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째서 폭격이 쏟아지는데 아이를 낳는 거지?” ― 가자의 출산으로 생각하는 신앙과 생을 계속한다는 것의 의미 (하디 하니, 2026)

원문: ハディ ハーニ, 〈「なぜ爆撃の中で子どもを産むの?」 — ガザの出産から考える信仰と生き続けることの意味〉, Olive Journal, 2026.05.13.

목차

들어가며

“어째서 폭격의 한가운데에서 아이를 낳는가?

“피임을 하면 될 텐데.”

“이런 상황에서 아이를 낳는 건 무책임하지 않나.”

가자에서의 보도를 접한 지지자나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주위에서 이런 질문을 받는다는 — 혹은 스스로 이런 질문을 하게 된다는 — 이야기를 종종 듣습니다.

이런 질문은 일견 ‘합리적’으로 들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이런 질문의 전제 자체에,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가치관 — 아이를 낳을지 말지는 경제적·환경적 여건을 고려해 개인이 득실을 계산해 결정할 일이라는 — 이 숨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번 기사에서는 가자의 여성들이 어째서 전쟁 중에 아이를 낳는지, 그 배경을 세 가지 층위에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지난 회에 공개한 「팔레스타인인들은 어째서 도망 가지 않는가?」의 연계 기사로서, 지난 회와 겹치는 부분은 간략히 참고하는 한편, 이번에는 ‘태어난다는 것’과 ‘계속 낳는다는 것’의 의미에 초점을 맞춥니다.

이번 기사의 요점

  • 가자에서는 피임약이나 안전한 출산을 위한 의료 접근성이 극도로 제한되어 있고, ‘낳지 않는다’는 선택을 하는 것 자체가 여의치 않다
  • 나크바 이래로 “끈질기게 존재하는 것’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저항의 의미를 갖게 된 배경
  • 이스람의 생명관에서 아이는 신의 은혜(리즈크)이기에, 양육의 책임은 최종적으로 신에게 있다는 사고방식이 있다
  • 단, ‘낳는 것 자체가 저항’이라는 단순화는, 팔레스타인 여성들 스스로도 비판한다. 이 점은 섬세하게 논의해야 한다

1. 애초에 ‘선택할 수 없다’ — 피임과 안전한 출산에의 접근성

‘피임하면 되지 않느냐’는 물음에 답하려면 우선 가자에서 피임이나 가족계획에 접근하는 것 자체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알아야 합니다.

가자는 봉쇄 하에 있으며, 2023년 10월 이후 인도적 지원 물자의 반입이 극도로 제한되어 의약품 전반이 심각하게 부족합니다. 그 가운데에는 물론 피임약이나 피임기구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국제가족계획연맹(IPPF)은 2023년 11월 당시 ‘가자에서는 피임약이 극도로 부족해 여성들이 피임약 한 알을 나누어 먹는다’고 보고했습니다. IUD(자궁 내 장치)를 장학찬 여성은 적절한 관리를 받을 수 없어 출혈이나 합병증을 겪고 있다고도요.

원래 봉쇄 이전부터 가자에서는 가족계획 서비스에 만성적인 문제가 있었습니다. 2023년에 UNFPA(국제연합 인구기금)에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팔레스타인에서는 예산부족으로 인해 정부의 기초의약품 목록에 포함되는 피임약마저 종종 품절되곤 해, 여성들의 선택지가 제한적이었습니다. 게다가 봉쇄 강화와 전쟁이 겹치면서 상황이 최악으로 치달았습니다.

그럼 ‘낳기’ 쪽은 어떨까요. 그쪽은 더욱 심각합니다.

가자가 봉쇄된 후 여성들은 마취로 소독도 못한 채 제왕절개를 받고 있습니다. 국제NGO 액션에이드는 전쟁 초기 단계부터 이런 증언 여럿을 모으고 있습니다. 국제구조위원회(IRC)도 2024년 4월 보고에서 마취 없이 제왕절개를 해야 했던 여성의 사례를 확인했습니다.

모자사망 위험도 급증하고 있습니다. 국제연합 인권최고대표사무소(OHCHR)는 2024년 후반 기준으로 가자 여성의 임산부 사망자 수 및 유산 수 모두 전쟁 전의 3배에 이르렀다고 보고했습니다. 신생아 사망도 증가하고 있습니다. 병원 자체가 표적이 되어, 2023년 12월에는 가자 최대의 난임치료클리닉이 공격을 받아 배아 4,000개 이상, 정자·난자 샘플 1,000개 이상이 사라졌습니다.

