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밖에는 없었다

성폭력 생존자 말하기 대회에 다녀왔다.
스스로를 피해자, 혹은 생존자라고 부르는 몇 명의 사람들이 무대에 올라 자신의 경험과 고민을 이야기하고, 노래하고, 영상을 상영하고, 연극을 상연했다.

누군가가 나오고 들어갈 때, 하나의 이야기나 노래가 끝날 때, 그 때마다 관객들은 박수를 치고 환호를 했다. 멋져요, 하고 외치는 사람도 있었다.
티나지 않게 박수는 쳤지만, 그 이상은 하지 못했다. 집회에서 하듯, 익숙지 않은 목소리로나마 환호성을 지를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것은 나의 방식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멋져요, 힘내세요, 흔히들 뱉는 단어 몇 마디를 입에 담을 수도 있었지만 역시 그러지 않았다. 감히 무어라, 말을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무대에 오른 한 명은, 그냥 안아 주세요, 하고 말했지만, 내 앞에 있는 이를 과연 안아 줄 수 있을지, 그것 역시 잘 모르겠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박수밖에 없었다.

박수 이외의 그 어떠한 것으로도, 나의 지지를 전할 수 없었다.
하지만 물론, 그것은 공연장에서의 이야기다. 나의 공간으로, 나의 집으로 돌아 온 지금은 아마,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것이다. 그럴 것이다.

——성폭력 상담소 블로그에 말하기 대회 후기가 올라 왔기에, 링크를 추가한다.

타이밍이 안 좋았다

  국회 앞에서 농성중인 여성농민회를 찾아 가는 길이었다. 취재하러 가는 것이었지만, 오전 일정이 언제 끝날지 감이 오지 않아서 따로 약속은 잡아 두지 않았다. 어차피 사무실에 가는 길이라, 혹시나 취재를 못 하게 된다 해도 크게 문제는 없었다.
  여의도 역을 지나 여의도 공원에 가까워지자 스피커를 통해 울려 퍼지는 노랫소리가 들렸다. 익숙한 투쟁가의 가락이었다. 공원 앞에는 전국 단위 집회가 있을 때 종종 볼 수 있는, 길게 늘어선 대절 버스 행렬도 있었다. 인턴 교사제 반대 등을 기조로한, 전국 예비교사궐기대회가 있었다.
  어차피 가는 길이니 간단하게라도 기사를 쓰려고 자전거에서 내렸다. 자전거를 한 쪽에 묶어두고 집회 무대 쪽으로 향할 때쯤, 노래 공연 하나가 끝나고 영상 상영이 시작되었다. 티브이 케이블 채널에서 방송되고 있는 롤러코스터-남녀탐구생활이라는 프로그램을 패러디해 임용고사 출신 교사와 인턴 교사를 비교하는 내용이었다.
  남학생 모 씨는 교육대학에 입학해 열심히 공부하고 군대에 다녀오고 교생실습도 하고 임용고사를 통과해 교사가 된다. 마지막 멘트가 압권이다, "역시 교사는 아무나 되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어요". 반면 인턴 교사는 이름부터가 ‘아줌마’. 쇼핑을 하다가 길에서 인턴 교사제에 대한 소식을 주워 듣고는 대충 면접을 준비해 교사가 된다.
 아이들의 질문에 답을 주지 못하고, 수업 시간에 조는 아이들을 제대로 통제-아마도-하지 못하는 모습이 비춰진다. 마침내 학생들은 하나둘 씩 일어나 밖으로 나간다. 교실 밖으로 나가는 문은 사교육 시장과 연결된다. 인턴 교사는 그럴 때에도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 마지막 학생마저 일어나 교실을 나갈 즈음, 인턴 교사는 말한다. "퇴근해야지, 우리 애 학원 보낼 시간이에요."
  나는 인턴 교사제에 반대한다. 교육에 대해 아무 것도 배운 바 없는 이들이 교편을 잡을 수 있게 되는 제도에도, 교사라는 직업 마저 단기 비정규직으로 전락하게 되는 제도에도 나는 반대한다. 하지만 그 영상을 보면서는 도무지 그 ‘예비교사’들을 지지할 수가 없었다. 교육학을 배운다고, 교대에 다닌다고, 누구나가 사람을 가르칠 수 있을 만한 자질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니다. 하필 그 때 도착한 탓에, 나는 하나의 지지를 할 수 없게 되었다.
  영상이 끝나고는 어느 운동 단체 대표가 무대에 올랐다. 자신도 사범대 출신이라는 그는 "아무리 교사의 권위가 떨어졌다고는 해도, 교사가 얼마나 중요한 직업입니까. 백지와도 같은 아이들이 꿈을 꿀 수 있도록 그림을 그리는 직업 아닙니까." 아이들이 백지는 아니겠지만, 그것이 백지이든 혹은 이미 하나의 그림이 있는 종이이든 교사가 그 위에 그림을 그리는 직업임은 사실이다. 그래서 두려웠다, 그런 영상을 만들고, 보고, 박수치는 이들이 과연 어떤 그림을 그릴까.
  집회가 끝나기 전에 농성장으로 움직였다. 4시를 조금 넘긴 시각이었다. 더 늦어지면 저녁 식사 시간과 겹쳐 취재를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바삐 움직였지만, 그조차도 늦었나보다. 농성장에는 아무도 없고, 허수아비만이 바람을 맞고 있었다. 타이밍이 안 좋았다.

