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人道에서,

강가로 난 인도를 걷고 있었다. 보도步道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험로는 아니었고 훨체어나 유모차를 타고도 지날 수 있을 만한 폭이기도 했지만 보도블럭을 뽑은 자리에 심은 나무들이 몇 미터 간격으로 길의 삼분지이 정도를 막고 있었으므로 그런 것으로 지나기는 힘든 곳이었다. 차도와 접한 쪽으로 간다면 길을 따라 죽 걸을 수 있었지만 강과 접한 쪽으로 간다면 몇 미터에 한 번씩, 나무를 피해 좌우로 몸을 옮겨야 했다.

이따금 강가 쪽으로 붙어 서서 물을 바라봤지만, 대개는 차도에 붙어 장애물 없는 쪽을 걷고 있었다. 시골길이었으므로 달리 다니는 사람은 없었다. 한참을 걸었을 무렵 맞은편에서 오고 있는 한 사람이 보였다. 몇 발짝 앞까지 가까워졌을 즈음 오른쪽으로, 그러니까 강가 쪽으로, 다시 말해 나무와 나무 사이의 공간으로, 나는 몸을 옮겼다. 다음 순간에 우리는 교차했다. 그대로 스쳐 지나지는 않았다. 그가 발을 멈추며 입을 움직였고, 그걸 본 내가 발을 멈추고 이어폰을 빼어 들었기 때문이다.

허리는 많이 굽지 않았고 걷는 속도도 많이 느리지는 않았지만 주름이 깊은 노인이었다. 몇 개쯤 이가 없기 때문이었거나 날이 추운 탓이었을 것이다. 발음은 흐렸다. 비교적 선명하게 들리는 몇 개의 단어와 손가락의 움직임으로 그가 이 길의 좌우에 대해, 그러니까 곧게 걸을 수 있는 쪽과 계속해서 나무를 피해야 하는 쪽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두어 번을 되물었지만 시비가 붙을 만한 일을 하지 않은 나로서는 ― 또한 시비할 것이 아니라면 이런 시점에 말을 거는 낯선 이를, 특히나 늙은 남성을 만나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 쉽게 알아들을 수 없었다.

서너 번쯤 되묻고서야 비로소 얼마간을 알아들었다. 자기 때문에 내가 몸을 옮긴 것이, 걷기 불편한 쪽으로 내 몸을 옮기게 한 것이, 미안하다고 했다. 아마도 그랬던 것 같다.

회복과 양심, 그리고 어떤 믿음

《톰과 제리》는 폭력으로 가득하다. 유혈이 낭자, 한 것은 아니지만 어쩌면 그 이상일 것이다. 치고 받고 던지고 터뜨리고 찌부러뜨린다. 손에 잡히는 모든 것이 무기가 된다. 조리기구나 밀대걸레 정도면 점잖은 편이다. 도끼나 폭탄도 서슴없이 사용한다. 톰과 제리는 혹이 나거나 납작해지거나 부풀어 오르거나 꺾이거나 바스러진다. 물론 아프다. 두렵다. 앞에서 상대가 무기를 집어들면 겁을 먹고 숨거나 눈을 감는다. 하지만 멈추지는 않는다. 복수가 돌아올 것을 알지만 공격한다. 때로는 도발한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이들은 종종 힘을 합치기도 하고 서로에게 애정을 표하기도 한다. 물론 그것은 잠시다. 곧이어 누군가가 다칠 것이다.

상처는 오래 가지 않는다. 혹은 눌러 넣을 수 있다(때로는 다시 튀어나오지만 말이다). 납작해지면 바람을 불어 넣으면 된다. 폭탄이 터져도 털이 좀 그슬릴 뿐이다. 깁스를 하고 목발을 짚을 때도 있지만 (다음 화조차 아니라) 다음 장면이면 모든 것이 멀쩡해질 것이다. 큰 상처를 입고 멈춰서지만, 숨을 가다듬고 장면을 바꾸고 다시 쫓아간다. 막대기로 내려치거나 꼬리에 폭탄을 묶거나 커다란 무언가를 떨어뜨려 깔아뭉개 줄 것이다.

끊임 없이 반복되는 그런 모습을 보며 폭력과 상처와 회복에 대해 생각했다. 물론 아프지만, 자기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을 만큼 무섭지만, 그것이 물러설 이유는 되지 않는다. 거창한 극복이나 다짐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 내게 공격이 가해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두려운 것은 없다. 실패하면 호되게 당할지도 모르지만, 그런 것보단 골탕을 먹이거나 복수하는 기쁨이 더 크다. 아마도 금세 잊을 수 있는 모양이다. 얼마나 아팠는지, 얼마나 무서웠는지를 말이다.

쥐와 고양이지만 어쨌거나 대등한 힘을 가졌기에 가능한 일일 테다. 받은 만큼 돌려줄 수 있으므로, 그러고는 웃고 털어버릴 수 있으므로, 이렇게 당하는 것은 지금 한 순간의 일일 뿐이므로, 가능한 일일 테다. 두려워 하지 않는 것, 공포에 사로잡혀 숨어들지 않는 건, 포기하지 않는 것은 말이다. 이 만화를 벗어나면 대개는 힘이 대등하지 않으므로, 어쩌면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태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이 그저, 불가능한 무언가를 상상해 그린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공격을 주고 받으면서도 한쪽이 기죽지 않는 관계, 라는 것이 실제로 불가능한 것만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어느 정도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릴적 오늘 싸운 친구와 내일 웃으며 놀았던 기억들 같은 것을 통해 말이다. 감정이 금세 변하던 시기였던 것 같다. 기억력이 없었기 때문은 아니다. 지금 당한 어떤 일이, 다음 순간이면 내게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테다. 어린 아이의 주먹에 맞았대 봐야 멍이 들지도 뼈가 부러지지도 않으므로, 뒹굴며 묻은 먼지만 털어버리면, 내 기억 말고는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으므로.

