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검사를 받았다

2021년을 자가 격리로 시작했다. 2021년 1월 1일 18시 03분, 문자 한 통이 왔다. “〈관악구 보건소에서 알려드립니다〉 / 12월 24일 ~ 12월 30일 ○○○○○ 본점(△△로 ×××)에 방문하신 분께서는 증상 유무와 관계없이 ★가까운 보건소★에서 코로나 검사를 받으시길 바랍니다.” 미리보기 창에 뜬 이만큼을 읽고 카드 결제 내역을 확인했다. 며칠 전에 어디에선가 낙지덮밥을 먹었기 때문이다. 내가 간 그곳이었다. 발신 번호로 전화를 걸어 선별진료소 운영 시간을 확인했다. 누군가가 구청 당직실이라며 전화를 받았다. 내일 아홉 시에 오면 된다고 했다. 그리고는 문자 메시지를 마저 읽었다. “검사 전까지는 외출, 타인 접촉을 피해주시기 바라며 검사 후에도 결과가 나올때까지 외출을 자제하고 자택에서 대기하여 주시기 바립니다. // 이 문자는 방명록을 기준으로 발송되오니, 동행인에게도 알려 검사 받으시길 바랍니다.”

방명록에 “외 1인”과 같은 식으로들 적는 것을 보며 그날 누구와 식사했는지 기억이 안 나면 어떡하나 하고 종종 생각했다. 나는 혼자였으므로 적어도 당장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다. 다만 내가 그 식당에 간 것은 12월 27일. 그 후로 두 번을 마스크 없이 누군가를 마주했으므로―밥을 함께 먹었다―그들에게 우선 알렸다. 나를 거쳐 누군가에게 옮았다면 물론 큰일이지만, 저 식당에서는 말없이 밥만 먹고 금방 나왔으므로 많이 걱정하지는 않았다. 다만 오늘 저녁을, 내일 낮에 검사를 받고 결과가 나오기까지 꼬박 하루 더를, 집에서 밥을 해 먹어야 한다는 사실이 곤란했다. 요샌 도통 밥할 마음이 생기질 않아서 거의 식당에서만 먹는다. 아침부터 이런저런 일을 하면서도 해 질 녘에야 첫 끼를 먹는 날도 종종 있다.

이튿날 일어나자마자 씻고 보건소를 향했다. 보건소 외에도 진료소 두 곳이 더 있지만 이곳이 제일 가까웠다. 대기실이 보일 즈음 그 앞에 선 누군가가 무어라 말을 걸며 손짓을 했다. 검사를 받으러 왔느냐, 그렇다면 저 뒤로 들어가라. 줄은 길었지만 사람들 사이에 간격을 꽤 두고 있었으므로 수가 많지는 않았다. 여남은 명 쯤 되었을까. 줄을 서 있자니 아까 그와 같은 옷을 입은 사람―같은 사람이었을지도 모르지만, 방역복을 입고 마스크를 쓰고 있었으므로 알 도리가 없었다―이 비닐장갑을 건넸다. 잠시 후 또 같은 옷을 입은 사람이 서류를 들고 다가왔다. 증상이 있는지, 왜 왔는지를 물었다. 흡연 여부도 물었다. 문자 메시지를 받고 왔다고 하자 그가 먼저 식당 이름을 댔다. 그렇게 몇 가지를 기입한 후 그는 서류를 내밀며 인적사항을 쓰라고 했다. 이름과 주민등록 번호, 성별, 주소, 연락처, 직업 정도를 쓴 것 같다. 허위 사실을 적으면 처벌받는다는 문장이 보였다. 웹사이트 회원 가입 할 때 보는 것만큼 자세한―어떤 정보를 수집해 어떤 용도로 쓰며 그것을 몇 년간 보관하는지, 파기 요청은 어떻게 할 수 있는지 등등의―안내는 받지 못했다.

줄이 끝나고 접수대에 이르렀다. 서류를 내밀자 담당자가 명단에 몇 가지를 옮겨 썼다. 다시 서류 하나를 받았던가, 아니면 이름과 일련번호가 붙은 검사키트를 받았던가는 기억나지 않는다. 접수대는 두 곳을 거치게 되어 있었다. 첫 번째 창구에서는 앞에 붙은 안내문을 읽으라고 했다. 먼저 입을 벌리고 그 다음에 콧구멍을 보이라는 말이 적혀 있었다. 증상 여부를 묻고 끝내지 않고 인후를 확인하나 보다 했다. 검사대 앞으로 가는데 아직 소독 중인지 물러서라고 했다. 잠시 후 그 옆 검사대에서 먼저 불렀다. 검사키트―면봉 두 개와 채취를 마친 면봉을 담는 통이었던 것 같다―를 내밀었다. 접수대에서 서류도 받았다면 같이 내밀었을 것이다. 키트를 받아 든 이가 입을 벌리라고 했다. 유리벽인지 아크릴벽인지를 사이에 두고도 잘 보일까, 생각하는 찰나 그가 면봉으로 내 목구멍을 훑었다. 코로 검사한다는 말만, 그나마도 이 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들었었는데. 당황했지만 헛구역질을 하지는 않았다. 다음으로 턱을 들어 콧구멍을 보였고 그가 다른 면봉을 밀어 넣었다. 면봉이 뇌까지 들어가는 기분이라고들 해서 겁먹고 있었으나 그렇지는 않았다. 들어올 것을 알면서도 그저 당황했지만 이번에도 헛구역질을 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무언가 소리는 낸 것 같다. 코에서 면봉을 빼며 그는 잘 하셨어요, 하고 말했다. 왜인지 그 점이 슬펐다.[1]투명한 벽에 난 구멍에 붙은 장갑에 손을 넣은 의료진이 검체를 채취하는 구조다. 초기에 한 명 한 명 검사할 때마다 방역복을 갈아입어야 했던 … Continue reading

