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들을 욕할 수 없다

  나는 그들이 싫다. 어쩌면 미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행진 대오를 지나가려는 운전자들에게 욕을 퍼붓고, 싸움이 나면 여자들은 뒤로 빠지라고 소리치고, 흥분하면 경찰 개개인을 폭행하는 그들이 나는 싫다. 그들은 대표적인 집단으로 말하자면 민주노총, 특히 금속노조로 대표되는 이들이고 개인적인 수준에서 말하자면 마초적이고 폭력적인 노동운동가, 혹은 노동자들이다.
  어제도 그랬다. 상용차로의 행진이 실패하자 그들은 쇠파이프를 들었다. 누군가는 그들에게 박수를 쳤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그들이 쇠파이프로 때릴 것이 결국은 애꿎은 경찰 대원 개개인일 뿐 이 나라의 경찰력이나 권력 자체가 되지 못할 것이며 어쩌면 길 가는 개개인이나 그들의 소유물이 될 것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런 일은 결국 벌어졌다. 그들 중 누군가는 경찰 오토바이를 향해 파이프를 휘둘렀고 또 누구는 순찰차의 앞유리에 파이프를 꽂았다. 또 다른 누군가는 왜 길을 막냐고 항의하는 행인을 향해 파이프를 휘두르며 욕을 내뱉기도 했다. 늘 그렇듯 파이프를 든 이들은 경찰의 제지선 가까이 가보지도 못하고 결국 행진을 멈추고 말았다.
  하지만 나는 그들을 미워할 수 있을 뿐, 욕할 수 없다. 그들을 욕하는 이들 앞에서 당당히 그들을 옹호할 수는 없지만, 나는 그들을 욕할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이 그만큼 절박하기 때문이라든가, 그 이상의 것을 배우지 못할 만큼 그들의 삶이 힘겨웠기 때문은 아니다. 그들의 탄식을 가까이에서 듣고 그들의 눈물을 가까이에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쇠파이프를 든 백 여명을 앞에서 이끌던 한 사람이 외쳤다. 저도 여러분과 같은 조합원입니다. 아무런 직책도 없는 평범한 조합원이지만,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는 쌍용 동지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투쟁을 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섰습니다. 얼른 달려 가서 경찰들을 뚫고 동지들을 구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지금 상황을 객관적으로 판단해야 할 것 같습니다. 뒤에 있는 본대오가 해산하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끼리 가서는 싸울 수가 없을 것입니다. 정말 분하지만, 안에 있는 동지들에게 미안하지만, 오늘의 싸움은 포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대신 29일,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이 자리에서 싸웁시다. 지금은 뒤에 있는 동지들이 안전하게 해산할 수 있도록 이 자리를 지킵시다.
  여기저기서 눈물을 삼키는 탄식이 터져나온다. 손에 들고 있던 쇠파이프며 죽봉이며가 땅바닥에 내리쳐진다.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다며 공장에 갈 수 없으면 경찰서에라도 찾아가자고 외치는 사람도 있다. 불과 몇 분 전까지 "동지가 기다리는 공장으로 들어가자"며 구호를 외치던 사람들이다. 무엇이든 다 부술 것같이 위세를 떨치던 이들이 눈물을 삼킨다.
  그 눈물 앞에서 나는 그들을 욕할 수 없다. 행여나 운이 좋아 경찰 몇을 쓰러뜨리고 약간의 틈을 만들 수 있다 해도 결국은 자기가 다칠 것을 뻔히 알면서도, 동지가 기다린다며 무기를 들었던 그들. 이제는 낡아버린 자신들의 방식을 무력하게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눈물을 삼키는 그들―그들을 나는 욕할 수 없다.

농담은 늘 쉽다

  지하철 2호선 을지로 입구역, 지하철 예술무대에서는 시민 노래자랑이 열리고 있다. 사회자는 참가자 하나하나에게 사는 곳과 직업을 묻는다. 어디에서 오셨나요? 을지로에서 왔어요. 아니, 을지로면 여기잖아요? 네. 그럼 노숙을 하신다는 거에요? 아니요. 을지로 어디서 오셨어요? 을지로 4가에 살아요. 그렇죠, 이렇게 아름다우신 분께서 노숙을 하면 큰일 나겠죠, 자 그럼, 노래 들어보겠습니다.
  질문하는 사회자도, 답하는 참가자도, 그리고 구경하는 관객들도 함께 웃는다. 하지만 그것은 물론, 모두가 아니라 대부분의 경우일 뿐이다. 행색이 멀쩡한 여성에게 노숙하냐는 질문을 하는 장면도, 그 여성이 당황해 하며 아니라고 답하는 장면도 모두에게 재밌는 것은 아니다. 아니, 그 누군가는 그 장면을 보고 절대로 웃을 수 없다.
  그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계단식 스탠드 덕분에 약간이나마 높은 곳, 그러니까 침대에서 잘 수 있고 약간이나마 바람을 피할 수 있는 그 무대가 누군가에게는 집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 역시 많지 않다. 하지만 무대를 지켜 보는 관객들 중에는 분명히 끼어 있다. 자신의 자리에서 잠을 청하기 위해 노래자랑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분명히 끼어 있다.
  농담은 늘 쉽다. 누군가를 웃음거리로 만드는 것도, 그 이야기를 웃으며 듣는 것도 늘 쉬운 일이다. 그것이 자신의 일이 아니라면 말이다. 늘 쉬운 그 일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웃지 못하는 사람, 끓어 오르는 화를, 혹은 차고 넘치는 민망함을 참으며 억지 웃음을 지어야 하는 사람이 바로 옆에 있음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사회자의 농담과 관객의 웃음, 그 사이에서 한 사람의 표정이 굳었다. 잠시 후 무대가 끝나면 이불로 쓸 신문지를 지금은 방석 삼아 깔고 앉아 노래를 듣고 있던 한 사람의 표정이 굳었다. 검게 탄 몸, 낡고 후줄근한 옷, 주머니에 꽂아 넣은 우산, 그가 을지로 입구역의 주민임을 알 수 있는 표지는 많지만 그것을 살펴 보는 사람은 많지 않다. 순식간에 굳어 버린 그의 표정을 감지하는 사람 역시 많지 않다.

