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이야기도 해보고 싶었어

   일주일 뒤면, 집에서 독립한지 딱 만 5년이 된다. 학교 기숙사에서 산 한 학기, 그러니까 3개월 반 정도를 빼면
나머지는 모두 학교 인근 자취촌의 방들을 전전했다. 반 년이 머다고 이사를 하던 때도 있었고, 그래도 한두 해 가까이 머물러
산 적도 있었다. 돌이켜 보면, 나는 참 좋은 방에 살았다. 대부분의 방이 볕도 잘 들었고 바람도 잘 통했기에 곰팡이는 구경조차
해 보지 못했으며, 그렇다고 옆방 사람의 숨소리가 들릴 만큼 벽이 얇은 집에 살아 보지도 못했다.
   어디까지나 ‘방’에 관한 이야기다. 무리해서 비싼 월세를 주고 독립된 부엌과 화장실을 가졌던 두어 달을 빼면 나는 늘
집이 아니라 방을 빌려 살았기 때문이다. 고시원처럼 서로 차단된 방들이 늘어선 건물조차 아니었고, 가정집 형태를 한 건물의 방
한 칸만을 빌려 산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래도 사람이 살라고 지어 놓은 집인 덕에 곰팡이나 습기로부터는 자유로웠지만, 그 모든
것은 ‘편안한 차림’의 낯 모르는 사람들과 거실에서 마주치는 난처함과 욕실과 주방을 공유하는 찝찝함과 바꾼 것이었다.
   공과금 포함해서 보증금 없이 월세 20만원, 지난 5년의 생활 중 가장 넓고 창문도 가장 컸던 방에서의 일이다.
1층에는 주인집이 있었고, 2층에 방 네 개, 그리고 옥탑방 하나가 있는 건물이었다. 2층의 네 명과 옥탑의 한 명, 이렇게
다섯 명이 같은 계단과 같은 거실, 그리고 같은 화장실과 같은 주방, 같은 냉장고, 같은 세탁기를 사용했다. 그들 중 누구는
속옷바람으로 물을 뚝뚝 흘리며 지나갔고, 또 그들 중 누구는 여름이면 배를 둥둥 걷어 올리고 네 활개를 편 채 방문을 열어 두고
잠이 들었다.
   김애란의 <성탄특선>이라는 소설을 읽어 본 적이 있을는지. 주인공들은 마음 놓고 섹스할 곳을 가져 보지
못한다. 섹스는 커녕, ‘나만의 공간’이라는 말부터가 사치일 뿐이다. 모텔조차 쉽게 허락되지 않는다. 그 당시의 나 역시,
그리고 나의 연인 역시 그랬다.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아찔한 일이지만(스릴 있는 일이라는 뜻이 아니다), 그야말로
‘고학생’이었던 우리들은 나의 방에서도 섹스를 했다. 2층에 사는 세 명, 2층을 거쳐 옥탑으로 올라가는 한 명이 몇 번쯤
낌새를 챘을 것이다.
   어느 날이었다. 수업을 마치고 방으로 돌아 와 열쇠를 돌리는데 발에 무언가 채이는 것이 있었다. 인터넷 쇼핑몰에서 보낸
택배였다. 작은 상자에는, 길게 자른 종이를 역시 길게 자른 유리 테이프로 정성스레 덮은 쪽지가 붙어 있었다. 인터넷 쇼핑몰에서
쓴 것은 아니었다. 2층의 세 명, 옥탑의 한 명 중 누군가가 썼을 그 쪽지에는 “섹스는 여관에서”라는 굵은 볼펜 자국이 남아
있었다. 신문에 실릴 글이니 여기에는 그냥 섹스라고 썼지만, 그 쪽지에는 실은 된소리로 시작하는 육두문자가 담겨 있었다.
   그런 일을 또 겪은 적은 없지만, 끝내 그것은 공포로 남았다. 한편으로는 조심스럽고, 한편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워
망설였지만, 이런 이야기를 해 보고 싶었다. 한 몸 뉘이면 가득 차는 좁은 방, 여름이면 곰팡이가 벽을 덮는 방, 옆 방의 통화
소리에 잠을 설쳐야 하는 방, 그런 방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많으니까 말이다. 불편한 동거가 아니라, 낯 모르는 이들과의 불안한
동거―서로의 마주침이 교류가 아니라 침입이 될 수밖에 없는 좁은 집들, 자신의 공간을 가질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다.

