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 분실 소동

  간만에 서점에 가서 책을 읽었다. 새책 냄새도 별로고 사람 많은 것도 별로라 서점에는 잘 안 가는데, 그냥 집을 나선 김에 가게 되었다. 고속터미널에 있는 대형 서점에 갔는데, 그곳에는 책을 읽을 수 있도록 테이블이 마련되어 있다. 여러번 가보고도 몰랐는데, 나보다 훨씬 더 여러번 가 본 사람에게 들어서 알게 된 사실. 물론 많지도 않고 어느 곳에나 있지도 않다.

  소설책 한권을 뽑아 들고, 2층에 있는 테이블을 찾아가 자리에 앉았다. 4인용 테이블이었는데, 내 옆에 앉은 이는 육아 잡지를 읽었고 대각선방향에 앉은 이는 뭔지 모를 수첩만한 책을 읽고 있었다. 휴대용 옥편 같기도 하고 불경집 같기도 한 책이었다. 내 앞자리는 비어 있었는데, 책을 반나마 읽었을 즈음에 누군가 와서 앉았다. 50대 후반 쯤으로 보이는 남성이었는데, 그가 들고 있던 책은 군사 잡지였다.

  내가 고른 소설책은 그저 그랬다. 기발하다면 기발한 상상에서 시작해 막힘없이 이야기를 풀어가는, ‘이야기꾼’의 책이었다. 사실 그런 책은 잘 읽지 않는 편이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려다 보면 타인에게 무례한 말을 뱉기 쉽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책은 크게 나쁘지 않으면서도, 작가의 절실함 같은 것이 미약하게나마 느껴졌다. 그래서 앉은자리에서 쉬지 않고 끝까지 읽었다. 책은 343쪽 짜리였다.

  책을 다 읽은 후, 책 제일 앞에 반페이지 씩 마련된 작가의 말과 일러스트레이터의 말을 훑고 있는데 앞에 있던 이가 크게 방귀를 뀌었다. 내 옆과 대각선에 앉아 있던 이들은 이미 자릴 뜬 후였다. 방귀 소리에, 그리고 그렇게 함부로 구는 그의 태도에 불쾌해진 나는 훑던 책을 덮고 자리를 떴다. 1층으로 내려와 소설책을 제자리에 꽂고 자리를 옮기던 즈음에야 깨달았다, 자리에 노트북을 두고 왔음을 말이다.

  급히 올라가 테이블로 돌아갔으나 가방은 자리에 없었다. 내 앞에 있던 방귀쟁이도 없어진 뒤였고, 어느새 낯모를 세 사람이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주변을 둘러 봤으나 가방도, 방귀쟁이도 보이지 않았다. 카운터에 물어봐도 접수된 분실물은 없다는 말 뿐이었다. 1층으로 내려가 중앙 안내 데스크에 분실물 문의를 한 번 더 한 뒤 나는 금세 포기했다. 그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주변을 몇 번 살펴 봤을 뿐.

  가방 속에는 지갑이 있었다. 현금은 한 푼도 없었고 3000원 쯤이 남은 체크 카드, 그리고 은행카드 몇 개, 신분증 정도가 내용물의 전부였다. 하지만 가방 속에는 지갑 외에도, 노트북이 들어 있었다. 산 지 얼마 되지 않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노트북 말이다. 하지만 기왕 사라져 버린 것, 노트북에 큰 미련이 남지는 않았다. 가당찮게도, 노트북 속에 들어있는, 아직 옮겨 두지 못한 글 한 편이 아까웠을 뿐이다.

   짧은 글 한 편. 쓰다 만 블로그 포스트. 노트북에 든 두 개의 글을 아쉬워 하고 있는데 문득 위화감이 들었다. 내가 앉았던 테이블 옆 선반에 세워져 있던 자동차의 역사라는 커다란 책이, 가방이 없던 그 테이블 옆에는 없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부리나케 뛰어 올라가니 아니나 다를까, 그 테이블 옆의 선반에는 훨씬 더 작은 다른 책 한 권만이 올라가 있었다. 그렇다, 다른 테이블이었던 것이다.

