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점에서

  한나절 내내를 사무실에서 보낸 후, 지친 몸을 아픈 다리에 싣고, 손으로는 주린 배를 움켜 쥔 채 나는 집이 아닌 서점을 향했다. 며칠 전 읽다 만 책을 마저 읽기 위해서였다. 글을 읽거나 쓸 때에는, 평소에 없던 그런 힘이 대체 어디서 나오는지 모른다.
  몇 안되는 의자에는 이미 죄 사람이 앉아 있었다. 지난 번에 읽다가 꽂아 두었던 책을 뽑아 들고 서성이던 나는 책이 있던 책꽂이 바로 옆에 자리를 잡았다. 책꽂이와 기둥의 사이로,사람 하나 들어가기에도 좁은 틈이 있었다. 몸을 밀어 넣으니 어깨가 걸렸다.
  상반신을 약간 앞으로 굽히고 선 상태에서 책을 읽었다. 들고 있던 물병과 매고 있던 가방은 발치에 내려두었다. 책에는 슬프고 아픈 이야기가 실려 있었다. 내가 읽은 책에는 늘 아픈 이야기가 있다. 내용을 알지 못한 채 집어든 책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간혹 그렇지 않은 이야기가 있다 한들, 나에게는 그 속에서까지 슬픔을 찾아내는 재주가 있다.
  중편 소설 세 개가 엮여 있는 책의, 못 읽은 마지막 이야기를 다 읽는 데에는 30분 쯤이 걸렸다. 마지막 소설을 읽고, 평론가의 긴 글을 뛰어 넘은 후 지난 번에 홀깃 보았던ー못 읽은 마지막 이야기 대신이었다ー작가의 말을 마저 읽은 후에 책을 덮었다. 그때까지는 들리지 않았던, 서점치고는 시끄러운 소리들이 귀로 들어왔다.
  다 읽은 책을 제자리에 가져다 꽂는데, 그 바로 위칸에 익숙한 제목의 책이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읽어본 책도, 들어 본 책도 아니었다. 얼마 전에 광고를 본 책과 비슷한 제목의 책일 뿐이었다. 하지막 작가는 아는 이름이었다. 두 권짜리, 그리고 세 권짜리, 장편소설 두 편, 도합 다섯 권의 책을 읽은 적이 있었다.
  그 작가는 고달픈 삶을 산 여성이었다. 가난도, 폭력도, 외로움도, 내가 열거할 수 있는 대부분의 고통을 극한까지 겪은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 경험들을 자신의 글에 담아내는 인물이었다. 나는 그의 글을 읽으면서 숨이 막혔고 가슴이 아팠고 눈 앞이 아득했지만 울지는 않았다.
  내가 운 것은 오히려, 주인공의 엄마를 다룬 평범한 소설이었다. 그 작가 역시 여성의 아픔을 섬세하게 잡아내는 것으로 유명한 이였지만 그 전까지는 읽어 본 적이 없었고, 내가 읽은 책은 그런 범주에서는 약간은 벗어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울었다. 서울에 오는 기차에서 책을 읽으며, 눈물을 떨구고 코를 훌쩍였다.
  누군가의 삶이 누군가의 삶보다 더 고되거나 더 아프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아마도 그것은 누군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자신의 글을 통해 할 수 있었고, 또 다른 누군가는 그렇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스스로는 할 수 없는 인생, 남의 입이나 남의 글을 통해서, 그래서 얼마만큼은 깎이고 또 휘어서 전해질 수밖에 없는 삶이 슬프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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