셔틀콕

  페달을 밟아서는 넘을 엄두가 나지 않는 긴 오르막, 뿌옇게 보이는 언덕 너머 하늘을 바라보며 자전거를 끌고 있었다. 시선을 내리자, 평지에서 시작한 완만한 경사가 끝나고 언덕이 가파라지기 시작하는 즈음에서 하얀 물체 하나가 오르락내리락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셔틀콕이었다.
  사람으로 가득한, 차로 가득한 차로와 맞닿은, 버스 정류장에서 누가 배드민턴을 치고 있는 걸까. 신기했다. 사람들 사이를 걸어 그곳에 도착했을 즈음, 하늘로 솟았던 셔틀콕은 다시 한 번 튀어 오르지 못하고 맥없이 땅바닥에 떨어졌다. 셔틀콕을 하늘로 올려 보내고 있던 것은, 사람들이 아니라, 한 사람이었다.
  셔틀콕이 땅에 떨어지던 순간, 그의 라켓은 등 뒤에 있었다. 셔틀콕을 몸 앞뒤로 넘겨 가며 치고 있던 모양이었다. 팔을 등 뒤로 젖힌 편치 않은 자세를 한 그의 표정은 어딘지 모르게 허무해 보였다. 잠시 굳어 있던 몸을 움직이고 허리를 굽혀 셔틀콕을 주운 그는 하던 것을 멈추고 자리를 옮겼다.
  라켓과 셔틀콕을 손에 쥐고 여전히 허무한 표정으로 걷는 그의 뒤로, 신문 가판대가 보였다. 창문도 문도 모두 열린 가판대 안에는 사람이 없었다. 한 평 남짓한 좁은 공간, 버스 정류장 옆 가판대를 지키던 노인이 좁은 방에서 굳어 버린 몸을 풀려 혼자서 배드민턴을 친 모양이었다.
  그가 운동을 멈춘 것은, 예상치 않게 셔틀콕이 땅에 빨리 떨어져 버린 탓이었을까. 아니면, 그것을 바라보던 나의 시선을 느낀 탓이었을까.

거짓말하지 말아야지.

사무실에 가는 길에 누가 말을 걸더라.

"학생, 혹시 전화 한 통만 쓸 수 있어요? 핸드폰 좀 빌려 줘요."

"죄송한데, 지금 배터리가 다 돼서요."

"아, 네."

그리고 잠시 후.

"저기 앞에 경찰서 가시면 아마 전화 쓰실 수 있을 거예요."

"저런 데 가기가 어디 쉽나, 여자가, 이 친구야."

그 사람은 웃으며 말했지만, 마음이 착찹했다. 언젠가 나의 전화를 빌려서는, 냄새가 배도록 침을 튀겨가며 한참을 통화했던 어느 아저씨를 떠올리며 나는 거짓말을 했다. 뻔한 거짓말을 그 역시 알아차렸겠지만 중요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의 마지막 말을 듣고는 후회했다. 이미, 전화기를 건네 주기엔 늦어버린 후의 일이었다.