세이브더칠드런에서 2024년 7월에 보고한 대로, 일부 여성들은 아기를 지키려 스스로 진통을 유발하는 극단적인 방법까지 쓰는 처지에 내몰렸습니다. 병원이 안전하지 않다면 적어도 집에서 낳을 수 있도록 시기를 조절하고 싶다, 그런 필사적인 판단입니다.

요컨대, ‘피임하면 되지 않느냐’는 물음은 피임약을 구할 수 있다는 전제, 출산을 할지 말지 차분히 생각할 수 있다는 전제, 안전한 의료시설을 이용할 수 있다는 전제 — 이런 전제가 전부 성립하는 사회에 사는 사람의 물음입니다. 가자의 여성들은 그 중 어느 것도 누리지 못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UNFPA에서는 가자 전체에 전쟁이 시작된 2023년 10월 시점에 이미 약 50,000명의 여성이 임신중이었던 것으로 추정합니다. 전쟁은 갑자기 시작되었습니다. 여성들이 전쟁을 예상하고 임신한 것이 아닙니다. 그녀들에게 ‘낳지 않는다’는 선택은 물리적으로 이미 불가능했습니다.

‘그럼 섹스를 안 하면 되지 않느냐’는 물음에 관해

여기까지 듣고는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 ‘피임을 못 한다면 성교 자체를 삼가면 될 텐데’라고.

이런 질문은 조금 신중히 대할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이것은 아마도 전시 하에 있는 사람들의 관계성을 매우 좁게 상상하면서 하는 질문입니다. 폭격과 봉쇄와 기아의 한복판에서 부부나 파트너가 서로 맞닿는 것, 껴안는 것, 성적으로 친밀해지는 것 — 이런 것은 ‘사치’도 ‘자제해야 할 일탈’도 아닌, 사람이 사람으로서 살기 위해 거의 마지막으로 남은 영역입니다. 집을 파괴 당하고 가족을 잃고 내일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자신을 사랑하는 누군가와 몸으로 맞닿을 수 있는 경험은 종종 ‘자신이 아직 살아 있다’, ‘자신이 아직 인간이다’라는 감각을 되찾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도 합니다. 이것을 ‘조심성 없다’, ‘무책임하다’고 일축하는 시선은 전쟁을 겪어본 적 없는 쪽에 생기기 쉬운 감수성 차이입니다.

둘째, 보다 구조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전시 하의 팔레스타인인에게 외부에서 ‘섹스를 그만하라’고 요구하는 것 자체가 실은 일종의 생명정치 — 지배하는 쪽이 지배 당하는 쪽의 신체·성·생식을 관리하려 하는 권력 작용 — 을 반영하는 일일 수 있습니다. 앞에서 말한 MERIP의 글에서도 점령 하의 신체와 재생산은 늘 정치의 대상이 되어 왔다고 지적합니다. ‘너희가 성적으로 자제해야 한다’는 말은 상대의 인격이나 존엄의 영역을 침범해 무언가를 명령하는 것이라는 점에, 우리가 좀 더 예민해져야 합니다.

셋째, 이슬람 윤리의 관점도 있습니다. 꾸란과 하디스(예언자 무함마드의 언행록)의 전통에 따라 부부 간의 성적인 친밀성은 ‘합법적인 기쁨’이고 기피해야 할 것이 아니며, 오히려 적극적으로 긍정됩니다. 또한 피임 자체는 이슬람 법학에서 조건부로 허용되어 온 역사적인 논의가 있고 (고전기부터의 아즐, 즉 질외사정을 둘러싼 논의 등) 현대의 주류 이슬람 학자 다수도 의학적·경제적·상황적 필요에 따른 피임을 인정합니다. 요컨대 가자의 여성들이 피임을 못하는 것은 신앙 상의 금기 때문이 아니라 봉쇄 하에서 피임약·피임기구를 구하기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섹스를 안 하면 된다’는 말은 이 세 가지 층위 — 전시에 친밀성의 의미, 외부에서 성을 관리하는 일의 폭력성, 신앙적·실천적으로 피임이 인정된다는 점 — 를 모조리 생략하고 생식의 책임을 팔레스타인인들에게만 전가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그러므로 이 물음에는 ‘안 하지 않을 거고, 안 할 필요도 없다’고 답하는 쪽이 오히려 성실합니다.

