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무게

삶에는 무게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의 일부는, 피할 수 없이 짊어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누구나 나이를 먹으면서, 자기 몫만큼의 무게는 진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인품이나 업적, 혹은 형편과는 상관없이 그 무거운 삶을 짊어진 것 하나만으로도 그들에게는 최소한의 존경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나를 포함해 학생들 모두가 싫어했던 학교 주사 아저씨에게 늘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교사들은 그를 주임이라 불렀고 학부모들은 그를 소사라고 불렀다. 학생들은 늘, 어떤 별명으로 그를 불렀을 것이다. 불친절하고 괴팍한 그의 성격과 그가 종종 학생들에게 내는 짜증이 그 별명에는 담겨 있었을 것이다.
백발이 성성한 나이가 되도록 한 번도 남의 위에 있어보지 못한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만큼 자신이 져야 하는 삶의 무게들을 그 누구에게도 떠넘기지 못하고 오롯이 혼자서 졌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가 짊어졌을 무거운 삶은 어쩌면, 그보다 많은 삶을 누군가의 위에서 산 사람보다도 훨씬 무거울 것이라 여겼다.
그래서 나는 몇몇 교사들에게 인사하는 대신 그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는 나의 인사에 한 번도 답하지 않았지만 나는 한 번도 빼먹지 않고 그에게 인사했다. 나에게 답하기에는 그의 삶이 너무도 무거웠을 것이라 생각했고, 그가 해 본 인사들은 다들 윗사람을 향한 것이었을 터이기에 내게 적절한 인사를 찾지 못했으리라 여겼다.
하지만 아마 그에게도 누군가 아랫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부인이나 자식이 있었을 수도 있고, 결혼으로 수렴되지 않은 연애 경험이 있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동생이 있었을 수도 있고 나이나 관계에 상관없이 힘이 약해 아랫사람으로 삼은 누군가가 있었을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자신과 함께 일하는 동료나 자신의 앞을 다니는 학생들을 자기 아랫사람으로 여겼을지도 모른다.
요즈음, 삶의 무게가 모두에게 같지 않음을 생각한다. 비록 몰랐던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잘 알았던 일도 아니다. 한 사람의 삶의 무게가 얼마나 쉽게 타인에게 떠넘겨질 수 있는지를, 한 사람의 삶이 타인에 의해 얼마나 쉽게 더 무거워질 수 있는지를 종종 생각한다.
여전히 나는 삶에 무게가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피하려 해도 결국은 피할 수 없는 삶의 무게가 있다고 여전히 나는 생각한다. 누구나가 그것을 지고 있다고, 그것만으로도 사람은 존중받을 자격이 있다고도 생각한다. 하지만 누군가의 삶은 부피가 크면서도 가벼울 것이고 누군가의 삶은 한없이 작으면서도 한없이 무거울 것이다. 삶의 무게에도 있을 밀도를 나는 생각해야 할 것이다.

퀴어 퍼레이드

""""   퀴어 퍼레이드에 다녀왔다. 12시부터라길래 단순무식하게 12시에 맞춰서 갔더니 그때부터 부스를 오픈하고 퍼레이드는 세 시 좀 넘어서 시작하더라. 몸은 좀 축났지만, 즐겁게 잘 보고 왔다. 혼자 간 터라 거진 여섯 시간을 딱히 말도 않고 진짜로 구경만 했다.
   아는 사람들을 몇 보았다. 아는 사람이지만 인사를 하지 않은 사람도 있고, 아는 사람인 것 같긴 한데 긴가민가 하다가 인사를 못한 사람도 있다. 아주 간만에 완전변태 분들을 만나서 인사도 했다.
   사진을 찍으려 무거운 카메라를 굳이 들고 갔었다. 프레스카드도 발급받았다. 그래놓고 정작 사진은 얼마 찍지도 않았다. 프레스 카드를 목에 걸고 카메라를 손에 들 때마다 내가 외부인이 되더라. 그래서 두 어장 찍고는 카메라를 가방에 쑤셔 넣기를 몇 번인가 반복했다.
   무대에 오르는 사람까지도 촬영거부 스티커를 붙이더라. 스티커를 붙이지 않은 사람도 카메라를 의식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내가 외부인이 되기를 감수하고서 취재든 소장이든을 핑계삼아 사진을 찍을 때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긴장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서 안 찍었다. 옆의 사진은, 내 파인더에 들어 온 이들 중에는 유일하게 촬영을 위해 포즈를 잡아 준 사람. 흔들던 피켓을 멈추고 카메라를 보며 웃어 준 사람이다.

길에서 그를 만났다

  길에서 그를 만났다
  언덕을 따라 내 집보다 한 골목 높이 앉은 집에 그는 살았다
  작년 이맘 때 살았던 옥탑방 아래층 문간방에 아들과 같이 살던 그였다
  귀치 않게 생긴 얼굴에 까치집 진 머리로 지금도 같이 살지 모를 그 아들과 계단 난간에서 날마다 담배를 피우던 볕이 잘 들어 더운 방에서 늘 문을 열어놓고 큰 대자로 뻗어 낮잠을 자던 언젠가 한 번 공용 싱크대에 내버려 뒀던 수박 껍질을 치우라고 내 방문을 두드렸던 그를 길에서 만났다
  한 골목 한 골목 철마다 하는 이사로 높아만 지는 내 집보다 한 골목
  더 높은 곳에 앉은 자기네로 들어가는 그에게 인사는 하지 않았지만
  길에서 그를 만났다

