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Susana Khalil, “Palestine, When Homosexuals Were Homophobic,” Orinoco Tribune, 2025.08.29.

그리 오래지 않은 시절의 일이다. 아버지는 아들이 동성애자인 걸 알게 되면 제 목숨을 끊었다. 제 아들을 죽였다. 동성애자들이 자살하기도 했다. 사회와 가족으로부터 부정 당해서도 그랬지만 스스로를 부정해서도 그랬다. 그저 사랑받지 못하는 문제가 아니라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하는 문제이기도 했다. “나는 나를 사랑하지 않아…”
지구의 동서남북, 거의 모든 곳에서 그랬다. 반동성애에 있어 지구인이 하나였다. 과거 천 년만의 일이 아니다. 더 이전에도 그랬고 꽤 최근에도 그랬다.
오늘날은 많은 사회에서 동성애가 존중 받는다 — 고귀하고 고상하고 마땅하고 변증법적인 진전이다. 다른 곳에서는 존중까지는 아니고 그저 용인 받는다. 비밀리에 행해지는 곳도 있다. 어떤 곳에서는 광장에서 잔인하게 교수형 당하는 비인도적인 죽음의 벌을 받는다.
반동성애는 인간이 견지해야 할 가치로 간주되었고 [동성애는] 부패, 타락, 인간 실격으로 여겨졌다. 동성애를 모욕하고 조롱하고 혐오하는 것이 스스로를 재확인하는 방법이었다. 다들 아는 이야기는 이 정도로 해 두자.
한 동성애자 친구와 돌아가신 부모님들을 추억하며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그가 자신은 사춘기 시절에 동성애라면 마냥 치를 떨고 조롱했다고 말했다. 커밍아웃한 후에는 부모라면 치를 떨게 되었다. 그는 — 울면서 — 부모님께 이해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고 말했다. “나는 그들에게 알려주지 않았어. 그저 그들을 비난했지.” 그는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을 거쳐 이제는 자신의 잘못을 안다. 그들은 종교인이 아니었어 — 사랑 넘치고 열려있고 존중하고 다정하고 따뜻하고 활기차고 근면하고 열정적이고 점잖고 언제나 단정하고 교양 있는 분들이었지. 물론 나를 공격하고 모욕하고 내게 상처를 줬어. 하지만 모든 것을 반드시 단번에 다 받아들여야 하는 건 아니잖아, 하고 그는 — 울면서 — 말했다. 그는 그들에게 강요하기도 했다. 자신의 고통으로 그들의 목을 조르고 싶었다. 동성애 앞에서 부모는 못된 아이가 된다. 사회의 악마에 겁은 아이가 된다.
그의 이야기를 듣자니 언젠가 CNN에서 젊은 아랍계 이집트인 사회학자에서 “아랍인들은 언제쯤 동성애 권리를 위해 싸울까요?” 하고 물었던 것이 떠올랐다.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랍인들이 결정하게 두세요 — 꼭 서구의 리듬과 요구에 복종하고 맞추어야 하는 건 아니에요. 아랍 세계에서는 그게 우선 순위가 아닙니다. 그리고는 질문을 덧붙였다. “서구는 언제쯤 아프리카를 착취하고 이스라엘 아파르트헤이트를 지지하기를 멈출까요?”
카리스마 있는 나치-시온주의 인사이자 작가, 코미디언, 배우, TV 쇼 진행자인 빌 마는 몇 년 전 어느 팔레스타인 여성에게 이렇게 물었다. “세계는 언제쯤 가자에서 게이바를 볼 수 있게 될까요?”
우리는 인간적 가치가 어떻게 비인간화의 수단이 되는지 안다 — 역사는 늘 그랬다. 종교, 예술, 과학, 학문, 문학, 고국, 페미지금, 민주주의, 세속주의, 표현의 자유, 성적 다양성, 환경주의, 인권, 정보권, 평화, 인본주의, 인종주의, 그 외의 여러 가치 있는 대의들까지. 오늘날 이런 가치들, 보루들은 종종 우리 시대의 제국적, 시온주의-식민주의적 파시즘의 가학적 콘돔이 되곤 한다.
그런 한편, 나는 동성애라는 어마어마한 금기가 “해방”되는 모습을 보았다. 하지만 유럽중심 식민적 시대착오에[역주1] 맞선 팔레스타인 대의는 그러지 못하고 있다.
퀘벡 대학교의 한 동성애자 교수는 게이 표현이 몬트리올에 가져다 주는 경제적 이익을 기록했다. 예컨대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재즈 페스티벌이자 일자리와 회완 수입 창출원인 몬트리올 재즈 페스티벌도 게이 주간에 밀려났다. 경제적 기여도가 그만큼이나 큰 것이다. 이윤은 관용, 포용, 다원성, 민주주의의 가치를 도구화하는 데 복무한다.
현재 팔레스타인, 가자에서 인종학살이 벌어지고 있지만 — 누차 말하건대 — 인종학살은 새로운 일이 아니다. 새로운 것은 이번에는 그것이 바깥에 보인다는 점이다.
한때 기독교 공동체를 혐오했던 유럽, 유대교 공동체를 혐오했던 바로 그 유럽이 — 나는 유대민족이 아니라 유대교 공동체라고 말하는데, 유대민족이라는 관념은 말도 안 되는 유럽중심적 술책, 사기이기 때문이다 — 우리 스스로를 탈식민화한다. 유럽 내 유대교 공동체에 대한 홀로코스트, 유럽인에 대한 유럽인의 학살 — 한쪽은 유대교, 한쪽은 기독교 — 이후, 오늘은 그들은 유럽중심적인 경각심 — 이 얼마나 멋진지! — 을 갖고 있다. 하지만 유럽 특유의 탐욕을 부리며 우리에게 반유대주의와 종교 간의 관용을 가르치려 든다. 유럽은 — 예나 제나 — 제 어머니의 입에 사정한다 …
요점으로 돌아가 보자.