꼭 그런 식으로만 가능한 것은 아니다. 한동안은 통증이 남을 만한 일들조차도 그 통증 이상의 효력은 갖지 못할 때가 종종 있다. 어쨌거나 이것이 그리 오래 갈 일은 아니라는 믿음이 있다면, 통증이 사라질 때쯤이면 역시 모든 흔적이 사라진다. 내가 반격할 수는 없는 상대일지라도 말이다. 이를테면 학교에서 혹은 가정에서 당하는 폭력들 중 어떤 것은 졸업만 하면, 독립만 하면, 과 같은 단서들과 함께 견딜 수 있을 만한 것이 된다. 졸업 날짜가 정해져 있는 학교 혹은 제대 날짜가 정해져 있는 군대와 같은 곳에서 사람들은 이를 갈며 견딘 후에나마 제 삶을 되찾곤 한다.

폭력이란 아프고 두려운 것이지만, 이처럼 그것이 그저 순간의 일임을 알거나 순간의 일이라고 믿을 수 있다면, 그 자체로 삶의 어떤 분기점이 되지는 않을 수 있다. 수없이 두려워 하고 수없이 아파 하면서도 톰과 제리가 변함 없는 일상을 이어갈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아, 그렇다고 이 만화를 만든 이들이 어린 시절이나 학교와 같은 특수한 곳에서의 기억을 토대로 이런 상상에 이르렀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이 만화에서 흑인이 재현되는 방식 같은 것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일정 수준 이상의 안전을 보장 받는 특권층으로서 가능한 상상이었을 것이다.

특정한 인구를 인간적인 삶이라는 기준 바깥으로 내몰지 않고서도, 그러니까 어떤 위험이나 절대적인 침해를 한 쪽에 쏟아 부음으로써 다른 한 쪽을 안전하다고 믿을 수 있게 만드는 것과는 다른 어떤 방식으로, 그런 믿음을 만드는 일도 가능하지 않을까. 소위 제도와 구조로써 보장되는 사회적 안전망 같은 것, 그런 것이 유효한 수준으로 제공된다면, 폭력에 대한 감각은 지금과는 다를 것이다. 차에 치이면 죽을 수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지만 ー 물론 믿음이 무너질 만큼 큰 사고를 겪은 사람을 제외하면 ー 대부분의 사람들은 교통 체계를 믿으며 의식할 만한 두려움 없이 차를 몰거나 찻길 옆의 보도를 다닌다. 그런 식의 감각, 폭력과 상처와 후유증에 대한 공포를 덮을 수 있을 만큼의 안전에 대한 감각이 있을 수 있다면 말이다.

그러나 그런 사회를 아직 만나지 못했으므로, 이런 단절을 믿는 것은 ー 그런 식으로 털고 나아가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새로 진학한 학교나 취업한 직장에서 다시 그를 마주치게 될지도 모르므로, 가정을 독립한다 해도 그가 언제든 내 주소를 알아낼 수 있으므로, 직장을 옮긴다고 해도 이 업계에서 사람들은 대개 연결되어 있으므로, 지금껏 그를 제지한 사람이 없었듯 비슷한 누군가를 만났을 때 또한 아무도 도움을 줄 것 같지 않으므로, 오히려 지금의 상황이 지속되거나 거의 같은 형태로 반복되리라는 상상이 훨씬 설득력 있다. 폭력이 사람을 무력하게 만드는 것은 어쩌면 그것이 너무 강력해서이기보다는 더 자주, 그것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다는 절망감 때문일지도 모른다.

톰과 제리는 치고 받고 하면서도 함께 살지만, 만화적 설정 속에서도 여전히 더 약자인 제리는 (제리는 주먹질로 톰을 날려 버릴 수 있지만 천성상 톰을 잡아먹을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톰은 늘 실패하고 있지만 한 번이라도 성공한다면 제리를 먹어치워 버릴 것이다.) 다른 곳에서의 새로운 삶을 꿈꾼다. 짐을 꾸려 멀리 떠나지만 그곳은 더욱 혹독했고, 제리는 돌아와야 했다. 그만큼 혹독하지는 않은 톰을 보려 안도감을 느껴야 했다. 한 번은 도무지 쥐를 잡지 못하는 톰을 대신할 고양이가 집에 들어온다. 그는 톰보다 강하고 잔인하다. 제리로서는 혼자 살 것이 아니라면 그보다는 톰이 있는 편이 낫다. 톰은 쫓겨나면 갈 곳이 없으므로 어떻게든 그를 쫓아 내야 한다. 톰과 제리가 힘을 합치는 것은 이런 순간이다. 톰과 합심하여 그를 쫓아 내고 제리는, 또 한 번 안도감을 느낀다.

제리는 아프거나 무서울 일 없는 삶을 꿈꾸지만 녹록지가 않다. 덜 아프고 덜 무서운 삶 ー 톰과 쫓고 쫓기는 삶이 그나마 나으므로 안주하는 것, 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영역이 분명히 남는다. 모든 인간이 선의만을 갖고 있으며 실수조차 하지 않는 세계를 상상할 것이 아니라면, 인간도 없고 야생동물도 없으며 독초도 없고 풍수해도 없는 어딘가에 숨어들어서는 영영 나오지 않을 요량이 아니라면, 이를테면 필연적으로 타협해야 한다. ‘그나마 나은’ 어딘가에서 말이다. 이 정도라면 그래도 해 볼만 하다, 라는 생각이 들 정도는 되는 어딘가에서 타협함으로써만 우리는 이 물리적 세계를 살아갈 수 있다. 모든 것이 어떤 관계들 위에서 벌어지는 이 세계를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그런 타협의 단위가 ‘이 세계’ 정도 되는 것 밑으로 떨어지지는 않기를 희망한다. 누구는 맞아서 뼈가 부러졌는데 나는 멍만 든 정도니까 이 정도면 괜찮은 거지, 같은 식의 타협은 아니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더 끔찍한 경험을 하고 돌아와서는 느끼는 제리의 안도감이 아니라, 언제든 다른 곳으로 갈 수 있다는 사실에서 오는 안도감을 바탕으로 삼을 수 있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언제든 떠날 수 있다는 데에서 오는, 이 사건이 저절로 단절되지 않는다면 내가 문을 나섬으로써 단절시킬 수 있다는 데에서 오는 안전에의 감각 위에서 삶이 구성되기를 희망한다는 뜻이다.

