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를 다녀왔다

대학에 들어 온 후 해마다 광주에 간다. 엉엉 운 적이야 한 번도 없다지만, 해마다 광주에서는 눈물을 흘렸다. 준비되지 않은 죽음을 기꺼이 맞이한 사람들, 기껍지 않은 죽음조차도 피하지 않은 사람들을 떠올리면서는 늘 눈물이 났다. 또한 해마다 광주에서는 분노와 좌절을 함께 느꼈다. 사과하지 않는 사람들, 책임지지 않는 사람들, 보상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삶을 떠올리며 분노했고 그것을 구경하고 기념하는 사람들을 보며 좌절했다.
2009년의 광주는 담담했다. 아니, 2009년의 나는 광주를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늘 어제의 일, 혹은 오늘의 일이었던 광주가 올해에는 30년 전의 일이 되어 있었다. 2009년의 망월동 방문은 문상이라기보다는 제사에 가까웠다. 나는 담담하게 30년 전의 죽음을 기억하고 또 추모했다. 작년까지 하나하나 살폈던 묘비명과 망자들의 역사를 올해에는 보지 않았다. 빠짐없이 찾았던 무명열사의 묘 근처에도 나는 가지 않았다.
구묘역 앞에 새로 생긴 조형물 앞에서 장난스레 팔을 뻗으며 기념사진을 찍는 대학생들을 보았기 때문은 아니었다. 사회당의 참배행렬이, 예약을 했다는 ‘추미애 민주당 의원님의 참배 의식’에 밀려 길을 터주어야 했기 때문도 아니었고,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를 따라 온 수십 명의 검은 양복들 때문도 아니었다.
아마도 그것은, 30 년 전의 죽음을 잊게 할만한 죽음이 지금 내 곁에 너무도 많기 때문일 것이다. 실상 늘 있었던 것이지만 지금 내가 그것을 여실히 느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산 자들을 위해 먼저 죽음을 택한 사람들, 살아 싸우고자 했으나 어이없이 죽음을 맞은 사람들이 지금 내 곁에 너무 많아서 나는, 30년 전의 죽음을 두고 눈물을 흘리지 못했을 것이다.
윤상원 열사의 어머님은 아직 정정하셨다. 작년에 건강이 많이 나빠지셨다는 아버님은 마비 때문인지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고 귀가 잘 안들린다고 하셨지만 목소리만큼은 우렁차셨다. 지팡이를 짚은 할아버지가 30년 전에 죽은 아들 자랑을 하고 또 그걸 잊지 않고 찾아 준 객들에게 고마워 하는 동안 나는 나와서 집 밖을 한 바퀴 돌았다. ‘시대의 등불 윤상원 생가’라고 쓰인 간판이 보였다.
1950년에 태어나 80년 5월 27일, 해방 광주의 마지막 날 세상을 떠났다 한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던 그의 나이는 올해로 예순이었다. 80년 5월, 광주에 있었건만 윤상원이라는 이는 알지 못한다는 어느 사람은  생가를 방문한 후  다시 광주로 향했다. 금남로를 걷겠다고 했다.  연락이 끊어진 5월 광주의 벗들, 그 중 누군가가 뒤에서 자기 이름을 부르며 달려 오는게 소원이라고 그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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