4.20 문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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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 마지막 학기를 함께 한, 인터넷신문사 프로메테우스에서 일을 계속하게 되었다. 두 달의 휴식을 끝내고 다시 기사를 쓰자니 머리가 띵하다. 쓰고 싶은 말을 다 못 쓰는 것 역시 괴로운 일이지만, 쓰고 싶지 않은 말을 쓸 일은 없으니 우선은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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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취재차 4.20 문화제에 갔다. 기사엔 못다한 이야기들.
  마이크를 잡은 비장애인들, 그 중에서도 장애인 운동과 그간에 연이 없었던 사람들의 발언을 듣고 있자면 늘 내심 불편하다. 그들이 장애인을 칭할 때면 자주 ‘우리’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우리 장애인들이 이렇게 고생하고 있는데, 저희도 꼭 함께 싸우겠습니다"라든가 하는 식으로. 어쩌다 그런 말을 사용하지 않은 사람이라도, 장애여성을 피해가지는 않는다. "우리 장애여성이 그런 일을 당했습니다"라든가 하는 식으로.
  철도/지하철 안전대책 수립을 요구하는 캠페인이 문화제 전에 있었다. 철도/지하철 인원감축과 관련된 문제인 덕에 장애인운동과 철도노조운동의 사람들이 함께 하게 되었다. 사회는 철도노조 쪽 사람이 보았다. 캠페인 전의 기자회견과 캠페인 후의 보고대회, 사회자는 ‘노동의례’를 이야기했다. 기자회견 후에는 철의 노동자를, 보고대회 중에는 파업가를 불렀다.
  기자회견이 끝나고 철의 노동자를 부르자는 사회자의 제안에 장애인운동과 연이 있는 이들 중 상당수는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렇다고 처음 장애인운동을 만난 사회자를 탓할 수도 없는 일이다. 사람들은 술렁였지만 사회자를 따라 노래를 불렀다. 다만 도무지 그러고 싶지 않았던 누군가가, 우리가 왜 여기서 이걸 부르고 있냐, 고 옆사람에게 나지막히 속삭였을 뿐이다.
  사실 나는 믿고 싶다. 장애인운동을 경험해보지 못한 노동운동의 사람들이 장애인운동 쪽의 노래를 알지 못하니 일단 그런 노래를 부르기로 사전에 합의했던 것으로. 이번엔 미처 못했지만 다음번엔 꼭 노래를 배워오마고 약속했던 것으로. 하지만 분위기가 너무도 확연히 이야기한다. 그렇지 않음을 말이다. 그리고 노동의례라니. 4.20 장애인차별철폐의날, 올해의 9대 요구안에도 어김없이 ‘장애인노동권’이 들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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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꼭 민망한 집회인 것만은 아니었다. 멀리서 좋아만 하고 있는 ‘장애여성공감’. ‘여성장애인독립생활운동을 독립시켜라’는 피켓을 들고, 관련내용을 담은 유인물을 쿠키와 함께 참가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있었다. 운동의 내부를 향해 또 다른 운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 나는 그런 이들이 좋다.
  길에다 누군가가 버려놓은 유인물을 주워다 읽은 후 주머니에 챙겼다. 그런 한참 후에야 공감에서 활동하시는 분이 내게도 유인물과 쿠키를 건냈다. 유인물은 있다며 쿠키만 받으려니 둘 다 받으라고 정색을. 못 들으셨나 싶어 유인물은 땅에서 하나 주웠다, 고 구체적으로 말했더니 멋쩍게 웃으며 유인물을 되받아 가셨다. 종이가 아까워도 그냥 좀 받을 걸 그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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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만에 본 한낱 님. 두 곡 부르고 가셨는데, 우울한 곡을 부를 때나 발랄한 곡을 부를 때나 표정은 똑같이 심각하다. 가사 안 잊어버리려다보니 그렇게 되는 거라나. 기사 쓸 때 사진 실어주마고 약속했는데, 아는 사람 나왔다고 너무 가까이서 찍었더니 관중이 하나도 안 나와서 약속을 못 지키게 되었다. (누나가 나온 사진엔 관객이 두 명밖에 없는 것처럼 보여서… 대신 여기 올립니다.)

