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역 그로테스크

   3월 7일 저녁, 서울역에서는 달포 전 경찰의 진압 작전으로 죽음에 이른 이들에 대한 추모제가 열리고 있었다. 그런 곳이 늘 그렇듯, 무대를 바라보거나 무대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경청하는 사람들과, 하필 이런 데서 저런 일을 하느냐고 비아냥거리는 이들이 섞여 있었다.
   내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 무대에 올라 있는 것은 어느 악사(樂士)였다. 낯선 악기가 낯선 가락을 흘리고 있었다. 낯선 곡의 연주가 끝나자 악사는, 그것이 몽골의 음악이며 “천상의 바람”이라는 제목의 곡임을 알려주었다. 천상에 있을 죽은 이들을 기리는 의미에서 연주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 악사가, 청중들에게 보다 익숙할 것이라는 다음 곡의 연주를 준비하는 동안 잠깐 정적이 흘렀다. 그틈을 타고 등 뒤에서도 악기 소리가 들려 왔다. 역사 입구에서 으레 열리는, 외국인 악사의 연주였다. 그곳에 서는 이들이 늘 그렇듯, 그 역시 청바지 위에 판초를 걸치고 손에는 커다란 팬플룻을 들고 있었다.
   외국인 악사가 연주하는 것은 러시아의 민요로, 한국에서는 “백만송이 장미”라는 유행가의 가락으로 널리 알려진 곡이었다. 그 곡 역시, 그 악사의 차림만큼이나 그 장소에서는 익숙한 것이었다.
   앞뒤에서 들려 온 두 개의 가락을 모두 받아들이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앞에서는 이 땅에서 죽은 이들을 기리는 이국의 음악을, 죽은 이들과 같은 피부, 같은 말을 가진 악사가 연주했고 뒤에서는 이 땅에서 새로운 살 길을 모색하는 다른 땅의 사람이 자신의 악기로 이 땅의 가락을 연주했기 때문이었다.
   내 앞의 무대에서 펼쳐지는 죽은 이들에 대한 애도는 내게 무척이나 소중한 것이었지만, 내 등위에서 들리는 어느 외국인의 삶을 위한 연주 역시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 잠깐의 정적을 틈타 나는, 내 자리를 떠나 외국인 악사의 무대를 향했다. “백만송이 장미”의 가락은 흥겨우면서도 구슬프게, 바삐 팬플룻을 움직이는 그의 손끝에서 흘러나왔다.
   광장에 펼쳐진 커다란 무대 때문인지, 아직 쌀쌀한 날씨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매일같이 열리는 비슷한 무대이기 때문인지 외국인 악사의 앞은 한산했다. 연주를 하고 있는 그와 그의 매니저쯤 되어 보이는 한 사람을 제외하고 그 무대에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는 나를 포함해도 다섯이 채 되지 않았다.
   외로운 무대에서도 연주는 이어져서, 익숙한 유행가 가락이 끝나고 아마도 악사의 고향 노래쯤 될 법한 새로운 가락이 흘러나왔다. 새로운 곡을 연주하는 데에는, 앞의 곡을 위해 썼던 것보다 훨씬 더 큰, 그래서 꽤나 다른 소리를 내는 다른 팬플룻이 사용되었다. 쇳소리가 약간 섞인 듯한 대금 소리 비슷한 소리가 흘러 나왔다.
   망연히 그것을 듣고 있는데 내 곁에 누군가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비틀거리는 몸짓이 그가 술해 취했음을 말해주었다. 괜히 눈을 마주쳤다가는 원치않는 대화, 그러니까 나는 공감할 수 없는 문제들에 대한 넋두리를 주워섬겨야 할 것 같아 모른체 앞을 응시했다. 곁눈질로 그를 살폈지만, 그 역시 내 옆에 서 있기만 할 뿐 앞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가 나를 보지 않는다고 해서 그가 내게 할 말이 있음을 내가 모를 수는 없는 일이다. 그의 침묵은 결국 나를 움직이고 말았다. 내가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리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 말을 꺼냈다. 약간의 사시가 있는 그는, 무언가로 덮힌 하얀 혀를 갖고 있었다. 그 하얀 물질이 그의 혀를 잡고 있기라도 한듯, 그의 발음은 불분명했다.
   그의 발음을 알아듣기는 어려웠지만, 여러번 겪어 본 상황인 덕에 그의 의도를 알아차리기는 어렵지 않았다. 그는 내게 담배를 요청했고, 나는 그가 입을 열기 전에 이미 그것을 알고 있었다. 담배를 피우지 않아 갖고 있지 않다고 말하자 그는 그렇잖아도 그래 보인다고, 그러면 혹시 이천원이 없느냐고 물었다.
   죄송합니다, 지금은 돈이 없네요, 라고 답했지만 사실 돈은 있었다. 이천원은 없었지만 만원짜리 몇 장이 지갑에 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가 말을 꺼내기전부터 이미, 담배 한 갑을 사다 줄까를 고민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잠깐의 고민이었을 뿐 실행에 옮겨지지는 않았다. 내 친구들에게 권하지 않는 담배를, 한데잠 자는 이에게라고 해서 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돈이 없다고 말한 후 나는 악사를 응시했다. 하지만 가락은 내 귓속으로 들어오지 못했고 나는 고민에 빠져 있었다. 지갑에 있는 만원짜리로 그에게 무엇을 사다줄까 하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나의 재미 없는 머리로는, 그가 좋아할 만한 것이라고는 술과 담배밖에 떠올릴 수 없었다. 물론 그것들은, 차마 사다 줄 수 없는 물건이었다.
   마주 앉아 술이라도 한 잔 기울일 생각이라면 못할 것도 없는 일이었지마는, 차마 그럴 용기는 생기지 않았다. 술을 마실 만큼 내 몸이 성하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의 하얀 혀를 바라보며 그의 말을 읽을 용기가 없기 때문이었다. 결국 나는, 외국인 악사의 음악을 마저 듣지 못하고 그 자리를 피하고 말았다.
   돌아온 추모의 무대에서는, 고인들의 가족이나 벗들이 애도의 말을 잇고 있었다. 이미 비슷한 무대에서 몇 번인가 들은 적이 있는 이야기여서 그 울림은 오히려 방금 보고 온 하얀 혀의 것보다 적었다. 눈물과 함께 마이크를 향하는 그 소리들을 흘려 들으며 나는 무대 주변을 배회했다.
   고인들과 함께 싸웠던, 다행히 죽음은 면했지만 범법자로 지목되어 재판을 받게 된 고이들의 동료들에 대한 탄원 서명을 받는 부스가 있었다. 조용히 다가가 펜을 쥐어들자 부스를 지키고 있던 이가, 읽어 보았는지를 물으며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종이를 받아들자 그는 탄원 서명 운동과 함께 재판 비용 모금 운동도 벌이고 있노라고 했다.
   아무 대답을 않았지만 그는 말을 이었다. 지금 만원을 기부해 주시면 재판정에 설 이들에게 큰 힘이 될 거라고 했다. 나는 아까 뱉었던 말을 또 한 번 했다. 잠시 망설였지만, 죄송합니다, 지금은 돈이 없네요, 라고 나는 다시 말했다. 그는 나중에 생각나면 계좌로라도 꼭 넣어달라며, 유료로 배포하는 소책자까지를 내 손에 쥐어 주었다.
   하얀 혀를 보며 고민했듯, 지금이라도 돌아가 돈을 낼까 잠시 고민했지만 결국 그러지는 못했다. 지갑에 손을 댈 수록 눈 앞에 하얀 혀의 이미지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가 담배 없는 밤을 보내는 대신, 나는 지갑 없는 밤을 보내야 할 성 싶었다. 한켠에서 죽음을 기리고 한켠에서 삶을 찾아 서로 다른 음악이 흐르는 서울역에서 나는, 늘 그렇듯, 삶도 죽음도 아닌 나의 당당함을 찾아 남을 속였다.

