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서 그를 만났다

  길에서 그를 만났다
  언덕을 따라 내 집보다 한 골목 높이 앉은 집에 그는 살았다
  작년 이맘 때 살았던 옥탑방 아래층 문간방에 아들과 같이 살던 그였다
  귀치 않게 생긴 얼굴에 까치집 진 머리로 지금도 같이 살지 모를 그 아들과 계단 난간에서 날마다 담배를 피우던 볕이 잘 들어 더운 방에서 늘 문을 열어놓고 큰 대자로 뻗어 낮잠을 자던 언젠가 한 번 공용 싱크대에 내버려 뒀던 수박 껍질을 치우라고 내 방문을 두드렸던 그를 길에서 만났다
  한 골목 한 골목 철마다 하는 이사로 높아만 지는 내 집보다 한 골목
  더 높은 곳에 앉은 자기네로 들어가는 그에게 인사는 하지 않았지만
  길에서 그를 만났다

광주를 다녀왔다

대학에 들어 온 후 해마다 광주에 간다. 엉엉 운 적이야 한 번도 없다지만, 해마다 광주에서는 눈물을 흘렸다. 준비되지 않은 죽음을 기꺼이 맞이한 사람들, 기껍지 않은 죽음조차도 피하지 않은 사람들을 떠올리면서는 늘 눈물이 났다. 또한 해마다 광주에서는 분노와 좌절을 함께 느꼈다. 사과하지 않는 사람들, 책임지지 않는 사람들, 보상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삶을 떠올리며 분노했고 그것을 구경하고 기념하는 사람들을 보며 좌절했다.
2009년의 광주는 담담했다. 아니, 2009년의 나는 광주를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늘 어제의 일, 혹은 오늘의 일이었던 광주가 올해에는 30년 전의 일이 되어 있었다. 2009년의 망월동 방문은 문상이라기보다는 제사에 가까웠다. 나는 담담하게 30년 전의 죽음을 기억하고 또 추모했다. 작년까지 하나하나 살폈던 묘비명과 망자들의 역사를 올해에는 보지 않았다. 빠짐없이 찾았던 무명열사의 묘 근처에도 나는 가지 않았다.
구묘역 앞에 새로 생긴 조형물 앞에서 장난스레 팔을 뻗으며 기념사진을 찍는 대학생들을 보았기 때문은 아니었다. 사회당의 참배행렬이, 예약을 했다는 ‘추미애 민주당 의원님의 참배 의식’에 밀려 길을 터주어야 했기 때문도 아니었고,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를 따라 온 수십 명의 검은 양복들 때문도 아니었다.
아마도 그것은, 30 년 전의 죽음을 잊게 할만한 죽음이 지금 내 곁에 너무도 많기 때문일 것이다. 실상 늘 있었던 것이지만 지금 내가 그것을 여실히 느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산 자들을 위해 먼저 죽음을 택한 사람들, 살아 싸우고자 했으나 어이없이 죽음을 맞은 사람들이 지금 내 곁에 너무 많아서 나는, 30년 전의 죽음을 두고 눈물을 흘리지 못했을 것이다.
윤상원 열사의 어머님은 아직 정정하셨다. 작년에 건강이 많이 나빠지셨다는 아버님은 마비 때문인지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고 귀가 잘 안들린다고 하셨지만 목소리만큼은 우렁차셨다. 지팡이를 짚은 할아버지가 30년 전에 죽은 아들 자랑을 하고 또 그걸 잊지 않고 찾아 준 객들에게 고마워 하는 동안 나는 나와서 집 밖을 한 바퀴 돌았다. ‘시대의 등불 윤상원 생가’라고 쓰인 간판이 보였다.
1950년에 태어나 80년 5월 27일, 해방 광주의 마지막 날 세상을 떠났다 한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던 그의 나이는 올해로 예순이었다. 80년 5월, 광주에 있었건만 윤상원이라는 이는 알지 못한다는 어느 사람은  생가를 방문한 후  다시 광주로 향했다. 금남로를 걷겠다고 했다.  연락이 끊어진 5월 광주의 벗들, 그 중 누군가가 뒤에서 자기 이름을 부르며 달려 오는게 소원이라고 그는 말했다.