검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 왔다. 하루면 결과가 나온다고 들었지만 진료소에 최근 검사량 폭증에 따라 최대 이틀이 걸린다고 적혀 있었으므로 어쩌면 적어도 여섯 끼를 꼬박 지어 먹어야 한다는 사실에 속이 탔다. 한 시간 넘게 뭉그적대다가 조금 늦은 시각에 점심을 해 먹었다. 김치찌개를 끓이려고 부엌에 갔더니 어제 저녁을 먹고는 씻지 않은 냄비가 싱크대에 들어가 있어서 카레를 하기로 했다. 야채를 볶고 강황가루를 꺼내면서야 토마토소스가 없음을 깨달았다. 야채 간장 조림 같은 걸로 대충 메뉴를 바꿀까 잠시 고민했지만 그러기엔 기름을 너무 많이 부은 참이라 밍밍한 카레를 먹기로 했다. 오래 전에 사 둔 레드커리 페이스트(여기에도 토마토소스는 들어있지 않다)가 있는 것이 생각나 조금 섞었다. 얼마 전에 사고는 쓰지 못해 마침 남아 있는 치즈도 조금 넣었다. 못 먹을 맛은 아니었다. 그러고는 또 한참을 누워 있다가 저녁을 하러 부엌에 갔다. 어제저녁에 쓴 냄비와 점심에 쓴 프라이팬이 모두 싱크대에 있었으므로, 다시 누웠다. 또 두어 시간을 그렇게 보낸 후에야 설거지를 하고 김치찌개를 끓였다. 역시 오래전에 사 둔 고등어 통조림을 썼다. 비린내가 났지만 한참 끓이니 가셨다. 그렇게 저녁을 먹었다. 찌개는 세 끼 정도 먹을 분량이었다. 몇 시간 후 즉석밥을 데워 한 끼를 더 먹었다. 남은 찌개는 냉동실에 있다.

또 늦게 잤고, 오늘은 정오가 좀 못 되어 눈을 떴다. 10시 17분자로 문자메시지가 와 있었다. “1월 2일 실시한 △△△님의 코로나19(COVID-19Test) 검사결과는 음성(Negative)입니다. / 마스크착용, 개인위생을 위한 손씻기 강조 // ※이 문자는 검사결과에 대한 정보만을 알려드리며 해외입국자 및 자가격리, 능동감시 / 통보를 따로 받은 경우 안내받으신 수칙을 준수하셔야 합니다.” 나의 접촉자들에게 검사결과를 알리고 샤워를 했다. 원래 두 번 보내는 건지 저 식당 방문자들이 검사를 잘 안 받는 건지 첫 문자와 비슷한 내용의 메시지가 한 번 더 왔다. 이번에는“이미 검사 받으신 분들은 중복해서 받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는 문장과 보건소 운영 시간 안내가 덧붙여져 있었다.

집에 붙어 있지 않고 식당에 다닌 탓으로 이런 일을 겪은 후의 일로는 현명치 않지만, 식사는 나와서 했다. 검검사결과가 정말로 이틀만에 나왔다면, 혹은 양성이 나와서 한참을 더 격리하게 되었다면, 좁은 방에 갇혀 지내는 불편과 불안이 문제가 되었을 것이다. 다행히 그저 밥 몇 끼 해 먹는 문제로 끝났다. 그나마도 오래가지 않았을지 모른다. 배달은 최소화한다는 원칙을 두고 사느라 그런 것이지, 마음만 먹으면 밥은 전화 한 통으로 해결된다. 집에 있는 식재료가 많지 않았지만 그 역시 클릭 몇 번으로 주문할 수 있다. 격리 기간 동안의 돈벌이를 제하면, 나로서는 택배로 살 수 없는 담배 정도가 문제였을 것이다. 당뇨라든가 하는 이유로 아무 음식이나 시켜 먹을 수 없는 사람, 그러나 인터넷을 하지 못해 재료 주문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을 생각했다. 그런 종류의 문제에 대한 안내는 전혀 받지 못했으므로.

References

1 투명한 벽에 난 구멍에 붙은 장갑에 손을 넣은 의료진이 검체를 채취하는 구조다. 초기에 한 명 한 명 검사할 때마다 방역복을 갈아입어야 했던 문제를 해결해 준 어느 의료인의 아이디어. 키가 작거나 휠체어에 앉은 사람을 검사하기는 힘들어 보였다. 나와 같은 시간대에 검사를 받은 이들은 모두 키가 닿았고 검사대에 충분히 붙어설 수 있었으므로 그런 경우 어떻게 하는지는 보지 못했다.

대체 텍스트, 번역, 비평 혹은 패싱의 정치학

대체 텍스트

대체 텍스트(alternative text)
[웹에서] 텍스트 아닌 콘텐츠를 대신하기 위해 제공되는 등가의 텍스트를 의미한다. […] 사용자가 장애 유무 등에 관계 없이 웹사이트에서 제공하는 모든 콘텐츠를 동등하게 인식할 수 있도록 […] 텍스트 아닌 콘텐츠는 그 의미나 용도를 인식할 수 있도록 대체 텍스트를 제공해야 한다.[1]미래창조과학부·국립전파연구원, 『한국형 웹 콘텐트 접근성 지침 2.1』(방송통신표준), 2015년 3월 31일 개정판(KCS.OT-10.0003/R2), 2쪽 및 8쪽.

