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의상’의 쓰임

수업 시간 발표를 위해 쓴 글은 열 한 쪽, 참고 자료 목록까지 더해 총 열 두 쪽이 되었다. 서른 명이 듣는 수업, 도합 삼백 예순 페이지나 되었지만 양면 인쇄를 하니 생각보다 부피는 크지 않았다. 학생들에게 나누어 줄 것은 양면 복사를 하고, 교수에게 제출할 것은 단면으로 인쇄한 것을 따로 철했다. 예의상, 이라는 문구가 문득 떠오르자 양면과 단면의 예의가 어떤 차이인지 궁금해졌다.


대학에 다니면서 하고 싶은 일은 거진 다 해 보았는데, 못 해 본 몇 가지 중 하나는 이면지에 글을 인쇄해 제출하는 것이다. 발표는 많지 않았으므로 사용하는 종이의 대부분은 기말 논문을 출력해 제출하는 데에 들어갔다. 한 번쯤 읽히고 버려질 글이었다. 첨삭되어 돌아 오면 이면지로나마 썼겠지만, 대부분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면지에 인쇄해서 제출해도 괜찮을까, 를 고민할 때 ‘예의상’이라는 말은 헷갈리지 않도록 “이면지 사용”이라는 도장 정도는 찍어야겠지, 라는 생각을 수식하는 데에 사용되었다. 그러던 것이 이제 와서는 자연스런 단면 인쇄를 합리화하는 데에 사용되고 있다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괜히 씁쓸해 졌다.


늘 누구와도 싸우지 않고자 했지만, 수없이 싸웠더랬다. 어떻게든 싸움을 줄여 나가려 노력하는 동안 애꿎게도 싸움의 대상이 된 것은 가까운 친구들, 정작 싸울 거리가 많지도 않은 이들이었다. 타인의 잘못을 눈감고 지나치느라 지쳐 예민해진 눈에 걸린 친구들의 작은 잘못과 나는 싸웠다.


이제는 그나마도 싸우지 않고, 때로는 나 자신과조차도 싸우지 않는다. 싸움을 포기했거나 싸움을 무의미하게 생각하게 된 것은 아니다. 다만, 싸우지 않고자 하는 노력을 엉뚱하게 쏟아 버려 습관이 변한 탓이다. 때로 잘못 든 습관을 고치기 위해 노력한다. 노력하지 않는 습관이 들어버린 스스로를 씁쓸해하며 말이다.

복음 전하던 이

지하철에 복음을 전하는 할아버지가 들어 섰다.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교회에 갈 것을 권했다.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을 외치며 윽박지르는 류만 아니라면 전도하는 이들을 싫어하지는 않는데, 안타깝게도 이번엔 그런 류였다.

예수를 모르는 년이 어떻게 여자야, 무식한 년!

어떠 년인지도 모르는 어떤 여자를 향해 그는 욕을 내뱉었다. 순간 열이 뻗쳐서 저기요, 라고 말을 붙이려는 순간 그는 또 외쳤다.

예수를 모르는 놈이 어떻게 남자야, 무식한 놈!

슬쩍 당황해서 말을 삼켰는데, 그 즈음 그는 반대 편에 앉아 있던 고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이에게, 학생 교회 다녀? 하고 물었다. 질문을 받은 이는 그렇다고 답했다. 그는 엄마 아빠랑 같이 다녀, 하고 덧붙이며 발걸음을 이었다. 그런데 질문받은 이가 말을 붙였다.

저는 교회 안 다니는 사람보다 큰 소리로 떠드는 할아버지가 더 무식해 보이는데요.

그러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안 들려.

그는 발걸음을 계속해서 옮겼다.

미용실 한담

서울에 와서 가장 놀라웠던 것 중 하나는, 미용실에서 머리를 깎는 것과 머리를 감는 데 돈을 따로 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실은 서울에 와서도 몇 년을 모르고 살다가, 어쩌다 한 번 이대 근처에서 머리를 자르게 되었을 때 알았다. 늘 집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서 머리를 잘랐기 때문에, 시골에서나 고시촌에서나 해볼 수 없는 경험이었던 것이다.