  안쪽으로 조금 더 들어가자 비로소 내가 앉았던 테이블이 나왔다. 처음 돌아왔을 때엔 반대편 계단으로 올라 왔는데, 앉았던 자리를 멍청히 지나쳐 버린 것이었다. 아무튼 다시 돌아간 그 테이블 옆 선반에는 자동차의 역사라는 책이 잘 세워져 있었고, 방귀쟁이는 없었지만 내 가방은 얌전히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방귀 좀 뀐 걸 가지고 가방까지 들고 간 것으로 의심했던 것을 미안해 해야 했지만, 사실 그 때엔 글을 되찾은 안도감 뿐이었다.

  가방을 다시 들고 옆에 있는 카페로 갔다. 빵 한 조각을 먹은 후 사진집 하나쯤을 보고 집으로 돌아갈 요량이었다. 서점이 문을 닫기까지는 한 시간쯤 남은 때였다. 2000원이라는 가격 표시를 보고 싸다고 생각하며 주문했는데, 알고보니 2900원이었다. 그걸 안 것은 이미 카드를 긁어버린 후였다. 베이글 하나를 내는데 카페 점원은 15분이라는 시간을 들였다. 심지어 친절하게 잘라 주는 바람에 나는 결국 앉은 자리에서 다 먹어야 했다.

  한참을 기다리고 앉아서 그것을 먹느라 겨우 한 시간 남은 영업 시간의 절반 가까이를 날려버렸다. 큰 서점을 헤메 사진집 코너를 찾았지만 딱히 마음에 드는 책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결국 베이글은 헛일이 되어버렸고, 나는 폐점 시간이 되기 전에 서점을 나서 집을 향했다.

망원동에 살고 싶다

   망원동에 처음으로 다녀왔다. 망원역 근처에 있는 민중의 집이라는 곳에서 <아마추어의 반란>이라는 일본의 독립 다큐를 상영한다기에 보러 갔다가, 망원역 근처를 한바퀴 둘러보고 왔다. 그래봐야 서울이지만, 내가 다녀본 서울의 동네들 중에서 제일 좋아 보였다. 높지 않은 건물들, 사람들로 가득한 재래시장, 서울 치고는 비교적 싼 집세, 가격에 비하면 꽤나 좋은 입지, 뭐 이런 것들이 말이다. 물론 민중의 집을 비롯한 지역 운동의 인프라도 꽤나 잘 되어 있는 곳이고. 심지어 주민센터, 그러니까 동사무소에서 벽화 그리기 강좌를 할 정도의 동네라면 좀 오버일까.

   망원동이 좋다는 말은 조약골 씨의 블로그에서 본 적이 있었다. (좋은 의미에서의) ‘변태들의 동네’라고 그는 말했다. 나도 찾아 가 보고야 그 말을 실감했달까. 그냥 이웃 사이 정이 돈독하다는 정도일 걸로만 생각했는데, 그것과는 조금 다른 모습의 생기가 있는 동네였다. 재래시장은 물론이고 근처의 일반 상점들 앞에까지 펼쳐진 좌판들에는 ‘골라 골라’ 식의 호객이 성행하고 있었고, 적지 않은 이들이 거리를 돌아 다니고 있었다. 자전거가 많았고, 건물들은 낮았고, 약간이었지만 비가 오는데도 뛰는 사람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민중의 집은 사실 이름은 썩 마음에 들지 않지만, 이래저래 어깨너머로 본 바로는 괜찮은 곳인 듯하다.(다만 휠체어 장애인의 접근성은 떨어진다.) 천원 강좌라는 이름으로 다양한 강좌들을 열고, 화요일에는 주제가 있는 밥상이라는 이름으로 만찬회[?]도 연다. 늦게 가서 무슨 주제가 있는지는 듣지 못했지만, 직접 만들어 먹었던 데마끼てまき는 맛있었다. 사무국장님의 말로는, ‘공동체의 느낌’을 배우기 위해 정기적으로 같이 밥을 먹기로 했단다. 식대는 2000원. 매월 마지막 화요일에는 영화 상영도 함께 하는데, 이번주에는 양파 극장이라는 단체와 함께 <아마추어의 반란>을 상영했다.