빠짐 없이 삽입하지는 않지만, 웹에 이미지나 동영상을 올릴 때면 늘 의식한다. 행사 홍보물 같은 것은 비교적 간단하다. 주요 이미지를 설명하고 문자―행사의 제목이나 일시 같은―는 그대로 옮겨 쓴다. 그 정도는 아니라도 정보를 전달하기 위한 이미지의 대체 텍스트 작성은 크게 어렵지 않다. 무엇을 찍은 사진인지, 사진 속 인물은 누구인지 하는 것들을 적는 것으로 일단락된다. 문제는 ‘느낌’이다. 어떤 풍경에서 따스함을 느껴서 찍은 사진이라면, 따스한 느낌의 풍경이라고 적어도 어느 계절 몇 시 경에 어디에서 찍은 하늘에 구름이 몇 개가 떠 있는지를 적어도 마뜩지 않다. 사진 속의 현실과 볼 때의 느낌 혹은 정보에 대한 판단이 일치하지 않는다면 더 어려워진다. 새벽녘에 찍은 하늘이지만 설명 없이 본다면 대다수가 석양이라고 생각할 사진에는 어떤 설명을 붙여야 할까. 자세히 보면 까만 고양이지만 얼핏 보면 그저 검은 덩어리만 보이는 사진이라면. 이런 식의 설명까지를 모두 적는 일이야 어렵지 않지만 착각, 다시 보기, 깨닫기 같은 일련의 과정들은 여전히 재연되지 않는다. 고민하다가 종종, 포기하고 만다.

많은 경우 대체 텍스트는 애초에 제공되지 않으며 제공되는 경우에도 또 많이는 숨겨져 있고 그렇지 않다 해도 보통은 (내가 이미 사진이나 그림으로 얻은 정보의 열화된 버전일 뿐이므로) 자세히 보지 않았다. 남들이 어떻게 쓰는지를 의식하기 시작한 것은 겨우 몇 년 전부터다. 한국 영화를 한국어 자막을 띄워두고 보면서였다. (그보다도 몇 년 전부터, 영어 자막이 달린 영화를 보면서도 같은 것을 보았지만 어째선지 깊이 생각하지는 않았다.) 곳곳에서 어긋났다. 아마도 내가 악기 소리와 선율에 둔하기 때문일 것이다. 대사도 효과음도 없이 고요한 가운데 연주곡이 깔리고 자막으로 ‘긴장되는 음악’, ‘장엄한 음악’ 같은 말이 뜬다. 나는 긴장하지도 장엄함을 느끼지도 않았으므로 의아해진다. 긴장감을 자아내는 상황이므로 아무것도 못 느낀 나나 아무것도 못 들은 누군가에게는 어쩌면 큰 문제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상황과 충돌하는 음악이라면, 혹은 그 음악을 넣은 사람과 그 자막을 단 사람과 그 음악을 듣는 사람과 그 자막을 보는 사람이 모두 다른 것을 느끼고 있다면, 조금 복잡해질 것이다.

두 달여 전에는 ‘장애·비장애 문화예술 동행’이라는 슬로건을 건 행사를 방청했다.[2]서울문화재단 잠실창작스튜디오 주최·주관, “2020 장애·비장애 문화예술 동행프로젝트 〈같이 잇는 가치〉”, 서울: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 … Continue reading 입 모양이 보이게 만든 마스크를 쓴 사회자가 수어통역사 옆에 서서 자기소개를 한다. 이름이며 직함 같은 것들 뒤에 자신의 머리길이나 옷차림을 설명한다. 몇 살 정도로 보이는 사람, 이라는 말도 한 것 같다. 생경하다. 시청각 장애인의 접근성을 고려해 준비된 행사에 참석한 것이 처음이 아님에도 낯선 풍경이다. 아마 그 덕에 나는 한참이 지나고도 그의 차림새를 조금은 기억하고 있다. 보통은 옷차림 같은 것은 신경쓰지 않으므로, 그 후에 참석한 행사들에서 사회자나 발표자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던가는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모두가 이렇지는 않다. 단숨에, 순서 없이, 주어지는 수많은 정보를―그가 스스로 언급한 정보들은 물론 말하지 않은 것들, 예컨대 허리가 꼿꼿한지 혹은 굽어 있는지, 옷에는 주름이 얼마나 져 있는지 같은 것들까지를―무의식적으로 분류하고 선별한다. 나에게서는 생략된 것이 누군가에게는 주요하게 남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주요하게 남은 것이 내게서는 생략될 것이다. “등가”는 (적어도 쉽게는) 달성될 수 없다. (“용도”는 차치하고라도) “의미”는 제시된 후에야 확정된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그의 차림새가 아니라 그것에 대해 그가 한 말을, 그가 무언가 말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

포기된 번역

기본적인 룰 중 하나는 장식―의미와는 무관한 것―에는 대체 텍스트를 제공하지 않는 것이다. 앞에서 인용한 지침을 다시 한 번 인용하자면 “단순히 장식이나 시각적인 형태를 위해 사용되는 콘텐츠의 경우, 보조 기술을 통해 해당 설명을 제공받을 때 오히려 혼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으므로 대체 텍스트로 공백 문자를 제공해야 한다.”[3]9쪽. 보조 기술, 입력된 텍스트를 음성으로 변환해주는 기술을 이용하는 사람―대개 청각 장애인―에게 이것이 혼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는 것, 그러므로 이를 빼는 쪽이 훨씬 효율적이라는 것은 아마도 분명한 사실이다. 책의 매 쪽 아래나 위에 넣어놓은 장식을 전자책 TTS 프로그램이 매번 ‘로코코 풍의 장식적인 선’ 따위로 읽어준다면 얼마나 성가실까. 그러나 어떤 장식들은 느낌과 함께 의미를―혹은 의미에 대한 지침을―담는다는 점을, 어떤 느낌들은 그 자체로 의미가 된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룰은 다소 과하다. 한 쪽을 넘길 때마다 로코코를 운운하면 피곤할 뿐이지만, 첫머리에서 이 책이 로코코 풍으로 꾸며져 있음을 소개한다면, 적어도 어떤 경우에는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 정도조차 아니다. 저 룰 조금 위에는 “특정 감각으로만 제공되는 콘텐츠인 경우 : 플루트 독주나 시각적 예술 작품 등의 경우, 해당 콘텐츠에 대한 간략한 용도를 알려주는 대체 텍스트만으로 충분하다”라고 적혀 있다. (“공백 문자를 제공해야 한다”, “간략한 용도를 알려주는 대체 텍스트만으로 충분하다”는 문장을 접근성 테스트 통과 기준을 서술하는 맥락에서 쓰인 것이다.) [4]같은 쪽. 한국정보통신기술협회, 『한국형 웹 콘텐트 접근성 지침 2.1』(정보통신단체표준), 2013년 12월 18일 개정판(TTAK.OT-10.0003/R2) 역시 (앞에서 인용한 … Continue reading “플루트 독주”나 “시각적 예술 작품”은 느낌이 의미가 되는 영역일 것이다. 느낌은, 그리고 그 출처가 되는 세부 사항은 종종 각자에게 서로 다를 것이므로 쉽지 않은 일이지만 “간략한 용도를 알려주는 대체 텍스트만으로 충분하다”는 말은 시험 통과 최저선을 설명하는 말로서는 너무도 단호하다.