서점에서

  한나절 내내를 사무실에서 보낸 후, 지친 몸을 아픈 다리에 싣고, 손으로는 주린 배를 움켜 쥔 채 나는 집이 아닌 서점을 향했다. 며칠 전 읽다 만 책을 마저 읽기 위해서였다. 글을 읽거나 쓸 때에는, 평소에 없던 그런 힘이 대체 어디서 나오는지 모른다.
  몇 안되는 의자에는 이미 죄 사람이 앉아 있었다. 지난 번에 읽다가 꽂아 두었던 책을 뽑아 들고 서성이던 나는 책이 있던 책꽂이 바로 옆에 자리를 잡았다. 책꽂이와 기둥의 사이로,사람 하나 들어가기에도 좁은 틈이 있었다. 몸을 밀어 넣으니 어깨가 걸렸다.
  상반신을 약간 앞으로 굽히고 선 상태에서 책을 읽었다. 들고 있던 물병과 매고 있던 가방은 발치에 내려두었다. 책에는 슬프고 아픈 이야기가 실려 있었다. 내가 읽은 책에는 늘 아픈 이야기가 있다. 내용을 알지 못한 채 집어든 책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간혹 그렇지 않은 이야기가 있다 한들, 나에게는 그 속에서까지 슬픔을 찾아내는 재주가 있다.
  중편 소설 세 개가 엮여 있는 책의, 못 읽은 마지막 이야기를 다 읽는 데에는 30분 쯤이 걸렸다. 마지막 소설을 읽고, 평론가의 긴 글을 뛰어 넘은 후 지난 번에 홀깃 보았던ー못 읽은 마지막 이야기 대신이었다ー작가의 말을 마저 읽은 후에 책을 덮었다. 그때까지는 들리지 않았던, 서점치고는 시끄러운 소리들이 귀로 들어왔다.
  다 읽은 책을 제자리에 가져다 꽂는데, 그 바로 위칸에 익숙한 제목의 책이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읽어본 책도, 들어 본 책도 아니었다. 얼마 전에 광고를 본 책과 비슷한 제목의 책일 뿐이었다. 하지막 작가는 아는 이름이었다. 두 권짜리, 그리고 세 권짜리, 장편소설 두 편, 도합 다섯 권의 책을 읽은 적이 있었다.
  그 작가는 고달픈 삶을 산 여성이었다. 가난도, 폭력도, 외로움도, 내가 열거할 수 있는 대부분의 고통을 극한까지 겪은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 경험들을 자신의 글에 담아내는 인물이었다. 나는 그의 글을 읽으면서 숨이 막혔고 가슴이 아팠고 눈 앞이 아득했지만 울지는 않았다.
  내가 운 것은 오히려, 주인공의 엄마를 다룬 평범한 소설이었다. 그 작가 역시 여성의 아픔을 섬세하게 잡아내는 것으로 유명한 이였지만 그 전까지는 읽어 본 적이 없었고, 내가 읽은 책은 그런 범주에서는 약간은 벗어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울었다. 서울에 오는 기차에서 책을 읽으며, 눈물을 떨구고 코를 훌쩍였다.
  누군가의 삶이 누군가의 삶보다 더 고되거나 더 아프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아마도 그것은 누군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자신의 글을 통해 할 수 있었고, 또 다른 누군가는 그렇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스스로는 할 수 없는 인생, 남의 입이나 남의 글을 통해서, 그래서 얼마만큼은 깎이고 또 휘어서 전해질 수밖에 없는 삶이 슬프기 때문일 것이다.

거슬리는 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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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린지 페스티벌에 갔다가 공연을 보고 알게 된 어느 밴드. 앨범이 나왔다기에 친구에게 선물해 달래서 사흘째 내리 그것만 듣고 있다. 그 공연을 보기 전까지는 전혀 알지 못했던 ‘스카’라는 장르를 하는 밴드인데, 목소리와 곡이 참 잘 어울린다. 가사도 괜찮은 편.
  발음을 또박또박 하는 편은 아니라서 전곡의 가사를 다 알지는 못하지만, 현재까지 두 곳의 거슬리는 부분을 발견했다. 하나는 ‘빈병만이 나를 감싸네’이고 또 하나는 ‘아가씨 이리 와서 한 잔 따라줘요’이다. 전자는 계속 ‘이명박이 나를 감싸네’로 들려서 거슬리고, 후자는 다른 부분에 나오는 ‘사장님 이리 와서 한 잔 같이 해요’라는 부분과 대비되어서 거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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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 덕분에 챙겨보다시피 하는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ㅍ’. ‘ㅍ’에 나오는 연예인들 중 초창기 멤버인 ㅇ과 후반에 투입된 멤버인 ㅈ 사이에는 주변사람들의 농간으로 인한 스캔들이 있다. 둘이 가까이만 있어도 주변에서 ‘그렇게 대놓고 같이 있어야겠느냐’고 놀리는 식.
  이 프로그램의 메인 MC 격인 ㅁ은 둘을 놀릴 때 종종 ㅇ을 제수씨라고 부른다. 가족적인 분위기를 만들고 싶으면, 초기 멤버인 ㅇ을 여동생으로 설정하고 ㅈ을 매부로든 서방으로든 불러야 할텐데 도통 그러지를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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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시나 S 덕에 챙겨보다시피 하는 또 다른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ㅁ’. 긴 시간 동안 부동에 가까운 시청률 1위를 고수하고 있는 이 프로그램은 피디가 사회의식을 은근슬쩍 담아 정부 풍자를 잘하기로도 유명한 프로그램이다. 그것이 정말인지 얼마 전에는 여성의 날 특집 방송을 하기도 했다. 출연자들의 난리야 접어두고, 피디가 제시한 결론은 ‘여성은 스스로의 삶을 스스로 구성할 수 있기를 바란다’였다던데 보지는 못했다.
  ‘ㅁ’에 출연하는, 결혼한지 얼마 되지 않은 ㅁ은 얼마 전 연애중임을 밝힌 ㅈ에게 결혼하게 될지도 모르니 가상인터뷰를 해보자며 막무가내로 질문을 던졌다. 그가 던진 질문이 가관이다. ‘(ㅈ이)나이가 있으셔서 2세 문제가 급할 텐데, (부인될 사람이)일을 계속하시게 하실 건가요, 아니면 그만 두고 살림에 전념하게 하실 건가요?’라니 세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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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여자 한 명이 교도관입네 장군 딸입네 거짓말을 하며 젊은 군장교들을 속여 돈을 뜯어냈단다. 피해자는 꽤 여러 명인데 대부분 실제로는 만나지도 않고 문자로만 친분을 쌓아 돈을 받아냈다니 참 대단도 하다. 그런데 이 여자, 몸무게가 좀 많이 나간단다.
  언론들의 관심이 그 몸무게에 쏠렸다. 기사 제목들은 온통 ’90kg 녀에 장교들 왜 속았나’, ‘꽃뱀 아닌 90kg녀 장교들 넘어간 이유는?’ 뭐 이런 식들이다. 나는 피해자 편을 들고 싶은데, 언론들이 나를 가해자 편으로 만든다. 이것 참.