아직 끊지 못한 것들

   수업에서는 아니었지만, 대학에서는 참 많은 것들을 배웠고 또 깨쳤다. 아는 것이 하나씩 늘어갈수록 해야 할 일도 늘었지만 반대로 해서는 안될 일들 또한 늘었다. 그것들을 하나하나 해 나가면서 생활의 많은 부분이 바뀌었지만 여전히 해내지 못한 것들도 꽤 있다. 그 중 내가 오래동안 노력하고서도 아직 완전히 해내지 못한 몇 가지를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을 졸업 전부터 했었다. 그러고서도 이제야 이것을 쓰게 되는 나의 게으름 역시, 내가 어찌하지 못한 것들 중 하나일 테다.

‘집에 내려 간다’는 말
   내가 보아 온 세계전도나 지구의에는 항상 북극이 위쪽이 그려져 있었다. 당연히 서울이 김해보다 높은 곳에 그려져 있었고. 하지만 서울 올라간다, 혹은 김해 내려 간다는 말은 단순히 그런 지리적인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애초에 우주의 위아래를 알기는 어려우니 그 지리적 문제 역시 허구에 불과한 것이겠지만.
   그 말들은 김해에 살 때에도 썩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때에야 서울과 김해를 오갈 일이 없으니 딱히 쓸 일 또한 없었다. 하지만 서울에 살게 된 4년 전부터 상황은 달라졌고, 나는 말을 버리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덕분에 ‘서울 올라 간다’는 말을 쓰는 일은 없게 되었지만 ‘집에 내려 간다’는 말은 여전히 종종 튀어나오곤 한다.
   비슷한 말 중에 ‘아래로부터’라는 표현이 있다. 대의민주주의 형식을 갖춘 곳에서 대표자가 아닌 이들을 종종 ‘아래’로 칭하곤 한다. 아래로부터의 의견 수렴, 아래로부터의 복지, 뭐 이런 식으로. 그들을―그리고 나를 ‘아래’로 칭하는 것은 유쾌하지 않은 일인데, 이 말 역시 아직 완전히 입에서 떼어 내지 못한 채 살고 있다.