하지만 겸양에서 나오는 단호함이라고 해도 좋겠다. 느낌이니 어쩌니 하는 말들은 성공과 실패를 나누는 데에 끌어들이기는 곤란한 말인데다 그럴싸하게 설명하기조차 어렵다. 능력 밖의 것을 깔끔하게 포기하는 겸양, 저 단호함의 이면에는 그것이 있다고 하자. 섣부른 포기, 귀찮은 일에 대한 섣부른 포기만은 아니다. 여기에는 분명 애초부터 불가능성이 놓여 있다. 불가능한 번역을 포기한 것 뿐이라면, 누구도 이렇다 할 성공을 해내지 못할 일이라면, 섣불렀는지 어땠는지 알 길이 없는 셈이다. 다만 무언가가 포기되었다는 사실만이 분명하다. 내가 종종 포기하는 거기서, 또 다른 누군가도 포기했다는 사실만이 말이다.

번역이라는 행위 자체의 불가능성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궁극적인 불가능성을 확인하거나 믿는 데에는 딱히 관심이 없다. 나는 대개 확인되지 않은 가능성만을 믿는다. 그러나 번역의 가능성, 소통의 가능성 같은 것을 믿기 전에 확인해야 하는 것이 하나 있다. 이를테면 소통에의 의지다. 전한 적 없는 것이 전해지기를 바랄 만큼 녹록지는 못하다.[5]이 문장을 쓰고 떠오른 노래가 제목도 가수도 정확한 가사도 생각나지 않아 한참을 고민했다. 자자(ZAZA)의 〈버스 안에서〉. “넌 너무 이상적이야, 니 … Continue reading 음악이나 시각 예술이 소통에의 의지가 없다고, 무언가를 전하려 하지 않는다고야 할 수 없겠지만 적어도 배타적으로 특정 감각을―그 감각을 가진 사람만을―택했다는 점에서, 어떤 불가능성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시각장애인의 미술, 청각장애인의 음악을 시도하는 이들이 어딘가에서 어떤 성공을 해낸다는 점을 물론 알고는 있다.) 그러므로 이 번역은 번역의 시점에서 포기된 것이 아니다. 애초의 발화 시점에서 번역이, 번역의 가능성 자체가, 적어도 상당 부분, 포기된다. 이런 느낌을 줄 수 있도록 만들어진 선율이라고 혹은 듣는 사람 대부분은 이런 느낌을 받는 선율이라고 말하는 것이 한계로, 분명하게 설정되어 있는, 발화의 시점에.

음악과 미술을 지목했지만, 결과를 두고 말하자면 시각이든 청각이든 하나의 감각만을 택했다고 해서 이것들이 다른 발화들과 특별히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특히 대사가 있는) 영화나 연극 같은 것들은, 혹은 표정과 몸짓과 말씨를 모두 활용하는 어떤 말하기는 복수의 감각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기초적인 번역에 대해 보다 폭넓은 가능성을 갖는 듯하지만, 대개 그 모든 감각을 쓰는 이들의 경험을 전제로 생산되므로, 번역이 딱히 더 용이한 것은 아니다. 글조차도 글자로 읽든 말로 듣든 상관 없는 경험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예컨대 나는 (말보다 글이 익숙한, 어려운 글도 익숙한) 나의 읽기를 기준으로 쓴다. (내용이나 어휘도 종종 그렇지만, 지금은 문장을 구성하는 방식에 대해 한 말이다. 내 경우에 이것은 섣부르고 속편한 포기다.)

번역의 가능성은 그러므로, 적어도 내가 알거나 상상할 수 있는 많은 경우, “등가”를 넘어서는 데에 있다. 발화자가 전하지 않았으면서도 전달된다고 전제한 것들을 짚어냄으로써만 생겨나는 가능성이다. 혹은 발화자가 의식하지 않고 전하는 것들, 수용자가 의식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들을 짚어냄으로써만 생겨난다. 예컨대 영어 문장에 담긴 내용을 한국어로 옮기는 것으로는 완료되지 않는다. 문장에 적혀 있지 않고 것들을, 혹은 적혀 있는 말이 한국어 화자가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일 수 있음을 따로 적지 않고서는 한국어 너머의 영어를 읽을 수 있는 이들에게만 닿을 뿐이다. 본문보다도 길게 수십 개의 각주를 써야 한다는 중압감에 시달린 끝에야 조금이나마 가까워진다.
그러나 그 모든 주석은 나를 거친 것이므로―내가 지어낸 것이므로―어쩌면 온당치 않다.

“안무의 몫”[6]하은빈, 「무용수-되기」(동명의 공연에 대한 드라마투르기의 글), 57쪽, 〈같이 잇는 가치〉 프로그램북, 56-58쪽.