  <아마추어의 반란>의 내용은 위에 있는 링크에서들 보시고… 무서운 아저씨들[?]이 주인공인 탓에 거슬리는 부분이 없진 않았지만, 꽤나 재밌었다. 평소에 이래저래 하던 생각들에 좀 힘을 얻기도 했고. 양파 극장은 돈이 없었던 건지 시간이 없었던 건지, 90분 짜리 DV 테잎을 사지 못했다며 80분 짜리 영화를 테잎 두 개에 담아 40분씩 끊어서 보여주었다. 양파 극장이라는 단체도 좀 더 알아보고 싶은데, 검색에 딱히 걸리는 게 없다.

  아무튼, 망원동에 살고 싶다. 사실은 시골에 살고 싶은 거지만, 일단 친구들이 다 서울에 사니까 나도 당분간은 서울에… 기왕이면 망원동에.

어느 카페에서

고장난 휴대전화 수리를 위해 집 근처의 서비스 센터에 갔다. 꽤 높은 층에 있어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눈에 띄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어두운 정장들 사이에서 홀로 하얀 옷을 입은 사람이었다. 좁은 엘리베이터에 타면서 나는 그 사람과 부딪혔는데, 그는 조금도 신경쓰지 않는 듯했다. 정확히는, 내가 그와 부딪히고 그의 옆에 있던 좁은 구석으로 들어가는 동안 그는 전혀 움직여 주지 않았다.
창구에 전화기를 맡기고 순서를 기다리며 노트북으로 작업을 하고 있었다. 내 뒤에 있는 공용 컴퓨터에 앉은 누군가가 작지 않은 목소리로 일행과 시덥잖은 이야기들을 하는 것이 들렸다. 집중을 방해할 만큼 컸던 그 목소리는, 이요원이 뭐가 예쁘나, 비쩍 마르기만 해서, 나는 홍수아가 좋더라, 홍수아는 말랐는데도 몸매가 좋다, 그런데 너 남자들이 홍수아 좋아하는 진짜 이유가 뭔지 아느냐, 그건 운동을 잘하기 때문이다, (운동? 하고 되묻는 여자 목소리)그래, 운동, 홍수아가 시구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느냐, 거의 투수급이다, 라는 내용을 외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사람은 신기하게도, 지하철에서 부딪혔던 그 사람이었다.

박종주 고객님, 하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자기 자리에서 한참을 걸어 나온 서비스 기사가 나를 맞는다. 나를 자리로 안내하고 전화기를 고치는 내내 그의 태도는 수리 기술자라기보다는 영업직 서비스 직원에 가까웠다. 오래 기다리셨죠, 라는 인사와 함께 나를 자리에 앉히고는 손수 사탕 통을 열어 내 손에 사탕 한 알을 쥐어 주고는 핸드폰의 상태에 대해 열심히 설명해 주었다. 사실 핸드폰은 이미 여러번 분해해 본 터라 필요없는 설명이었지만.
수리하는 내내 그는 친절하게 작업 하나하나와 남은 시간을 설명해 주었고 나와는 별 상관이 없는, 자신이 동시에 수행해야 하는 다른 일들에 대해서도 빼놓지 않고 설명을 해 주었다. 수리가 끝난 시점에서는 잘 쓰시라는 인사와 함께 서비스 만족도를 확인하는 전화가 오면 잘 이야기해 달라는 부탁을 했고 나를 마중했던 자리까지 따라 나와 배웅 또한 했다. 잘 가시라는 인사를 하며 그는 내게 마스크팩 하나를 선물로 주었다.
수리를 받으러 가면서 테이블 위에 노트북이며 문서들이며를 펼쳐 두고 갔었는데, 수리를 받고 있던 중에 누군가가 그 테이블에 앉은 것이 보였다. 내 짐들을 치워 주려고 다가가서 보니 손님들이 아니라 그곳에서 일하는 청소 용역 업체 직원들이었다. 내가 치우면 자신들이 손댈 것을 걱정한 것으로 오해할까봐 신경이 쓰였지만 이미 내 손이 움직이기 시작한 후였고 그들 또한 궤념치 않는 듯했다. 그들은 노트북을 챙기는 내게 가격과 성능을 물어 보더니, 자기들의 집에 있는 아들이나 며느리 소유의 컴퓨터에 대한 이야기들을 나눴다.

