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탁방 (관찰) 일기

아마 깔끔한 성격일 것이다. 공용 빨래건조기의 문을 맨손으로 잡지 않았다. 물티슈를 댔다. (그렇게 습기를 제공하는 것이 실은 오히려 위생에 해가 되는 것은 아니었을까.) 티슈 타입의 섬유유연제인지를 넣는 것 같았는데 내 시야 바깥에 있는 테이블에 올려 둔 통에서 한 번에 한 장씩 뽑아다 넣은 모양이다. 매번 손을 새로 닦았는지도 모른다. 그냥 던져 놓지 않고, 자리를 잡아 펴는 것 같았다. 어쩌면 애초에 물티슈로 건조기 속을 닦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느릿느릿 몇 번을 오가는 사이 세탁이 끝났다.

세탁물을 한 번에 옮기는 데에 쓰는 수레가 따로 있었지만 그것은 쓰지 않았다. 역시 여러 번을 오가며 손으로 빨래를 옮겼다. 중간에 떨어뜨린 무언가 하나는 넣지 않았다. 그걸 줍고는―바닥에 닿지 않은 부분에 손을 댔을 뿐인데도―물티슈로 손을 닦았다. 한참을 걸려 빨래를 옮기고는 건조기 속에 줄을 맞추어 빨래를 폈다. 제일 아래에 쌓는 대신 누운 원통의 벽에 난 턱을 받침 삼아 최대한 넓은 면적에 늘어놓았다. 곧 회전을 시작하면 다 섞일 것이다. 접혔다가 펴졌다가 할 것이다. 건조기는 삼십 분을 돈다. 건조기 문을 열더니 그 속에서 빨래를 개기 시작했다. 보통이라면 수레에 빨래를 담아 테이블로 가서 허리를 펴고 하는 일이다. 역시 천천히, 한참이 걸렸다. 아니, 그랬을 것이다. 끝까지 보지는 못했다. 어느틈에 사라지고 없었다.

아마 깔끔한 성격일 것이다. 모두의 손이 닿는 문 손잡이는 맨손으로 잡지 않는다. 여럿의 빨래가―아마 종종 아직 빨지 않은 빨래도―오르는 수레나 테이블은 쓰지 않는다. 옷가지는 깔끔하게 펴고 갠다. 그렇다면 궁금하다. 여럿의 빨래가 드나드는 이곳의 세탁기나 건조기는 어떤 마음으로 쓰고 있을까. 온수와 세제와 열기로 차는 곳이므로, 세균은 죽고 오물은 씻겨 나갈 것이므로, 괜찮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집에서는 도무지 빨래를 할 수 없어 꾹 참고 쓰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집이 없을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내가 이곳의 세탁기나 건조기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지난 이 년간 세 번째인지 네 번째인지로 동전세탁방에 다녀 왔다. 한번은 길었던 지난 장마에 옷을 말리러 갔고, 나머지는 이불 때문이었다. 손잡이를 잡는 데에 물티슈가 필요한 사람까지야 못 되지만 공용 세탁기가 아무렇지 않은 사람도 못 된다. 세균은 죽고 오물은 씻겨 나갈 것임을 의심치 않지만―정기적으로 관리하므로 물때니 곰팡이니에 있어서도 내 세탁기보다 낫겠지만―아무튼 싫어 한다. 하지만 이 좁은 집에서 이불을 말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므로 (이불을 널 수 있도록 건조대를 활짝 펼 자리가 마땅치 않다) 이따금 세탁방에 간다. 물론 수레나 테이블은 쓰지 않는다.