   원래 제목은 <이런 이야기도 해보고 싶었어>였고, 2안은 <불편 말고 불안>이었다. 제목에 1안, 2안이 있었던 것은 기고글이었던 탓이다. 대학생사람연대의 신문 <대학생사람연대>에 기고 요청을 받고 쓴 글. 그런데 웬걸, <여관 말고, 집에서 사랑하면 안 되나요?>라는 얼토당토 않은 제목으로 실렸다. 심지어 ‘김애란의 소설’로 시작하는 문단도 어디론가 사라졌다. 제일 끝에는 "5면 하단으로 이어집니다"라는 문구가 붙어 있더라. 물론 글은 저게 끝이고 이어지지 않는다. 으으음. 아무튼, 섹스와 사랑은 전혀 다른(그러니까, 별개의) 건데 말이지. 블로그에 올릴 생각은 없었는데, 이상한 제목과 이상한 내용으로 실려서, 여기에 원안을 남겨 둔다. 따질까 하다가, 말기로 했다.

지하철

   내가 한 자리, 커다란 카메라가 한 자리를 차지했다. 그 옆으로 빈 자리 하나가 있었다. 무엇이 내키지 않았던 것인지는 모르지만, 누군가가 내 카메라가 차지한 자리와 빈 자리 사이에서 고민했다. 카메라는 내 무릎으로 올라 왔고 그 사람은 내 옆에 앉았다. 왼쪽에 봉이, 오른쪽에 사람이 있는 자리에 나는 앉아 있었다. 오른쪽으로 기대는 습관이 있는 나는 불편했다.
   작은 모금함을 든 사람이 내 앞을 스쳐갔다. 내 왼편 몇번 째 자리 쯤에 앉은 사람의 앞에서 무어라 중얼거린 그는 그 맞은 편에 앉은 사람 앞에서 또 몇 마디를 내었고 몇 자리를 더 가서 같은 일을 반복했다. 무엇을 위한 모금인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그의 모금함에 돈을 넣는 이도 없었다. 그 역시 별로 미련이 없는 듯, 빈 자리가 많지 않은 지하철 한 칸에서 겨우 네 명에게 말을 붙여 본 후 다음 칸으로 넘어 갔다.
   모금함을 든 사람과 반대 방향으로 소쿠리를 든 맹인이 다가 왔다. 흰 지팡이를 짚지 않고도 방향을 잘 잡았다. 그럴 수 있겠다, 싶을 만큼 지하철에서 자주 마주치는 사람이었다. 주머니 속에 든 천 원을 꺼내 손에 쥐고 있다가 그가 내 앞에 왔을 때 소쿠리에 살짝 내려 놓았다. 몇 년 간 반복하면서, 그가 느끼지 못하도록 지폐를 내려 놓는 기술이 생겼다. 혹시라도 느끼는 순간이면 그는 허리를 너무 깊이 숙여 인사한다.
   내 옆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은 건너편 의자의 봉이 있는 자리로 몸을 옮겼다. 나는 그 맞은 편, 오른쪽에 봉이 있는 자리로 옮겨 봉에 기댔다. 봉 너머에 가방을 든 사람이 섰다. 그의 가방이 계속 해서 내 머리를 치고 눌렀다. 하지만 나는 피곤했고, 머리를 치우지 않았다. 잠깐 잠이 든 사이 가방을 든 사람은 사라지고 없었다. 맞은 편에 앉은, 내 옆에 앉았던 사람은 왼쪽의 봉에 기대어 곤히 자고 있었다.
   지하철이 몇 개의 정거장을 지나는 사이 맞은 편에서 곤히 자던 사람도 시야에서 사라졌다. 내 옆에는 카메라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 옆으로 추레한 차림을 한 사람 하나가 앉았다. 휴지에 무어라 빼곡히 적힌 글자들을 그는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곁눈질로는 알아 보기 힘든 날려 쓴 글씨 사이로 프랑코라는 단어가 보였다. 신부라는 단어도 보였다. 어느 역에선가 그는 내리기 위해 일어섰지만, 문이 먼저 닫혔다. 포기하고 자리에 앉은 그는 몇 정거장인가를 그대로 앉아 있었다.
   목적지에 도착해서 지하철에서 내렸다. 플랫폼에 서 있는 자판기를 보고서야, 아까의 천 원이 잠을 깨기 위해 커피를 마시려던 돈이었음을 깨달았다. 자판기를 지나치면서, 그 전에 그 돈으로 복권이나 한 장 사 볼까 생각했던 것도 떠올랐다. 땅 위에서부터, 찬 바람이 불어 내려 왔다.