수리를 마친 후에는 근처 카페로 갔다. 서비스 센터 근처에 살았던 후배에게 전날 미리 물어 두었던 조용한 곳이었다. 사실 그리 조용하지만은 않았다. 사람들이 시끄럽게 대화하거나 음악이 큰 소리로 재생되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공간이 좁은 탓에 믹서기를 비롯한 여러 기계들의 소리가 여과없이 들렸고 한사람만 큰 소리를 내도 카페 전체가 울리는 탓이었다. 자리를 잡은 후 카운터로 가 잠시 고민한 끝에 나는 카라멜 마끼아또를 주문했다.
잠시 기다린 후에 나온 음료를 받아들고 나는 자리에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얼마 후 들린 카라멜 카페라떼 나왔습니다, 라는 소리에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고 보니 서비스 센터에서 부딪혔던 그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나 음료를 받아 드는 모습이 보였다. 이요원과 홍수아를 논하던 이는 어디 갔는지 그는 혼자 앉아서 책을 읽고 있었다. 얼마쯤 내가 글을 쓰고 그가 책을 읽은 후에 그의 일행이 도착했다.(서비스 센터에서 그의 얼굴을 확인하지 못했기에 같은 사람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간간히 그가 영어로 무언가를 읽는 소리가 들렸지만 서비스센터에서처럼 큰 소리로 이야기를 하진 않은 덕분에 나는 글쓰기에 집중할 수 있었다.
좁은 카페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드나들었다. 주로 테이크 아웃 커피를 사들고 나가는 그 가게의 손님들은 연령대가 꽤나 다양했는데, 대학생으로 보이는 이에서부터 중년의 남녀까지 적잖은 사람이 그곳을 드나들었다. 그 중 눈에 띈 것은 가게 가운데에 있던 기둥 옆자리에 자리 잡은 한 노인이었다. 부시시한 머리에 수수한 차림을 하고 있던 그는 커피 한잔을 주문했다. 점원은 그에게 종이컵과 머그잔 중 고를 기회를 주었고(내게는 주지 않았다.) 그는 머그잔을 택해 한참을 마셨다.
꽤 긴 시간동안 천천히 커피를 마시던 그는 점원에게 샌드위치가 있으냐고 물었다. 점원은 샌드위치는 없고 베이글이라는 빵이 있다며 그에게 샘플을 보여주었다. 베이글을 먹어 본 적이 없는 듯 그는 그것이 얼마나 단지, 얼마나 딱딱한지를 물은 후 그거 하나 주세요, 라고 추가 주문을 했다. 그가 베이글을 먹는 모습은 기둥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대신 나는, 자신의 컴퓨터를 가져 본 적이 없는 용역 업체 직원들을 떠올렸다. 기둥 뒤의 그 역시 컴퓨터를 가져 본 적은 없을 성 싶었지만, 그는 베이글을 가졌다. 용역 업체 직원들이 무엇을 가졌을지 나는 잠시 생각했다.

나의 정치와 그의 삶에 관한 짧은 변명

요즘 들어 밤에 잠들기가 어렵다. 몸은 극도로 피곤한데도, 낮에까지 내내 잠이 오는데도, 정작 밤이면 잠이 달아난다. 어제는 끙끙거리다가 5시가 넘어 겨우 잠들었는데, 오늘은 그조차도 되지 않을 것 같아 잠들기를 포기하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일다로 메타블로그를 뒤지다가 누군가의 블로그에서 mi-ring이라는 생소한 블로그 목록을 발견했는데, 그곳을 통해 들른 어느 블로그에서 엄마와 가사노동에 관한 글을 읽게 되었다. 블로그의 주인인 필자가 가사노동에 대한 견해를 필자의 엄마와 나누던 중 엄마가 표한 불편함에서 글은 시작했다.
문든 떠오르는 게 있었다. 아니, 꽤 오랫동안 종종 떠오르던 것이 또 한 번 떠올랐다. 당시에는 얼렁뚱땅 넘어갔는데 후에 내내 가슴에 걸리는 일들이 있다. 늦었지만, 뭐라고 짧게라도 변명해야 할 어떤 사건이 말이다. 나 역시 지난 23년을 살면서 그런 일들을 몇 개 만들었는데, 그 중 하나가 또 떠오른 것이다.