  서점에 갔다. 책을 읽으려고, 소설들이 꽂힌 서가를 뒤졌다. 좋아하는, 혹은 몇 편 쯤의 작품이 나쁘지 않았던 작가들의 책이 줄지어 꽂혀 있었다. 요즘 꽤나 인기를 끌고 있는 젊은 작가들의 책부터, 수십 년 째 문단의 중심, 혹은 그 언저리에 서 있는 작가들의 것까지 책은 많았다. 하지만 그 어느 것에도 손은 가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것이 작가에 대한, 혹은 책에 대한 불신 때문인줄로만 알았다. 어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소설입네 하며 써 놓았을지, 그들의 활자 속에서 어떤 삶이 또 죽어갈지가 두려워 책에 손이 가지 않는 것일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내게 꽤나 신뢰를 쌓은 작가의 책에도, 단 한권의 책으로 나를 사로 잡은 작가의 책에도 손은 가지 않았다.
  겨우겨우 골라 든 것은 김형경 씨의 소설이었다. 두 편을 통틀어 다섯 권이나 되는 책을 읽어 보았고, 그 중 한 편에 대해서는 어떻게는 내 나름의 대답을 글로 써야겠다는 생각까지를 하게 한 작가의 신작 소설이었다. 그의 책이라면, 물론 가슴 아픈 이야기들이 또 있겠지만, 불신하지 않고 역겨워 하지 않으며 읽을 수 있으리란 생각에서였다.
  그 소설에 어떤 이야기가 있는지, 어떤 진실과 어떤 거짓이 있는지는 끝내 확인하지 못했다. 겨우 세 페이지쯤을 읽은 후에 나는 책을 덮고 서점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한 문장 한 문장을 읽을 때마다 머릿속에서 새로운 문장들이 줄지어 나온 탓이었다. 도무지 이야기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소설을 고르지 못한 것은 실은, 내 머릿속에 새로운 이야기를 위한 자리가 남아있지 않기 때문인 모양이었다. 머릿속에서 터져 나오는 문장들 때문에 도무지 책을 읽을 수 없을 것임을, 아마도 내 몸은 먼저 알았던 모양이다. 결국 나는 아무 것도 읽을 수가 없었다.
  두어 달을 쉬며 먹고 자는 일 이외에는 글만 쓰다 시피 하고서 다시 일상적인ㅡ일반적인 생활로 돌아온지가 이제 겨우 보름 남짓인데, 그간 쓰지 못한 문장들이 또 머릿속을 채우고 있다. 그것은 다 받아 쓰기에는 체력도 시간도 부족하니 아마 한동안은 그저 괴로워 할 수밖에 없을 모양이다.