대개 물리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안전한 편에 속하는 곳에서 지내 왔지만, 견디기 힘든 공간들에서 지낸 적도 물론 있다. 어떤 곳에서는 곧 이 시간이 끝나고 나는 전혀 다른 곳으로 가게 될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ー 적어도 그 공간에 가 있는 시간을 제외하면 ー 그럭저럭 무탈한 일상을 영위할 수 있었다. 어떤 곳에서는 그런 기약이 없었지만, 인내심이 한계에 달한 순간 미련 없이 그만두었다. 후자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일한 곳이었지만, 그만 두는 순간에 ー 정확히는 상사에게 화를 내고 그럴 거면 그만 두라는 말을 들었던 그 때에 ー 아무 망설임이 없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내가 일상을 꾸리는 데에 필요한 자원은 많지 않고1, 그 정도 수입을 얻을 수 있는 일자리는 언제든 구할 수 있다는 믿음과 경험이 있었던 덕이다. 그 이후로도 지금껏, 이렇다 할 사건조차 없이도 그저 좀 지쳤다 싶으면 일을 그만 두고 한동안을 쉬며 지내고 있다. 오로지 그 믿음과 경험 만으로 말이다.

이제 그런 식으로 하는 일 없이 푼돈을 버는 자리에 들어가기에는 나이나 경력이나 모두 애매한 지위가 되어버려 조금씩 두려움이랄까 불안감이랄까가 생기고 있다. 이런 감정이 조금씩 실체화되다 보면 어쩌면 내 삶은 극적으로 바뀔 것이다. 저축이래봐야 백만 원 남짓, 한두 달 겨우 버틸 돈밖에 없을 때조차도 망설임 없이 일을 그만두곤 했던 시기도 있었지만 이제는 서너 달 버틸 돈은 있어야 일을 그만 둘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조금씩 더 먼 미래를 걱정하며 지내다 보면 언젠가는 일을 그만두지 못하게 될 날이 오고 말 것이다. (몇 년쯤 버틸 돈은 있는 상태, 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는다.) 내일을 걱정하는 맘이 커질수록, 오늘의 작은 상처들 하나하나가 모두 치명적인 것으로 여겨지게 되는 날이 언젠가 올 것이다.2

짧으면 몇 달, 길어야 두 해 정도를 버티고 일을 그만 두기를 반복하는 것은 실제로는 대개 그저 심신의 피로 탓이지만, 가장 두려운 것은 양심을 버려야 하는 순간이 오는 것이다. 피로를 피하기 위해 벌이를 줄이고는 그러다 급해지면 무어라도 하게 되므로 지금도 그다지 양심껏 살고 있지는 못하지만, 조금씩 낮아지는 수준으로나마 지키고자 하는 양심의 선 같은 것이 있다. 예컨대 사기업에 취직하지 않는다거나 가격이 좀 더 비싸더라도 노동환경이 나은 곳의 물건을 산다거나(정확히 말하자면 노동환경이 극악함이 알려진 곳의 물건은 사지 않는 수준이지만) 하는 것들 말이다. 과외로 돈을 벌지는 않는다는 원칙을 조금 물려 글쓰기 이외의 것을 가르치지 않는다는 수준으로 바꾸고 논술학원에서 단기 아르바이트를 했을 때, 굳이 찾아가던 동네 서점을 버리고 몇천 원의 할인을 받기 위해 대형 인터넷 서점에서 책을 사기 시작했을 때 느꼈던 작은 절망들을 토대로 상상해 보건대, 적어도 지금 상상하기로는 십 년째 못 쉬고 일해야 한다는 데에서 오는 절망감보다는 이런 것들을 지키지 못하게 되는 데에서 오는 절망감이 내게는 더 크다.

최근에 무언가 읽다가 정부의 예술작품 지원 제도나 예술인 지원 제도에 대해 생각했다.3 개인 작업이 주가 되는 장르는 다르지만, 연극과 같이 집단적으로 작업하는 경우, 대표자 ー 연극에서는 주로 연출가 ー 개인을 지원하는 방식에 대한 문제 제기가 있었다. 지원금 수혜자로 등록된 이가 다른 이들에게 부당한 요구를 할 때 이를 고발한다면 지원 자체가 취소되고, 부당한 요구를 당했던 이들은 그런 일을 겪은 걸로 모라자 작업할 기회와 그에 따른 수입이 모두 사라지는 상황에 처하게 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그러므로 작품이나 제작 집단 자체를 지원하는 방식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했다. 임금을 체불하거나 물리적, 정신적 폭력을 일삼거나 일은 하지 않고 이름만 걸어 공을 가로채는 대표자를 교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물론 맞는 말이었지만, 그리고 맞는 말이었으므로, 나는 그 다음을 상상했다. 그렇게 갈아치운 대표자도 알고 보니 같은 종류의 인간이었다면, 그런 일이 반복되어 더 이상 누구도 대표로 삼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면, 혹은 그 영역의 예술이나 예술 자체에 대한 애정이 사라져버렸다면, 그 다음에 그들은 어떻게 되는 걸까 하는 상상을 했다. 예술에 종사해 왔다면 저축 따윈 없기 십상인데, 예술 경력을 인정 받아 일자리를 구하기는 쉽지 않을 텐데, 예술을 벗어나면 그나마의 지원조차 받을 기회가 없을 텐데, 그 다음에 그들은 어떻게 되는 걸까 하는 상상을 했다.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마음에 사로잡혀 다르지 않은 삶을 반복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상상.4