2. ‘계속 낳는다’는 것의 정치적 의미 — 수무드와 인구운동

1장에서는 ‘낳고 싶지 않아도 낳는 경우가 있다’는 현실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역으로, 곤란한 상황에서도 ‘그래도 낳기를 택하는’ 팔레스타인인들의 목소리 또한 분명히 존재합니다.

저번 회 기사에서 자세히 소개한 수무드(صمود、끈질기게 버틴다는 뜻) 개념은 ‘낳기’라는 행위와도 깊이 이어져 있습니다.

나크바 이후의 ‘끈질기게 존재한다’는 행위

1948년 나크바로, 팔레스타인인은 인구의 절반이 넘는 70만 명 이상이 고향에서 쫓겨났습니다. 팔레스타인 마을 531곳이 파괴되었고 토지의 약 78%를 잃었습니다. 이런 경험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수적으로나 존재적으로나, 사라지지 않도록 끈질기게 버텨야만 한다’는 절박한 인식을 새겨넣었습니다.

팔레스타인문제백과사전 palquest는 나크바 이후 팔레스타인인들의 높은 출산율을 “조직적인 출산 장려 정책의 결과가 아니라, ‘이 땅에 남아 버티려면 수가 필요하다’는 집단적 무의식의 발로”로 설명합니다. 1960-1965년 경에는 이스라엘 국내의 팔레스타인 여성 1인 당 출생아 수가 8.1명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은 당시 기준으로도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에 속했습니다.

이 ‘수에 의한 저항’은 일방적으로 낭만적으로 이야기할 것은 아닙니다. PLO(팔레스타인해방기구)가 1970-1980년대에 수무드를 국민적 상징으로 내걸었던 시기, 그 중에는 ‘인구 투쟁’을 위해 여성들의 재생산 능력을 동원하는 측면도 있어, 팔레스타인 내부에서도 ‘여성을 재생산 도구로 취급한다’는 비판이 나왔습니다 (이점은 뒤에서 다루겠습니다).

‘재생산 인종학살’에의 응답

한편, 현재 가자의 상황은 ‘낳는 일’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커지게 하고 있습니다.

미국을 거점으로 하는 중동연구평론지 MERIP에 실린 가자 출신 여성권리활동가 하라 쇼만 씨의 글 「Israel’s War on Reproduction in Gaza가자 재생산에 대한 이스라엘의 전쟁은 가자의 재생산 능력에 대한 이스라엘의 공격을 ‘리프로사이드(reprocide)’[역주1] — 한 집단의 재생산 자체를 표적으로 삼는 조직적인 폭력 — 로 분석합니다. 쇼만 씨가 드는 사례는 안타깝습니다. 어느 아버지는 2024년에 공중 폭격으로 여섯 명의 아이를 잃은 직후 카메라 앞에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 “그들은 저희 아이들을 죽입니다. 우리가 살아남지 못하게요. 그러니 우리는, 절멸 당하지 않도록, 또 아이를 낳습니다.”

의사를 찾아온 남성의 말도 인용되어 있습니다 — “살해 당하기 전에 아이를 하나 갖고 싶습니다.”

이런 응답을, 쇼만 씨는 “앗-수무드 무카와마(الصمود مقاومة)” — 직역하면 ‘남아서 버티는 것이 저항(이다)’이라는 아랍어 구호 — 로 요약합니다. 영어로는 “existence is resistance존재가 저항이다”로 의역하는 경우가 많지만 원어의 “صمود(수무드)”는 저번 회 기사에서 다룬 바로 그 개념이고,[역주2] “مقاومة(무카와마)”는 “저항”을 뜻합니다. 남아서 버티는 것, 그것 자체가 저항이다 — 그런 함의을 잃지 않도록 여기서는 직역에 가까운 형태로 번역했습니다. 가자의 나세르종합병원 공보 담당 무함마드 사크르 의사는 2024년 8월, 국제사회를 향해 낸 성명에서 “응급치료 부문에 의료물자가 고갈되고 있어, 우리는 현재 가자의 팔레스타인 핏줄을 지키기 위해 아동과 여성을 구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수무드가 이미 그렇듯, 이것은 군사적인 무장저항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계속 숨을 쉬고, 계속 밥을 먹고, 계속 아이를 기르는 것, 즉 ‘생을 계속하는 것’, 그것을 저항의 행위로 여기는 관점입니다.

아기의 이름에 담기는 의미

이것이 가장 상징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태어난 아기에게 이름을 붙일 때입니다.