유제품
   육류를 먹지 않은지 어느덧 열달 가량이 되었다. 먹기 위한 사육에 반대하는 것이 애초의 동기였기에 계란이나 유제품 역시 최대한 먹지 않으려 하고 있고, 그 중 계란은 빵을 먹을 때가 아니면 섭취하는 일이 딱히 없을만큼의 생활을 하고 있다.
   하지만 유제품은 아직 상당한 양을 먹고 있다. 물론 생우유를 사서 마시는 일은 많지 않지만, 커피나 빵에 곁들여 먹는 경우는 아직 상당히 있고 치즈는 돈이 허락할 경우의 이야기지만 그냥 간식으로도 종종 먹는다. 그런 식으로 직접 섭취하는 것과 빵이나 과자, 피자 등을 통해 섭취하는 양을 합치면 만만히 넘길 수준은 아닐 것이다.
   유제품을 끊지 못하는 것은 ‘우유의 처지’가 내게 그만큼 강하게 와닿지 않기 때문이다. 어릴적부터 보아온 육우肉牛나 (알을 낳는)닭은 그야말로 몸부림칠 틈조차 없는 곳에 갇혀 있었지만 어쩐 일인지 내 주위의 젖소들은 상대적으로 훨씬 자유로운 환경에 있었다. 그나마 저정도면 살만하겠네, 라는 인식이 베어 있는 것이다.
   며칠전 스펀지라는 티브이 프로그램에서 각종 기능성 우유의 허와 실을 밝히는 코너를 방영했다. 그 중 ‘잠 잘 오는 우유’라는 것이 있었는데, 이 우유를 만들기 위해서 농장에서는 소의 멜라토닌 수치가 높은―즉 소가 잠오는 상태인 새벽 세 시에 소의 젖을 짠다고 했다. 그쯤 되는 것을 보았으면 이제 우유도 과감히 끊어야 하는데, 사실 약간은 자신이 없다.

1인칭 주어 ‘형’
   주변에 1인칭 주어로 형/오빠, 혹은 언니/누나라는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청자와 자신과의 관계를 우선시한 단어 선택이라든가 친밀감의 표현이라든가 하는 여러가지 변명이 있겠지만,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어느 정도의 권위 의식에 기반한 단어 선택임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동생이’로 시작하는 문장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그 반증일 터.
   하지만 나로서는, 의식적으로는 물론이고 실수로조차, 혹은 농담으로조차 사용해 본 적이 없는 표현이다. 그러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그런 말을 쓰는 일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몇번인가 자조적인 농담으로 써 보려 했던 적이 있으나, 그조차도 되지 않았다. 그만큼이나 내게는, 감히 사용할 수 없는 표현인 것이다.
   대신 ‘형아가’라는 표현을 때때로 사용한다. 원래는 종종 사용했었는데, 스스로가 그런 표현을 사용하고 있음을 인식하고부터 의식적인 노력을 통해 그 빈도를 떨어뜨렸다. 내게 이런 표현으로 시작하는 문장을 듣는 사람은 딱 한 명, 일곱 살이라는 꽤나 큰 터울이 있는 내 동생이다. 주로 무언가를 해줄 때 이 표현을 사용한다. "형아(물론 경상도 방언으로 발화하기때문에 실제 발음에는 꽤 차이가 있다.)가 나중에 해 주께."하는 식으로.
   터울이 큰 막내가 그나마 ‘형아’로 스스로를 지칭하지만, 아마 나이 차이가 더 적었거나 우리 둘의 나이가 더 많았더라면 ‘형님’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을 것이다. 내가 이런 표현을 유독 동생에게만 사용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아마 작년이나 재작년쯤의 일이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1년 혹은 2년 동안이나 신경 쓰고서도 아직 완전히 버릇을 고치지 못했다는 뜻이다.

  끊지 못한 것이 어디 이것 뿐이랴만.

(이 글을 쓰기 시작할 당시 떠올렸던 것이 분명히 세 개의 항목이었는데 쓰다 보니 둘밖에 기억나지 않아 두 개의 항목만을 정리해서 게시했었다. 뒤늦게 나머지 하나가 다시 떠올라서, 늦게나마 추가한다. 순서대로 앞의 두 개가 처음에 쓴 것이고 마지막 것이 후에 추가한 부분이다.)

어제는 3.8 여성의 날

1.
   난생 처음으로 3.8 여성의 날 행사에 다녀왔다. 내 정보력의 범위 내에 있는 여성의 날 행사는 여성연합 등에서 주최하는 전국여성대회와 전국학생행진 등에서 주최하는 여성의 날 문화제, 이렇게 두 개인데 둘 다 내가 그리 좋아하지 않는 단체들에서 여는 거라 그간 한 번도 가 보지 않았다.(어제 다녀와서 좀 찾다보니 민주노총에서 하는 여성 노동자 결의대회 같은 것도 있긴 하더라.) 작년에는 주변 사람들이 꽤나 간다길래 은근슬쩍 묻어서 가 볼까 했으나 마침 다른 일과 겹쳐서 가지 못했다.
   어제 다녀온 것은 여성연합 등에서 연 전국여성대회를 비롯한 몇 가지 행사들. 2시부터 열린 여성의날 기념식에서 아는 선배가 공연을 한다기에 가기로 맘 먹었던 건데, 늦잠을 자는 바람에 정작 공연은커녕 선배 얼굴조차 보지 못했다. 행사는 역시나 그저그랬지만, 의외로 다양한 단체들에서 부스를 열고 있어 그리 아깝지는 않은 시간을 보냈다.
   어제의 견문을 꽤나 자세히 썼었는데, 뭔가 오류가 생겨 날려먹는 바람에 자세한 이야기는 생략하기로 한다. 자세한 내용을 보고 싶다면 이 글을 참조할 것. 나와 동행한 이의 후기로 연결된다.

2.
   나를 여성의날 행사로 이끈 다른 요인도 하나 있었다. 여성 민우회 홈페이지에 올라와 있는 여성의 날 공지 게시물 중 ‘3.8을 맞이하는 민우회원의 자세’라는 파트다.