앞에 쓴 행사를 “창작으로의 연대”라는 프로그램이 있는 날에 참석했다. “(감각의 전환을 통한) 새로운 예술창작 방법론 탐구와 시도”라는 부제 아래 〈도착되려 하는 언어들〉(여기는 당연히, 극장 제작, 구자혜 구성·연출)이라는 연극과 〈무용수-되기〉(김원영×프로젝트 이인 제작, 라시내·최기섭 안무·연출)이라는 무용이 상연되었다. 이 중 〈무용수-되기〉는 김원영과 최기섭의 이인무다. 시작은 이본 라이너Yvonne Rainer의 〈트리오 ATrio A〉(1966, 1978)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본 라이너의 몸짓을 김원영이 재연하고 그것을 최기섭이 재연하는, 〈트리오 A〉를 변형한―혹은 번역한―춤. “원영과 같이 해보면서 하체의 움직임은 휠체어의 움직임으로 대체하고, 휠체어를 기동하느라 추가된 움직임은 최대한 본래 안무에서의 상체 움직임과 매끄럽게 연결시키고, 여의치 않은 동작은 삭제하거나 변형시켰다. 그런 다음에는 원영의 동작에 맞춰서 원래 안무를 다시 변형시켜 기섭의 동작으로 만들었다. 원영이 모든 동작을 날리지 않고 정확하게 수행할 수 있도록 템포를 상당히 늦췄다. 원영의 〈트리오 A〉를 원본으로 삼은 기섭의 〈트리오 A〉도 똑같이 느린 템포로 가게 되었다. 라이너의 움직임을 휠체어에 탄 원영의 움직임으로, 이를 다시 기섭의 움직임으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두 사람의 〈트리오 A〉는 분명 〈트리오 A〉이지만 〈트리오 A〉와는 다른 어떤 춤이 되었다.”[7]라시내, 「모든 움직임은 모든 몸에게 열려 있는가」, 웹진 《춤:in》, 2020.12.15. 이후도 대개 같은 구조다. 휠체어 이용 장애인인 김원영이 휠체어에 … Continue reading

무용은 감상자에게는 시각(과 청각)을, 수행자에게는 원활한 몸짓(과 종종 특정한 형태의 몸)을 요구한다. 그 전통과 지위는 강력하므로 지체장애인이 출 수 있는 춤을 만들지 못하는 안무(가)의 실패가 아니라 안무를 해내지 못하는 지체장애인의 실패가―장애가 없더라도, ‘몸치’의―실패가 전면에 놓인다. “간략한 용도를 알려주는 대체 텍스트만으로 충분하다”는 말은 이런 구도 속에서 정당해진다. 힘을 가진 틀 밖에 놓인 이의 실패는, 틀 안에서는 책임지지 않아도 좋다. 몸을 움직이지 못할 것이므로 그 몸을 위한 안무는 불필요하다. 적어 줘도 모를 것이므로 대체 텍스트는 불필요하다. 성사되지 않을 대화를 위한 번역은 불필요하다. 최기섭과 함께 이 공연의 연출과 안무를 맡은 라시내는 〈트리오 A〉를 〈무용수-되기〉로 변형하고 번역한 질문을 이렇게 요약한다. “가능과 불능의 문제인 한계와 달리, […] 몸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의 문제[…인] 역량의 차원에서 정당한 질문은 ‘원영은 라이너의 〈트리오 A〉를 출 수 있는가’가 아니라 (이렇게 답이 뻔한 것은 애초에 어떤 물음이 아니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원영은 그의 한계에 적합하게 새로이 안무된 〈트리오 A〉를 얼마나 잘 출 수 있는가?”[8]라시내, 같은 글.

원영의 몸에 대한 것인 이 질문을 뒤집으면 안무(가)에 대한 질문이 될 것이다. 안무(가)는 과연 그의 몸에 적합한 춤을 고안할 수 있는가? (이것은 우선 능력의 문제나 의지의 문제가 되겠지만 그에 그치지는 않을 것이다. 그가 속한 세계―장애인의 몸에서 불능만을 읽는―가 그에게 무엇을 얼마나 허락하는지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의 책임을 덜기 위해서 이런 말을 덧붙이는 것이 아니라, 그를 비롯해 그 세계를 공유하는 이들이 흔히 갖는 한계를 생각하는 것이다. 능력이나 의지를 발휘해 무언가 해낸다 해도 어떤 면에서는 여전히 그 한계 속에 있을 것이다.) 스스로의 한계 때문이든 부과된 한계 때문이든, 이 공연의 드라마투르기 하은빈의 문장으로 말하자면, “이 몸들 앞에서 안무는 어려움을 겪는다. 계속해서 이 몸들이 계획과 예상으로부터 비껴난다는 점에서, 안무의 노력은 대개 실패로 돌아간다.” 상대를 굴복시키고 통제하지 못하는 안무, 상대에게 아무것도 전하지 못하는 발화 스스로가 실패를 겪는다. 시도되기 전까지는 실패로 명명될 일이 없는 류의 사태다. 실패가 이렇게 뒤집어지면서, 안무에서―번역에서, 대체 텍스트에서―배제되었던 몸들, 실패로서만 독해되어 왔던 몸들이 자리를 바꾸어 새로이 등장한다. “안무의 거듭되는 실패와 몸의 불완전성 속에서, 무용수의 몸은 춤의 근원 없는 근원으로서 비로소 출현[한다. …] 그렇다면 이제 스스로를 끊임없이 수정하고 굴복하는 것은 무용수의 몫이 아니라 안무의 몫이 된다.”[9]두 인용 모두 하은빈, 같은 곳. 이 절의 제목은 이 문장에서 따 온 것이다.

