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의 경험>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낸 <보통의 경험>(이매진, 2011)을 읽었다. 공식적인 리뷰, 그러니까 좋은 말만 쓴 책 소개는 여기.

그리고 공동 저자 5인 중 한 분인 당고 님의 책 소개는 여기.

일부러 볼륨을 한껏 높인 이어폰을 귀에 꽂고 읽었다. 책이 성폭력 사례들을 구체적으로 재현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코 쉬이 읽히는 것은 아니었다. 이틀 쯤을 망설이다 결국, 최대한 집중하지 않고 읽어 넘기기로 했다.

 
보통의 경험, 에로 비디오 제목을 밴드 이름으로 정했다는 어느 뮤지션의 책 제목이 떠올라 영 마뜩지 않았지만, 더 이상의 이름을 붙이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누구나가 노출되어 있다는 점에서 실제로 보통의 경험이자, 부디 보통의 경험으로 끝내 넘길 수 있기를 바라는 일, 적어도 내게 성폭력은 그런 이미지다.
 

성폭력 가해자의 속성을 언급하면서 ‘정신 이상자’, ‘정신 질환자’ 같은 정신 장애를 비하하는 표현들(물론 ‘가해자는 —이 아니다’는 형태의 서술이다)이 몇 차례 등장하고, 시종 비장애인의 신체를 중심으로 한 비유들―보다, 일어서다 따위의―이 주요한 메타포로 반복되는 점은 적잖이 불편했다.

일단 그런 문제는 차치해 두자, 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어떠한 가치만을 견지한 채 다른 가치를 부차적은 것으로 두어도 좋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이 책을 접할 이들 중에 보거나 일어설 수 없는 사람들이 있으리라는 점을 간과할 수도 없다.

그런 불편함들을 갖고서 읽은 이 책에서 가장 생소했던, 그리고 가장 흥미로웠던 점은 ‘피해자 리더십’이라는 명명이었다. ‘피해 경험자가 주인공이 되어 보자’는 말을, 이야기가 비극이건 희극이건 끝이 기쁘건 슬프건 간에 결국 의미를 창출하는 것은 주인공이라는 식으로 이해해도 좋다면, 사건이 결코 당사자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거나 마무리 되지 않는 힘겨운 현실 속에서도 얼마만큼의 힘을 얻을 수 있을까.

“섣부르게 용서하라고 피해자에게 권고하는 것은 모욕”이라는 이 책의 인용*만큼이나, ‘당신에게 힘이 있다’고 말하는 것도 내게는 어려운 일이지만, 20년이라는 세월을 피해자들과 함께 한 이들이 하는 말이니, 라는 점을 변명 삼아 조용히 뇌까려 본다. 당신에게는 힘이 있다, 고.

비교적 가까이서 경험한 경우든, 혹은 어디선가 주워들은 경우든, 성폭력은 사건으로 규정하고 대응하건 그렇지 않건, 가해자가 반성하고 사과하건 그렇지 않건, 어쩌면 시간이 갈수록 상처는 커지기만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쉽사리 말할 순 없지만, 주인공이 된다면, 어떻게든 조금은 나아질까, 하는 생각을 했다.

*엘렌 베스, 로라 데이비스 지음, 이경미 옮김, <아주 특별한 용기>, 230 쪽, 동녘, 2000.

인용문은 로라 베이비스의 말, 이 책 247쪽에서 재인용.

덧.
무슨 생각을 하면서 ‘피해자 리더십’이란 말을 읽었는지를 안 써 둬서. 성폭력 피해자를 가리키는 ‘대안적’ 용어 중에 ‘성폭력 생존자’라는 것이 있다.

그 동안 수동적이고 약한 존재로서의 고정된 피해자 상을 벗고 자신의 삶이 직면한 문제에 예민하게 반응하며, 삶을 이끌어온 살아남은 생존자로서 주체적 존재로서 그/녀들을 다시 보는 것입니다.