온라인 신문 The New Arab새 아랍2024년 기사는 이집트 국경 근처 천막에서 테어난 여자아이 사마(سماء, 하늘)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아버지인 사메르 씨는 처음에는 아이샤(살아가는 사람)나 아야(기적/징표)라는 이름을 붙일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병원으로 몸을 피하던 중에, 주위의 모든 것이 파괴되어 희망이라곤 찾을 수 없었던 그때, 문득 하늘을 올려다 보니 청명한 푸른 빛이 넓게 펼쳐져 있었습니다.

“폭격과 살육의 한가운데에서, 유일하게 맑고 더럽혀지지 않은 것이 하늘이었죠. 그래서 딸에게 사마라는 이름을 붙였어요.

사메르 씨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기사에 따르면, 가자에서는 자신의 아이에게 “가자”라는 이름을 붙이는 부모도 많다고 합니다. 가자시에서 더없이 혹독한 학살을 겪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1948년 경계선 안에서 탈출해 온 가족의 후손들도 그 이름을 택합니다.

순교한 자신의 아버지를 기리며 아들에게 아티야(عطية, 선물, 은혜)라는 이름을 붙이는 아버지도 있습니다.

The New Arab은 이런 흐름에 크게 두 가지 갈래가 있다고 정리합니다. 하나는 ‘투쟁’, ‘자유’, ‘해방’ 등 정치적인 의미를 직접 표현하는 전통적인 흐름이고 (팔레스타인에는 옛날부터 니다르(투쟁), 후리야(자유), 타흐리르(해방) 같은 이름이 쓰이고 있습니다), 또 하나가 사마(하늘), 아티야(은혜) 같이 전쟁통에서도 시적으로, 희망을 담아서 짓는 흐름입니다. 두 흐름의 공통점은 이름 짓기가 미래에 대한 믿음의 표명이며 ‘목숨을 빼앗긴 누군가’의 기억을 오래도록 이어가는 일이기도 하자는 점입니다. ‘가자’라는 이름을 얻은 아이는 어디에 가도 가자와 함께 살아갑니다. ‘아티야’라는 이름을 얻은 아이는 순교한 할아버지의 존재를 매일 상기하게 됩니다. 태어난 아이의 이름은 미래를 향한 작은 선언이자 과거가 맡긴 것이기도 합니다.

3. 신앙의 관점에서 보는 ‘낳기’라는 일 — 리즈크와 아마나

지금까지 본 ‘선택지를 빼앗긴 현실’과 ‘끈질기게 존재하겠다는 의지’ — 이 둘의 깊숙한 곳에는, 1·2절로는 다 말할 수 없는, 생명에 관한 신앙적인 세계관이 흐르고 있습니다.

아이는 ‘리즈크(رزق)’ — 신이 주신 은혜 — 다

저번 기사에서는 이슬람에 있어 생명은 신이 맡겨둔 것(아마나, أمانة)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다는 점을 소개했습니다. 이 ‘생명은 신이 맡겨둔 것’이라는 세계관은 출산의 맥락에서 또 하나의 형태로 나타납니다. 그것이 리즈크(رزق)라는 개념입니다.

리즈크는 번역하자면 ‘양식’, ‘은혜’, ‘부양’입니다. 꾸란에 123번 등장한다고 하는 중요한 말로, 먹을 것이나 부만이 아니라 건강, 가족, 지식, 그리고 아이 자체도 리즈크에 포함된다고 해석됩니다.

그리고 꾸란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궁핍의 두려움으로 너희 자손을 살해하지 말라 하나님이 그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나니 너희에게도 마찬가지라 그럼으로 그들을 살해하는 것은 큰 죄악이라 (제17장 31절)[역주3]

이 구절은 고대 아랍에서 행해졌던 영아살해를 금지하는 맥락에서 계시된 것이지만 ‘너희가 아이를 기르는 것이 아니다. 신이 아이와 너희 모두를 기르신다’라는 핵심 사상은 오늘까지도 계승되고 있습니다. 타프시르(꾸란 주석)의 전통에서도 강조되는 것은 ‘아이의 부양을 먼저 말하고 부모의 부양을 뒤에 둔다’는 순서의 깊은 의미 — 신은 아이의 리즈크부터 보장한다는 — 입니다.