사후적인 개입 이외의 곳에서 번역의 불가능성에―포기의 정당성에―맞설 수 있다면, 이처럼 발화를 구성하는 논리부터를 뒤엎음으로써일 것이다. 좋거나 충분한 대체 텍스트를 쓰기 위해서는, 좋거나 충분한 ‘텍스트 아닌 콘텐츠’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내가 업로드하는 것, 그래서 대체 텍스트를 달지 말지 혹은 어떻게 달지 고민하는 것의 반나마는 내가 찍은 사진이나 내가 그린 그림이나 내가 만든 포스터다. 원본을 충분히 알지 못해서, 원본이 전하고자 하는 바를 충분히 알지 못해서 망설이고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애초에 그 너머를 생각해 본 적이 없기에, 이제 와서 새로이 고민할 열의도 충분치 않기에, 망설이고 포기한다. 이를 테면 ‘나의 몫’을 다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전히 중요한 것은, 내가 만든 것에 달건 남이 만든 것을 옮기며 달건, 주석은 나를 거친 것이라는 사실, 그러니까 원본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나를 거친 주석을 어쩌면 충분히 달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비평 혹은 패싱의 정치학

단숨에 제시되는 이미지와 선형적으로 제시되는 텍스트가 얼마나 가까운 경험을 제시할 수 있을지를 나는 전혀 알지 못한다. (매체의 특수성에 매력을 느끼는 사람조차 아니므로 내게서 이 둘이 그저 멀기만 한 뿐인 데 대해 나는 아무런 정당화도 할 수 없다.) 이미지의 많은 부분을 나는 놓친다. 사람의 차림새도 그렇고 캔버스 한 쪽 구석에 작게 그려진 사물도 그렇다. 문자를 읽을 땐 조금은 덜하지만 여전히 무언가를 뛰어 넘는다. 누군가는 보고 누군가는 읽을 것을 나는, 보고 읽은 후에 잊는 것이 아니라, 못 보고 지나친다. 오디오북을 몇 권인가 들은 적이 있다. 딴짓을 하지 않는 한, 그런 방식으로는 아무것도 놓치지 못한다. 멋대로 넘어가기 쉽지 않으므로 어쩔 수 없이 모든 단어를 듣는다. 잊을 수도 무시할 수도 있지만 듣지 않을 수는 없다. 아무것도 보거나 읽지 않고 듣는 사람들, 혹은 보기보다는 주로 듣는 사람들은 어떨까. 아직 배우지 못했다.

내가 대체 텍스트를 어떤 방식으로 다는지를 통해 많은 것이 드러날 것이다. 이미지 속의 무엇을 골라 명시했는지를 통해서. 어느 선까지는, 많이 달수록 그럴 것이다. 많은 정보를 제공하였으므로 이미지의 많은 것이 드러난다는 말이 아니다. 내가 무엇을 명시할 만한 것으로 생각했는지가, 이 주석이 어떤 나를 거쳐서 나왔는지가 드러난다는 뜻이다. 듣는 사람들이 무엇을 어떻게 듣는지를 모른 채 쓰고 있으므로, 그래서 조악할 것이므로, 더더욱 많은 것이 드러날 것이다. 무엇이 중요한지, 중요한 것을 어떻게 전해야 하는지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는 점이 말이다. 최근에는 비평을 무엇이라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여러 의미에서 딱히 답할 만한 위치에 있지 않으므로 답하지는 않았다. 무얼까, 잠깐 생각만 했다. 비평을 통해 작품이―작품의 의미나 가치 같은 것들이, 비평가가 아닌 이들이 흔히 놓치는 것들이―얼마나 드러날까. 비평을 쓴 이가 투명하게 드러나는 일이 훨씬 많다고 생각했다. 최선의 비평은, 그 작품을 왜 그렇게 보고 듣고 읽고 생각하고 느끼게 되었는지를 잘 밝히는 것, 좋은 자기소개 같은 모습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작품에 대해서 잘 아는 만큼 자신에 대해서도 잘 알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는 패싱passing을 생각했다. 성소수자의 맥락에서 누군가가 사회적으로 어떤 성별로 받아들여지는지를 설명할 때 쓰는 말로서의 패싱은 아마도 그 누군가가 ‘나는 이렇게 패싱된다’고 쓸 때가 가장 적절한 용례일 것이다. 그가 어떤 성별로 받아들여지는지를 충분히 아는 것은 대개는 (순전히, 보통은 오직 그만이 그의 삶을 빠짐없이 관찰한다는 이유로) 그 자신 뿐이니 말이다. 이따금 확장되는 용례는 이런 식이다. ‘(그의 자기정체성이나 법적 성별은 모르겠지만 혹은 그에 대해서는 판단하지 않겠지만) 그는 이러이러하게 패싱되는 사람이다. 혹은 그의 패싱성별은 이것이다.’ 타인의 성별을 함부로 재단하지 않으면서도 무언가를 설명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지만 이것은 대개 거짓말이다. 이렇게 발화된 그의 패싱과 실제 그가 경험하는 것이 같다고 해도 그렇다. 엄격히 말하자면 이렇게 고쳐야 할 것이다. 나는 그를 이런 성별로 본다고, 의식(적으로 판단을 보류)하지 않는 순간에라면 그를 이런 성별로 분류했을 것이라고.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온전히 드러나는 것은 실은 말하는 이의―누군가에게 주석을 다는 이의―틀이다.

뜬금 없이 저런 말을 하는 사람의 한계를 지적하고 싶어진 것은 아니다. 세계가 허락하는 바 속에서, 나 역시 종종 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의 발화―여기서는 말하자면 젠더 표현―가 어떤 번역의 가능성을 차단하는 종류의 것이었느냐고 묻는다면, 그렇지 않다고 답할 것이다. 성별화된 양식들에 모자람 없이 들어맞는 경우라 해도, 그가 의식적으로 그렇게 하고 있는 경우라 해도, 언제나 무언가가 비져나오기 때문이다. 그것이 어떤 발화로서 수행된 이상 그가 그 성별이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그렇게 한 것일 가능성은 배제되지 않는다. 그 가능성이 배제되지 않는다는 것을 내가 아는 한, 그의 패싱성별을 지목하는 나의 행위는 그를 위한 것도 나를 위한 것도 아니다. 그저 나의 발화를 세계의 틀 속에 남겨두기 위한 것일 뿐이다.