미션1. 봄날 어김없이 찾아오는 황사에 대비해 마스크를 챙긴다!
미션2. 초봄 쌀쌀한 기운을 든든히 막기 위해 후드티를 입는다!
미션3. 즐겁고 신나게 여성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간편한 차림에
          운동화를 신고,  배낭을 맨다!
그리고 미션 4. 자외선을 피하기 위해 썬글라스를 필참한다!

위의 ‘미션’ 네가지는 이명박 정권의 복면금지법을 풍자하기 위한 것이다. 집회에서 얼굴을 가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황사와 쌀쌀한 날씨를 피하기 위해 얼굴을 꽁꽁 가리자는 것. 이 중 나를 잡아 끈 것은 바로 세 번째 미션이다.
   대학에서 4년 동안 이런저런 모임들, 특히나 종종 집회에 나가는 모임들에서 활동했고 그 중 3년은 선배-경험자-로서, 혹은 어떤 일의 담당자로서 공지를 보내거나 상대방이 겪을 상황에 대한 조언을 주며 시간을 보냈다. 그 시간동안 집회는 늘 격했고, ‘뛸’ 일들로 가득했다.
   당사자의 안전과 건강을 위한 것이라고는 해도, 집회에 가면 뛰거나 싸워야 하니 편한 옷(대개는 ‘안 예쁜’ 옷)을 입고, (구두가 아닌)운동화를 신고 오라고 말하는 것은 늘 조심스러운 일이었다. ‘뛰기 위해 어떤 차림을 하라’고 말하는 것보다는 ‘뛰기 힘들어 보이니 같이 뒤로 빠지자’고 말하는 편이 내겐 훨씬 쉬운 일이었다.
   평소에는 늘, 여성의 외모가 사회에 의해 규제받고 있는 것이며 불편한 복장과 화려한 화장은 온전한 개인의 선택이 아님을 강조하던 이들이 집회나 새터, 혹은 비슷한 행사들이 있을 때마다 ‘활동하기 편한 복장’을 요구하는 것을 보는 것은 또한 내 입에 그 말을 담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여성단체’에서도 똑같은 이야기가 나오더라. 그래서 궁금해졌다, 그들의 3.8이 말이다.

3.
   여성의날 행사에 참가한 이들은 아름다웠다. 그들의 몸이나 얼굴이 아닌, 복색과 태도가 말이다. 어느 집회에서나 흔히 볼수 있는 통일된 차림을 하고 있는 이들도 별로 보이지 않았고, 감정이 과잉한―혹은 결의가 과잉한 노래도 별로 들리지 않았다.
   다만 참가단체별로 한 두가지씩의 아이템은 공유하고 있었다. 어떤 이들은 보라색 원통을 머리에 쓰고 있었고 또 어떤 이들은 보라색 풍선을 손에 들고 있었다. 주최측에서 나눠준 듯한 붉은색과 노란색의 술을 들고 있는 사람들도 꽤나 있었다.
   내가 늘 보아오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들 역시 ‘같은 것’에서 아름다움, 혹은 강함을 찾는 듯했으나 다행히 그것이 나의 소름을 끼치게 할 만큼은 아니었다. 그 한두가지 물건들로 인해 하나가 되기에 그들은 너무도 다양한 표정과 다양한 몸짓을 갖고 있었던 덕이다.
   하지만 그들의 행진은 늘 보아 오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비록 ‘대중가요’에 속하는 노래들이 종종 흘러 나왔고 여성 사회자들이 마이크를 잡았지만, 그리고 내가 보아온 것보다 다양한 연령과 성별의 사람들이 방송차를 따랐지만 말이다. ‘퍼레이드’라는 이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늘 보아오던 평범한 행진과 다르지 않았다.
   방식도, 구호도, 시작과 끝을 알리는 인삿말도 소위 ‘남성적’인 것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하면 조금은 설명이 될까. 당연하다는 듯 ‘쇳소리’로 인사를 하고 발언 중에 설움이 북받쳐 눈물을 터뜨린 후에야 겨우 자신의 목소리로 이야기를 잇던 여성 연사들을 볼 때와 비슷한 심정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청계광장에서 시작한 행진은 국가인권위원회와 프레스센터 앞에서의 퍼포먼스를 포함하고 있었다. 인권위 축소해 반대하는 줄넘기와 언론법 개악을 반대하는 상자밟기, 이 두개의 퍼포먼스를 하는 동안 행진 대열에 있던 한 휠체어 장애인은 그저 박수를 치며 환호하고 있었다.
   늘 주제넘은 짓일지 모른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광경을 볼 때면 나는 늘 그 당사자만큼의 웃음을 지을 수가 없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가 짓는 웃음만큼의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다. 물론 어제도 그랬다.