이것은 일본의 독자에게는 조금 따라가기 어려운 감각일 수도 있겠습니다. 일본 사회에서는 ‘키울 여건이 마련된 후에 아이를 갖는다’는 것이, 마땅한 ‘책임 있는 태도’로 여겨지니 말입니다. 하지만 이슬람 세계관에서는 아이의 양육을 자신의 경제적만으로 확실히 다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일종의 오만으로 여겨집니다. 최종적으로 아이를 기르는 것은 신이며, 인간은 그것을 위해 수단과 노력을 다하는 입장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런 발상은 전쟁통 같은 ‘도무지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 아이를 낳는 일에의 저항감을 근본적으로 누그러뜨려 줍니다.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것은 평소에도 마찬가지다, 하는 감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내다볼 수 있는 범위는 애초부터 얼마 되지 않고, 그것을 넘어선 곳에서 아이를 보살피는 것이 신이라는 것입니다.

‘신의 저울’과 인간의 시련

저번 회 기사에서 소개한 시련(이브틸라, ابتلاء)과 인내(사브르, صبر)의 감각도 중요합니다.

전시 하에서의 출산은 분명 너무도 가혹한 시련입니다. 하지만 신자들 사이에는 그 시련을 ‘신앙을 깊어지게 하는 기회’, ‘신 가까이 가기 위한 통로’로 여기는 관점이 있습니다. 국제연합에서 공개한 가자에 사는 어머니 알라 씨의 수기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 “미사일과 폭격 소리가 내 기쁨보다 더 컸다. 하지만 나는 이 자그마한 아가와 함께 어떤 어려움도 이겨내리라 다짐했다.”

이것은 단순한 낙관이 아니라 시련의 한가운데에서 오히려 ‘삶의 의지’를 확인하는, 신앙에 기초한 자세입니다.

팔레스타인의 기독교인들 ― 희망으로서의 출산

그런데, 저번 회에 언급했듯 팔레스타인에는 기독교도 커뮤니티도 존재하며, 독자적인 해방신학을 발전시켜 왔습니다. 2025년 11월에 발표된 카이로스팔레스타인의 제2문서 「인종학살 시대의 신앙」은 현재의 상황에 대한 새로운 신학적 응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역주4]

그중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희망은 항복이 아니다. 희망은 살아 있는 저항 행위다 ― 죽음을 강요하는 현실을 단호히 거부하고 갖가지 부정의와 점령에 맞서고 항거하는 일이다.

또한 이 문서는 ”신앙과 희망을 놓지 않는 것 자체가 저항이다. 기도가 저항이다. 성소를 지키는 것이 저항이다”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팔레스타인의 기독교인들에게 있어, 로마 제국의 점령 하에 십자가에 걸린 예수의 ‘부활’은 희망신학의 중심입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시작이기도 하다 ― 그렇게 믿는 세계관 속에서, 전시 하에서의 출산은 그야말로 그 ‘부활의 희망’의 구현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무슬림의 ‘리즈크’, 기독교인의 ‘희망’ ― 말은 다르지만 양쪽 모두 ‘인간의 이성과 계산을 넘어선 곳에서 삶이 긍정된다’라는 확신을 토대로 하고 있습니다.

4. ‘낳는 것이 저항’이라는 말에 팔레스타인인 스스로가 제기하는 의문들

그런데 글을 마치기 전에 반드시 말해두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팔레스타인 여성은 전쟁 중에도 영웅적으로 계속 아이를 낳고 있다’, ‘출산이야말로 가장 큰 저항이다’ ― 이런 식의 말을 실은 팔레스타인인 스스로가 비판하고 있습니다.

앞에서도 인용한 하라 쇼만 씨는 MERIP에 실은 예의 글에서, 그리고 「가자에서의 리프로사이드」라는 제목의 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2024년 8월에 나는 가자의 신혼 커플들에게 가능하면 임신을 미루라고 호소하는 글을 올렸다. 삶을 믿지 않아서가 아니라 내가 목도하고 있던 견딜 수 없는 고통으로부터 여성들을 지키고 싶어서였다. 제노사이드의 논리를 반복하는 일일까 두려웠지만, 동시에, 이런 상황에서 재생산을 하지 않기를 택하는 것도 저항과 생존의 행위가 될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이런 발언은 매우 중요합니다. 쇼만 씨는 ‘낳는 것’만을 저항으로 여기고 ‘낳지 않는 것’을 패배로 간주하는 단순한 이분법을 명확히 거부합니다. 그리고 전쟁 중에 아이를 갖지 않는 선택도 그 자체가 여성의 주체적인 판단이며 이는 반드시 존중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팔레스타인 여성들 중에는 바로 지금 임신·출산을 경험하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편, 재생산을 유보하기를 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피임을 하고 싶지만 못하는 사람, 아이를 낳고 싶지만 유산해버린 사람, 여러 아이를 잃은 후 또 한 번 출산을 선택하는 사람, 그리고 출산을 한 번 더 할 수는 없다고 느끼는 사람 ― 그런 한 사람 한 사람의 선택과 아픔은 모두가 제각기 고유한 것이며, ‘당신의 선택은 저항이다/패배다’라고 바깥에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오히려 여성들의 주체성을 갉아먹습니다.

