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의 첫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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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연시’와 같은 것에 딱히 의미를 두지는 않는데, 하루종일 방 안에만 있었더니 아이러니컬하게도 독특한 날이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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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손님이 오기라도 하지 않으면 보일러는 잘 켜지 않는다. 요 며칠도 계속 보일러를 켜지 않고 살고 있다. 그랬더니 어제 저녁에 주인집에서 창문을 두드리더라. 성가셔서 응대하지 않았는데 계속 두드리길래 마지 못 해 문을 열었더니, 아저씨가 들어 오셔서는 손수 보일러를 켜 주고 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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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손으로 보일러를 다시 껐다. 그러고는 밤을 보내고, 아침에 머리를 감는데 따뜻한 물이 안 나와서 두피가 얼어 버릴 뻔 했다. 평소에는 보일러 켜고 좀 기다려서 감지만, 오늘은 늦잠을 잔 탓에 그럴 틈이 없었다.(그러고 보니 아침에 잠깐 나갔다 왔으니 하루 종일 집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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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에 있는 낙서를 스캔해서 올렸다. ‘집’이라는 글은 분명히 전에 써 뒀던 것 같은데 찾을 수 없어 그냥 새로 썼고, 그림 두 개를 스캔했다. 콘돔 이야기는 올릴까 말까 약간 망설였지만 뭐,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애초에 나랑 콘돔을 같이 사용하는 사람의 허락을 받아 놓은 일이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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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블로그에 갔다가 친구가 올려 놓은 요리 사진들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구수한 냄새가 나더라. 사진이 나의 후각적 기억을 자극한 건가, 라는 생각을 잠깐 했지만 애초에 먹어 본 적도 없는―게다가 재료조차 알 수 없는― 음식들이었으니 그럴 리 없었다. 구수한 냄새는 부엌에서, 국물이 사라져버린 김치찌개 냄비에서 피어 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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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열 시가 훨씬 넘은 시각이라고 생각했는데 웬걸, 이제 겨우 저녁 먹을 시각이다.

지하철

   간만에 탄 지하철은 사람으로 가득하다. 몸은 이미 몇 시간 전부터 안 좋은 상태였다. 울렁거리는 속을 누르며 기둥을 잡고 서 있다가, 휘청거리는 몸을 점점 가누기 어려워져 손잡이까지를 잡았다. 기둥을 잡은 왼손과 손잡이를 잡은 오른손의 모습이 마치 누구를 껴안을 때와 닮았다. 그런 내 앞, 자리에는 어느 여자가 앉아 있다.
   그렇게 양팔에 몸을 의지한 채 잠깐을 버티다가, 포기하고 자리를 옮긴다. 돌아서서 오른손으로 기둥을 잡고, 문 옆 좁은 벽에 등을 기댄다. 편치 않은 자세에 몸은 다시 휘청거리고, 속은 갈수록 안 좋아진다. 앞을 살피지 못하고 서 있었던 원래의 자리에서, 내 앞의 그 여자가 지었을지도 모를 불편한 표정 혹은 불안한 표정이 머릿속을 맴돈다. 속이 더 안 좋아진다.

일주일의 자전거

지난 일주일, 자전거를 좀 무리해서 탔더니 다리가 아프다. 외출할 일이 좀 많았던 탓이다.

11.12 1 녹두>학교>정부중앙청사>홍대입구역>신촌>녹두
11.11 2 녹두>숙대입구역>학교>녹두
11.10 3 녹두>학교>녹두
11.09 4 녹두>마로니에공원>성균관대학교>녹두
11.08 5 녹두>숭실대학교>서울역>공덕오거리>녹두
11.07 3 녹두>학교>녹두
11.06 7 녹두>학교>신촌>녹두

total 171.8km
다리가, 아플만도 하구나, 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이정도면 뭐, 부산도 가볼만 하겠다는 생각도.