부당한 행위들에 상처 입고서 절망에 빠지는 대신 회복에 충분히 투자할 수 있고 언제든 벗어날 수 있으므로 두려울 것 없다는 마음으로 맞서 싸울 수 있기 위한 조건, 양심을 접어두고 꾸역꾸역 사는 대신 언제든 떠날 수 있고 언제든 새로운 공간을 만들 수 있으므로 아쉬울 것 없다는 마음으로 양심을 좇을 수 있기 위한 조건, 으로서의 기본소득을 생각했다. 제리에게 달리 갈 곳이 있었다면, 어느 가난하고 힘없는 예술가에게 지원금에 매달리지 않고 작업할 수 있는 곳이 있었다면, 떠나서 새 삶을 꾸리든 필요한 것들을 챙기며 싸우든 할 수 있었다면, 삶을 달랐으리라고 생각했다.

기본소득이라는 개념은 사회당 당원이었던 때 처음 배웠고 “공화주의”라는 말과 함께 배웠다.5 수사로써든 진심으로써든 경제 구조의 지속을 위한 제도로서의 기본소득을 말하거나 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런 이야기들엔 관심이 가지 않았다. 기본소득을 보장받을 권리, 란 것은 내게는 언제나 참정권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먹고 사느라 바빠서 시사에 관심을 갖거나 투표를 하거나 집회에 나가거나 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아도 좋은 삶, 적극적으로 정치적 의견을 형성하고 표현할 수 있는 삶을 위한 기본조건이었고 따라서 그것은 공화정의 필수조건 같은 것이었다.

고대 그리스 시민들이 스스로를 정치적 존재로 정의할 수 있었던 것이 (적어도 큰 부분) 삶의 필요에 따른 활동들을 노예들에게 전가함으로써 가능했다고 한다면, 조선의 선비들이 옳고 그름을 따지며 살 수 있었던 것이 (역시, 적어도 큰 부분) 다른 활동들을 노비나 평민들에게 전가함으로써 가능했다고 한다면, 그리고 그런 삶의 가치를 믿는 나로서는, 의식주나 의료와 같이 생명의 유지를 위한 활동들을 떠맡는 것은 공화제를 표방하는 국가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정치를 실천하고 옳고 그름을 따진다는 것, 그러니까 자신의 고유한 생각을 가지며 그것을 숨김없이 표현한다는 것 ー 그러니까 내가 기본소득이 보장하기를 바라는 참정권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 양심을 따를 자유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쫓겨나 굶게 되는 일은 없다는 보장 정도로 온전히 실현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서로의 양심이 다르고 개개인의 양심과 제도의 지향이 또한 다르므로, 양심을 지키고 정치적 존재로 산다는 것은 자신이 믿는 것을 위해 때로는 목숨을 거는 일이고 그렇지는 않더라도 종종 여러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다. 위험을 감수할 수 있다는 믿음, 이 위험이 그 자체로 절망적이고 치명적인 것은 아니라는 믿음을, 그리하여 위험을 감수하는 용기를 갖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아마도 바스러지면 붙여주고 꺾이면 펴주며 납작해지면 바람을 불어넣어주는 (그리고, 죽는다면 하다못해 그 죽음을 기억해주는) 존재가 필요할 것이다.

그런 존재들을 어떻게 만들 수 있는지를 나는 알지 못한다. 기껏해야, 하던 일을 멈추고 다가와 붙여주고 펴주고 바람을 불어준다 해도 일자리를 잃고 나락으로 빠지지는 않을 수 있는 방법을, 그러니까 기본소득이든 뭐든 물질적인 사회보장 정도를 알 뿐이다. 내가 그런 존재가 되어 누구 하나에게라도 힘이 되는 것 외에 그런 존재들을 만들 방법은 알지 못하므로, 그러나 내가 그리 했을 때 당장 내일을 굶게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 또한 갖지 못하였으므로, 또한 그러나 여전히 나는 그것을 바라므로, 폭력과 상처와 회복에 대한 남들과는 조금은 다른 감각을 가져보는 것, 그것이 얼마나 가능하고 유효한지를 스스로 실험해 보는 것, 그 정도 외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가끔 생각한다. 뜻한 적 없이 태어나 원한 적 없는 일을 하며 부지하는 이 생에, 다른 그 무엇이 ー 어쩌면 죽음마저도 ー 내게 치명적일 수 있을까. 실은 폭력 없는 삶을 상상하지 못하기 때문일는지도 모른다. 폭력 이후의 삶만을 생각하는 것, 막힘 없이 나아가는 삶이 아니라 걸리고 쓰러져도 멈추지 않고 나아가는 삶만을 생각하는 것은 말이다. 물론, 폭력으로 가득한 ‘삶’을 상상할 수 있는 것은 삶을 불가능하게 하는 종류의 폭력을 겪은 적 없는 덕분이지만.