주체의 자리를 되찾기 위해 새로 고안한 이름이라지만, 오히려 내게는 더 수동적인 이름으로 읽혔다. 살아 ‘남은’ 것으로 한정되는 이미지였달까. 피해자라는 명명이 피해를 크건 작건 피해를 입었음을, 어떠한 형태로건 보상이 필요함을 말하는 듯했다면 생존자라는 이름은 작은 사건조차도 확대하는, 그러나 별다른 대책은 없는 듯한 인상을 풍겼다.
그래서 조금은, 더 반가웠지 싶다. 피해자 리더십이라는 새로운 접근이.

경험의 편협함

* 바퀴벌레

인생의 3분의 2 쯤은 시골에서 보냈다. 집에서 농사를 짓지는 않았지만, 집은 갖가지 농지들에 둘러 싸여 있었고 그 농지들은 또 몇 개의 산들에 둘러 싸여 있었다. 때로는 남의 밭을 휘젓고 다니기도 하고, 때로는 친구네 농사일을 돕기도 하며, 그리고 대개는 산에 들어가 개울물을 훑고 다니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랬던 시절 동안 본 것은 정말이지 많다. 인상에 강하게 남이 있는 것들만 말해도, 새우, 거머리, 다슬기, 논고동, 송사리, 피라미, 각시붕어, 잉어, 미꾸라지, 붕어, 가물치, 고라니, 너구리, 오소리, 족제비, 두더지, 들쥐, 산토끼, 갖가지 뱀들, 풀무치, 팥중이, 여치, 베짱이, 귀뚜라미, 크고 작은 나방들, 색색의 개구리들, 도롱뇽, 도마뱀, 온갖 소리로 우는 새들―대부분의 것들을 나는 가까이서 보고 또 만지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린 내게도, 그들의 생명은 아름다웠다. 멋모르고 많은 것들을 괴롭히고 또 죽이기도 했지만, 나는 그들을 사랑했다, 고 감히 말해도 좋을 것 같다.
그런 데서 비롯한, 도시에서 자란, 혹은 시골에서 도시를 생각하며 자란 대부분의 친구들과 나 사이에 다른 점이 있다면, 그들이 혐오하거나 두려워하는 대부분의 생물들을 나는 좋아한다는 점일 것이다. 위협적으로 생긴 거미, 귀찮게 윙윙거리는 날벌레들, 한 때의 유행이 되다시피 한 꼽등이까지도, 나는 그저 좋아한다는 점일 것이다.
내가 딱 하나 싫어하는 생물이 있다면 그것은 바퀴벌레다. 어릴 때는 그것이 바퀴벌레는 비위생적이라는 교육을 받은 탓이라 생각했다. 그너 똑같이 비위생적이라고 배운 파리나 모기와는 전혀 다른 감정을 바퀴벌레가 일으키는 원인을 곰곰 생각해보니, 그것은 바퀴벌레만이 유일하게 내가 도시에서 만난 생물이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바퀴벌레를 처음 본 것은 9살 때, 1년 동안 서울에서 살면서였다. 시골에서 살면서는 그 어떤 생물이라도 그저 들에서 공존할 뿐이었다. 개미는 개미굴을 파고, 거미는 거미줄을 치고, 사람은 사람의 집을 짓고서, 때로는 서로를 헤친다 하여도, 어쨌거나 우리는 같이 살고 있었다.
그러나 서울의 바퀴벌레는 사정이 달랐다. 처음 겪어보는 도시 생활이었지만, 그럼에도 내게 도시는 사람의 것으로 다가왔나 보다. 사람의 것인 도시에 지어진 사람의 것인 우리 집, 그곳에서 바퀴벌레는 그저 기생하는 존재요 불청객, 침입자였다. 바퀴벌레를 보며 하게 되는 생각은 그것이 살아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집에 들어와 있다는 것이었다.
겨우 조금 다른 환경에서 접했다는 이유만으로, 내가 그것을 그토록 혐오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은지는 아직 몇 해 되지 않았다.