집시 달구지

  집시 달구지, 라는 말이 떠올랐다. 기억 속에서 떠오른 것은 아니다. 시詩에 대해 생각하던 어느 날, 문득 떠오른 말이었다. 달구지에 시를 모으는 집시, 내 머릿속에는 책이 가득 실린 수레 앞에서 즐거이 웃고 있는 한 사람의 집시가 떠올랐다. 그렇게, 집시처럼, 살고 싶다고 나는 생각했다. 유랑하며, 음악을 즐기며, 자유롭고 즐겁게. 나의 이름이 집시였기를, 나는 바랐다.
  하지만 집시 달구지라는 말도,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이미지도, 결국 어디에도 사용하지 못했다. 그것은 내 이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집시처럼 살고 싶어요, 집시는 멋져요, 라는 말을 하기는 너무도 쉬운 일이었기에, 쉽기만 한 일이었기에, 나는 결국 그 이름을 사용할 수 없었다.
  집시는 영국인들이 붙인 이름이다. 프랑스인들은 같은 사람들을 보헤미안이라고 부른다. 유럽 곳곳에서 그들은 치고이너, 치가니, 히따노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그들이 스스로를 부르는 이름은 롬 또는 돔이다. 하지만 그 이름을 아는 이는 흔치 않다.
  보헤미안, 얼마나 아름다운 이름이던가. 집시라는 이름보다 많은 것이 선명해진다. 자유와 낭만, 예술의 상징 보헤미안. 한 세기 전의 많은 프랑스인들이 흠모해 마지 않았던 이름, 아직까지도 많은 이들의 선망을 받고 있는 그 이름. 나 역시 너무나도 갖고 싶었던 이름이다.
  하지만 흔치 않다. 그들이 자신의 터전인 유럽에서, 소수민족으로서 박해 받으며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흔치 않다. 물론 그들은 자유롭게, 낭만적으로, 예술적으로 살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부의 일일 뿐이다. 외부와의 경계에서 그들은, 차별 속에서 쉽사리 스러지고 있다.
  그래서 나는 그 이름을 내 것으로 삼지 못했다. 그들의 자유와 낭만, 그리고 예술, 그 모든 것을 그 이름 하나로 다 훔쳐 올 수 있지만, 그들의 고통과 그들의 고난, 그들의 삶을 온전히 훔쳐 올 수는 없기에 나는 그 이름을 포기하고 말았다.
  내가 집시로 태어났더라면, 아마 그 이름을 내 길의 가장 앞에 세우고 살았을 것이다. 롬이나 돔, 나의 언어로 된 나의 이름보다도 남들이 붙여 준 집시나 보헤미안 같은 이름을 더 내세웠을 것이다. 그 이름에 박해가 따르기 때문이다. 그 모든 것을 견딘 후에 살아 남은 내 삶으로, 나의 진짜 이름을 내어 놓기 위해 나는 집시라는 이름을 기꺼이 받아들였을 것이다.
  집시로 태어나지는 않았다. 집시로 살겠어요, 그들의 낭만을, 그들의 자유를, 이 척박한 세상에 관철시키고 말겠어요. 부푼 포부를 밝히기는 쉬운 일이지만, 그것이 쉬운 것은 그 이름에 대해 어떠한 박해나 구속도 따라 오지 않기 때문이다. 집시로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 이름을, 감히 쓰지 못했다.
  대신 생각했다. 언젠가, 집시들을 찾아가겠다고. 그들에게 물을 것이다. 얼마동안이 되었든, 함께 다녀도 좋겠느냐고. 그들의 낭만과 자유, 예술을 바로 곁에서 지켜 보면서 나는 또한 그들의 무거운 삶을 지켜 볼 것이다. 그런 다음에 말하고 싶다. 나는 집시를 아노라고, 알기에, 나는 집시가 되고 싶노라고.
  그 전까지는 감히, 세상이 당신을 집시라 욕할지라도 나는 그 이름을 사랑합니다, 집시라는 이름으로 살겠습니다, 이 세상에서 집시라는 말이 담고 있는 의미를 바꾸어 놓겠습니다, 나는 말할 수 없다.

무슨 한이 그렇게 많길래

주의 : 여성, 혼혈인 등을 비하하는 단어가 인용되어 있습니다.