  1. “다행인지 불행인지”라고 쓴 것은, 지금으로서는 물질적 욕망이 크지 않은 이 상태가 마음에 들지만, 어쩌면 그것은 천성으로 인한 것도 혹은 자발적인 욕망의 재배치를 통한 것도 아니며 그저 어린 시절을 풍족하지 못하게 지내며 욕망의 가능성 자체가 줄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2. 지금으로서는 이런 정도의 두려움은 겪지 않는다. 유학을 할 마음은 없어도 해외에서 한두 해 쯤 살아보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그만큼의 돈을 모으지는 않는데, 그것은 일 년치 생활비만 갖고 떠나서 일 년을 살다 올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어딘가에서의 일 년치 생활비와 귀국 후의 서너 달을 버틸 돈까지만 모으면 시도할 수 있는 일이지만, 그런 식으로 떠났다가 해외에서 병에 걸리거나 사고가 난다거나 해 예상치 못한 큰 지출이 생기면 치명적이(라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사고가 났을 때를 위한 준비는 지금도 전혀 되어있지 않고 돈을 벌 수 없을 수준의 상처를 입는다면 이곳에서도 난감해지기는 마찬가지지만, 한국에서는 막연히나마 가질 수 있는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마음을 해외에서도 유지할 자신은 없다. 내가 지금 가진 잠재적 자원은 모두가 한국에서만 작으나마의 쓸모를 갖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3. 지난 두 해 동안 나 또한 예술인이라는 명목으로 서울시의 지원금을 받았으나, 아니 받았기에 더욱, 이런 제도 자체가 이상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아래에 적을 이유 때문은 아니다.
  4. 내 경우를 가지고 말해보자면 그것은 마음에 없는 글을 쓰게 되는 상황에 대한 상상이다. 그간 지원금을 받은 것은 젊은 비평가, 쯤 되는 명목으로였다. ‘젊은’이라는 수식어가 떨어진 후에도 지원금을 받거나 청탁을 받거나 하려면 비평 실적이 있어야 할 텐데 그럴 수 있는 지면은 많지 않으므로 창작자가 도록이든 프로그램북이든에 싣기 위해 하는 청탁들을 많이 받아야 한다. 싫은 작업에 대해 안 좋은 말을 쓰거나 아예 거절해 댔다가는 금세 청탁이 끊어질 것이므로 나는 맘에도 없는 아부를 써야 하거나 이 일을 포기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름 없는 비평가가 다른 곳에서 자리를 구하거나 스스로 유지가능한 지면을 만들 수 있으리란 보장은 없으므로 나는 갈등해야 할 것이다. 물론 나는 이 지원금이 끊겼을 때에 청탁 받은 글의 원고료로 생활할 수 있는 기반 같은 것은 만들지 못했으므로 그다지 쓸모 없는 상상이지만.
  5. “사회적 공화주의”와 “기본소득” 모두 당론이었던 것 같은데, 사실 제대로 무언가 읽어보거나 하지는 않았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

섹슈얼리티, 재생산, 기독교 ― 이런 것들에 대해 생각하다가 기독교의 인간상에 대해 잠깐 고민했다. 먼저 떠올린 것은 창세기 1장 27절의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였다.1 그 다음으로 떠올린 것이 기도문에 흔히 등장하는 “우리가 주님을 닮게 하시고”라는 말. 나는 물론 기독교의 인격신에 대해 이렇다 할 믿음이나 기대를 갖고 있지 않지만, 저 말이 이 종교에 ― 정확히는 이 종교를 믿는 이들과 내가 한 세상을 사는 데에 ― 어떤 가능성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저 신의 속성으로 이야기되는 것들이 몇 가지 있다. 절대적인 진리를 소유하며, 전지전능하고, 물리적 한계 없이 편재하며, 어쩌고 저쩌고 하는 것들. (저 종교 안에서조차 저 모든 속성을 인간이 지니려 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은 일이라는 합의는 있는 듯하므로) 그런 신의 어떤 측면을 인간이 닮을 수 있을까, 저 신의 어떤 측면을 닮고자 할 때 이 종교가 인간의 것일 수 있을까, 이런 생각들을 하게 된다. 선택지가 많지는 않아. 신이 읊는 절대진리를 들을 수는 있을지언정 스스로 알 수는 없어 보이므로, 온갖 자연법칙들에 묶여 있음을 이미 잘 알고 있으므로, 남는 것은 사랑 정도일 것이다.

믿음, 소망, 사랑이라는 세 가지 말을 알고 있으면서 사랑만을 언급하는 것은 저 신은 자기 바깥의 어떤 신을 믿지 않으므로, 또한 저 신은 자신이 실천할 수 없는 무언가를 소망하지 않으므로, 사랑밖에는 남지 않는 탓이다. 그러니까 실은, 사랑보다는 “유일한 존재”라는 속성을 먼저 생각했던 것이다. 세상 그 누구와도 같지 않은 존재, 세상에 단 하나인 존재로서의 그 신을 생각했다. 물론 모든 것을 다 갖는 존재로서의 신이므로 그런 신이 둘이 된다면 그 둘은 같은 존재요 하나인 존재가 되겠지만 다행히 우리는 인간이므로, 모든 것을 다 갖고 있지 않으며 또한 서로 다른 몸까지를 갖고 있으므로, 신이 되지 않고서도 닮을 수 있는 신의 형상이라면 그것은 우리 각자가 “유일한 존재”라는 사실이리라 생각했다.

이 땅에 신의 왕국을 세울 수 있다면 그것은 신의 뜻을 좇지 않는 존재들을 ― 비유적으로건 실질적으로건 ― 죽여 없애는 방식이 아니라, 각자의 이 ‘유일함’을, 서로간의 ‘다름’을 지키는 방식으로만 가능한 것이 아닐까. 서로 다르며 그 중 누구 하나도 다른 누구보다 우월하지 않다는 전제 위에서, 그러니까 그 평등한 다름을 부정하는 행위가 아니라면 그 어떤 일도 쉽사리 부정할 수 없다는 전제 위에서, 오직 그 위에서만 가능해 보인다.

내게 시급하거나 필요한 고민이 아니므로 여기까지만 생각하고 멈추었는데, 어제 길에서 만난 사람 덕에 다시 생각을 시작했다. 작은 책자와 “성경”을 내밀며 내게 말을 청한 그는 인간이 신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 것 같으냐고 물었다. 글쎄요, 하고 말았더니 그가 이은 말은 ‘서로 닮았기에 교제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의 관심사는 신과 인간의 교제였겠지만, 그 스스로도 예로 삼았듯 인간과 개가 아니라 인간과 인간이 닮았기에 인간과 인간이 교제할 수 있다. 저 신을 믿는 세계관 아래에서, 그 신과 인간의 닮음을 믿는 세계관 아래에서, 인간의 능력이란 다름아닌 ― 그러니까, 일방적인 지배나 정복이 아닌 ― 이 “교제”의 능력일 것이다. 서로 닮았기에 가능한, 그러나 또한 동시에 서로 다르기에 가능한 교제, 말이다.