서울에 와서 머리를 자르게 된 고시촌 입구의 미용실은 커트가 6000원이었다. 열 번을 깎으면 한 번을 무료로 깎아 주기도 했다. 대학에 들어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미용실이 문을 닫는 바람에 두 번 찍은 쿠폰은 쓸 수 없게 되었지만, 같은 자리에 같은 가격의 미용실이 새로 들어와 계속 그곳에서 머리를 깎았다. 새 미용실 역시 쿠폰 제도를 운영했는데, 4년을 그 곳에만 간 덕에(위의 한 번만 빼고) 지난 해에는 드디어 열 번을 채우고 공자로 머리를 깎아 보기도 했다.

뜬금없이 미용실 이야기를 하는 것은, 몇 달만에 머리를 잘랐기 때문이다. 코를 덮을 만큼 길게 내려온 앞머리와, 목을 완전히 가렸던 뒷머리, 볼을 거진 다 가렸던 옆머리가 모두 사라졌다. 늘 하듯, 너무 짧지 않을 정도로 깔끔하게 잘라주세요, 하고 말했다. 생각보다 더 짧게 되어버렸지만, 이미 잘린 머리를 어쩔 수는 없는 일이니 괜찮냐는 물음에 그렇다고 답했다.

자르면서 괜히 가르마를 타 놓은 탓에 이발 가운을 벗자마자 일어서서 머리를 흔들어 가르마를 풀었더니, 머리카락을 터는 줄 안 미용사가 머리를 감아야 한다고 말했다. 개수대로 다가가고 있자니 직접 감으셔도 되고 감겨 드리기도 해요, 하고 말한다. 감겨 주는 것은 실은 늘 부담스러워 무심결에 제가 감을게요, 하고 답하고 나서야 알았다. 머리를 감겨 주면 돈을 더 받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처음으로 학교 후생관 미용실엘 갔다. 커트는 4200원, 머리까지 감겨 주면 5000원. 싸지만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이었다. 학부에 다닐 때 그곳은 고시생과 대학원생, 그리고 강사들만이 가는곳으로 여겨졌다. 어떤 곳이건 상관은 없었지만, 강사같은 머리로 잘라 놓을까 두려워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이었다. 오늘도 머리를 자르고 있는데 들어와 옆에 앉은 강사는 옆머리는 하얗게 밀어주세요, 하고 말했다.


제가 감을게요, 하고 답은 했지만 머리 감기는 쉽지 않았다. 감아도 감아도 물만 개수대로 흘러가고 머리에 남은 머리카락은 사라지지 않아 결국 도중에 포기했다. 머리를 감겨주지 않으면 말려주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찬 바람을 젖은 머리로 맞으며 타박타박 걸었다. 쓸쓸했던 것은 아니다. 그냥 좀 민망했을 뿐.


‘홍반장’이 되고 싶었던 그

   그의 장래 희망 중 하나는 ‘홍반장’이었다.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난다”는 홍반장 말이다.(영화는 보지
않았으니, 그냥 카피 문구만 생각하자.) 그는 돈 잘 버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도 하지 않았고, 자신이 속한 단체나 당을 대표하는 정치인이 되고
싶다고도 하지 않았다. 마을에서 누군가가 도움을 필요로 하면 언제든 나타나서 도움을 주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다.

   도움이래 봐야 거창한 것도 아니다. 짐을 들어 주거나 못을 박아주고, 운전을 해 주거나 사람을 부축해 주는 일. 그런 소박한 도움들을 주며
살고 싶다고 그는 말했고, 실제로 그렇게 살았다. 후배들의 이사 소식에 없는 차를 빌려 가서 짐을 날라다 주었고, 멀리서 부음이라고 있으면 또
밤새 차를 몰았다. 농활을 가서 낫에 손가락을 베이고도 남은 한 손으로 꾸역꾸역 일을 했고, 언제 어디서나 남의 짐을 나누어 들었다. 단체의
대표를 맡았을 때도, 혹은 무슨 무슨 국장 쯤 되는 자리를 맡았을 때도, 체면 치레 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런 그를 알고 지낸 지 6년
만에, 그를 감옥으로 보내게 되었다.

   그러니까 그는, 사회복무제 같은 것이 있었더라면 오히려 즐거워 했을지도 모르겠다. 하루종일 남을 도우기만 해도 되는 일상, 돈 걱정 잠자리
걱정 없이 그저 남을 위해 일하기만 하면 되는 그런 일상이 주어졌더라면 고마워 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끝내 그의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수해가 났을 때나 폭설이 내렸을 때, 남을 도울 기회가 생기겠지만, 그보다는 남을 부리거나 남에게 부림받는 훈련 혹은 총을 쏘고 사람을 죽이는
훈련을 해야 하는 군대가 그를 불렀기 때문이다.