삶의 무게

삶에는 무게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의 일부는, 피할 수 없이 짊어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누구나 나이를 먹으면서, 자기 몫만큼의 무게는 진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인품이나 업적, 혹은 형편과는 상관없이 그 무거운 삶을 짊어진 것 하나만으로도 그들에게는 최소한의 존경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나를 포함해 학생들 모두가 싫어했던 학교 주사 아저씨에게 늘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교사들은 그를 주임이라 불렀고 학부모들은 그를 소사라고 불렀다. 학생들은 늘, 어떤 별명으로 그를 불렀을 것이다. 불친절하고 괴팍한 그의 성격과 그가 종종 학생들에게 내는 짜증이 그 별명에는 담겨 있었을 것이다.
백발이 성성한 나이가 되도록 한 번도 남의 위에 있어보지 못한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만큼 자신이 져야 하는 삶의 무게들을 그 누구에게도 떠넘기지 못하고 오롯이 혼자서 졌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가 짊어졌을 무거운 삶은 어쩌면, 그보다 많은 삶을 누군가의 위에서 산 사람보다도 훨씬 무거울 것이라 여겼다.
그래서 나는 몇몇 교사들에게 인사하는 대신 그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는 나의 인사에 한 번도 답하지 않았지만 나는 한 번도 빼먹지 않고 그에게 인사했다. 나에게 답하기에는 그의 삶이 너무도 무거웠을 것이라 생각했고, 그가 해 본 인사들은 다들 윗사람을 향한 것이었을 터이기에 내게 적절한 인사를 찾지 못했으리라 여겼다.
하지만 아마 그에게도 누군가 아랫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부인이나 자식이 있었을 수도 있고, 결혼으로 수렴되지 않은 연애 경험이 있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동생이 있었을 수도 있고 나이나 관계에 상관없이 힘이 약해 아랫사람으로 삼은 누군가가 있었을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자신과 함께 일하는 동료나 자신의 앞을 다니는 학생들을 자기 아랫사람으로 여겼을지도 모른다.
요즈음, 삶의 무게가 모두에게 같지 않음을 생각한다. 비록 몰랐던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잘 알았던 일도 아니다. 한 사람의 삶의 무게가 얼마나 쉽게 타인에게 떠넘겨질 수 있는지를, 한 사람의 삶이 타인에 의해 얼마나 쉽게 더 무거워질 수 있는지를 종종 생각한다.
여전히 나는 삶에 무게가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피하려 해도 결국은 피할 수 없는 삶의 무게가 있다고 여전히 나는 생각한다. 누구나가 그것을 지고 있다고, 그것만으로도 사람은 존중받을 자격이 있다고도 생각한다. 하지만 누군가의 삶은 부피가 크면서도 가벼울 것이고 누군가의 삶은 한없이 작으면서도 한없이 무거울 것이다. 삶의 무게에도 있을 밀도를 나는 생각해야 할 것이다.

퀴어 퍼레이드

""""   퀴어 퍼레이드에 다녀왔다. 12시부터라길래 단순무식하게 12시에 맞춰서 갔더니 그때부터 부스를 오픈하고 퍼레이드는 세 시 좀 넘어서 시작하더라. 몸은 좀 축났지만, 즐겁게 잘 보고 왔다. 혼자 간 터라 거진 여섯 시간을 딱히 말도 않고 진짜로 구경만 했다.
   아는 사람들을 몇 보았다. 아는 사람이지만 인사를 하지 않은 사람도 있고, 아는 사람인 것 같긴 한데 긴가민가 하다가 인사를 못한 사람도 있다. 아주 간만에 완전변태 분들을 만나서 인사도 했다.
   사진을 찍으려 무거운 카메라를 굳이 들고 갔었다. 프레스카드도 발급받았다. 그래놓고 정작 사진은 얼마 찍지도 않았다. 프레스 카드를 목에 걸고 카메라를 손에 들 때마다 내가 외부인이 되더라. 그래서 두 어장 찍고는 카메라를 가방에 쑤셔 넣기를 몇 번인가 반복했다.
   무대에 오르는 사람까지도 촬영거부 스티커를 붙이더라. 스티커를 붙이지 않은 사람도 카메라를 의식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내가 외부인이 되기를 감수하고서 취재든 소장이든을 핑계삼아 사진을 찍을 때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긴장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서 안 찍었다. 옆의 사진은, 내 파인더에 들어 온 이들 중에는 유일하게 촬영을 위해 포즈를 잡아 준 사람. 흔들던 피켓을 멈추고 카메라를 보며 웃어 준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