* 물

어릴 때부터 그랬다. 전기세가 아니라 전기가 아까웠고, 기름값이 아니라 기름이 아까웠다. 어떤 물건이라도 혹 다시 쓰일 데가 있을까 싶어 쉬이 버리지 못했고, 버림 받은 물건을 보면 주워 모았다.
한 때는 그것이, 타고난 생태주의라고 생각했지만, 그저 웃긴 소리일 뿐이었다. 아마도 나는 그저, 내가 갖지 못한 것을 아꼈던 뿐이었다 싶다.
전기 공급이 불안정한 시대를 겪은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시골에서 전기는 다분히 이질적인 존재였다. 기름은 말할 것도 없고. 땅을 파면 어디서든 나오는, 혹은 땅을 파지 않아도 어디서든 흐르는 물이랑은 전혀 달랐다.
그래, 그것을 깨달은 것은 내가 물은 전혀라고 해도 좋을 만큼 아끼지 않음을 깨달으면서였다. 변기를 통해 버려지는 물이나 세탁에 들어가는 물은 아끼면서도, 몸이나 그릇을 씻는 데에 드는 물을 나는 거의 아끼지 않음을 깨달으면서였다.
그것이 단순히 몸과 먹을 것에 대한 결벽증 때문은 아닌 것 같다.물을 아끼지 않을 뿐 그리 열심히 씻는 것은 아니므로. 그저 몸과 관계하는 물, 그러니까 물놀이 하는 데에, 혹은 마시는 데에 쓰이는 물은 늘 산에서 절로 나왔으므로 그런 것은 아닐까.
똑같은 지하수라고는 해도 변기나 세탁기로 들어가는 물은 내가 그 속을 알 수 없는 수도를 통해 흘러 나왔고 펌프가 고장 나기라도 하면 꼼짝없이 끊기고 말았지만, 물놀이라면 언제든 산으로 몇 분 걸어들어만 가면 할 수 있었고, 집에서 마시는 물은 늘 여기저기의 약수터에서 통만 받쳐 놓으면 구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은 아닐까.
이유 없이 뻐근한 몸을 풀겠다며 쉼 없이 더운 물을 몸에 흘려보내는 요즘, 샤워를 할 때마다 생각한다. 내 경험의 편협함을, 오로지 몸이 받아들인 방식으로만 상대를 생각하는 그 편협함을.

마을버스 한담

*
밤 열한 시 쯤 학교에서 나가는 마을 버스를 타면 나오는 방송 두 개가 있다. 하나는 농협의 공익 광고, 하나는 청소년을 대상으로 교육청에서 제작한 충고 한 마디.

*
농협 공익 광고는 "사물이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습니다"라는 자동차 사이드 미러 경고문을 언급하며 당신에게 힘이 될 사람도 생각보다 가까이 있다 말한다.
그런데 말이지, 이 사람아, 그 문구는 가까이에서 언제 들이받을지 모르니 조심하란 거잖아. 안 와닿는다고요.

*
어제 들은 청소년 충고. 앵커는 학벌이 별로이던 자신은 처음에 중책을 맡지 못하고 한직에 밀려나곤 했었는데, 맡은 일을 하며 자리를 지켰더니 결국 지금의 자리에 올랐다며, 청소년 여러분도 당장 기회가 주어지지 않더라도 열심히, 기회가 오면 언제라도 잡을 수 있게, 준비하고 노력하라 말한다.
진리다 이건. 한국의 직장에서 요직이 주어지는 건 학벌순, 연공서열순이라는.

*
덧. 정류장을 향해 오는 버스는 언제나 내등이 꺼져 있어, 운행을 끝내고 차고로 들어가는 중이라는 인상을 준다. 하지만 늘, 알고보면 사람이 너무 많아 내등 빛이 새어나올 틈이 없었던 것 뿐이다. 이 사람들이 다 대학원생은 아닌 것 같은데, 뭘 이리 늦게까지들 하는 걸까.

궁금하고, 때로 그립다

""저기 저 쩍벌남…이 후보인 친구. 선본 이름은 무려 ‘나는 후보다’