*

그는 그 닮음을 저버리는 것, 그 교제를 포기하는 것을 “죄”라고 불렀다. 여전히 그의 관심은 인간과 신의 교제에 있었으므로, 이 죄라는 것은 신의 명령을 듣지 않는 것이었지만 ― 그는 예레미야서 2장 13절의 “내 백성이 두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라는 말을 근거로 들었다 ― 말이다. 자신을 따르라 명하고 그러지 않으면 응징하는 신이라면 내게는 역시 쓸모가 없지만, 나는 그에 대해 지켜야 할 도리가 없으므로 저 “생수의 근원되는 나”라는 말을 멋대로 “나”에게서 비롯된 다름에 대한 것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교제할 수 있는 존재임을 생각지 않고 타인에 대한 통제와 억압이라는 마른 구덩이를 파는 죄에 대한 말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하고 며칠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기독교인으로서 임신중지를 생각하며 “하나님이 주신 생명일 수 있는데” 하는 생각을 먼저 하게 된다는 이가 있었다.2 이처럼, 명령하고 응징하는 신의 이면에 베풀고 축복하는 신이 있다. 원죄original sin의 서사에 맞서, 원복original blessing의 서사를 수립할 근거를 제공하는 신이 있는 것이다. 어떤 인간 생명을 신의 선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 인간 생명에 내포하는 다름의 가능성, 차이의 가능성 또한 선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얼마든지3 전환할 수 있으리라는 이야기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받지 않기로 하는, 나의 가능성을 포함해서 말이다.

그저 의구심에 지나지 않으므로 굳이 말하진 않았던 것이 있다. 태아가, 혹은 신생아가 신이 내린 선물이라면, 한때 태아였고 한때 신생아였던 다른 이들의 삶은 무엇일까. 특정한 생명만이 선물로서 받아들여지는 ― 혹은 적어도 보다 더 소중한 선물로서 받아들여지는 ― 데에는 가족이니 민족이니 하는 소위 혈통 중심의 이익공동체 개념 밖에도 한 가지 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신이 ‘나’를 축복한다는 생각. 어떤 존재가 신의 선물이라면, 그것은 누구에게 온 선물인가? 나의 몸을 거쳐 나에게 온 선물이라고 한다면, 그 맞은편에는 자신의 몸으로 어떤 존재를 낳지 못한, 그러니까 축복 받지 못하였으며 어쩌면 저주 받은 누군가가 있게 될 것이다. 빛과 어둠을, 뭍과 물을, 풀과 나무를, 짐승과 인간을, 이 모든 것을 보고 똑같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신이 이런 방식으로 축복하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가 축복하는 상대가 있다면 그것은 나나 네가 아니라 나와 네가 함께 머무는 이 세상인 것은 아닐까.4 나의 태중에 온 존재가 선물이라면 다른 이의 태를 거쳐 내 곁에 당도한 이 또한 선물일 테다. 아쉽게도 나는 몸을 하나밖에 갖지 못하였으므로 두 선물을 모두 온전히 즐기지는 못할 터이나, 어느 쪽에 마음을 기울이든 그것은 그의 선물을 기쁘게 받는 일이 될 것이다. 인간이 신의 형상을 따라 교제하는 존재로 만들어졌다면, 그리고 그 신은 세상 만물을 보고 똑같이 좋아한다면, 우리 또한 누구와의 관계인지에 상관 없이 기뻐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온 신, 예수. 예수의 탄생을 예언한 이사야 9장 6절은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라는 말로 시작한다.5 ‘아기가 났다’는 말을, 그리고 ‘우리에게’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인간은 누구나 아기로 태어나므로 저 말에 그가 인간이라는 사실 이상의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찾아 왔던 세 사람의 이방인을, 예수가 함께 하고자 했던 이방인들 ― 그러니까, 유대민족이 아닌 모든 이들 ― 을, 그리고 이방인으로서의 예수를 만났던 모든 이들을 생각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어떤 아기가 우리에게 온다면, 혹은 어딘가의 아기였던 이방인이 우리에게 온다면, 그것은 우리의 재산으로서 오는 것은 아닐 테다. 우리의 친구로서, 이미 서로 다른 우리와 또 다른 새로운 존재로서, 우리와 교제할 이로서, 우리에게 온다고 믿는 편이 나을 것이다. 신이 선물한 이 세상을 신의 형상 속에서 서로 교제하며 살지 않는, 그야말로 이방인이 될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1. 여기까지만 떠올렸는데, 인용하려고 원문을 찾아보니 그 뒤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라는 말이 이어진다. 최초에 만든 것이 남자와 여자 둘이었다, 는 뜻으로 이해하건 성적으로 분화된 동물적 형상을 또한 담았다, 는 말로 이해하건 나에게는 아무 상관이 없으므로 ― 언제까지나 남자와 여자만 있으리라는 말은 없으므로 ― 일단 넘어가기로. 이하에서 『성경』의 번역은 개역개정을 따랐다.
  2. 믿는페미와 무지개예수가 주최한 〈교회×낙태죄 : 배틀그라운드 저자와 함께하는 북토크〉 자리에서 쪽지로 접수 받은 질문 중에 “기독교 신자로서 낙태를 선택해야 하는 당사자가 됐을 때 가장 먼저 생각하게 되는 지점이 ‘하나님이 주신 생명일 수 있는데’, 이것입니다. 이런 부분에서 죄책감과 고민이 생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적인 부분에서 어떤 선택이 옳을까요?”라는 것이 있었다. 성공회 신부 자캐오가 대표로 답했고 믿는페미 활동가 달밤과 『배틀그라운드』 공저자 나영이 말을 더했다. “원복” 개념은 매튜 폭스Matthew Fox의 것이라고 하는데 자캐오의 말에서 따온 것이며, 축복으로서의 임신과 대비되는 저주로서의 유산이나 불임에 대한 이야기는 나영의 말에서 따온 것이다.
  3. 물론 나는 삶을 선물보다는 저주로 받아들이는 편이므로 이 “얼마든지”라는 것을 아주 힘주어 말하지는 못한다. 나는 그저 이 저주 속에서도 작은 가능성이나마 찾아보려, 그 가능성이나마 즐겨보려 애쓰는 사람에 불과하다.
  4. 필연적인 연결로 여기지 않으며 그가 이런 관점의 선상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나, ‘나에게 직접 내려지는 축복’이라는 생각이 모종의 선민사상이 되는 것은 쉬운 일이리라는 의심 또한 갖고 있다.
  5. 나는 이 문장을, 그리고 아래에 쓴 이 문장을 읽는 태도를 한나 아렌트의 책을 통해 배웠다. 그 흔적은, 이 글의 다른 부분들에도 묻어 있다.