결국 애초의 발화에 내포된 번역 불가능성을 운운하는 것은 끝내 정당하지 않게 된다. “혼란”을 주지 않으면서도 “등가”의 무언가를 제공하기 위한 번역은 언제 포기하든 섣부르다. 나는 다만 나를 드러내지 않고 있을 뿐이다. 그래도 되기 때문이다. 아마도 ‘텍스트 아닌 콘텐츠’와 ‘안무’와 ‘성별’이 모두 다르겠지만, ‘대체 텍스트’와 ‘번역’과 ‘비평’과 ‘패싱’이 모두 다르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한 곳에서 만난다. 나에게서. 무언가를 전하고 무언가를 겪고 무언가를 해석하는 나에게서. 거기서 나는 나와 싸우는 중이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싸움을 피하는 중이다.

추기.

이 글을 쓰던 중에 잠시 워드프로세서를 닫고 장애여성공감 극단 춤추는 허리의 〈춤추는 혼잣말〉을 보았다. 온라인 실시간 방송 형식이었고 채팅창이 있었다. 장애여성공감은 채팅창에 이런 공지를 올렸다.

춤추는허리의 첫번째 웹독백극 「춤추는 혼잣말」은 수어와 자막을 제공합니다. 그러나 화면해설과 쉬운 말 해설 등 장애인접근권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관람 후 평가와 의견 주시면 반영하여 접근권 확대를 위해 계속 노력하겠습니다.
[자막 정보] 1. 배우들의 나레이션과 공연 독백은 기울임체로 표시함2. 음악은 음표로 가사는 음표 옆에 표시함

References

1 미래창조과학부·국립전파연구원, 『한국형 웹 콘텐트 접근성 지침 2.1』(방송통신표준), 2015년 3월 31일 개정판(KCS.OT-10.0003/R2), 2쪽 및 8쪽.
2 서울문화재단 잠실창작스튜디오 주최·주관, “2020 장애·비장애 문화예술 동행프로젝트 〈같이 잇는 가치〉”, 서울: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 2020.10.16-11.04. 이 기간 동안 기획전시, 워크숍 등 여러 행사가 열렸다. 나는 10월 16일부터 이틀간 열린 오픈포럼의 둘째날에 방문해 토크 프로그램과 공연을 관람했다.
3 9쪽.
4 같은 쪽. 한국정보통신기술협회, 『한국형 웹 콘텐트 접근성 지침 2.1』(정보통신단체표준), 2013년 12월 18일 개정판(TTAK.OT-10.0003/R2) 역시 (앞에서 인용한 것들을 포함해) 같은 내용으로 되어 있다. 한편 이 둘이 참조하는 월드와이드웹 콘소시엄의 지침 2.0판은 동영상 접근성 평가 기준을 설명하며 “제목, 움직임, 작곡가 등을 비롯해 사용자가 해당 오디오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모든 정보”라는 표현을 쓴다.
5 이 문장을 쓰고 떠오른 노래가 제목도 가수도 정확한 가사도 생각나지 않아 한참을 고민했다. 자자(ZAZA)의 〈버스 안에서〉. “넌 너무 이상적이야, 니 눈빛만 보고 네게 먼저 말 걸어줄 그런 여자는 없어. 나도 마찬가지야, 이렇게.”
6 하은빈, 「무용수-되기」(동명의 공연에 대한 드라마투르기의 글), 57쪽, 〈같이 잇는 가치〉 프로그램북, 56-58쪽.
7 라시내, 「모든 움직임은 모든 몸에게 열려 있는가」, 웹진 《춤:in》, 2020.12.15. 이후도 대개 같은 구조다. 휠체어 이용 장애인인 김원영이 휠체어에 앉아서, 혹은 휠체어에서 내려 두 다리와 두 손으로 몸을 지탱하며, 휠체어와 몸을 이용해 만드는 움직임을 (적어도 춤에 한해서는) 비장애인인 (또한 김원영과는 달리 훈련된 무용수인) 최기섭이 휠체어 없이 소화한다.
8 라시내, 같은 글.
9 두 인용 모두 하은빈, 같은 곳. 이 절의 제목은 이 문장에서 따 온 것이다.

[번역](일본) 비침습적 산전 검사의 보다 나은 모습을 위한 제언

「NIPT의 보다 나은 모습에 관한 제언」

첨부한 글은 일본 산과부인과학회의 비침습적 산전 검사(Non-Invasive Prenatal Test, NIPT) 지침 개정안(2019)에 대해 “NIPT의 보다 나은 모습을 고민하는 모임NIPTのよりよいあり方を考える有志”에서 낸 제언(20.06.17.)과 이들이 얼마 후 연 기자회견(20.06.24.)의 기록을 번역한 것이다. (관련 기사: 쓰게 아즈미, 「‘산전 검사’를 페미니스트 관점으로 이야기하다」 (고주영 옮김)《일다》, 2020.12.20.)


각각의 원문은 아래 페이지에 공개되어 있다.
제언: https://niptpgd.blogspot.com/2020/06/nipt.html
기자회견록: https://niptpgd.blogspot.com/2020/07/blog-post.html

  • 주의
    • 일본어 초급자의 번역이므로 전체적인 얼개를 확인하는 이상의 용도로 사용하지 말 것 . 인용이 필요할 경우 반드시 원문을 확인하고 새로 번역할 것.
    • 특히 기자회견록은 거의 직역만을 한 것으로 대강의 내용을 이해하기에도 용이하지 않음.