4.
   집에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나는 그의 어깨에 기대어 앉았다. 그러다가 한 번, 서로 입을 맞추었다. 작았지만, 쪽, 하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가시기 무섭게 머리 위에서 거친 음성이 들려 왔다. "그런 건 집에서 해." 뭔가 싶어 고개를 들자 그는 다시 한번 확인해 주었다, "그런 건 집에 가서 하라고."
   몇 분 전인가 버스에 타 내 옆에 서서는 거친 숨을 뿜고 있던 이였다. 그의 숨에는 약한 술냄새과 짙은 담배냄새가 섞여 있었다. 독한 그 냄새와 씩씩거리는 커다란 소리가 뜨거운 숨결을 타고 내 얼굴에 날아왔다. 물론 나는 기분이 상했지만, 늘 그렇듯 티내지 않고 있었다.
   나는 그렇지 않지만, 타인의 애정표현―신체접촉을 보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불편하거나 불쾌한 일일 수 있다. 충분히. 하기에 그의 문제 제기에 내가 할 수 있는 이의 제기는 딱히 없다. 물론 긴 대화가 가능하다면 그것이 왜 불편한지, 볼편해야만 하는 일인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 볼 수 있겠지만.
   아무튼 그래서 나는 조용히 있었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 문제 제기에야 항변할 말이 없지만, 그의 ‘반말’에는 충분히 할 말이 있으니 말이다. ‘그런’ 이라거나 ‘집에서’라는 표현에도 충분히 따질 여지는 있었지만 굳이 그러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저 입에서 "엇다 대고 반말입니까"라는 말이 맴돌았을 뿐.
   그렇게 시간이 가는 동안 그의 숨 속에서 술 냄새는 차츰 옅어졌지만 하루 이틀된 것이 아닐 담배 냄새는 좀처럼 가시지도, 그렇다고 익숙해지지도 않았다. 버스에 사람이 더 탈수록 그는 내 의자에 다가왔고, 불룩 나온 그의 배는 내 어깨를 밀고 들어왔다. 열린 단추 아래 펄럭이던 그의 코트자락은 기어코 내 무릎을 그의 품 속으로 넣고야 말았다.

5.
   집에서 쉬며, 곰TV에 업데이트 된 ‘우리 결혼했어요’라는 프로그램의 영상을 재생시켰다. ‘남편’들의 모습이 너무 역해서, 결국 끝까지 보지는 못했다. 그 전날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나왔던, 여성들에 대한 가정 폭력이나 1900년대 초반 남아프리카의 여성들이 겪었던 온갖 고난이 떠올랐다. 뻔뻔하게도 나는, 그들의 잔혹사만이 괴로운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4년의 책들

딱히 많은 것을 배우지는 않았기에 ‘대학’이라는 말이 내게 주는 울림은 적다. 그곳에서 한 수많은 일들, 그곳에서 만난 수많은 사람들은 다른 이름으로도 부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졸업을 겨우 열흘 앞두고 있는 지금, 뭔가 대학생활을 정리해 볼만한 건수를 찾아 보았다. 그러다 떠오른 것이 책들이다.
나는 책을 많이 읽지는 않는다. 애초에 소설이 아니고서는 다른 영역의 책들은 썩 좋아 하지도 않는다. 철학이나 사회과학에는 흥미가 없고, 문학 역시 소설 이외의 것을 읽는 데에는 별로 취미가 없다. 자연과학이나 공학에 흥미는 있지만 그 분야의 것들 중 내게 적당한 수준의 책을 찾기는 어려운 일이고, 음악이나 미술에도 흥미가 있지만 이 경우 재미있으면서도 잘 짜여진 책을 찾기가 어렵다.
책은 사는 것 역시 좋아하지 않는다. 사전이나 사진집처럼 내가 여러번 들추어 볼만한 책이 아니고서야, 두꺼운 종이뭉치를 지니고 있는 일이 낭비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같은 책을 두 번 이상 보는 일은 거의 없고, 분야를 막론하고 책을 보면서 책에 무언가 필기를 하는 일도 없다. 어쩌다 사게 되는 책은 거의가 헌 책이고, 그나마도 한 번 읽은 후에는 주변 사람들에게 선물해 내게 남기지는 않는다.
그렇지 않고서도 내가 계속 가지고 있는 책은 거의가 선물받은 책들이다. 나의 대학 생활 동안 무슨 일을 시작할 때, 혹은 생일과 같은 기념일을 맞았을 때 주고 받은 선물은 거의가 책이었다. 책을 주고 받으며 속지 첫장에 나나 상대방들이 쓴 글들이야말로 어쩌면 내 대학생활의 정수일지도 모르겠다. 내 대학생활 4년의 정수를 품고 있는, 내가 선물 받은 책의 목록을 정리해 보기로 했다.

2005년
<전태일 평전>, 조영래, 돌배게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난장반에 배정되어 가입한 학회 ‘광장’의 선배였던 영민이 형이 준 가입축하 선물. 사실 아직 읽어보지 않았다―앞의 몇 페이지를 읽어보기는 했지만. 형이 적어 준 말은 "부디 학회 생활을 하며 ‘회의주의자’에서 벗어나자!!" 예나제나 나는 스스로를 회의주자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지만.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신영복, 삼우간
역시나 학회 광장의 가입 선물로 자연 누나가 준 책. 첫 속지가 까만 색인데, 그 위에다가 까맣고 깨알 같은 글씨로 꽤나 긴 글을 적어 주었다. 이 책은 신영복 씨가 옥중에서 때로는 스스로를 갈고 닦으며, 때로는 주변을 관망하며 쓴 글들을 모아 놓은 것이다. 자연 누나는 그것을 두고 " 너와 내가 함께 해야 할 과정이겠지. 잘 부탁한다."고 썼다. 누나는 잘 살고 있으려나.

