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7.14.(수)

낮은 더우니까 짐정리는 저녁에 조금씩, 이라는 계획엔 큰 헛점이 있으므로 어제는 아침 일찍 책꽂이 하나를 정리했다. 저녁엔 대개 기운도 의지도 없으니까. 역시나 대충 책꽂이 앞에 놓여 있는 것들을 집어들었는데 지난번에 이어 페미니즘, 퀴어, 장애 관련 서적들과 시집, 비판철학서 일부를 꽂았다. 읽고 싶은 마음이 드는 책은 아마도 거의 다 꽂은 셈일 것이다. 사진집이나 전시도록 같은 것들이 남아 있지만.

그리고는 또 저번과 같은 카페에 가서 커피와 샌드위치를 시키고 발제 준비를 했다. 얼마나 했지, 진도가 빠르진 않았던 것 같다. 아침도 점심도 아닌 시간에 먹었으므로 저번처럼 점심을 거르고 저녁까지 이것저것 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배가 고파 와서 멈췄다. 어제의 보리밥집 ― “보리밥 친구들” ― 을 지나 처음 가보는 골목으로 들어갔다. 이사하며 갔던 곳에서는 2인분부터만 팔아서 먹지 못했던 옹심이를 1인분 단위로 파는 집이 있어 그리로 정했다. 칼국수로 상 받은 집, 이었는데 다들 콩국수만 시켜댔다. 타당한 결정이었다. 나는 옹심이칼국수를 먹었고 땀에 젖었다.

도서관 구경이나 할까, 하고 검색해 보니 15분 거리에 시립도서관, 10분 거리에 (아마도 역시 시립인) 어린이도서관 하나가 있었다. 후자로 정했다. 외관만 구경했다. 역시 처음 가보는 구역에 있었다. 아파트 단지 뒤의 주택가라고 해야 할까, 높은 건물이 없는 곳이었다. 하늘이 파랬다. 구름이 희고 두터웠다. 모르는 길을 조금 걸어, 여전히 가보지 못한 힙한 카페 앞에 이르렀다.

친구에게서 전화가 와서 이리저리 걸으며 통화를 했다. 카페와는 멀어졌다. 통화가 끝날 즈음엔 의림지를 오가며 지난 큰길가에 섰다. 논밭과 자그마한 공군 비행장이 보이는 위치. 1층은 가구점, 2층은 카페라는 건물에 들어섰다. 가구점은 구경하지 않았다. 카페도 가구점에서 운영하는 것이어서 앉지 말라는 경고문과 기백만 원 가격이 적힌 소파가 두엇 있었다. 장식장 같은 것도. 카페용으로 쓰는 테이블과 의자는 평범한 것들이었다. 통창으로 하늘이 보이는 자리에 앉아 발제 번역을 계속했다. 저녁 시간. 밥을 해먹기도 사먹(을 곳을 찾)기도 귀찮아서 중간을 택했다. 토마토소스를 사다 파스타면을 삶았다. 소스와 면, 기름 약간만 넣었다. 배불리 먹었다.

식사 앞뒤로 시간을 좀 흘려보냈다. 대충 털고 일어난 것은 이미 어둑해진 때였다. 기분이 별로여서 걷기로 했다, 가 이내 돌아왔다. 아파트 현관을 나서자마자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기 때문이다. 시간 정해 놓고 각자의 일에 바짝 집중하기, 를 같이 하기로 했다. 나선 김에 편의점에 들러 담배와 술을 샀다. 두 캔을 사면 얼음컵을 준다는 술을 골랐는데 시스템에 증정 이벤트가 등록되어 있지 않았다. 주인은 이벤트가 취소되었나보다며 이건 그냥 드리겠다고 했다. 그리고는 이미 입력된 얼음컵 가격을 빼는 걸 잊고 그대로 결제했다. 늘 그렇듯 다시 말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 나왔다.