  1. 8km
  2. 9km
  3. 2km
  4. 6km
  5. 3km
  6. 2km
  7. 8km

어느 아침

  탁, 밥통 스위치가 올라가는 소리가 들린다. 쌀을 씻어 밥을 안치고 이십 분쯤이 지났다. 아침이라기엔 늦은 시각에 일어났다. ‘평일 오전 아홉시’로 설정되어 있는 알람을 무시하고 계속 잔 터였다. 금요일은 그들에겐 평일이지만, 내게는 유일하게 완전히 하루가 비는 날이다. 물론 고정적인 일정에서의 이야기이고, 오늘조차도 따로 잡힌 일정이 있으니 완전한 휴일은 아니다.
  잠을 깨서 제일 먼저 한 일은 컴퓨터 스위치를 누르는 것이었다. 컴퓨터가 부팅되는 동안 화장실엘 다녀왔다. 컴퓨터가 켜 지면 밀린 리포트를 쓸 요량이었다. 부팅 중의 푸른 화면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배가 고파져 왔고, 나는 부엌으로 향했다. 간만에 카레를 해 먹어야겠다, 는 생각을 하며 냉장고를 열어 양파와 감자, 토마토 소스, 다진 마늘을 꺼낸다.
  팬에 기름을 두르고 다진 마늘을 볶다가 양파와 감자를 볶고, 거기에 토마토 소스를 얹어 또 볶는다. 그 뒤의 레시피는 잘 알지 못해서, 그냥 카레 가루를 넣고 볶다가 물을 붓고 끓인다. 친구가 준 사제私製 카레가루는 시중의 것과는 조금 다른 맛이다. 마침 집에 남아 있던 우유를 조금 넣었더니 맛과 색이 시중의 것과 비슷해졌다. 카레에 우유를 넣어보기는 처음이다.
  카레가 끓는 동안 밥을 안쳤다. 그리고는 싱크대 가득 쌓여 있는 어제의 설거지를 시작했다. 어젠 제대로 된 밥을 먹지 않아서 설거지는 간단했다. 스파게티를 먹었던 접시와, 고구마를 삶았던 냄비가 찜기, 그리고 그것들을 먹느라 쓴 수저들. 늘 그렇듯 세제는 쓰지 않는다. 그래도 요즘은 보일러를 틀어 두고 있어서, 따뜻한 물을 사용할 수 있어 훨씬 수월한 편이다.
  카레는 설거지가 끝날 때쯤 완성되었다. 늘 먹던 붉은 카레보다 훨씬 노란 빛을 띠고 있다. 밥이 다 되려면 좀 시간이 걸릴 것 같아서, 방으로 들어 왔다. ‘대기 모드’로 들어가서 검게 변해 있는 모니터를, 마우스를 흔들어 깨운다. 지인들의 블로그를 둘러 보고, 마지막으로 내 것에 들어온다. 친구들이 남긴 몇 개의 새로운 글이 올라와 있다. 읽으며 피식 웃고는, 답을 잠시 미룬다.
  블로그에는 방문자들의 유입 경로를 알 수 있는 기능이 있다. 검색을 통해 들어 온 것인지 혹은 링크를 통해 들어 온 것인지라든가, 어떤 검색어를 사용했는지 혹은 어디서 링크를 눌렀는지 등을 알 수 있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 들어 온다. 도라에몽이나 불알, 전기곤로 같은 검색어를 통하는 사람도 있고 내 블로그 주소를 통째로 검색해서 들어 온 사람도 있다.
  다녀간 이들의 이름이 남지 않는 것은 참 다행한 일이다. 그들을 의식하지 않을 수 있을 뿐더러, 와 놓고 흔적조차 없는 지인들을 무심타 원망치 않아도 좋으니 말이다. 블로그에는 하루에만도 수십의 사람이 다녀간다. 나는 그들을 전혀 알 수 없다. 길에서 마주친 생면부지의 사람을, 옷차림과 표정만을 겨우 확인하고 흘려보내는 것과 같이 말이다.
  탁, 하는 소리가 들린지 십 분쯤이 지났다. 뜸같은 것이야 들이지 않아도 좋지만, 그 소리가 들리자마자 밥을 먹는 건 못할 짓이다. 가끔씩 찾아오는, 그래야만 하는 순간들은 늘 먹기 위해 사는지 살기 위해 먹는지에 대한 의문을 불러 일으킨다. 먹어야만 살 수 있는, 먹기 위해 아등바등해야만 하는 육신에 대한 혐오를 불러 온다는 뜻이다. 이제 십 분이 지났으니 걱정은 없다. 밥을 먹어야겠다.