여름이었으므로 이불이라고 해 봐야 겨우 한 겹짜리 천을 덮었다. 매트리스 커버도 한 겹짜리. 침대는 싱글이다. 겨우 그만큼에 팔천 원―세탁과 건조, 기본 코스가 각각 사천 원이다―을 쓰긴 아쉬워 옷가지 몇 장을 더 주워 넣었다. 아무튼 세탁방이 마뜩지는 않으므로 많이는 아니었다. 세탁기는 보이지 않는 곳에 있어 몰랐다. 텅빈 채 돌아가는 건조기가 호화로웠다. 주워 넣은 것은 생각보다도 더 적어서, 빨래가 끝나고 확인해 보니 겨우 얇은 셔츠 하나, 티셔츠 하나, 바지 하나가 다였다.

형법 ‘낙태죄’ 개정안의 원칙과 편의 ― 단순한 비/논리들

‘낙태죄’를 ‘현행과 같음’으로 계속 유지하겠다는 것은 임신중지를 정당한 의료서비스로서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임신중지를 결정한 사람과 임신중지를 돕는 모든 사람들을 당장에 현행법을 피할 수는 있을지라도 계속해서 잠재적 범죄자로 만들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것이다.

최예훈, 「’낙태죄’ 개정안 ‘현행과 같음’에 대한 단상」

0.

“형법(1995. 12. 29. 법률 제5057호로 개정된 것) 제269조 제1항, 제270조 제1항 중 ‘의사’에 관한 부분은 모두 헌법에 합치되지 아니한다.” 2019년 4월 11일 헌법재판소가 2017헌바127 형법 제260조 제1항 등 위헌소원 사건에 내린 주문이다. 그리고 며칠 전 정부는 이 둘 모두를 그대로 유지하는 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임신 14주 이내에 의사에 의하여 의학적으로 인정된 방법으로 이루어진 때에는 처벌하지 아니한다”, “임신 24주 이내에 의사에 의하여 의학적으로 인정된 방법으로 이루어지고 [… 강간 등으로 인한 임신, 혈족 또는 인척 간의 임신, 임신 당사자의 건강을 심각하게 해치고 있거나 그럴 가능성이 있는 임신, 사회경제적 사유로 임신 당사자를 심각한 곤경에 처하게 하고 있거나 그럴 가능성이 있는 임신의 경우 중] 하나에 해당하는 때에는 처벌하지 아니한다”는 조항을 (대개는 현행모자보건법 14조의 위법성 조각사유에서 옮겨 와) 추가했을 뿐이다. 이 개정안에 따르면 ‘의사에 의하지 않고’ “부녀가 약물 기타 방법으로 낙태한 때에는” 여전히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는 처벌 조항이 효력을 갖는다.1

1.

법의 역할이 원칙을 선언하는 것이라면―형법은 죄로 규정되어야 마땅한 행위들과 그에 합당한 처벌 범위를 지정하고 검찰과 법원은 이 원칙 내에서 개별 사건에 대한 세부적인 판단을 내린다―이 개정안은 아무리 많은 이들이 ‘낙태’를 행한다 해도, 그들에 대한 처벌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거나 무의미하다 해도, 그것은 죄로 천명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고수하기 위해 이런 형태를 띤 것이라 해도 좋을 테다. 개정안이 신설 조항에서는 “임신한 여성”이라는 표현을 쓰면서도 기존 조항은 “부녀”조차 고치지 않고 두는 것은 다분히 상징적이다.