열두 시까지 일하기로 했지만 열한 시 조금 지나까지만 하고 시답잖은 이야기를 좀 했다. 씻고 누웠다. 한 시 반쯤 잠들었으려나, 세 시 반과 여섯 시에 한 번씩 깨고 여덟 시 좀 전까지 잤다. 엉뚱한 꿈을 꿨다. 배두나 실종사건 쯤 되는. 마지막 행적은 ― 주변의 증언에 따르면 친하지도 않고 오히려 평소에도 찝찝하게 여겼다는 ― 동료 연예인 ― 누구인지 기억나지만 적지 않았다 ― 과의 약속. 다들 그 혹은 그의 회사에서 벌인 납치극이라고 확신했다. 협박전화 같은 것은 오지 않았다. 정확히 기억나진 않는데, 이 일들을 언론보도로 알게 된 것은 아니다. 나는 아마 배두나 소속사의 관계자였던 것 같다.

파스타를 사면서 치약도 샀다. 닷새, 이사를 오고 그만큼을 치약 없이 물로만 양치했다. 몇 군데를 몇 번이나 뒤졌지만 치약이 어딨는지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칫솔과 같이 있지는 않았다. 짐 정리가 더딘데가 영영 안 나올 수도 있으므로 그냥 사기로 했다. 아마도 2008년을 전후로 서너 해는 세제 없이 살았다. 샴푸, 비누, 주방세제, 치약 모두 쓰지 않았다. 여전히 (거의) 안 쓰는 것은 샴푸 뿐이다.

당시엔 친구와 함께 살았고 빨래를 함께 돌렸으므로 세탁세제는 썼다. 지금은 쓰지 않는다. 매 끼니 해먹지 않게 되자 오래 방치된 그릇에서 설거지 덜 된 티가 나기 시작했으므로 주방세제를 다시 쓰기 시작했다. 나이를 먹을수록 노폐물이 많이 쌓이는지 머리칼을 감당할 수 없게 되어 비누를 다시 쓰기 시작했다. 이 몇 개에 구멍이 나고 이따금 통증이 올라오게 되어 치약을 다시 쓰기 시작했다. 구멍은 세 개. 몇 년 전에 갔던 교내 병원에서는 금을 씌우면 총 60만 원이 든다고 했다. (더 간단한 치료로도 무언가 되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남겨두고 있긴 했지만) 바깥에 비해 훨씬 산 가격인데다 그 정도는 예상하고 가기도 했으나 치료하지 않기로 했다. 여전히 그대로다.

사지 않은 것들이 여럿 있다. 싱크대에 둘 수세미받이는 며칠째 생각만 하고 있다. 다이소에서도 어제 마트에서도 생각나지 않았지만. 싱크대에 수세미를 그대로 두는 성격은 되지 못하고 임시변통할 것을 찾기도 어려운 난장판이므로 수세미 없이 손으로만 설거지를 하고 있다. 있지만 (싱크대에 수세미를 올리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유로) 쓰지 않을 욕실장, 휴지걸이, 수건걸이도 사야 한다. 얼렁뚱땅 피하고 있다. 면도기도 찾지 못했다. 오늘은 공적으로도 사적으로도 여러 사람을 만나야 하는데.

커튼도 아직이다. 베란다와 실내를 가르는 문과 창문에 방충망도 설치해야 하는데 역시나 아직이다. 어젠 벌레를 여럿 보았다. 그제까지는 베란다에도 벌레가 딱히 없이 사방을 활짝 열어두었는데 어제부터 날벌레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 전까진 화장실에서 거미와 집게벌레를 본 것이 전부였다.) 베란다에 나가보니 전등에 날파리가 잔뜩 모여 있었다. 기어다니는 작고 검은 벌레도 보았다. 바퀴벌레 약충인가 싶어 잔뜩 긴장했으나 그렇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다시 봐도 의심을 온전히 거둘 수는 없었다. (아직 보진 못했으나 이 집엔 바퀴벌레가 있다. 그저 확신하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이다. 세상에서 제일, 이라고 해도 될 만큼 바퀴벌레를 싫어하고 바퀴벌레는 집을 고를 때 가장 중요한 기준 중 하나지만 알고도 결국 이 집으로 정했다. 달리 선택지가 있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일단은 며칠 더 흘려 보내겠지만, 아마 오래지 않아 약을 칠 것이다. 잠깐은 마음이 불편할 것이다.

이제 집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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