취객과 아이

  지하철을 타고 가는데, 내가 앉은 자리 옆에 아이를 업은 사람이 서 있었다. 엄마로 보이는 아이 업는 사람과, 할머니로 보이는 동행이 아이를 얻니 안니 하며 옥신각신하고 있었다. 자리를 내어 주었더니 엄마로 보이는 사람은 고맙다고 말하며, 포대기를 풀어 아이를 앞으로 안고 자리에 앉았다.
  엄마로 보이는 사람과 할머니로 보이는 사람의 사이에 선 아이는 둘을 번갈아 보며 연신 웃었고, 가끔 나를 보면서도 웃었다. 아이의 웃음에 나도 웃음으로 답했더니 아이는 또 엄마로 보이는 사람과 할머니로 보이는 사람을 번갈아 보며 자지러졌다.
  그러자 옆에서 술에 취한 사람 하나가 아이를 보며 웃었다. 재롱을 요구하는 듯, 무언가 소리를 내어 아이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 대답하는 것인지, 그저 웃는 것인지, 아이는 여전히 엄마로 보이는 사람과 할머니로 보이는 사람을 번갈아 보며 웃었다.
  술에 취한 사람이 점차 아이에게 다가와 나는 조금 불안해졌다. 지하철에서 만난 취객은 종종, 상대방의 기분 따위 모른 채 말을 걸거나 손을 대거나 자리를 뺏거나 했기 때문이다. 여성들을 상대로 욕을 하거나, 혹은 누군가의 무릎에 앉으려는 취객을 볼 땐 주저없이 끌어 내었는데,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했다.
  그저 아이의 재롱을 보고 있을 뿐이고, 손을 내밀어 아이의 볼을 꼬집을 수도 있겠지만 위협적일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것을 그냥 두면 언제 위협적이 될지 모르는데, 그런 가능성과 술에 취해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끌어내도 좋을까 고민했다.
  여전히 아이는 엄마로 보이는 사람과 할머니로 보이는 사람에게만 관심을 주고, 술에 취한 사람에게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자신에게 무관심으로 응대하는 아이에게, 버럭, 화라도 내면 어쩌나 나는 불안했다.

  지하철이 신도림 역으로 들어섰다.

  술에 취한 사람이, 나는 여기서 내릴래, 하고 말했다. 누구를 향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할머니로 보이는 사람이, 여기서 내리기는 뭘 내려, 하고 답했다. 엄마로 보이는 사람이, 여기는 사람도 많고 계단도 많아서 안 돼, 하고 답했다.
  그리고 엄마로 보이는 사람이 아이에게, 아빠가 술에 많이 취했지, 하고 웃었다. 술에 취한 사람은 가족으로 보이는 사람들을 두고 신도림 역에서 홀로 내렸다. 엄마로 보이는 사람도, 할머니로 보이는 사람도, 그런니까, 술에 취한 사람의 배우자로 보이는 사람도, 그의 어머니로 보이는 사람도, 그를 잡지 않았다.
  나는 혼자 걱정했지만, 술에 취한 사람은 아이의 아빠였다. 다행히, 술에 취해도 위협적이지는 않은 사람인 듯 싶었다.

1년 만의 장례식

고인들의 명복을 비는 것과, 유가족의 행복을 비는 것 중 어느 쪽을 먼저 해야 할지 알기 어렵다.

처음으로 돌아 오는 기일을 겨우 열하루 남겨 두고 이제야 장례식을 치르게 된 가족들,
죽어서 식은 몸을 더 싸늘한 냉동고에 누인 채 한 해 가까이를 보낸 고인들,

안도와 서러움이 한 데 섞인 눈물을 흘릴 그 곳에 가지 못해 심란하다.

1월 9일, 불길이 혹은 이 나라가 남일당을 집어 삼킨지 거의 한 해가 다 되어 가는 오늘,
고인들의 장례식이 열린다.

사정상 가지 못해, 시민 장례 위원 명단에 이름이나마 올렸다.

모레나 글피 쯤,
지금의 닥친 일이 마무리 되고 나면 불 꺼진 남일당에나마 한 번 들러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