  인종차별금지법 입법 공청회, 한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가득 메우고 앉아 있다. 누군가에게 시집 갔던 어머니가, 남편보다 잘 생긴 자신을 낳아서 쫓겨 나고 말았다는 한 사람이 이야기를 한다. 그것은 농담이다. 그의 어머니가 낳은 것은 남편보다 잘 생긴 아이가 아니라, 백인과의 혼혈인이다. 양공주, 자신의 어머니가 한 때 들었던 말이다. 이 정도면 점잖지요, 경상도에서는 똥갈보, 양갈보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덧붙인다.
  그런 상황에서도 어머니는 저를 잘 키워 주셨습니다. 어머니의 가르침대로, 저와 같은 상황에 처한 아이들의 선배로서, 혼혈인을 위해 운동하고 있습니다. 튀기라는 말을 평생 들으며, 그 말에 싸워 온 사람이다. 튀기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면 그 말 못 씁니다. 사람이 낳은 아이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에요, 당나귀랑 말 사이에서 태어난 새끼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뜻을 알면 못 쓰지만, 써 놓고 몰랐다고 하면, 그걸로 끝입니다.
  선배로서, 후배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절친한 친구와 술을 먹던 한 백인계 한국인은 술 취한 친구에게서 튀기라는 말을 들었다. 친구니까 참았다. 친구는 그치지 않고, 너희 엄마 양공주지, 라고 덧붙였다. 참지 못한 그는 친구를 때렸고 친구는 죽었다. 그가 7년의 징역을 사는 동안 그의 어머니는 자살했다. 출소 후 알콜 중독에 빠져 지내던 그는 겨우 알콜 중독을 치료하고 중국 동포와 결혼해 살고 있다.
  후배들은 많다. 경찰에게 "어이, 튀기 아니야, 어디에서 왔어?"라는 말을 들은 사람이 있다. 주민등록증까지 내어보이며, 한국에서 태어난 한국인이라고 말하지만 소용이 없다. 결국 싸움이 붙고, 경찰은 갈비뼈 대여섯 개를 내어주는 대신 그를 공무원 폭행죄로 끌고 간다. 재판까지를 거쳐서야 겨우 그는 벗어날 수 있었다. 무죄 판결을 내려 준, 바른 판사를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깜둥이, 아프리카로 가라, 는 말을 듣던 16살 아이는 어느 날 백주대로 위의 육교에서 목을 매고 죽었다. 아프리카는 단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는 이였다.
  대학 교수도 알고 있다. 한국인 남성과 결혼이주여성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놀림을 받는다. 깜둥아,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 하지만 그들의 나라는 한국이다.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살았건만, 그들은 돌아가라는 소리를 듣는다. 그것은 사실 사라지라는 소리다. 눈에 거슬리지 말라는 소리다.