원칙을 정하는 것은 법이 포기할 수 없는 역할이므로 어떤 이들은 이것이 현실적이고 합리적이면서도 옳은 결정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내게 이 개정안은 원칙의 파기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형법 제269조 1항이 헌법에 위배된다는 헌재의 판결을 무시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최예훈의 지적대로, 여기서 “‘낙태’는 ‘죄’이면서 동시에 ‘의사에 의하여’” 행해져야 한다는 점에서 “의사에게도 모순적”이다.2 임신중지는 죄이지만 당사자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시혜적인 관점에서의 불벌이라면 당사자 스스로 해결하거나 하다못해 국가가 개입할 일이지 별개의 사인인 의사에게 죄를 행할 역할을 부과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는 그저 저 범죄행위에 가담한 이가 의사라면 벌을 면해 준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는 없다. 정부는 “약사법 개정을 통해 형법과 모자보건법에서 허용하는 의약품에 대해 낙태 암시 문구나 도안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하고, […] 이에 따라 자연유산유도 의약품 허가를 신청받고 필요한 경우 허가 신청을 위한 사전상담도 추진”한다. 벌받지 않는 범죄를 용이하게 하는 조치들이다. 또한 이 영역에서 의사의 역할을 크게 잡는 논리는 단 하나, 임신한 여성의 건강과 안전이다. 당연하게도 이는 중요한 문제이며 보건의료 서비스로서 임신중지를 의료 전문가에게 맡기는 것은 아마 필요한 일일 것이다.3 그러나 의료 전문가가 아닌 이가 함부로 타인의 몸에 해를 가하는 경우가 아닌, 스스로의 건강에 해를 가하는 일을 막기 위해 당사자를 처벌한다는 것 역시 수없이 지적되어 온 대로 어불성설이다.

이런 복잡한 사정들 속에서, 나는 아무런 원칙도 읽어낼 수 없다. 직접 하면 처벌 받지만 타인에게 의뢰하면 벌을 면하는 죄, 게다가 범행을 국가가 지원하는 죄의 영역을 둘 수 있는 논리적 원칙을 상상할 능력이 내게는 없다.

2.

개정안에 따르면, 임신 14주는 넘겼고 24주에는 이르지 않은 시점에서 사회경제적 사유로 임신중지를 처벌받지 않으려면 “임신한 여성이 모자보건법에서 정한 상담을 받고, 그 때부터 24시간이 경과하여야 한다.” 정당한 사유의 기준을 설정하고 증명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모자보건법에서 정한 상담 절차에 따라 임신의 지속, 출산 및 양육에 과한 충분한 정보를 제공받고 숙고 끝에 임신을 지속할 수 없다는 자기 결정에 이른 경우에는 [… 상당한] 사유가 있는 것으로 추정한다.” 임신중지를 죄로 규정하면서도 상담소 방문과 24시간의 ‘숙려’, 그리고 자기진술만으로―실질적인 ‘심사’나 ‘평가’ 없이―벌을 면제한다니 그야말로 관대한 예외라고밖에는 할 수 없다. 이 역시 원칙과는 거리가 먼 일이다. 하지만 원칙이 무색해질 만큼 관대하다는 뜻이 아니다. 이것은 법이 원칙을 선언할 자격이 있다는 원칙 자체를 약화시킨다. 당사자의 판단에 대한 의심―그것도 여성만을 선택해 가해지는 의심―은 근본적인 원칙을 부정한다. 이 역시 수없이 지적되어 온 문제다.

대의민주제든 직접민주제든 내가 아는 한 보통선거의 원칙은 핵심요소다. 법을 만드는 권위와 법을 집행하는 권위가 모두 그로부터 나온다. 여기에는 전제가 있다. 모든 주권자는 스스로 판단할 능력이 있다는 것, 혹은 주권자의 무능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 공적인 판단에서건 사적인 판단에서건 개개인이 최선의 판단을 하고 있다는 것은 민주주의라는 개념 자체를 부정하지 않고서는 부정할 수 없는 단순한 전제다. 민주주의적 정치의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을 형식적인 전제일 뿐 아니라 평등한 토론과 협의를 위한 상호존중을 가능케 할 실용적인 전제이기도 하다. 국가가 사인들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사인끼리에서조차도, 최선의 판단을 요구하는 것은―지금의 판단을 부정하는 것은―그러한 전제와 원칙을 무너뜨리는 일이다.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최선의 판단이 용이할 상황을 만드는 일이며 또한 그것이 유일하게 허용되는 일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저 대목에서 해야 하거나 할 수 있는 일은 국가가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지 제공받을 의무를 부과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감히 ‘충분한’이라는 말을 쓰려면, 적어도 이 맥락에서 직접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모든 것을 언급하는 성의 정도는 있어야 할 것이다. 임신을 중지하겠다는 판단을 불신할 테라면 “임신의 지속, 출산 및 양육에 관한 충분한 정보”를 토대로 내리는 “임신을 지속할 수 없다는 자기 결정”을 인정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임신의 중지에 대한 정보만은 충분히 갖고 있으리라는 전제가 있는 것이다. 효과는 두 가지다. “임신의 지속, 출산 및 양육”이 얼마나 ‘좋은’ 일인지를 국가의 언어로 떠벌일 기회가 확보된다. 임신중지에 따른 부작용이든 후회든에 대한 책임은 온전히 “자기 결정”에 돌려진다.