비누라는 단어에 대한 잡담

나는 멍하게 있을 때면 제외하면 읽고 쓰거나 듣고 말하지 않을 때에도 대개 속으로 무언가 문장을 떠올리고 있는 편인데, 오늘은 설거지를 하며 ‘그릇을 씻을 땐 겉부터 헹군다, 비눗물이 안쪽 면에 묻을 수도 있으니까’라는 생각을 했다.

설거지 세제를 푼 물을 비눗물이라고 하는 것이, ‘설거지용 비누’ 같은 말이 어색하다는 생각을 하다가 비누의 어원이 궁금해졌다. 딱히 유럽에서 온 말처럼 생기지는 않았는데 ‘양잿물’ 같은 말을 생각해 보면 오래 전부터 한국어에서 쓰이던 말도 아닌 것 같고, 까지 생각한 후 사전을 뒤졌다.

국립국어원의 표준한국어대사전이 제공하는 어원정보는 【<비노<박언>】이다.1 “비노”라는 단어가 쓰였다는 “박언”이라는 책은 1677년에 12인의 역관이 함께 저술한, 한국어 주가 붙은 중국어 학습 교재 『박통사언해朴通事諺解』다.2

이 책의 306쪽(三○六면)에는 “行者ㅣ 듯고 여 나와 大王을 블러 비노 잇냐 날을 주어 머리 게 라”(행자가 듣고 뛰어 나와 대왕을 불러 [말하기를] ‘비노 있느냐, 나에게 주어 머리를 감[는 데에 쓰]게 하라’)라는 말이 있다.3 무려 1677년에 이미 비누에 해당하는 한국어 표현이 있었던 것이다.

그 이전의 어형은 밝혀진 것이 없는 듯하다. 날 비飛 자에 더러울 누陋 자를 쓰던 것이라 여긴 이도 있었던 모양인데, 정작 『박통사언해』에 실린 저 한국어 문장의 중국어 표현에 쓰인 것은 肥棗다.4 『조선시대 의궤용어사전』에 따르면, 오히려 飛陋가 한국어의 비노를 차자표기한 것이라고 한다.5

그래서 이제 비누가 꽤 오래 묵은 한국어인 것은 알겠는데, 그럼 왜 양비누가 아니라 양잿물이란 말이 쓰인 것인가 하는 크나큰 의문이 남았다. 『조선시대 의궤용어사전』에 따르면 (의궤에 쓰인 표기로) 飛陋는 “직물의 세탁에 쓰이는 곡물 가루”를 뜻했다고 하며, 당시에는 “대체로 면, 마직물의 세탁에는 잿물을 쓰고, 명주와 같은 귀중한 직물을 빨 때는 콩·팥·녹두 등을 갈아 빨래에 비벼서 썼”다고 하니 조선시대에 쓰인 세제로는 (적어도) 잿물과 비누 두 가지가 있었던 모양이다.

수산화나트륨, 혹은 그것의 수용액이 곡물가루보다는 잿물을 먼저 떠올리게 했나보다. 이제 이어지는 궁금증은, 그럼 왜 곡물세제를 가리키던 비누라는 말은 그대로 잊혀지지 않고 되돌아와 양잿물을 대체했는가 하는 것인데… (양잿물은 말 그대로 물이므로, 이 말로써 고체비누를 가리키려 했다면 양재였어야 했을 것이라는 점이 뒤늦게 떠올랐다. 양석감, 같은 것도 가능했을까.)

1921년에 발행된 신문에도 화학식 고체비누(로 추정되는 무언가)를 가리키는 말로 “비누”가 사용되고 있다. (이와 함께 석감石鹼이라는 단어가 쓰이는데, 글자 그대로는 돌(처럼 굳힌)잿물을 가리키는 이 말은 원래는 “쑥이나 여뀌 등의 풀을 태운 재에서 추출한 잿물에 밀가루 등을 섞어서 가공하여 만든 고형물”을 뜻했으며 그것은 약재로도 쓰이고 양치, 기름떼 제거 등에도 쓰인 모양이다.6) 역시 비누라는 말을 쓰면서 석감이라고 부연한 1934년 기사에는 “예전 같으면 [세수에 쓸] 비누라고 하면 팟[=팥]비누밖에는 없엇고”라는 말이 나오는데, “예전”이라는 게 필자가 어렸을 때 정도쯤이니까 저런 말을 썼으려니 싶으면서도 한국전쟁 휴전 후에 출생한 베이비붐 세대가 늙어서는 젊은이들에게 전쟁도 안 겪어봐서 운운하는 꼴을 생각하니 그렇지만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7

이 정도 정보를 갖고서야, 고체비누엔 석감이란 단어를 빌어 쓰고 비누라는 단어는 서서히 잊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으므로, 나는 여전히 크나큰 궁금증을 품은 상태.