<역사란 무엇인가>, E.H. 카, 청년사
이것도 학회 광장의 가입 선물, 나름 라이벌 학회였던 ‘파문’의 학회장 민진 누나가 준 선물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나를 학회 광장에 가입시킨 장본인. 학회 발대식이 있던 날 받은 것이니 순서로는 자연 누나의 것보다 이게 먼저. 발대식을 하는 술집에 가기 전에 같이 헌책방에 들러서 산, 학회 세미나의 첫 텍스트였다. 즉석에서 사서 준 것이라 아쉽게도 아무 말도 적혀 있지 않다.

<해변의 카프카> 상, 무라카미 하루키, 문학사상사
내가 가입했던 난장반의 다른 모임인 ‘주인공―주체적인 인간들의 공동체’의 가입선물로 추정되는 책. 책을 준 당사자가 가입선물임을 당시에는 밝히지 않아서, 나에게만 주는 건 줄 알았었는데 알고보니 다른 애들도 한 권씩 다 받았더라. 편지와 함께 받은 것이라 책에는 별다른 말이 적혀 있지 않다. 그는 내게 상권을 주며 하 권은 사서 읽으라고 했지만, 나는 결국 그의 것을 빼앗았다. 책에 적혀 있는 말은, "종주에게 희선이. 4월 16일에 주다."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박완서, 웅진닷컴
<해변의 카프카>를 준 그가 5월에 준 책이다. Zzoi라는 칵테일 바에서 마주 앉아 한참을 이야기한 날이었다. 수능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아서 <엄마의 말뚝>조차 제대로 읽어 본 적이 없었는데, 이 책을 통해 박완서를 알게 되었다. 그 뒤로는 박완서 책을 참 많이 읽었다. 전쟁 중의 여성들을, 그들의 고난과 대화, 그리고 변화를 담은 이 책을 그는 가슴 설레하며 또 아파하며 읽었다고 했다. 책에 길게 적혀 있는 말은, "사람의 아픔을 어루만지며 살자, 사랑한다"라는 문장으로 끝난다.

<권리를 위한 투쟁>, 루돌프 폰 예링, 범우사
2005년 2학기에는 난장반 밖의 동아리인 인문학회에서도 활동했던다. <권리를 위한 투쟁>은 인문학회에서 9월 부터 세미나를 시작한 2학기의 첫 텍스트. 이 책을 준 것은, 안타깝게도 위의 두 권을 준 이와 같은 사람이다. 인문학회에는 정을 붙이지 못해 한 학기밖에 활동하지 않았지만, 이 책은 여전히 내 책꽂이에 있다. 그때 함께 세미나를 했던 사람들의 얼굴을 기억한 채. " 많은 말들과, 그보다 더 많은 시간을 공유할 것이란 기대를 하며…"

2006년
<걸리버, 세상을 비웃다>, 박홍규, 가산출판사
학회 광장과 주인공을 함께 했던 헌일이가 준 생일 선물. 학회 광장은 내게 잘 맞지 않은 공간이었고, 그래서 다른 이들과 자주 부딪혔었다. 어떤 책을 읽은 것인지에 대해서 주로 싸웠는데, 내게 무의미했던 철학 개론서, 사회과학서 대신 내가 반 농담조로 제안했던 책이 <걸리버 여행기>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어디서든 독특한 사람이고, 주변 사람들에게 말로써 내 마음을 이해시키기는 여전히 어렵다. <걸리버 여행기> 이야기 역시 주변 사람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는데, 이 책을 받게 된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다.
그때의 지난한 싸움을 지금 설명하기는 힘드니까, 그냥 그렇다고만 해 두자. 헌일이는 무려 두 페이지에 걸쳐 주절주절 말을 풀어 놓았다. 몇 개의 칭찬 사이에 그가 내게 바랐던 것들이 자세하게 적혀 있는데, 미안하게도 그 바람들을 채워주지는 못했다. 그 긴글 끝에 그는, "같은 반/「광장」 동기/「주인공」 동기 박헌일이."라고 서명했다.

<세계를 뒤흔든 열흘>, 존 리드, 책갈피
역시나 난장반의 동기이고, 주인공을 함께 했던 강은이가 준 생일 선물. 생일날 밤 강은이와 헌일이는 수퍼에서 도넛 세 갠가를 사고 나무젓가락 두 개를 챙겨서 내 방에 찾아 왔다. 도넛을 쌓아 놓고는 초 대신 나무 젓가락을 꽂아 두고 불을 붙여 생일 파티를 해 주었다. 러시아 혁명일 기록한 책인데, 아직 읽지 못했다. 사실 헌일이가 준 책도 띄엄띄엄 거의 다 읽기는 했지만 완전히 다 읽은 것은 아니고. 지금은 둘 다 군대에 가 있어서, 제대하기 전에 꼭 다 읽어야겠다는 다짐을 해 둔 상태다. 강은이가 적어 둔 말의 요지는 친해지고 싶은데 아직 친해지지 못해 아쉽고 미안하고 답답하는 것. "앞으로 2006년에는 나의 아쉬움이 그저 단순한 아쉬움으로 그치지 않기를 빌며 스무번째 생일을 축하한다. 생일 축하해요 종주군-_-…" 저 표정의 의미는 아직까지도 미상.