대학에 입학한 2005년, 나는 내가 속한 난장반의 모임인 "주체적인 인간들의 공동체"에 가입했다. 약칭인 ‘주인공’으로 불리던 그 모임은, 주제를 정해 영화를 보고 그에 관해 멤버들끼리 토론을 하는 공간이었다. 지금 변명하려는 사건이 일어난 것은, "메커니즘과 인간"이라는 주제의 텀을 진행하며 영화 <효자동 이발사>를 보고 세미나를 하던 중이었다.
옅은 기억을 되살려보자면, <효자동 이발사>에서 송강호 분의 이발사는 문소리 분의 이발사 보조를 방으로 끌고 들어가 임신시킴으로써 결혼을 성사시킨다. 방으로 들어간 후의 상황은 생략되었고, 방으로 들어가기 전 이발사가 이발사 보조의 몸을 보며 군침을 삼키는 장면은 생략되지 않았다. 그 상황에서 이발사 보조가 느끼는 감정은, 약간의 당혹스러움 이외에는 표현되지 않았다.
세미나의 원래 초점은 유신 정권 하에서 개인의 삶이 체제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았는가 하는 류의 것이었지만, 위의 장면 역시 주요하게 다루어졌던 것 같다. 세미나의 형식은 자유로운 편이었고, 적지않은 멤버가 성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덕일 것이다. 한 친구가, 이발사가 이발사 보조를 ‘강간했다’는 말을 꺼냄으로써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그 뒤로 어떤 이야기들이 오갔는지는 사실 잘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은, 그러니까 지금까지도 종종 떠올라 가슴에 걸리고, 십 몇 분 전에 누군가의 글을 읽음으로써 또 다시 떠오른 한 장면은, 그의 발화에 이어 튀어 나온 나의 한마디였다. 나는, "덮쳤죠."라고 말했다. 그러자 "강간했다"고 표현한 이는 다시 한 번 자신의 표현을 반복했다.
누군가가 나서서 표현이 다를 수 있음을 지적했고, 이야기의 초점이 그 행위에 대한 평가보다는 그런 상황 속에서의 여성의 삶에 관한 것으로 맞추어진 탓에 나와 그가 설전을 벌이거나 하지는 않았다. 서로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지만 애써 잊은 채 다음 화제로 이야기를 진행시켰다.
그 상황이 4년이나 나를 붙잡고 있었던 것은, 내가 선택한 "덮치다"라는 표현이, 이발사의 행위에 대한 옹호로 읽힐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니, 내 의도와는 상관없이, 이발사의 행위를 옹호하는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치 판단이 약화된’ 단어를 굳이 고른 나의 의도는 그것이 아니지만, 나의 선택이 성폭행이라는 행위에 대한 가치 판단 자체를 유보하거나 혹은 약화시키는 데에 일조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내가 굳이 덮친다는 모호 단어를, 그것도 굳이 강간했다고 표현한 사람의 말을 자르며 들이댄 것은 이발사가 아닌 이발사 보조가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나의 표현―나의 가치 판단이 단순히 이발사의 행위를 규정하는 것일 뿐만이 아니라, 이발사 보조의 상황 자체를 규정하는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인 것이다.
상대방의 의중을 따지지 않고 무력을 행사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욕망을 채운 이발사의 행위를 비판, 혹은 비난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를 구시대적이고 마초적인 소시민이라 부르는 것도, 파렴치하고 부도덕한 강간범이라 부르는 것도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의 행위 뿐 아니라 그의 인격 자체를 싸잡아 비판하는 데에도 크게 거리낌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강간했다’는 표현은 시대를 앞서 나가는 페미니스트가 되지 못한 것 이외에는 죄가 없는 이발사 보조의 삶까지를 흔들어 놓는다. 세상 물정 모른 채 서울에 와서 일하다가, 이발사가 밀어 붙이는 바람에 어쩌다 보니 애엄마가 되었지만 그래도 크게 괴롭지 않은 삶을 살아 온 한 인간―여성의 삶을, 극단적인 객체인  ‘피해자’의 것으로 한순간에 바꾸어 버릴 수 있는 것이다.