  • 일러두기
    • 중절, 타태 등 주요 용어는 뉘앙스에 따라 적절한 한국어로 옮기는 대신 일본어 한자어를 음차하였음.
    • 역자의 삽입은 대괄호로 표시하고, 원어는 첨자로 병기하였음. 각주는 역주임.
    • 제언에서 본문 중에 ‘※’ 기호로 표시된 것은 원문의 주석임.
    • 기자회견록에서 소괄호 속에 표기된 것은 원문의 삽입임.
    • 기자회견록에서 제언을 인용한 문장들의 번역은 제언의 번역과 일치하지 않음.
    • 기자회견록 원문에는 모두 홑낫표로 표시되어 있는 문헌 제목, (제언 등의) 직접 인용, 세간의 말을 정리한 것 등을 번역문에서는 홑낫표, 큰따옴표, 작은따옴표로 구분하여 표시하였음.

[번역]『나의 등이라 불리는 이 다리』 1981년 서문 (체리에 L. 모라가)

Preface, 1981 by Cherríe L. Moraga to This Bridge Called My Back: Writings by Radical Women of Color (expanded and revised third edition) edited by Cherríe L. Moraga and Gloria E. Anzalduá (Berkeley: Third Woman Press, 2002), xliv-li.
주의: 아무것도 확인되지 않은 초벌 번역임.

레즈비언 분리주의 유토피아? 됐어요, 언니들. 매사추세츠 워터타운의 백인 주택지구를 떠나 흑인들의 록스베리로 가는 T라인을 타면 아무것도 아니게 되는 혁명 문건이나 준비하고 있을 수는 없지.

세탁방 (관찰) 일기

아마 깔끔한 성격일 것이다. 공용 빨래건조기의 문을 맨손으로 잡지 않았다. 물티슈를 댔다. (그렇게 습기를 제공하는 것이 실은 오히려 위생에 해가 되는 것은 아니었을까.) 티슈 타입의 섬유유연제인지를 넣는 것 같았는데 내 시야 바깥에 있는 테이블에 올려 둔 통에서 한 번에 한 장씩 뽑아다 넣은 모양이다. 매번 손을 새로 닦았는지도 모른다. 그냥 던져 놓지 않고, 자리를 잡아 펴는 것 같았다. 어쩌면 애초에 물티슈로 건조기 속을 닦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느릿느릿 몇 번을 오가는 사이 세탁이 끝났다.

세탁물을 한 번에 옮기는 데에 쓰는 수레가 따로 있었지만 그것은 쓰지 않았다. 역시 여러 번을 오가며 손으로 빨래를 옮겼다. 중간에 떨어뜨린 무언가 하나는 넣지 않았다. 그걸 줍고는―바닥에 닿지 않은 부분에 손을 댔을 뿐인데도―물티슈로 손을 닦았다. 한참을 걸려 빨래를 옮기고는 건조기 속에 줄을 맞추어 빨래를 폈다. 제일 아래에 쌓는 대신 누운 원통의 벽에 난 턱을 받침 삼아 최대한 넓은 면적에 늘어놓았다. 곧 회전을 시작하면 다 섞일 것이다. 접혔다가 펴졌다가 할 것이다. 건조기는 삼십 분을 돈다. 건조기 문을 열더니 그 속에서 빨래를 개기 시작했다. 보통이라면 수레에 빨래를 담아 테이블로 가서 허리를 펴고 하는 일이다. 역시 천천히, 한참이 걸렸다. 아니, 그랬을 것이다. 끝까지 보지는 못했다. 어느틈에 사라지고 없었다.

아마 깔끔한 성격일 것이다. 모두의 손이 닿는 문 손잡이는 맨손으로 잡지 않는다. 여럿의 빨래가―아마 종종 아직 빨지 않은 빨래도―오르는 수레나 테이블은 쓰지 않는다. 옷가지는 깔끔하게 펴고 갠다. 그렇다면 궁금하다. 여럿의 빨래가 드나드는 이곳의 세탁기나 건조기는 어떤 마음으로 쓰고 있을까. 온수와 세제와 열기로 차는 곳이므로, 세균은 죽고 오물은 씻겨 나갈 것이므로, 괜찮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집에서는 도무지 빨래를 할 수 없어 꾹 참고 쓰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집이 없을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내가 이곳의 세탁기나 건조기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지난 이 년간 세 번째인지 네 번째인지로 동전세탁방에 다녀 왔다. 한번은 길었던 지난 장마에 옷을 말리러 갔고, 나머지는 이불 때문이었다. 손잡이를 잡는 데에 물티슈가 필요한 사람까지야 못 되지만 공용 세탁기가 아무렇지 않은 사람도 못 된다. 세균은 죽고 오물은 씻겨 나갈 것임을 의심치 않지만―정기적으로 관리하므로 물때니 곰팡이니에 있어서도 내 세탁기보다 낫겠지만―아무튼 싫어 한다. 하지만 이 좁은 집에서 이불을 말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므로 (이불을 널 수 있도록 건조대를 활짝 펼 자리가 마땅치 않다) 이따금 세탁방에 간다. 물론 수레나 테이블은 쓰지 않는다.

여름이었으므로 이불이라고 해 봐야 겨우 한 겹짜리 천을 덮었다. 매트리스 커버도 한 겹짜리. 침대는 싱글이다. 겨우 그만큼에 팔천 원―세탁과 건조, 기본 코스가 각각 사천 원이다―을 쓰긴 아쉬워 옷가지 몇 장을 더 주워 넣었다. 아무튼 세탁방이 마뜩지는 않으므로 많이는 아니었다. 세탁기는 보이지 않는 곳에 있어 몰랐다. 텅빈 채 돌아가는 건조기가 호화로웠다. 주워 넣은 것은 생각보다도 더 적어서, 빨래가 끝나고 확인해 보니 겨우 얇은 셔츠 하나, 티셔츠 하나, 바지 하나가 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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