학부 때 동아리에서 연을 맺은, 그래서 졸업할 때까지 같이 운동했던 친구는 여전히 학부에 남아 있다. 인문대와 사회대, 사이에 있는 거라곤 법대 하나뿐인데 그것도 멀다면 먼 거리라 거의 만나지는 못하고, 자보나 포스터들을 통해 안부만 가늠하고 있었다.
그 친구가 사회대 학생회 선거에 후보로 나섰다기에, 같이 활동했던, 그리고 지금은 대학원생이 된 다른 친구 하나를 불러다 공개 유세에 지지방문, 아니 구경을 갔다. 두 달 전부터 멀다고 안 가고 있던 사회대 도서관에 들러 책 한 권을 빌리고, 공지된 시각이 10분 넘게 지나도록 유세는 시작하지 않았다.
몇 안 되는 선관위원들, 혹은 그 지인들이 여기저기서 의자며 강연대며를 옮겨 오고서야 유세는 시작되었다. 민중의례―묵념과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으로 시작해 상대 캠프의 유세, 그리고 그 친구의 유세 순으로 진행된 유세에는 한 시간 가량이 걸렸다.
진보 언론 기자 활동을 하고는 있다고 해도 집회보다는 기자 회견에 주로 참석하고, 얼마 전 학교 법인화 반대 집회에 가긴 했었지만 뻘쭘히 서 있다 온 터라 연설과 민중가요가 교차한 그 시간은 꽤나 생경했다.
언제나 그랬듯, 연사는 엄숙하고 청중은 지루했다. 아, 친구가 연설할 땐 친구는 이상하리만치 쾌활했고―그런 주제에 꽤나 버벅거렸지만― 청중은 지루했다.
4년간 학교를 다니면서 과반 학생회 선거와 총학생회 선거, 두 번의 선거 운동을 경험해 보았는데, 과반 선거 때는 거의 이름만 올려놓고 아무 일도 안 했고 총학생회 선거 때는 골방에서 글만 쓴 터라 운동원들의 마음은 겪어 보지 못했다. 그러니까, 운동원으로서의 나의 마음도, 그리고 다른 운동원들의 마음도 말이다.
꽤 긴 연설을 듣다가, 괜스레 공약집을 뒤적거리다가, 노래가 흘러나오면 따라 불러 보기도 하다가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궁금해 하면서. 이들은 어떤 재미를 느끼고 있을지, 어떤 희망을 품고 있을지, 이들은 왜 여기 있는지 궁금해 하면서.
무언가가 바뀔 거란 희망을 갖고 운동한 적은 딱히 없었던 것 같다. 결과야 어떻건, 바꾸고자 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또 모을 수 있을 거란 희망을 품은 적은 종종 있지만 말이다. 그 자리에 있었던 후보들과, 그들을 지지하며 모인 운동원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때로 그립다, 사람들을 만나고 모으는 데에 희망을 품었던 한 때의 내가.

""

내가 학교에 다녔던 때와 다름 없이, 친구는 바이올린 공연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존재만으로 힘이 되는

*
감히 말하자면, 중학교 때, 고등학교 때의, 그리고 대학교 때의 몇몇 친구들에게 나는 존재만으로 힘이 되는 존재다. 그러니까, 굳이 찾아 연락하지 않더라도, 나라는 사람이 어딘가에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언젠가 만날 수 있음을 아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는, 그런 존재 말이다.
거기까지다. 존재만으로 힘이 되지만, 그 이상 딱히 힘이 되지는 않는 존재. 시간 내어 만나 봐야 자신에게 나누어 줄만큼의 기력을 갖고 있지도 않고, 설혹 가끔 갖고 있는 때에 만나게 되더라도 말 한 마디 하지 않아서 나누어 받을 수 없는 존재.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왠지 힘이 될 것도 같지만 실은 별 도움이 안 되는 사람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늘 고민이었다. 아무에게도 말 못할 고민이 있을 때, 아니면 고민은 없지만 괜히 힘들 때 나를 찾는 친구들이 몇 있지만, 늘 나를 찾은 그 친구들은 아무 것도 얻지 못하고 돌아가곤 했다.
말수도, 말재주도 조금은 늘었다고는 해도 거기서 거기, 여전히 나는 존재만으로‘만’ 힘이 되는 사람에 머물러 있다.