A와 담배와 아저씨

  나의 부탁 반 협박 반으로 언제부턴가 담배를 피우지 않은 친구 A는 여성이다.

  나날이 오르는 담배값이나, 담배 때문에 어떤 병이 생긴다는 기사들, 혹은 길에서 볼썽 사납게 담배를 피우는 일부 흡연자들을 볼 때는 A는 자신이 담배를 끊게 해줘서 고맙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나는 때로 미안할 때가 있다. 길거리에서 시비 거는 취객들, 여자라고 함부로 대하는 아저씨들, 그 망나니들의 얼굴에 담배 연기를 뿜어 줄 기회를 앗아 버린 것이 미안할 때가 있다.

  물론, 그럴 친구는 아니지만. 기회마저 빼앗아 버렸다는 사실이, 미안할 때가 있다.

잠 못드는 새벽의 비망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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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잠자기에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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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속 시간이 빠듯한 경우가 아니면, 사람이 많아 서로의 몸이 닿는 지하철에서 내린다. 그리고 다음 차를 기다린다. 다음 차에도 사람이 많다면 보내고 또 기다리기도 한다. 때로는 목적지보다 먼저 내려서 걷기도 한다. 또 때로는, 약속 시간에 늦고 말더라도 그렇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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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스 손잡이를 잡는 여성은 매우 적은 편이다. 어지간한 만원 버스에서도 손잡이를 잡고 있는 여성은 한손에 꼽을 정도인 경우가 많다. 지하철에야 잡을 것이 따로 없으니 다들 손잡이를 잡는 것 같지만, 버스에서는 왠만하면 의자에 달린 손잡이나 기둥을 잡는다. 소매가 없거나 짧은 옷을 주로 입는 여름만의 일은 물론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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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전히 말은 어렵다. 글을 쓰는 것 또한 어렵지만, 글은 말만큼 빠른 속도를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말하기가 어려운 것은 단순히 답을 몰라서만은 아니다. 물론 그런 경우가 적지 않지만, 그보다는 답이 실은 답이 아님을 알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명쾌한 답은 언제나 그늘을 갖고 있는 법이다. 그 그늘을 아는 이상, 말하기는 어려울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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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싶은 것이 많이 쌓였다. 이맘때부터 그림을 본격적으로 배울 생각이었는데 여러가지로 상황이 여의치 않다. 아쉬운대로, 인터넷 서점에서 드로잉 가이드북을 샀다. 첫장은 줄긋기. 겨우 에이포 용지의 가로세로를 잇는 줄을 긋는 것부터가 역시 어렵다. 그리고 싶은 것들을 잊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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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전면허를 따기로 했다. 내 소유의 자동차를 갖는 일은 아마 없겠지만(하지만 한편으로는 캠핑카에서 사는 것이 꿈이기도 하다.) 운전면허가 필요할 때가 있다. 바로 김해 집에 갔을 때인데, 교통이 좋지 않은 집에서 시내로 친구들을 만나러 다니면서 어머니에게 기사 노릇을 시키는 건 가히 못할 짓이다. 실은 어머니께서 이젠 내가 좀 몰라며 운전면허를 따라고 하셨다. 하지만 학원비가 아까워서, 여전히 탐색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