   병역 거부, 결국 그는 그런 결정을 내렸다. 감옥에 대해서는 아직 이야기하고 싶지 않지만―이미 몇 명의 병역 거부자들이 그런 일이 없을
것임을 몸으로 확인했지만, 양심의 가치를 아는 어느 판사가 나타나 무죄 판결을 내려 주기를 나는 여전히 기대하고 있다―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는 아마 머지 않아 감옥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 속에서도 서글서글 웃으며 방의 궂은 일을 도맡아 하는 그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병역 거부, 남을 도우며 바르고 착하게 살고 싶다는 그의 꿈은 어처구니 없게도 그를 ‘범죄자’로 만들었다.

   어쩌면 다행일는지도 모른다. 그가 자신의 꿈을, 자신의 양심을 접고 군대에 갔더라면 그는 ‘모범적인’ 군인으로 살았을 것이다. 동료
병사들에게 피해 주지 않기 위해 싫은 명령에도 잘 복종했을 것이고, 동료 병사들의 짐을 덜어주기 위해 자신의 몸을 혹사시켰을 것이다. 그러는
사이 자신도 모르게 몸과 마음에 병을 얻고, 마침내는 양심을 거스른 죄의식까지 안고서 제대해 친구들의 곁으로 돌아오게 되었더라면, 그것이 더
슬펐을는지도 모른다.

   눈물은 나지 않았다. 병역 거부를 선언하는 기자회견에서도 평소처럼 씩씩하게 말하며 선하게 웃는 그의 표정을 보면서도, 부모님의 이야기를
하며 숙연해 진 그의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눈물은 나지 않았다. 군대 대신 감옥을 택한 그가 감옥에서 겪을 또 다른 군사주의의 문화, 그러니까
위계질서라든가 폭력이라든가 하는 것들이 나는 걱정되지만 그래도 슬프지는 않다. 그가 자신의 양심을 지킬 수 있는 길이 있으므로,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 수감 생활의 끝에 다시 친구들의 곁으로 돌아 온 그가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또 밝고 우직하게 살아 갈 것을 알고 있으므로.

그의 병역거부 소견서

신입생이 되었다.

   낯선 캠퍼스에 발을 내딛었다. 처음 들어 보는 수업에는 처음 보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모르는 이름의 학자들이 쓴 논문 목록이 주어졌다. 정처 없는 학교의 낯선 구석들을 기웃거렸다. 내게 주어진 자리는 없었다.
   광장에는 몇 장의 자보가 붙어있었다. 수많은 기업 광고들, 혹은 기업처럼 되어버린 동아리 광고들 사이에 겨우 몇 장만이 숨어 있었다. 새내기가 새내기에게, 새내기 혜린이의 일기―’선배’들이 얕은 꾀를 써서 지은 제목의 글들이었다.
   새내기란 말은 어딘지 조금 우습다. 새로운 이, 그 단어가 미숙하다는 뜻을 원래부터 갖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하여간 그런 뜻으로 쓰인다. 처음 대학에 들어와 처음 대학을 경험하는, 미숙하고 어린 아이들, 그런 뜻으로 그 말은 쓰인다.
   묘하게도, 본인들 스스로가 스스로를 새내기라고 칭하게 되기도 한다. 선배들 앞에서 자기를 낮추는 말이 되기도 하고, 부질 없는 신입생의 특권을, 기껏해야 밥을 얻어 먹을 수 있는 정도의 특권을 지키는 말이 되기도 한다. 실은 자기 자신에게는 쓸 수 없는 말일 테다.
   우습게도, ‘새내기’로 묶이는, 그래서 대학을 처음 경험하고 대학에 대해서, 그러니까 학문이나 자치와 같은 것들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이들의 틈사구니에 그렇지 않은 이들이 끼어 있다. 다른 곳에서 이미 몇 년이나 대학을 경험한 이도 있고, 대학이 아닌 곳에서 대학생보다 많은 것을 경험한 이도 있다.
   1년 만에 찾은 캠퍼스는 낯설었다. 원래가 좋아하는 곳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4년간 비비적대며 익숙해진 곳이었다. 한 해 동안 멀어져 있었더니, 받아들일 수 없는 풍경은 다시 생경한 것이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