당연하게도 임신중지의 악영향에 대한 정보를 제공받을 의무를 추가하는 것이 아니라 제공받을 의무 자체를, 그것도 특정한 정보만을 제공받을 의무를 삭제하는 것이 원칙에 맞는 일이다. 국가가 정보를 제공할 의무는 여전히 남는다. 이 정보를 통해 임신의 지속과 출산과 양육을 장려하고자 하는 국가의 욕망이 쉽게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최소한 주권자의 판단을 신뢰한다는 원칙을 아는 국가라면, ‘멋모르고 임신을 중지하려 드는 주권자가 모르고 있을 것이 분명한’ 정보를 제공하는 대신 그들이 판단을 돌이킬 만큼 새로운 정보를―새로운 여건들을―만들어 내는 데에 힘을 쏟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이미 있는 정보들이 어째서 일상적으로는(‘받을 의무’를 부과하지 않고서는) 전달되지 않고 있는지를, 혹은 전달된 정보들이 담고 있는 사회의 현상태에서 부족한 부분이 어디이며 그것을 어떻게 개선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데에 말이다.

3.

이렇게 볼 때 개정안에서 감지할 수 있는 것은 원칙 없는 편의주의 뿐이다. 범죄 규정과 낙인을 유지함으로써 지배와 통제의 길을 열어 둔다. 처벌을 줄임으로써 여러 요구들에 부응하는 척 한다. 공로는 정부에, 책임은 개개인에게 돌린다. 개개인이 크고 작은 책임을 질 역량은 최소화한다. 샛길을 돌고 돌아, 범죄 규정과 낙인만이 남는다.

  1. 제일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병원에 갈 형편이 되지 않아 따로 구한 약물을 스스로 복용하거나 그조차도 여의치 않아 민간요법까지를 동원하는 상황일 것이다. 경제적인 이유가 아니라도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강간에 의한 임신을 중지하는 것은 기존 법에 의해도 처벌 받지 않지만 강간에 의한 것임을 주장하고 인정 받는 일부터가 난관이다. 개정안에 따르면 학대 등으로 인해 가족 대리인의 동의를 얻을 수 없는 만 16세 미만 아동청소년은 이를 확인할 서류를 제출해야 상담만으로 임신중지를 ‘허락’ 받을 수 있다. 이런 상황들조차 전부가 아니다. 넘어지거나 타인의 공격으로 인해 유산한 여성이 ‘낙태죄’ 규정에 따라 기소되고 처벌 받은 외국의 사례들 역시 고려해야 할 것이다.
  2. 최예훈, 앞의 글.
  3. 관련 현행법의 규정을 유지한 개정안대로 꼭 “의사”여야 하는지는 또한 따로 따져 볼 일이다.

위험을 감수할 권리, 위험을 감수할 의무

헬로우뮤지움 《모던 패밀리》전(20.09.21-, 온라인 상설전시. 참여작가 장지아, 김용관, 흑표범, 도로시 M. 윤, 김허앵, 류준화) 토크 프로그램 발제문. 어린이를 위한 페미니즘을 화두로 한 전시에 관심을 갖고 있는 교육자, 양육자 등의 독자와 성교육, 성적 감수성 등의 키워드를 염두에 두었다.