  누군가는 고려방망이라는 말을 들으며 중국에서 모진 수모 속에서 살았다. 조국으로 돌아가면, 동포들 사이로 돌아가면 당당하게 살 수 있겠지, 그것이 그의 꿈이었다. 하지만 조국은 그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국적은 내어주었지만, 한국에서 태어난 한국인과 중국에서 태어난 한국인은 같지 않았다. ‘선천적’ 국민들이 갖는 권리와 의무를, ‘후천적’ 국민인 그는 온전히 누리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한이 많은 건 그들만이 아닌가보다. 뼈에 사무치는 슬픔과 아픔은 그들에게만 있는 것은 아닌다 보다. 한국을 사랑하는 노년의 한국인이 일어선다. 필리핀 노동자가 어린 여중생을 칼로 열 세번을 찔렀습니다. 오히려 자국민이 가해를 당하고 있습니다. 뒤에서 누군가가 외친다. 같은 국적, 같은 모습, 같은 나잇대의 사람이다. 이건 자국민에 대한 역차별이야.
  그들은 모르나보다. 한국인이 한국인을 헤친 사건들을 말이다. 자신과 같은 ‘한국인 남성’들이 자신이 울분을 외치게 많은 ‘어린 여중생’을 헤쳤다는 수많은 보도들을 그는 보지 못한 걸까. 자신이 언젠가 훑어 본 어느 여성의 종아리를, 낯모르는 젊은이에게 자신이 내뱉을 반말을, 그는 기억하지 못하는 걸까. 물론 아닐 수도 있다. 그런 일이라고는 해 본 적이 없고, 오로지 남을 위해 살아 온, 나쁜 짓이라곤 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일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 몸서리치는 외국인조차도 알고 있다. 한국인 여성과 서 있다가 어느 한국인 남성으로부터 "냄새 나는 개새끼"라는 말을 들은, 그 남성이 자신의 일행에게 "조선년이 깜둥이랑 연애하니까 좋으냐"고 말하는 것을 본 인도인이 있다. 그는 말한다. I guess many of you can imagine the abusive situation inside the police station especially as it involves a young Korean woman and a middle aged Korean man. In front of 10 or more policemen, Mr. Park continued abusing Ms. Han by repeatedly saying, "You dumb ass, Why are you doing this? Aren’t both of us Korean?"*
  무슨 한이 그렇게 많길래, 그들의 앞에서 그렇게 외칠 수 있을까. 피눈물을 삼키는 이들의 앞에서 내가 피해자라고, 내가 차별받고 있다고, 그들은 어떻게 외칠 수 있을까. 그들을 보는 것은 역겨운 일이다. 싫은 일이라서만은 아니다. 견딜 수 없는 일이다. 견딜 수 없는 괴로움이 멀미가 난다. 그들을 보는 것은 역겨운 일이다.
  ‘Mr. Park’을 경찰서로 데려감으로써 언론을 탄 그는 또 말했다. I feel my circumstance in Korea has taken away one of my basic rights as human being i.e. right to live without fear.** 얼마 전 그는 한 한국인 젊은이로부터 공격을 당했다고 한다. 마침 집 앞이었고, 경비실이 가까이 있었던 덕에 겨우 피할 수 있었지만 그 뒤로는 밤길을 걷는 것이 두렵다고 했다. 자신의 저녁을 송두리째 빼앗겨 버렸다고 그는 말했다.
  무슨 한이 그렇게 많길래, 그렇게 외칠 수 있는 걸까. 이것이 역차별이라고.