  1. http://stdweb2.korean.go.kr/search/View.jsp?idx=156723.
  2. 고려말부터 읽힌 『박통사』에서 1765년 간행된 『박통사신석언해朴通事新釋諺解』에 이르는 역사에 대해서는 http://kostma.korea.ac.kr/dir/viewIf?uci=RIKS+CRMA+KSM-WO.1765.0000-20150331.OGURA_186 을 참조.
  3. 원문은 http://waks.aks.ac.kr/rsh/dir/rview.aspx?rshID=AKS-2011-AAA-2101&callType=dir&dirRsh=&dataID=06_300@AKS-2011-AAA-2101_DES. 생략한 부분에 당승唐僧이라는 말이 있는 것을 보면 저 행자는 길 가던 사람이 아니라 불교의 수행자일 듯하긴 한데, 저 부분만 잘라 읽은 것이라 무슨 상황인지는 모르겠다. 애초에 대왕은 진짜 왕인가?
  4. 사실 잘 안 보여서 모르겠지만 찍었다. 살찔 비, 대추 조인데 대추 조는 하인 조皂와 발음이 유사하다(당시엔 같았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모르는 일이다). 살찔 비, 하인 조를 쓰는 肥皂는 무환자無患子 나무 열매의 육질 부분을 뜻하던 단어로, 중국에서는 이것을 갈아 빨래에 썼던 모양이다. 肥皂는 현대 중국어에서도 비누를 뜻하며, 『박통사신석언해』 54 번째 페이지(http://waks.aks.ac.kr/rsh/dir/rview.aspx?rshID=AKS-2011-AAA-2101&callType=dir&dirRsh=&dataID=12_289@AKS-2011-AAA-2101_DES)에 있는 같은 예문에는 이 단어가 쓰였다. 또한 두 책 모두 정확히는 肥 자와는 한 획이 다른 글자를 썼다. 사전의 이체자 목록에서 찾지는 못했지만 같은 글자이려니…
  5. http://waks.aks.ac.kr/dir/achieveView.aspx?dataID=FND_DIC_UIG_UGYS_0685@AKS-2007-HZ-2003_DIC.
  6. http://www.koreantk.com/ktkp2014/dictionary/dictionary-detail-view.view?dicCd=K0013584http://www.koreantk.com/ktkp2014/medicine/medicine-view.view?medCd=M0001925 참조.
  7. 읽은 기사들의 출전을 정확히 밝히지 않은 것은 비누라는 단어를 설명하는 글이 아니어서이기도 하지만 저 글들이 호명하는 독자가 “부인”과 “여학생”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고 그런 내용들이다.

용산참사 10주기

2009년 1월 20일. 이제 곧 10주기를 맞는다. 새벽에 있었던 일에 대해, 아마도 당시 소속돼 있던 단체의 사무국에서 보낸 문자메시지를 받았거나 뉴스를 보고 알았을 것이다. 너댓 시쯤에나 현장에 도착했던 것 같다.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먼저 온 이들이 경찰과 싸워 얻어낸 좁은 공간에 분향소를 설치하고 있었다. 방금에야 겨우 자리를 얻었는지, 절을 할 자리를 만들기 위해 바닥에 흩어진 화재의 잔해를 쓸고 있었다.

전투경찰이 가득한 건물을 둘러 싼 천조각에 사람들이 꽂아 둔 국화들이 보였다. “살려고 올라갔는데 죽어서 내려왔다”, “살릴 수도 있었다. 진압이 아닌 구조였다면…” 같은 문장을 쓴 피켓들이 눈에 들어왔다. “살인 진압 규탄한다” 같은 것들도 있었을 테다.

고인들을 추모하고 서울시와 건설사 ― 삼성과 포스코 ― 를 규탄하는 짧은 집회를 했을 것이다. 그리고는 행진을 시작했다. 앞에서 이끈 이들에게는 목적지가 있었을 테지만 잘 기억나지 않는다. 경찰과 밀고 밀린 끝에 어느덧 명동성당 앞에 도착했다.

기약 없이 밀고 밀릴 수만은 없다고 생각한 누가 있었을 것이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보도블럭을 집어 던지기 시작했다. 경찰은 방패로 막았다. 길에 떨어진 것을 시위하는 이들을 향해 되던지기도 했다. 아마도 갑자기 무력 진압이 시작되었다. 돌에 맞거나 곤봉에 맞아 다친 사람들이 있었다. 주인을 잃은 안경들이 길에 굴러다녔다.

이후로 남일당 앞에서도, 고인들이 시신을 안치했던 순천향대학병원 앞에서도 숱하게 집회를 했을 것이다. 1주기를 며칠 남기고서야 겨우 장례를 치렀다. 장례식에는 가지 못했고, 1주기 추모 집회에 갔다. 마석 모란 공원에도 갔었는데, 시신을 안치할 때 갔던 건지 이후에 갔던 건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남일당 일대의 건물들을 점거하고 꾸린 대책위 사무실이나 몇몇 작가들의 작업실에도 갔었고, 근처에 문을 열었던 레아 호프에도 갔었다. 일단의 정리를 맞고 나서 수 년간 방치되었던 남일당 터에도 갔었다.

2012년 여름이었던 모양이다. 무슨 날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남일당 터 앞에서 작은 집회가 있었다. 마이크를 잡은 대책위 활동가는 울먹이는 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 외쳤다, 고 써야 할지도 모르겠다. “여기가 남일당이 있던 자리 맞나요? 여기가 남일당이 있던 자리 맞나요? 남일당이… 어디 갔죠?” 잘 잊히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