안팎

성적인 영역에서 손해감소를 고민하는 이유는 성적 행동 자체를 금기시, 범죄시 함으로써 손해를 막으려 하는 것이 개인의 자유를 가로막고, 발생하는 손해에 대처하지 못함으로써 건강을 비롯해 손해를 가중시키고, 사회화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타리, 「성관계에서의 위험(RISK)과 손해(HARM)를 정의하고 대처하기」

여성 청소년이 성에 무지해야 한다는 사회의 편견은 그들이 안전한 공간에서 성에 대해 발화할 수 없게 만들었다. […] 성을 욕망하는 여성 청소년에게는 익명성을 빌려 불특정 다수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만이, 그러니까 ‘일탈’만이 허락되었던 것이다.

위티, 「왜 누구에게는 ‘N번방’이었고 누구에게는 ‘일탈계’였나」1

1a.

성적인 행위에 도사리고 있는 갖가지 위험, 그로부터 종종 입게 되는 해에 대해서는 많은 것이 알려져 있다. 성매개감염이나 뜻하지 않은 임신, 성폭력, 혹은 감정적인 투여와 소진, 나아가 그 이후 사회관계에서 받게 되는 영향들까지가 두루 이야기된다. 감염과 임신을 막을 수 있는 여러 수단, ‘피해자’가 되는 상황을 막거나 피해를 최소화하는 데에 필요한 기술들―호신술부터 대화술, 사후피임약, 문제제기 방법 등―역시 적지 않게 이야기된다. 이 위험과 해가 결코 작지 않으며 심지어 특정한 신체조건이나 사회적 지위에 있는 이들에게 불균형하게 몰리곤 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는 분명 중요하며 필요한 일, 또한 여전히 부족한 일일 것이다.
(인간의 다른 모든 행위와 마찬가지로) 성적인 행위는―자위조차도―행위자 홀로 있는 진공 상태에서 행해지지는 않으므로, 따라서 스스로의 통제 바깥에서 오는 ‘손해’를 온전히 차단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이야기는 종종 위험한 상황을 미리 피하는 방법에 초점을 두게 된다. 그리고 손해를 온전히 차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바로 그 이유로, 위험한 상황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는 행위들은 쉽게 금지되곤 한다. 청소년의/잘 알지 못하는 이와의/불특정 다수와의/동성간의 관계, 충분히 주의하지 않은 관계 같은 것들은 물론이고 위험이 있는 곳에 접근하는 일까지도 그렇다.
필연적으로 위험에 연루될 어떤 욕망 자체를 제거―금지―하기 위하여 그에 대한 앎까지를 차단할 때 오히려 위험이 가중된다는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위험을 아는 것으로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위험을 알면서도 행하는 일은 얼마든지 있다. 그것이 현재로서는 가장 덜 위험하기 때문이든 위험에도 불구하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있기 때문이든 혹은 위험 자체를 통해 얻는 것이 있기 때문이든 말이다. 위험을 피하는 것이 지상명제가 될 때, 그리하여 위험을 충분히 알면서도 굳이 혹은 위험을 충분히 알지 못하면서 섣불리 행하는 것이 그 지상명제에 대한 위반으로서 비난 받게 될 때 역시 위험은 가중된다. 위험의 절대적인 제거가 불가능하다고 한다면, 위험을 제거해야 한다는 말은 그저 비현실적인 데 그치지 않으며 오히려 그 자체로 위험한 말이 된다.

1b.