*여러분들은 아마 경찰서에서 일어난, 젊은 한국인 여성과 중년 한국인 남성 사이에서 벌어진 폭력적인 상황을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열 명, 혹은 그 이상의 경찰들 앞에서 미스터 박은 미즈 한에게 계속해서 "이 멍청아, 대체 왜 그러냐, 우리 둘 다 한국인이잖아"라라며 괴롭혔습니다.
**나는 한국에서의 주변 환경이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권리 하나를 앗아가버렸다고 느낍니다. 이를 테면, 공포 없이 살 수 있는 권리 같은 것 말입니다.

어쭙잖은 번역이라, 본문에는 원문을 인용했다.

한강변, 자전거

  처음으로 한강변을 따라 자전거를 탔다. 자전거 도로에는 그늘조차 없었지만, 강바람을 맞으며 타는 자전거는 나쁘지 않았다. 강가에는 자전거를 타는 사람도 있었고, 벤치에 앉아서 쉬는 사람도 있었고, 낚시를 즐기는 사람도 있었다. 강물 속에는 아마도 몇 가지의 물고기와 벌레들, 그리고 어쩌면 거북이나 자라 따위가 살고 있었을 것이다. 자전거를 탄 사람과 부딪히지 않는 한, 어느 낚시꾼의 미끼에 걸리지 않는 한, 아마도 그들 모두는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을 것이다.
  그저께 저녁부터 내린 비 때문에 강남역에 두고 온 자전거를 찾아서 사무실로 가는 길이었다. 강남 역에서 차도를 타고 반포 한강 공원으로 들어 간 후 강변을 따라 여의도까지를 달렸다. 여의도에서 다시 차도를 타고 서강대교를 건너 광흥창의 사무실까지 오는 데에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같은 거리의 차도를 달릴 때에 비하면 거의 절반 가까이 단축된 셈이었다.
  얼마 안 되는 시간동안 나는 수많은 자전거들과 마주쳤다. 어디에서 출발해 어디로 가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여의도에서 강남으로 가는 방향의 자전거 도로에는 그야말로 수많은 자전거들이 달리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헬맛과 고글, 그리고 스카프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고 온몸을 뒤덮는 타이즈를 껴 입고 있었다. 몇 몇의 무리들이 지나갔지만, 각각의 무리들은 모두 똑같은 옷들을 맞추어 입고 있었다.
  수십만원 어치의 옷에 또 수십만원, 혹은 수백만원 짜리의 자전거를 갖춘 기백만원의 사람들 뒤로 덤프트럭이 따라왔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 혹은 한강변을 산책하는 사람들을 위한 강변 개발 공사를 위한 차량들은 차도가 없는 그곳을 자전거 도로를 타고 들어왔다. 클락션 한 번 누르지 못하고 깜빡이를 켠채 자전거 뒤를 따르는 덤프트럭들에게서 흔히들 생각하는 ‘도로의 무법자’ 이미지는 도무지 찾을 수 없었다.
  아마도 ‘상부’의 지침일 것이다.운전자들 모두가 그곳이 자전거 도로임을 감안해 서행하고 있는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건설업체, 혹은 서울시에서 자전거 운전자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당부했을 것이다. 어쩌면 크락션 한 번에 몇 만원 하는 식으로 페널티 제도가 시행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유가 무엇이건 간에 덤프트럭들은 처량하리만치 천천히 달렸다.
  평일 대낮, 남들처럼 일하는 대신 한강변을 달리며 여가를 즐기는 사람들의 곁에는 그들이 편히 달릴 도로를 닦는 인부들이 있었다. 그늘조차 없는 길가에서 웃통을 벗어 던진채 땀에 젖은 몸으로 삽질을 하고 시멘트를 나르는 인부들이 있었다. 그들의 한 달 수입 정도는 가볍게 뛰어 넘을 가격의 자전거들 수십대가 줄지어 지나가는 모습을 그들이 뒤에서 치어다 보고 있었다.
  가끔씩 나와 같은 방향으로 타이즈 입은 사람이 자전거를 탈 때면 나는 미친듯이 페달을 밟았다. 무릎과 종아리가 아려왔지만, 타이즈를 뚫고 드러나는 살진 엉덩이를 지켜 보며 강변을 달리고 싶지는 않았다. 도로에서 자전거를 타는 이들이 갖고 있는 경쟁심 따위는 그들에게 없는 걸까, 그들 중 누구도 다시 나를 따라잡지는 않았다.
  어쩌면 그 비싼 자전거를 탄 이들 중 몇 명 쯤은 밤새 일하고 새벽에 조각잠을 잔 뒤 건강을 위해 강변을 달리는 이들일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은 이라 할지라도, 또 다른 몇몇은 평생을 뼈빠지게 일하고 말년에 와서야 겨우 자전거를 타 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어쩌면’일 뿐이다.
  강변을 달리는 것은 그 ‘어쩌면’이 아니라, 눈 앞에 실재하는 기백만원의 자전거들이다. 덤프트럭의 앞을 달리는 것도, 인부들의 옆을 달리는 것도 모두가 그들이다. 나 역시, 마주한 덤프트럭 기사의 눈에, 스쳐 지나간 인부의 눈에 똑같이 비쳤을 것이다. 그곳에서는 나도 그저, 여유로이 강변을 달리는 한가한 사람일 뿐이었을 것이다.
  처음으로 달려본 강변은 너무도 힘들었다. 가파른 오르막도, 질주하는 자동차도 없었지만 강변의 자전거 도로는 전혀 수월하지 않았다. 여유로이 달릴 수 있는 공간조차 내게는 아니었다. 아빠와 세 아이가 나란히 자전거를 타던 어느 가족, 짐을 실은 허름한 자전거를 타던 어느 노인―그들이 아니었다면 나는 아마, 그 길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집을 나서면서, 실수로 헬멧을 두고 온 것은 참 잘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