전시들

서울메트로의 시사회 이벤트에 당첨이 되어서, 클림트 전을 보고 왔다. 당첨된 것은 한참이나 지난 일이지만, 체력이 달려 제대로 보지 못할까봐 미루고미루다가 전시 종료 전날에야 겨우 갔다. 미루는 동안 체력을 어느정도는 회복했지만, 전시의 끝물에 몰려든 인파의 앞에서 눈곱만큼의 회복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사람은 정말 많았다. 관객의 절대다수는 젊은 여성이었고, 그 중의 상당수는 아이를 데리고 있었다. 유모차에 탄 아이부터 초등학교 3학년 쯤 되어 보이는 아이까지 수많은 아이들이 엄마(로 추정되는 사람)와 함께 클림트 전시장을 매우고 있었다.
재미있게도, 그 아이들은 딱히 방해가 되지 않았다. 유모차에 탄 아이들은 다행히 울지 않았고, 제 스스로 돌아다닐 수 있는 아이들은 그림에 관심이 없었다. 방해가 된 것은 열심히 그림을 살피는 성인 관람객들과, 시간마다 대인원을 끌고 전시장을 휩쓰는 도슨트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벽을 따라 그림을 훑으며 지나갔다. 그리고 상당수의 사람들은 바닥의 화살표와는 반대방향으로 벽을 따라 돌아 여러 사람을 곤한하게 만들었다. 심지어 마지막 방에서는 벽에 붙어 있지 않은 몇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역주행을 하고 있었다. 나만 빼 놓고 말이다.
<유디트 I> 앞에서는 그 많은 사람들이 벽을 따라 돌지도 않고 한참을 서서 그림을 보고 있었다. 우리나라 미술관에서 이런 퐁경도 볼 수 있구나 싶어 신기해 하며 사람들을 구경했다. 적지않은 사람들이 하품을 해 가면서도 그림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다들 귀에 이어폰을 꽂고 오디오가이드를 듣고 있었다. 아마도 설명이 끝나지 않아 자리를 뜨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사람들은 벽을 따라 그림을 훑으며 지나갔다. 누군가와 부딪혀도, 누군가의 밟을 밟아도, 혹은 자신과는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는 이와 맞닥뜨려도 그들은 흔들리지 않았다. 넘치는 사람에는 관심이 없다는 듯 그저 그림을 훑었다. S와 나는 전시장을 나오며, 관객의 대다수가 여성임을 새삼 다행히 여겼다. 덕분이 몇 번은 덜 부딪혔을 것이고 덕분에 자주는 아플만큼 세게 부딪히지 않았을 것이고 덕분에 좁은 전시장에서 누군가의 몸에 밴 역한 담배 냄새를 맡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니 말이다.

클림트 전시를 다 본 후에 광장에 망연히 앉아 있다가 분연히 홍대를 향했다. 나와 S가 좋아하는, 그러나 최근에 S가 자주 가지 못한 쌀국수 집에서 밥을 먹기 위해서였다. 붐비는 지하철을 서서 타고 홍대입구역에 내려서는 곧바로 식당을 향했다. 식탁 테이블 유리 아래에는 국립공원 케이블카 허용을 반대하는 리플렛이 끼워져 있었다. 밥을 먹고 나오면서는 서명판에 이름을 올렸다. 나와서는, 늘 그렇듯 무작정 걸었다.
몇 번인가 간판만을 보았을 뿐 들어가 본 적 없던 갤러리. 이번에는 간판조차 보지 못하고 지나쳤는데 뒤따라 걷던 S가 "갤러리!"하고 외치더니 계단을 내려갔다. 따라 내려간 지하 공간에는 익숙한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언젠가 일다로 메타블로그를 타고 들어간 공간에서 본 적이 있는 작품들이었다.
신문 기사들, 혹은 광고들을 색색의 펜이나 아기자기한 스티커로 꾸민 작품들이 전시장 가운데에 선 각목 구조물에 매달려 팔랑이고 있었다. 얼핏 보면 수업 시간에 교과서에다 하던 낙서와도 비슷한 그림들은 하지만 무거운 메시지를 담고 있다. 아니, 무겁다는 말은 어쩌면 어울리지 않겠고, 웃어 넘길 수만은 없다고 하는 편이 좋을지도 모르겠다.
신문의 대부분은 흑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위에 덧칠된 알록달록한 색들이 신문이 알려주지 않는 숨은 진실들을 알려주고 있다, 고 평하기 알맞은 작품들이었다. 하지만 저런 고루한 표현으로는 다 담을 수 없는 이야기들, 그리고 이야기로는 표현할 수 없을 느낌들을 담고 있는 작품들이었다. 작가의 이름은 연미, 전시회의 타이틀은 <시시한 폭력>이다.
갤러리 안에는 다른 관객은 물론이고 작가나 직원 또한 보이지 않았다. 사무실인 듯한 구석의 보이지 않는 공간에서 인기척이 나기는 했으나 내다보는 이는 없었다. 아무의 방해도 없이 작품들을 살폈다. 웃음이 나오는 것도, 소름이 끼치는 것도 있었다. 소름 끼치는 기사가 우습게 변한 것도, 우스운 광고가 소름 끼치에 변한 것도 있었다. 한참을 보고 있는데 안쪽에서 사람들이 나오더니 문 닫을 시각임을 알렸다. 그래서 나왔다. 곧 다시 가봐야겠다.