그러므로 (결코 절대적일 수 없는) 안전을 누리는 것만이 아니라 (절대적이지 않게 될 수 있을) 위험을 감수하는 것 역시가 권리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것이 권리가 된다는 것은, 위험을 감수한 행위을 통해 입은 해가 온전히 그 개인의 책임이 되지 않는 것, 그 개인을 비난할 이유가 되지 않는 것을 뜻한다. 위험을 피하거나 통제할 수 있을 ‘충분한’ 지식과 능력, 즉 자격을 상정하지 않는 것을 뜻한다. (실재하지 않는) 전적으로 안전한 상황을 지어내고 누군가를 그 속에 가두지 않는 것을 뜻한다.
이렇게 볼 때 교육이 제공해야 할 것은 충분한 것으로 상정되는 지식과 그에 입각한 지침, 그 모든 것을 충분히 익혔다는 수료증 같은 것 아니라 언제까지나 불충분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는 지식과 각자가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하는 데에 필요한 조력일 것이다.2 당연한 모자람과 한계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위험이란 특정한 사람이 굳이 감수하는 것이 아니라 실은 모두가 언제나 감수하고 있는 것임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성적 권리(를 비롯해, 사실상 모든 권리)는 불가능해진다. 위험이 도 아니면 모로 상상되면 안전 역시 도 아니면 모가 되어버리므로, 안전조차도 불가능해지고 만다.
모자람과 한계가 특정한 이들에게만 귀속되는 것이 아니라면, 위험의 감수는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삶의 조건이자 양식이다. 그것이 권리로 인정된다는 것은 그에 따른 손해의 감소와 회복이 그저 당사자의 책임이 아니라 모두가 공유하는 책임이 된다는 것이다. 세계는 충분한 지식과 능력을 갖춘 이들이 안전을 구축하고 그로써 능력이 모자란 이들을 보호하는 공간이 아니라 그 누구도 온전한 능력을 갖출 수 없는 가운데 서로에게 위험과 해를 가하고 서로의 위험과 해를 줄이기 위해 노력하는 공간으로, 그렇게 함으로써 최대한의 자유와 최대한의 안전―새로운 위험을 감수하고 그 다음의 자유를 찾기 위한 조건으로서의―을 일구는 공간으로 상상되어야 한다.

2.

아마도 질적으로도 양적으로도 다를 어떤 위험을 생각해 보면, 그러나 아마도 위와 같은 관점을 토대로, 위험의 감수는 권리일 뿐만 아니라 또한 의무이어야 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관계 내의 위험에 한정해 이야기한다면, 어떤 위험은, 권력이 적은 이가 가하는, 자신의 권력에 대한 위협은, 쉽게 제거할 수 있다. 바로 권력을 통해서다. 그러나 권력을 통해 상대를 통제하고 그로써 위험을 제거한다는 것은 관계가, 삶이 본질적으로 위험을 내포하며 그 위험 속에서만 구성될 수 있는 것이라는 전제를 부정하는 것이다. 대화와 교섭, 상호작용의 상대가 아니라 통제의 대상을 찾는 것은 관계와 행위를 차단함으로써 위험을 제거하는 또 하나의 방식이다.
이런 의미에서 위험을 감수할 의무란 곧 단순히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평등한 관계를 조성하기 위해 노력할 의무가 된다. 권력에 절대적인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면 아마도 사소할 위험들이다. 거부 당할 위험, 상처 입을 위험, 권력을 휘두르고 통제하지 못할 위험. 위계나 협박 등을 통해 자신의 권력을 누릴 장을 만드는 것은 그저 상대를 존중하거나 보호하지 않는 일이 아니라 자신만은 결코 사소한 위험에조차 노출시키지 않는 일이다. 상대를 존중하고 보호하는 것으로 평등한 관계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상대가 언제나 위험 속에 있다면, 나 역시 위험 속에 들어 갈 때 평등의 가능성이 생길 것이다.
위험을 감수할 의무가 있다는 것은 물론 그런 이들에게 돌아가야 할 말이지만, 동시에 교육이나 조력을 제공하는 이들에게 역시 필요한 말이다.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교육도 조력도―피교육자, 피조력자를 통제하지 않는 한―뜻대로 이루어질 수만은 없다. 받는 이들의 부족함이 아니라 주는 이의 부족함이 우선적인 전제가 되어야 할 것이다. 능력도 의지도 없어 보이는 이들에게, 교육과 조력이 유의미한 효과를 내지 못하는 듯 보이는 이들에게, 어떤 사정과 어떤 욕망이 있는지를 우리―교육과 조력을 행할 능력이 있다고 상상되는―는 여전히 모른다는 전제, 배워야 할 것은 어쩌면 우리라는 전제.