맞는 말이다, 가자에서 동성애는 어마어마한 금기다. 뉴욕에서 — 몇백 년 전이 아니라 80년대에 —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다. 현재, 기만적이게도 이스라엘이라 불리는 유럽중심 식민적 시대착오가 정당한 동성애 대의를 파시즘을 포장하는 광고판으로 쓰는 것은 — 전략적이고 유용하고 실용적이라고는 해도 — 변태적이고 가학적이다. 이 전략은 유효해서, 우리가 깊이 생각하지 않게 만든다. 우리는 진실되지 않고 대중영합적이고 겁쟁이이고 기계적이고 기회주의적이고 분별 없기 때문이다.
고상한 게이 대의를 식민주의에, 1948년부터 이어진 수천 년 된 선주민족을 절멸시키는 과정에 맞서 싸우는 한 민족을 악마화하는 데 씀으로써 그들을 금지된 존재로 만들었다. 그저 고향땅에서 쫓겨나야 하는 민족이 아니라 — 아무리 동성애가 팔레스타인 선주민들 사이에서 금기라고 해도 — 역사 자체에서 쫓겨나야 하는 민족으로 만들었다. 고귀한 게이 대의를 이용하는 것은 유럽중식 식민주의에 득이 되는 일이다. 거의 예술적인 폭정이다. 이것이 통하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인도주의적 이미지, 겉모습에 너무도 신경 쓰기 때문이다. 우리는 미숙한 범죄자 끄나풀들이다.
게이 대의를 이용해 인종학살을 정당화하는 것, 가자에서는 동성애자들이 교수형 당한다고 말하는 것은 이 사이코패스들, 프로파간다계의 요제프 멩겔레들, 프로파간다계의 제프리 엡스타인들, 프로파간계의 칼리굴라들의 교묘한 프로파간다다. 나치-시온주의 병사 하나가 가자에 들어가 기만적이게도 이스라엘이라 불리는 식민의 깃발을 들어올렸다. “동성애혐오 없는 가자”라고 적힌 깃발이었다.
우리는 분석하기보다는 기호에 휘둘린다. 오늘날에는 가치 있는 게이 대의를 지지하는 것 역시 하나의 상표다 … 서구가 동성애에 대한 의견을 바꾸더니 우리에게도 그 변화를 따르라고 하는 것을 생각해 보라.[역주2]
나는 가자에 열한 번 다녀왔다. 평생에 가장 큰 분노를 거기서 겪었다. 나의 하마스 형제들, 특히 여성들과 논쟁을 벌이면서였다. 그들은 내게 베일을 쓰라고 하지 않았다. 나는 나 자신을 표현하고 그들을 비판할 수 있었다. 가자에 게이라서 교수형을 당하는 사람은 없다.
그래, 저 식민적 시대착오에는, 저 나치즘에는, 세계 최대의 게이 자긍심 행진이 있다. 기만적이게도 이스라엘이라 불리는 유럽중심 식민적 시대착오가 가자-팔레스타인에서 벌이고 있는 인종학살 앞에서 게이 대의를 들먹이는 것은 품위 없는 비난이자 굴종이다 — 진보도 아니고 아름다운 일도 아니다 … 서구처럼.
21세기 오늘날에 식민주의에 맞서 싸우고 있는 저 셈계 팔레스타인 선주민족은 흠 잡을 데 없는 민족, 완벽한 민족이 되기를 강요 받는다. 실상 서구를 닮아야만 한다 — 정말이지 꼼꼼한 모욕이다.
예수는 팔레스타인이었다 — 유다도 그랬다. 아니, 나의 팔레스타인 민족은 흠 잡을 데 없는 민족이 아니다. 나는 열 살 때 어느 팔레스타인인에게 성폭력을 당했다. 나는 인류에게 호소한다 — 나는 인류에게 빚이 있다. 오늘날, 인종학살이 벌어지고 있는 맥락에서, 우리는 흔들림 없이 단호해야 한다. 조종 당하지 말자. 유럽중식 식민 시온주의 시대착오가 우리에게 가해지는 부정의를 이용하게 두지 말자. 스스로를 다잡자. 기만적이게도 이스라엘이라 불리는 저 역겨운 시온주의-식민 나치즘이 나무랄 데 없는 보기 좋은 멍청이가 되지 말자.
팔레스타인인들이 아니라 팔레스타인 대의를 옹호하자.
게이들이 아니라 게이 대의를 옹호하자.
이 기회에 분명히 밝혀 둔다. 나의 투쟁은 강에서 바다까지 셈계 팔레스타인 선주민의 완전한 해방을 위한 것이다. 추상적인 말이 아니다. 식민자를 마주한 선주민족들의 고귀한 역사적 위업은 언제나 맞서 싸워 그것을 무너뜨리고 스스로를 해방하는 것이었다. 나는 끝이 — 기만적이게도 이스라엘이라 불리는 유럽중심 식민적 시대착오의 철폐가 — 올 것임을 믿는다.
↥역주1 이 표현과 아래의 “유대교 공동체”에 관한 저자의 관점은 〈팔레스타인: 어휘를 탈식민화하기〉에 서술되어 있다.
↥역주2 이스라엘의 동성애관 변화에 대해서는 〈시온주의가 동성애를 이용하는 데에 처벌 제도는 어떤 역할을 하는가〉(무사 샤디디, 2018)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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