<서 있는 여자>, 박완서, 세계사
2006년 4월 나와 그의 연애는 많이 힘들었었나 보다. 서로가 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에서 시작했던 관계였을 텐데, 날이 갈수록 서로의 차이를 발견하고 그것이 서로의 바람과 얼마나 먼 것인지를 확인하는 것은 꽤나 힘든 일이었다. 서로에게 상처가 쌓여 말을 꺼내는 것조차 힘들어 졌을 즈음 그는 내게 이 책을 선물했다. 절반밖에 읽지 못했지만 자신의 답답한 속을 건드린 이 책의 나머지를 나와 함께 읽고 싶다고 그는 써 두었다. 덕분에 우리가 지금가지 온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내게 당신이 있어서 다행이에요. 함께 책을 읽어주고, 함께 고민 나눠 줄. 함께 있어 줄. 책을 줄 수 있어서, 그런 사람이 당신이어서, 많이 고맙고 많이 미안해.."

<타인에게 말걸기>, 은희경, 문학동네
2006년 2학년이 되어 처음으로 후배를 맞던 나와 동기들에게, 주인공의 선배들은 선물을 주었다. 정확히는, 주려 했다. 주기 전에 우리가 먼저 알아버리는 바람에, 이 책은 내가 직접 고른 것. 선배들은 세 명이 각자 다른 포스트 잇 하나씩에 글을 써어 첫장부터 하나씩 붙여 주었다.
"너한테 좀 고심하고 책 사줘야 하는데 ㄱ- 너가 갖고 싶대서 그냥 「타인에게 말걸기」 샀어. 담엔 꼭 내가 사주고픈 거 주마~"라고 영아누나가 썼는데 아직 책은 안 줬다.[!] 내게서 인류애가 무엇인지를 느낀다는 황송한 말을 종종 하는 바오란은 "가장 먼저 나를 알아 준 후배. 말하지 않아도 웬만한 건 느끼는 팬 일호― 사실 내가 네 팬인지도 몰라"라고 쓰고, "네 사랑 바오란"이라는 서명을 달았다. 이 글에 너무 자주 등장해 좀 민망한 김희선 씨는, "가득히 느끼는 시간, 다시 만들자. 다시 만들어가자"고 적어 두었다.

<함께 보는 한국근현대사>, 역사학연구소, 서해문집
이름을 밝히지 않은 한 선배가 준 책. "우리, 서로의 든든한 울타리가 되며, 살맛나는 세상- 함께 만들어 가보자!!"

2007년
<인간실격>, 다자이 오사무, 민음사
일본 작가인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과 <직소直訴> 두 편이 실려 있는 이 책은 혜진이가 생일 선물로 준 것이다. 올해 생일에는 무려 현금을 준 혜진이, 이 책의 첫장 첫줄에는 책을 선물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 뭔가 엄청나게 특이한 물건을 선물해야겠다는 마음을 버렸다고 써 두었다. 어디서 무슨 일을 함게 해도 든든한 혜진이(절대 수업 노트를 빌려주기 때문은 아니다.), "생일 축하드리고, 살롱(?) 만드시면 제가 단골 될 거랍니다. 꼭 만들어 주세요"라라도 썼다. 살롱은, 어디든 땅 열 평만 있으면 만들고 말 내 고물상에 딸린 담소 공간이다.

<사회적 공화주의>, 금민, 박종철 출판사
선물이라고 하긴 뭣하지만 일단 받은 책이니 여기에 넣는다. 무려 저자의 친필 싸인과 함께 받았지만, 집단으로 받은 거라. 2007년 여름, 희망 실천단 활동을 대학생사람연대와 사회당이 함께 했는데, 그때 실천단을 찾은 금민 당시 사회당 대표님께서 주신 책. "박종주 동지께 금 민 드립니다"라고 적혀 있다. 사실 이 책은 지금은 갖고 있지 않고, 김해 집에 보냈다. 집에서 내가 운동하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내가 자세한 설명은 하지는 않기 때문에, 혹시나 뭣 좀 더 알게 될만한 게 있을까 싶어서 말이다.

<나는 유령작가입니다>, 김연수, 창비
늘 자기 아니었으면 나는 왕따가 됐을 거라고 말하는 이은혜의 선물. 이 책을 고른 것은,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조남현 선생님이다. 수업 교재인데, 반 농담으로 사달라고 졸랐더니 덜컥 사준 착한 이은혜는 속지 둘째장에다가 무려 "참 쓸말 없네"라고 적었다. 물론 그 말만 적은 건 아니지만. 늘 아낌없이 먹고 마실 것과 잠자리를 제공해 준 이은혜, 이 책에는 "늘상 피곤해하고 쩔어있는 모습만 보니 박종주의 유쾌한 웃음이 그립다"고 썼다.

2008년
<작은 인디언의 숲>, E.T. 시튼, 두레
지금은 병상에 있는 원재가 생일 선물로 준 책. 정작 이 책을 산 것은 자신의 생일 바로 전날이었다. 사람들이 자기 생일 챙겨줄 것을 알고, 며칠 전에 그냥 넘긴 내 생일 선물을 산 것. 정작 나는 이 때 원재 생일 선물을 주지 못했다. 첫장에는 생일 선물이 늦은 상황과 책을 고르기가 어려웠음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앞으로 2008년 대사람 잘 이끌어 보자"라는 말을 적었다. 이걸 어쩌나, 나는 졸업하는데 원재는 대사람 1년 더 하는구나.