  1. 각각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 이슈페이퍼(2020.01.31.), 청소년 페미니스트 네트워크 위티 논평(2020.05.01.). 아래 쓴 내용의 대부분은 이 두 글에 대한 나의 독해이다.
  2. 현재 교육은 전자에서 후자로 변해 가고 있거나 변해야 한다는 주장을 마주 하고 있는 시점일 것이다. 또한 적어도 지금 이 대화에 관심을 갖는 이라면 전자보다는 후자에 가까운 태도에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굳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나 자신을 포함해, 그런 이들조차 여전히 상상가능한 후자의 극단보다는 후자의 초입에 훨씬 가까운 곳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특히 아동·청소년, 장애인, 성노동자, 약물사용자, HIV감염인 등 흔히 능력이나 의지가 없는 것으로 상상되는 이들에 관해 그렇다.

2018년 가을, 집

2018.09.22.

벽에서 물이 샘솟는다. 사실 샘솟는 건 아니고, 샘솟았던 흔적이 있다. 벽지와 벽 사이에 물이 고여 불룩한 상태. 바닥을 적신 건 일단 닦았지만, 귀찮아서 벽지 뒤에 고인 물은 방치하고 있다.

하필 연휴 첫 날 이렇게 되었는데 직장에 나가 있다는 집주인은 당장 사람을 불러 줄 의사가 없으므로, 아무래도 연휴 내내 수리 못하지 않을까. 덕분에 고향행 버스표를 취소하고 수수로 1600원을 물었다. 연휴 동안은 집에서 일하면서 틈틈이 물을 닦을 예정.

2018.10.06.

이사 온 집에는 현관등이 없었다. 볕은 들지 않으므로, 현관은 어두컴컴했다. 바깥이 밝을 때야 현관문을 열고서 신발을 찾아 꿰어 신으면 되었지만 밤중에 나가야 할 때는 신발을 찾을 수 없었다.

전선이 보이게 설치하는 게 싫기도 했지만, 그보단 몇천 원이라도 덜 쓰려고 건전지식 센서등을 사서 달았다. 발광 다이오드 여섯 개, 희미한 불 아래에서 겨우 신발을 신기를 삼개월, 건전지 수명이 다했다. 그렇게 한 해를 채우고 나면 건전지 값이 전등 가격차를 넘어서게 될 것이었다.

그래서 잠깐 고민하다 그냥 전선을 연결하는 등을 새로 사서 달았다. 가난의 습관은 늘 이런 식이다. 얼마라도 아껴보겠다고 못할 것이 분명한 것을 사게 된다. 그리곤 후회하고, 결국 돈을 더 쓰고 만다. 갑자기 밝아진 현관이 어색하다.

2018.10.13.

지금 사는 집은 (조금 전까진) 화장실 콘센트에 덮개가 없었다. 물이 튀기 좋은 자리에 있지만 샤워를 해 보니 딱히 물이 튀지는 않길래 그냥 두고 살았는데, 요 며칠 어째선지 그쪽으로 물이 튀는 것을 발견했다. 딱히 걱정될 수준은 아니었지만 나사 푸는 건 재밌는 일이므로 콘센트를 바꾸기로 했다. 그 과정에서 두 가지를 알게 되었고 한 가지가 궁금해졌다.