셔틀콕

  페달을 밟아서는 넘을 엄두가 나지 않는 긴 오르막, 뿌옇게 보이는 언덕 너머 하늘을 바라보며 자전거를 끌고 있었다. 시선을 내리자, 평지에서 시작한 완만한 경사가 끝나고 언덕이 가파라지기 시작하는 즈음에서 하얀 물체 하나가 오르락내리락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셔틀콕이었다.
  사람으로 가득한, 차로 가득한 차로와 맞닿은, 버스 정류장에서 누가 배드민턴을 치고 있는 걸까. 신기했다. 사람들 사이를 걸어 그곳에 도착했을 즈음, 하늘로 솟았던 셔틀콕은 다시 한 번 튀어 오르지 못하고 맥없이 땅바닥에 떨어졌다. 셔틀콕을 하늘로 올려 보내고 있던 것은, 사람들이 아니라, 한 사람이었다.
  셔틀콕이 땅에 떨어지던 순간, 그의 라켓은 등 뒤에 있었다. 셔틀콕을 몸 앞뒤로 넘겨 가며 치고 있던 모양이었다. 팔을 등 뒤로 젖힌 편치 않은 자세를 한 그의 표정은 어딘지 모르게 허무해 보였다. 잠시 굳어 있던 몸을 움직이고 허리를 굽혀 셔틀콕을 주운 그는 하던 것을 멈추고 자리를 옮겼다.
  라켓과 셔틀콕을 손에 쥐고 여전히 허무한 표정으로 걷는 그의 뒤로, 신문 가판대가 보였다. 창문도 문도 모두 열린 가판대 안에는 사람이 없었다. 한 평 남짓한 좁은 공간, 버스 정류장 옆 가판대를 지키던 노인이 좁은 방에서 굳어 버린 몸을 풀려 혼자서 배드민턴을 친 모양이었다.
  그가 운동을 멈춘 것은, 예상치 않게 셔틀콕이 땅에 빨리 떨어져 버린 탓이었을까. 아니면, 그것을 바라보던 나의 시선을 느낀 탓이었을까.

거짓말하지 말아야지.

사무실에 가는 길에 누가 말을 걸더라.

"학생, 혹시 전화 한 통만 쓸 수 있어요? 핸드폰 좀 빌려 줘요."

"죄송한데, 지금 배터리가 다 돼서요."

"아, 네."

그리고 잠시 후.

"저기 앞에 경찰서 가시면 아마 전화 쓰실 수 있을 거예요."

"저런 데 가기가 어디 쉽나, 여자가, 이 친구야."

그 사람은 웃으며 말했지만, 마음이 착찹했다. 언젠가 나의 전화를 빌려서는, 냄새가 배도록 침을 튀겨가며 한참을 통화했던 어느 아저씨를 떠올리며 나는 거짓말을 했다. 뻔한 거짓말을 그 역시 알아차렸겠지만 중요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의 마지막 말을 듣고는 후회했다. 이미, 전화기를 건네 주기엔 늦어버린 후의 일이었다.