<다음 중에서 옳은 것은>, 홍승진
난장반에 08학번으로 들어온 승진이의 책. 출판사를 통해 나온 것은 아니고, 자신의 글을 모아 인쇄소에서 제본한 것이다. 떡하니 책으로 만들긴 했는데 집에 백권 넘게 남은 게 쌓여 있다나 뭐라나. 절반은 승진이의 시, 나머지 절반은 승진이의 시 비평. 남의 글을 평하는 것은 좋아하지 않아 비평은 하나도 읽지 않고, 시들만 전부 읽었다. 첫장에 붓펜으로 힘주어 쓴 "만들어진 빛보다 훨씬 더 환한 빛은 네 몸속에 있을 거라고, 박종주 님께 담연 모심"이라는 문구는 ‘환하다’는 말이 얼마나 고운 것인가를 새삼 일깨워 주었다.

<자연과 타협하기>, 리오 패니치·콜린 레이스 엮음, 필맥
생태주의에 관한 논문을 모아 놓은 이 책은 무려 500쪽에 달하는 데다가 가격도 2만원이 넘는다. 2008년 동아리연합회 사회학술분과 소속의 동아리들이 개최한 ‘인문사회학술주간’ 행사에서 인문학회과 고전연구회가 공동으로 운영한 <그날이 오면>(서울대 앞에 있는 인문학 전문 서점이다.) 후원 책 장터에서 혜진이가 사 준 책. 읽고 싶은 책이 있다며 사달라길래 한 권을 사주면서 농담 삼아 제일 비싼 책을 가리키며 답례를 요구했더니 그 자리에서 지갑을 열어 사 주었다. 읽고 싶었지만 가격때문에 엄두도 못 내고 있던 것을 내 손에 쥐어 준 혜진이에게 감사를. 즉석에서 책을 주고 받은 것이라 멘트는 없다.

<원미동 사람들>, 양귀자, 살림
소설을 쓰고 싶던 때가 있었다. 시라는 짧은 형식은 내 속의 것을 토해내기에는 더없이 좋지만 타인에게 온전히 뜻을 전하기는
어려워 나의 이야기든 남의 이야기든 소설의 형태로 써 보고 싶던 때가 있었다. 그래서 연애 중인 이에게 이 책을 부탁했다. 그가
별 이유도 없이 한참이나 있다가, 그러니까 소설에 대한 갈망이 사라진 다음에야 이 책을 사주는 바람에 나도 한참을 버려 두고 있다가 얼마 전에야 읽었다. 그는 "늦어서 미안해요. 하지만 잊지 않고 있었어요. 난 좀 늦긴 해도 까먹진 않으니까 너무 걱정마요. 사랑해요."라고 썼다.

<마르탱 게르의 귀향>, 나탈리 제먼 데이비스, 지식의 풍경
한국 최초의 진보정당 사회당의 창당 10주년이 바로 지난해인 2008년이었다. 창당 10주년 행사장 앞에서는 진보적인 내용을 주로 다루는 출판사 서너곳이 할인판매전을 열었었다. 지난 학기 동안 기자로 활동했던 인터넷 신문사 프로메테우스Prometheus의 강서희 대표님이 그곳에서 사주신 책. 갖고 싶은 책을 골라 보라시기에 여름학기 수업 시간에 듣고는 재밌겠다 싶었던 이 책을 골랐다. 받은지 두어달 남짓 되었는데 아직 읽지 못한 이 책에도 멘트는 없다.

2009년
<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해냄
자신의 대학 입학 이후 맞은 내 생일 세 번을 전부 다 챙겨준 정은이의 올해 생일 선물. 끔찍한 상황을 상상해 묘사한 것이라 읽기 부담스러운 부분이 없지 않았지만, 덕분에 좋은 작가 한 명을 알게 되었다. 내가 읽은 남성 작가의 책 중에서는 최고 수준에 속한다고 해도 좋을 정도의 책. 책과 편지를 함께 받아서, 책에는 아무런 말도 적혀 있지 않다. 정은이는, 언제나 내 손 닿는 곳에 있겠다고 말해 준 사람. 앞의 생일들에 준 핸드크림과 귀걸이도 지금 바로 내 옆에 있다.

이렇게 정리해 보니 4년 동안 선물받은 책이 열아홉권이다. 여기에 더해 아버지에게 받아서 몇 권만 읽고(몇 권은 펼쳐보지도 않고) 집으로 돌려 보낸 책이 열권 남짓 되고 크리스마티 파티 때 사다리 타기로 당첨된 책도 한 권 있다. 그리고 선물받았다기보단 ‘얻었다’는 말이 어울릴 책들이 몇 권 있다. 선물 받은 책이 몇 권 더 있을 법도 한데 지금 내 책꽂이에 꽂혀 있는 것은 이게 전부다.
책이 아닌 형태로 받은 선물은 핸드 크림이 두번에 귀걸이나 옷, 그리고 카메라나 현금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것들가지를 다 정리하자니, 함께 받은 편지를 공개하지 않고서는 선물의 의미를 공유하기가 어려울 것 같아 그냥 책으로 대상을 한정했다. 이 책들을 읽으면, 나의 대학생활에 대해, 나의 벗들에 대해 조금은 알 수 있을 터이다.
언제 한 번 내가 선물한 책들도 정리해 볼까 싶지만, 그러기엔 요즘 기억력이 너무 떨어져서 조금 망설여진다. 좀 더 여유가 생기면, 내가 책을 준 이들에게 내가 준 책을 빌려서 다시 읽어 보아야겠다. 책도, 첫 장에 내가 써 둔 말들도. 헌책방에 팔아버렸다는 사람이 없기를 빌어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