*
잃은 사람보다는 버린 사람이 많고, 버린 사람보다는 얻은 사람이 많다. 모임을 엎어가며 사람들과 서로 열변을 토한 적은 몇 번인가 있지만, 싸우거나 다툰 기억은 딱히 없다. 가리지 않고 사람을 만나고, 만나보고 아니다 싶으면 내치고, 나는 잡았으나 상대가 나를 내치면 아쉬워하고, 그렇게만 살았다.
그래서, 애인과의 관계가 아니고서는 큰 트러블을 겪어 본 적이 없다. 사이가 틀어진 경우야 없지 않지만 매번 그저 어쩌다 보니 멀어지게 되는, 그런 형국이었다. 덕분에 작은 트러블이라도 생기면, 그야말로 어쩔 줄 모르게 되고 만다.
때로는, 너무 많은 사람을 버리고 살아 왔나 싶기도 하다. 길에서 마주치면 반가이 인사하지만 실은 아무 것도 공유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버려둔 사람이 너무 많은가 싶기도 하다. 끝내 길에서 인사도자 하지 않는 사이가 되어버릴지 몰랐다 하더라도, 그래도 몇 번쯤은 더 물고 늘어졌어야 했나 하는 생각을 한다.
몇 안 되는 잃은 사람들은 너무도 먼 곳에 있다. 외려 버리고 내친 사람들은 길에서 만나면 아무렇지 않게 인사를 하고 근황을 묻고 수다를 나눈다. 그 모습을 본 한 친구가, 대체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느냐고 물어볼 만큼.

*
피로와 통증을 몸에 달고 살아서, 피곤하다는 말도 아프다는 말도 입에 달고 산다. 사람들이 걱정하는 말을 건네 오면, 하루 이틀도 아니니 괜찮다, 고 답하지만 실제로 나도 괜찮지 않고 상대방도 괜찮지 않을 것이다. 다른 이들이 얼마만큼을 읽어 낼지 몰라도, 나는 내가 입으로 뱉는 것 이상으로 아프고 피곤하다.
몸이든 마음이든 어딘가 아프다고 징징거려 본 것은 최근의 일이다. 최근의 몇 달, 몇 명에게 좀―혹은 많이― 징징거리면서 살았는데, 이제 그것도 좀 질린다. 이야기를 들어 준 사람들은 질리다 못해 지쳤겠지만. 그래서, 이젠 뭘 해야 할까, 신나는 이야기를 하면 좋을까 싶지만 원래가 그런 것은 없는 사람이니.
행복하다, 고 느껴 본 적은 별로 없다. 아주 어릴 때부터, 우울하지 않았던 날도 딱히 없다. 그냥 타고 난 성정이 그러려니 하고 살다가, 최근에 좀 심해져서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해 봤지만 별 효과가 없는 걸 보니 타고난 성정이 그런 게 맞나 싶기도 하다. 전문가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누군가는, 우울하게 타고난 사람은 없다고 단언하더라만.
불행하다고 느껴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별로 없는 것도 아니고 딱히 없는 것도 아니고, 전혀 없다. 괜히 그렇게 한 번 말해 본 적이야 어디서든 몇 번 쯤 있겠지만. 그래서 누가 뭐가 문제냐고 물으면, 모르겠다, 고밖엔 할 말이 없다.
징징거리는 이야기를 들어 준 몇 명―그래봐야 다섯 명도 채 안 되지 싶은데― 중, 두 명이 내게 그런 말을 했다. 말하는 내용을 들어 보면 굉장히 심각한 것 같은데, 말투나 분위기에는 전혀 그런 게 느껴지지 않는다고. 마치 남의 일 이야기하듯이, 너무 담담하게 이야기한다고.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 불행하다고 느껴 본 적이 없는 것인지, 불행하다고 말하면 안 된다고 스스로를 다그쳐 온 것인지 모르겠더라. 성적이 모두인 중고등학교 시절을 나는 그 ‘모든 것’을 가진 자로 보냈고, 고등학생 때도 대학생 때도 학교 밖에서 ‘가진 것 없는 이’들을 만나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으니, 감히 나의 불행을 이야기하면 안 된다고 스스로에게 말해 왔는지도 모를 일이다 싶더라.
정말로 내가, 타인과 나의 불행을 비교하며 스스로에게 엄숙함을 요구해 왔는지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
아무튼 나는, 어떤 이유에서든 늘 힘이 없었고, 아무에게도 힘을 주지는 못하며 살고 있다. 어쩌면 좋을까, 늘 고민만 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