(전시 홈페이지 가기)

운수 나쁜 날

제 119주년 노동절. 운수 나쁜 날.

취재를 나가야 했다. 원래 목적은 집회 브리핑과 다양한 참가자들의 인터뷰로 구성된 기사를 쓰는 것. 청계광장에서 열리는 본대회를 보며 인터뷰를 한 후 주변 카페에 들어가 기사를 쓰고, 저녁에 다시 청계천변으로 나와 대학생사람연대 메이데이 실천단의 문화제에서 한낱 님의 공연을 보려고 했다. 아침을 먹고, 카메라와 노트북을 챙겨 집을 나섰다.

신림9동의 기나긴 내리막을 다 내려갔을 즈음 수첩을 놔두고 온 것을 깨달았다. 인터뷰 메모 해야 되는데. 누구한테든 빌릴 요량으로 그냥 버스를 타고 나서는 명함도 놔두고 온 것을 깨달았다. 인터뷰할 때 내밀어야 되는데. 결국 사무실에 들러 명함과 필기구를 챙겼다. 충무로 카메라 수리점에 들르려고 컴퓨터로 교통편을 확인하다가, 노동절 기념대회는 청계광장이 아니라 여의도에서 열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결국 카메라 수리는 포기하고 여의도를 향했다. 사무실에서 이런저런 짓들을 하다가 조금 늦게 도착해 이미 집회는 시작된 뒤였다. 무대 옆에 서서 집회 분위기를 살피는데, 스피커의 진동이 속을 뒤흔들었다. 머리도 아프고 멀미도 나고. 컨디션이 급격히 나빠져서 한참을 멍하니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다가 정신 좀 차리고 인터뷰를 시작하려는데 사회자가 갑자기 청소를 하자더라. 그러더니 선언문을 읽고, 그러더니 노래 한 곡을 하고 집회가 끝나버렸다.

행진을 하길래 집으로 가려고 했다. 무릎이 안 좋아서 매일 한의원에 가고 있는데 무작정행진을 하기는 곤란했다. 터덜터덜 집을 향하는데 나타난 희석 선배, 행진하지 말고 지하철 타고 바로 종로로 가자신다. 시청 앞에서 촛불집회가 있다던데 종로로 간다니 그리 합류하려나 싶어 잠깐 고민하다가 지하철을 탔다. 종로 3가에서 내렸다. 잠시 기다리다가, 달렸다. 참가자들이 도로를 막고 경찰들이 참가자들을 쫓았다.

눈 앞에서 사람들이 맞고 잡혀가고 하는데 이제 와서 집에 갈 수도 없고 해서, 또 아픈 무릎으로 뛰어 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그러다가 경찰에 쫓긴 사람들을 따라 어느 골목으로 들어가 무릎도 좀 쉴 겸 사진들을 정리했다. 사진 정리를 마친 후 노트북을 끄고 골목 입구까지 나가보니 사람들이 없더라. 내 시야 안에, 그러니까 골목 안쪽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아마도 좌절하거나 포기한 사람들이었나 보다.

무릎도 갈수록 아파오고, 이미 놓친 사람들을 찾아 돌아다니기도 힘들고 해서 집으로 돌아 왔다. 버스를 타려는데 집회때문인지 도통 오지 않아 지하철을 탔다. 노량진에서 내려 버스를 탔는데 그게 하필 또 집에서 먼 곳에 서는 152번. 결국 아픈 무릎을 끌고 노트북과 카메라를 매고 집까지 터덜터덜 걸었다. 인터뷰는 못했지만 찍은 사진이라도 올려야지 싶어 간단하게나마 기사를 쓰는데 익스플로러 오류까지.

아흐, 지친다.

그렇게 해서 겨우 나온 기사.

2009 노동절 기념대회 집회
현장(서울)
제 119주년 노동절 기념대회가 ‘119주년 세계노동절
기념.촛불정신 계승, 민생&#8228;민주주의 살리기, MB정권 심판 범국민대회’라는 이름으로 서울 여의…
[박종주 기자 2009/05/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