광주를 다녀왔다

대학에 들어 온 후 해마다 광주에 간다. 엉엉 운 적이야 한 번도 없다지만, 해마다 광주에서는 눈물을 흘렸다. 준비되지 않은 죽음을 기꺼이 맞이한 사람들, 기껍지 않은 죽음조차도 피하지 않은 사람들을 떠올리면서는 늘 눈물이 났다. 또한 해마다 광주에서는 분노와 좌절을 함께 느꼈다. 사과하지 않는 사람들, 책임지지 않는 사람들, 보상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삶을 떠올리며 분노했고 그것을 구경하고 기념하는 사람들을 보며 좌절했다.
2009년의 광주는 담담했다. 아니, 2009년의 나는 광주를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늘 어제의 일, 혹은 오늘의 일이었던 광주가 올해에는 30년 전의 일이 되어 있었다. 2009년의 망월동 방문은 문상이라기보다는 제사에 가까웠다. 나는 담담하게 30년 전의 죽음을 기억하고 또 추모했다. 작년까지 하나하나 살폈던 묘비명과 망자들의 역사를 올해에는 보지 않았다. 빠짐없이 찾았던 무명열사의 묘 근처에도 나는 가지 않았다.
구묘역 앞에 새로 생긴 조형물 앞에서 장난스레 팔을 뻗으며 기념사진을 찍는 대학생들을 보았기 때문은 아니었다. 사회당의 참배행렬이, 예약을 했다는 ‘추미애 민주당 의원님의 참배 의식’에 밀려 길을 터주어야 했기 때문도 아니었고,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를 따라 온 수십 명의 검은 양복들 때문도 아니었다.
아마도 그것은, 30 년 전의 죽음을 잊게 할만한 죽음이 지금 내 곁에 너무도 많기 때문일 것이다. 실상 늘 있었던 것이지만 지금 내가 그것을 여실히 느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산 자들을 위해 먼저 죽음을 택한 사람들, 살아 싸우고자 했으나 어이없이 죽음을 맞은 사람들이 지금 내 곁에 너무 많아서 나는, 30년 전의 죽음을 두고 눈물을 흘리지 못했을 것이다.
윤상원 열사의 어머님은 아직 정정하셨다. 작년에 건강이 많이 나빠지셨다는 아버님은 마비 때문인지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고 귀가 잘 안들린다고 하셨지만 목소리만큼은 우렁차셨다. 지팡이를 짚은 할아버지가 30년 전에 죽은 아들 자랑을 하고 또 그걸 잊지 않고 찾아 준 객들에게 고마워 하는 동안 나는 나와서 집 밖을 한 바퀴 돌았다. ‘시대의 등불 윤상원 생가’라고 쓰인 간판이 보였다.
1950년에 태어나 80년 5월 27일, 해방 광주의 마지막 날 세상을 떠났다 한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던 그의 나이는 올해로 예순이었다. 80년 5월, 광주에 있었건만 윤상원이라는 이는 알지 못한다는 어느 사람은  생가를 방문한 후  다시 광주로 향했다. 금남로를 걷겠다고 했다.  연락이 끊어진 5월 광주의 벗들, 그 중 누군가가 뒤에서 자기 이름을 부르며 달려 오는게 소원이라고 그는 말했다.

  서점에 갔다. 책을 읽으려고, 소설들이 꽂힌 서가를 뒤졌다. 좋아하는, 혹은 몇 편 쯤의 작품이 나쁘지 않았던 작가들의 책이 줄지어 꽂혀 있었다. 요즘 꽤나 인기를 끌고 있는 젊은 작가들의 책부터, 수십 년 째 문단의 중심, 혹은 그 언저리에 서 있는 작가들의 것까지 책은 많았다. 하지만 그 어느 것에도 손은 가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것이 작가에 대한, 혹은 책에 대한 불신 때문인줄로만 알았다. 어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소설입네 하며 써 놓았을지, 그들의 활자 속에서 어떤 삶이 또 죽어갈지가 두려워 책에 손이 가지 않는 것일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내게 꽤나 신뢰를 쌓은 작가의 책에도, 단 한권의 책으로 나를 사로 잡은 작가의 책에도 손은 가지 않았다.
  겨우겨우 골라 든 것은 김형경 씨의 소설이었다. 두 편을 통틀어 다섯 권이나 되는 책을 읽어 보았고, 그 중 한 편에 대해서는 어떻게는 내 나름의 대답을 글로 써야겠다는 생각까지를 하게 한 작가의 신작 소설이었다. 그의 책이라면, 물론 가슴 아픈 이야기들이 또 있겠지만, 불신하지 않고 역겨워 하지 않으며 읽을 수 있으리란 생각에서였다.
  그 소설에 어떤 이야기가 있는지, 어떤 진실과 어떤 거짓이 있는지는 끝내 확인하지 못했다. 겨우 세 페이지쯤을 읽은 후에 나는 책을 덮고 서점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한 문장 한 문장을 읽을 때마다 머릿속에서 새로운 문장들이 줄지어 나온 탓이었다. 도무지 이야기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소설을 고르지 못한 것은 실은, 내 머릿속에 새로운 이야기를 위한 자리가 남아있지 않기 때문인 모양이었다. 머릿속에서 터져 나오는 문장들 때문에 도무지 책을 읽을 수 없을 것임을, 아마도 내 몸은 먼저 알았던 모양이다. 결국 나는 아무 것도 읽을 수가 없었다.
  두어 달을 쉬며 먹고 자는 일 이외에는 글만 쓰다 시피 하고서 다시 일상적인ㅡ일반적인 생활로 돌아온지가 이제 겨우 보름 남짓인데, 그간 쓰지 못한 문장들이 또 머릿속을 채우고 있다. 그것은 다 받아 쓰기에는 체력도 시간도 부족하니 아마 한동안은 그저 괴로워 할 수밖에 없을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