1. 차단기함을 열면 레버 세 개가 보인다. 하나는 메인이고, 두 개는 거기에 물려 있는 서브인 듯하다. 서브가 두 개이므로 한 라인은 콘센트들, 한 라인은 전등들과 연결되어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나 하나를 내렸더니 콘센트와 전등 모두의 전원이 차단되었다. 나머지 하나를 내렸다 올렸다 해 보니 복도의 등이 꺼졌다 켜졌다 한다. 지상 3층 건물이고 나는 1층에 산다. 세 층에 사는 사람들이 복도를 오갈 때마다 켜지는 센서등에서 소비되는 전력의 요금을 내가 내고 있었던 거다! (정확히 말하면, 이사 온 이후로 아직 한 번도 요금을 내지 않았으므로, 내가 내야 하는 것이다. 큰 문제는 아니다. 한 달 전기요금은 평균 이천 원 정도 되는 것 같다.)

2. 낡은 집인데 콘센트는 모두 접지극이 있는 것이어서 신기하게 여겼다. 그러나 열어보니, 접지극만 있을 뿐 접지선이 연결되어 있지는 않았다.

3. 2구 콘센트를 교체한 것인데, 2구 콘센트는 전원선 두 가닥을 연결하도록 되어 있다. 콘센트 안에서 분배되어 총 네 개의 구멍으로 전류가 흐르게 된다. 그런데 여긴 어째선지 네 가닥이 연결되어 있다. 원래 꽂혀 있던 대로 꽂으니 전기는 문제 없이 통하긴 하는데 대체 왜 네 가닥인 걸까. 이 콘센트를 거쳐 다른 데로 또 전기를 전하도록 만들어 둔 걸까 싶지만 그럴 이유가 없으므로 그렇다고 확신할 순 없다.

청회색 물

마을은 조금 더 안 쪽에 있으므로, 물가를 따라 띄엄띄엄 앉은 몇 채 안 되는 집들, 그 중에서도 또 몇 안 되는 불이 켜진 집들, 그 사이사이 이따금 선 가로등. 물에 비치는 빛은 그것이 전부다. 별은 밝지만 그래봐야 별이어서인지 혹은 각도가 적당하지 않아서인지 물 위에는 뜨지 않는다. 보름을 겨우 며칠 지난 달이 지려면 두어 시간은 남았지만 산 뒤에 걸린 모양이다. 달이 보이지 않는 짙은 하늘을 반사하는 물은 청회색으로 흐른다.

지도에는 강이라는 이름으로 올라있지만, 그런 이름이 무색하지만은 않게 폭은 넓지만, 얕은 물이다. 겨울이므로 더 그럴 것이다. 급류가 소를 이룬 몇 곳을 빼면 대개는 걸어서도 건널 만한 깊이다. 낮에는 바닥이 훤히 보이는 맑은 물이다. 마을사람은 물가를 두고 강가가 아니라 냇가라는 말을 썼다. 물을 두고 무어라 하는지는 듣지 못했다.

청회색 수면 여기저기 희끄므레하거나 어슴한 무언가가 있다. 모래톱이거나 마른 물풀이거나 작은 바위거나 얇게 언 얼음이다. 나는 색맹이므로, 또한 근시이므로, 게다가 사위가 어두우므로, 모래톱인지 풀섶인지 바위인지 얼음인지를 알려면 기억해 두는 수밖에 없다. 이튿날 밝을 때 다시 볼 수밖에는 도리가 없다. 얼음이라면 녹아 사라질지도 모른다. 모래도 풀줄기로 흘러가 버릴지도 모른다.

또한 나는 길을 잘 찾지 못하므로, 이르지 못할지도 모른다. 제대로 닿아 놓고도 모래나 풀잎이 사라지고 없다면 으레 그렇듯 길을 잃었으려니 하고 돌아갈지도 모른다. 청회색 물을 따라 한 시간 반나마 걸었다. 돌아올 즈음에는 검어져 있었다. 물가도 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