반말하지 마세요

  내가 딱히 그런 것은 아니지만, 자전거를 타고 서울의 차도를 달리는 사람들 사이에는 괜한 유대감 같은 것이 있다. 생전 모를 뿐더러 다신 볼 일 없을 사람인데도 스쳐 지나가는 이들끼리 인사를 나누고, 격려를 주고받는 식이다 짐받이의 물건이 떨어질 것 같거나 타이어에 바람이 없어 보이면 그런 것들을 귀띔해 주기도 한다. 그렇게 그들은, 서로에게 말을 건다. 며칠 전에도 어느 아저씨가, 내게 조언을 해 주었다. 위험하게 타지 말라고 말이다.
  서울의 도로에는 맨홀이 많다. 맨홀은 주로, 자전거가 많이 다니는 1차선에 있다. 맨홀 뚜겅은 노면과 같은 높이에 있는 경우도 있지만 5cm 가까이 파여 있는 경우도 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맨홀 위를 달리면 자전거는 흔들린다. 내 것과 같이 싸이클 타입인 경우는 그 흔들림이 더 심하다. 바퀴 폭이 좁아서 충격에 약한 탓이다. 맨홀이 많은 길을 지날 때면 자전거를 좌우로 움직이며 그것들을 피해야 한다.
  며칠 전에도 그런 곳을, 그렇게 지났다. 오른쪽 골목에서 튀어나와 내 앞을 달리던 자전거 한 대를 따라잡은 직후였다. 그런 내 모습이 그에게는 불안해 보였나 보다. 자기 앞에서 좌우로 요동치는 나때문에 한 번쯤 멈칫거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신호에 걸려 인도에 기대 자전거를 세우자 그가 내 옆으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위험하게 타는 건 좋지 않아."
  나는 무슨 말인지 몰라 "네?"하고 되물었다.
  "위험하게 타는 건 좋지 않다고. 일직선으로 쭉 가야지 그렇게 갑자기 들어왔다 나갔다 그러면 안돼."
  "제가 그렇게 탔나요?"
  "그래."
  "아, 네, 죄송합니다."

  내가 ‘위험하게’ 탔다는 것을 깨달은 건 그와의 대화를 끝내고 신호가 바뀌어 다시 페달을 밟기 시작한지 한참이 지나서였다. 내게 위험한 것은 좌우로의 움직임이 아니라 맨홀이었으니 말이다. 나는 그가 내게 했듯 골목에서 갑자기 튀어나오지도 않았고 애매한 속도로 길을 막지도 않았으니, 뭐가 위험하다는 뜻인지를 한 번에 알아차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나나 내 친구들은 아직 그 나이가 되지 않아 잘은 모르겠지만, 아저씨들은 주변사람들에 대한 묘한 유대감을 갖고 있는 것 같다. 길을 가다 갑자기 위아래를 훑으며 한참을 쳐다보거나, 괜히 남의 대화에 끼어들고, 혹은 아무에게나 반말을 내뱉는 것은 아마도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자전거를 타고 가며 내게 말을 걸고 "수고해"라며 격려의 말을 던지는 것도 그런 아저씨들이었다.
  헬멧과 선글라스로 자신을 가리고 내 옆에 서서 기꺼이 조언을 해주신 그 아저씨를 떠올리며 나는 노래를 불렀다. 가사는 기억나지만 곡을 기억하는 것은 무리다. 애초에 내가 흥얼거린 것인지 중얼거린 것인지도 불분명하고 말이지.

♪반말하지 마세요

반말하지 마세요
반말하지 마세요
언제 봤다고
반말을 하세요?

반말하지 마세요
반말하지 마세요

내게 수염이 있었더라도
내게 근육이 있었더라도
내가 한뼘쯤 더 컸더라도
내게 반말하실래요?

반말하지 마세요
반말하지 마세요
다신 볼일 없겠지만
반말하지 마세요
그러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