집시 달구지

  집시 달구지, 라는 말이 떠올랐다. 기억 속에서 떠오른 것은 아니다. 시詩에 대해 생각하던 어느 날, 문득 떠오른 말이었다. 달구지에 시를 모으는 집시, 내 머릿속에는 책이 가득 실린 수레 앞에서 즐거이 웃고 있는 한 사람의 집시가 떠올랐다. 그렇게, 집시처럼, 살고 싶다고 나는 생각했다. 유랑하며, 음악을 즐기며, 자유롭고 즐겁게. 나의 이름이 집시였기를, 나는 바랐다.
  하지만 집시 달구지라는 말도,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이미지도, 결국 어디에도 사용하지 못했다. 그것은 내 이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집시처럼 살고 싶어요, 집시는 멋져요, 라는 말을 하기는 너무도 쉬운 일이었기에, 쉽기만 한 일이었기에, 나는 결국 그 이름을 사용할 수 없었다.
  집시는 영국인들이 붙인 이름이다. 프랑스인들은 같은 사람들을 보헤미안이라고 부른다. 유럽 곳곳에서 그들은 치고이너, 치가니, 히따노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그들이 스스로를 부르는 이름은 롬 또는 돔이다. 하지만 그 이름을 아는 이는 흔치 않다.
  보헤미안, 얼마나 아름다운 이름이던가. 집시라는 이름보다 많은 것이 선명해진다. 자유와 낭만, 예술의 상징 보헤미안. 한 세기 전의 많은 프랑스인들이 흠모해 마지 않았던 이름, 아직까지도 많은 이들의 선망을 받고 있는 그 이름. 나 역시 너무나도 갖고 싶었던 이름이다.
  하지만 흔치 않다. 그들이 자신의 터전인 유럽에서, 소수민족으로서 박해 받으며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흔치 않다. 물론 그들은 자유롭게, 낭만적으로, 예술적으로 살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부의 일일 뿐이다. 외부와의 경계에서 그들은, 차별 속에서 쉽사리 스러지고 있다.
  그래서 나는 그 이름을 내 것으로 삼지 못했다. 그들의 자유와 낭만, 그리고 예술, 그 모든 것을 그 이름 하나로 다 훔쳐 올 수 있지만, 그들의 고통과 그들의 고난, 그들의 삶을 온전히 훔쳐 올 수는 없기에 나는 그 이름을 포기하고 말았다.
  내가 집시로 태어났더라면, 아마 그 이름을 내 길의 가장 앞에 세우고 살았을 것이다. 롬이나 돔, 나의 언어로 된 나의 이름보다도 남들이 붙여 준 집시나 보헤미안 같은 이름을 더 내세웠을 것이다. 그 이름에 박해가 따르기 때문이다. 그 모든 것을 견딘 후에 살아 남은 내 삶으로, 나의 진짜 이름을 내어 놓기 위해 나는 집시라는 이름을 기꺼이 받아들였을 것이다.
  집시로 태어나지는 않았다. 집시로 살겠어요, 그들의 낭만을, 그들의 자유를, 이 척박한 세상에 관철시키고 말겠어요. 부푼 포부를 밝히기는 쉬운 일이지만, 그것이 쉬운 것은 그 이름에 대해 어떠한 박해나 구속도 따라 오지 않기 때문이다. 집시로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 이름을, 감히 쓰지 못했다.
  대신 생각했다. 언젠가, 집시들을 찾아가겠다고. 그들에게 물을 것이다. 얼마동안이 되었든, 함께 다녀도 좋겠느냐고. 그들의 낭만과 자유, 예술을 바로 곁에서 지켜 보면서 나는 또한 그들의 무거운 삶을 지켜 볼 것이다. 그런 다음에 말하고 싶다. 나는 집시를 아노라고, 알기에, 나는 집시가 되고 싶노라고.
  그 전까지는 감히, 세상이 당신을 집시라 욕할지라도 나는 그 이름을 사랑합니다, 집시라는 이름으로 살겠습니다, 이 세상에서 집시라는 말이 담고 있는 의미를 바꾸어 놓겠습니다, 나는 말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