거기다 대고 당신이 피해자였음을, 객체였음을 인정하라고 외칠 수는 없는 일이다. 한마디 쉬운 말로 그의 지난 수십년 삶을 부정하고 붕괴시킬 수는 없는 일이다. 그것은 내가 온전한 책임을 질 수 있다는 확신이 있을 때에 감히 시도를 꿈 꿔 볼 수 있는 일일지는 몰라도, 아무 대답도 할 수 없는 상대를 앞에 두고 함부로 내뱉아도 좋은 일은 절대 아니다.
물론 이야기를 꺼낸 그가 그런 의도를 갖고 있지는 않았겠지만, 나는 순간 울컥하고 말았었다.  1년이라는 짧은 대학생활 중에도 수없이 보고 또 들었던, 대학생의 입바른 소리들, 너무나도 쉽게 지껄여지는 그 말들에 대한 염증이 그 순간 거부반응이 되어 튀어나왔던 것이다.
그가 당시의 상황이나 나의 말을 기억하고 있을는지, 나처럼 가슴에 담아 두고 있을는지는 모르겠다. 또한 이 글을 과연 그가 보게 될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혼자서 이렇게 주절거린다고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렇게나마 변명을 해보고 싶었다.
변명에 또 변명을 덧붙이자면, 이 변명은 나를 위한 것만은 아니다. 아니, 이것이 나를 위한 것으로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 이발사의 행위를 보며 분노했던 그에게, 당신의 곁에 있는 누군가가 그 이발사를 옹호하는 것이 아님을, 나 역시 당신과 같은 감정을 갖고 있음을, 그러니 당신은 혼자가 아님을 알릴 수 있으면 좋겠다. 나의 입으로 감히 그런 말을 하지는 못 할 테니, 우연히라도 그가 이 글을 볼 수 있기를, 그래서 이 글이 나만을 위한 것으로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




(내가 본 블로그의 글은 2008년 7월이 것이며, 그 블로그의 마지막 글이다. 다시 말해 그 글을 쓴 이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 또 그 글을 읽을 수 있기를 바라기에 여기에 링크를 걸어 둔다.)

시골이 즐거운 것은

시골이 즐거운 것은 죽음이 자연스러운 탓이다. 잡동사니를 태우는 냄새가 솔잎의 향기와 하나로 어울리는 것은 시골집 마당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잡동사니를 태운 흰 연기가 하늘로 피어올라 구름 앞에서 스러지는 것은 시골의 하늘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다.

삶이 그렇듯 죽음이 축복받을 수 있기에 시골은 즐겁다. 죽음이 다가와도 숨을 필요가 없기에, 삶을 주위와 함께 했듯 죽음 역시 저들과 함께 맞을 수 있기에 시골은 즐거운 곳이 된다. 죽음은 어두운 골방이 아니라 환한 거리에서 찾아 온다.

죽음이 백일하에 드러난다. 일흔 해나 여든 해, 혹은 아흔 해쯤의 시간이 이웃들의 곁에서 숨을 갈무리하고, 쓸모를 잃은 잡동사니들 혹은 마른 삭정이들이 솔잎의 냄새처럼 숲을 감싸는 연기가 된다. 삶의 끝을 맞는 시간은 늘 대낮이다.

시골의 즐거움은, 고향길의 아름다움은, 지저귀는 새들이나 폴짝이는 개구리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른 곳에서는 찾을 수 없는 수많은 생명들, 그 움직임들에도 아름다움은 있지만, 시골의 아름다움은 그 정수를 다른 곳에 숨겨 두고 있다.

길가에서 썩어가는 호박들, 밭둑에서 곰삭는 거름들, 좁은집 툇마루에서 마당을 응시하는 늙은 눈빛들, 안방에 누워 움직이지 못해도 자연스레 드나드는 숨들, 그곳에 시골의 아름다움이 있다. 그 죽음들이 내는 화음에 시골의 즐거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