이 점은 앞에서 다루 PLO 시대의 수무드 비판과도 상통합니다. “여성의 자궁을 팔레스타인의 무기로 삼는다”는 언설(아라파트 의장의 발언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은 여성의 몸을 국민재생산의 도구로 취급한다는 점에서 팔레스타인 여성들로부터 거듭 반문을 받아 왔습니다.

그러므로, ‘왜 전쟁 중에 아이를 낳느냐’는 질문에 답하는 가장 성실한 태도는 ‘팔레스타인 여성들은 모두 아이를 낳고 싶어한다’고 단순화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들 각자가 각자의 상황에서 내리는 판단을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경청하는 것입니다. 지지자로서 우리가 할수 있는 최소한은, 그 다양성을 축소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나가며 ― 질문을 바꾸기

‘왜 폭격 중에 아이를 낳는가’ ― 이 글의 첫머리에 내건 이 물음에 하나의 답은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의 답을 찾으려는 것 자체가 이미 모종의 폭력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글을 통해 분명해진 것이 딱 하나 있습니다. 바로 ‘아이를 낳을지 말지는 개인이 경제적 합리성으로 결정하는 사적인 선택’이라는 우리에게 익숙한 전제가 세계 모든 곳에서 똑같이 공유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가자의 여성들은 우선 ‘낳지 않는다’는 선택지를 물리적으로 빼앗긴 상황에 있습니다. 또한 일부 여성은 자신의 출산을 나크바 이후의 ‘끈질기게 존재하기’라는 집단적 행위 속에 놓습니다. 게다가 그 깊은 곳에는 아이를 신의 은혜(리즈크)로 받아들이고 최종적인 부양은 자신들의 경제력이 아니라 신에게 맡긴다는 이슬람의 신앙, 그리고 고난의 한복판에서 오히려 생을 긍정하는 기독교의 희망신학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위에, ‘낳는다/낳지 않는다’라는 개개 여성의 주체적인 판단을 존중하라는, 당사자들의 목소리가 있습니다.

저번 회 기사에서 다루었던 ‘도망치지 않는다’라는 선택과 이번 회의 ‘낳는다’라는 선택 모두,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하루하루의 실천 속에서 택하는 수무드의 발로입니다. 폭격 속에서 라마단 장식을 거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스크가 있었던 자리에서 예배 행렬을 이루는 것과 마찬가지로, 불타버린 올리브 나무 곁에 묘목을 심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합리성을 척도로 해서는 이해하기 어려워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 척도는 자신의 생존을 다른 이와 교섭할 필요가 없는 입장에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점도 유념해야 하겠습니다.

‘어째서 이런 상황에서 아이를 낳느냐’는 질문에는 이렇게 답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 “낳지 않는다는 선택지가 있는 당신의 세계와 그런 선택지를 빼앗긴, 그럼에도 오히려 ‘끈질기게 존재하기’를 택하는 세계는 서로 다른 문법으로 돌아간다. 그 문법의 차이를 마주하는 것이 팔레스타인을 이해하는 첫걸음이다”라고.


참고 문헌


주석

역주1 재생산을 뜻하는 리프로덕션reproduction과 죽임을 뜻하는 접미어 사이드-cide를 조합한 말이다.

역주2 “수무드란 ‘꿈쩍도 하지 않음’, ‘인내’, ‘남아서 버티기’를 뜻하는 말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는 그저 단어가 아니라 삶의 방식 자체입니다. 1948년의 나크바(대재앙)으로 70만 명 이상이 고향에서 쫓겨난 경험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두번 다시 이 땅을 떠나서는 안 된다’는 깊은 교훈을 새겼습니다.
수무드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하나는 ‘정적인 수무드’ — 그저 그곳에 계속 있는 것 — 입니다. 또 하나는 ‘저항의 수무드’ — 점령 하에서도 학교를 열고 밭을 일구고 집을 고쳐짓는 것 — 입니다. 무너지면 다시 짓습니다. 불타버린 올리브 나무 옆에 새 묘목을 심습니다. 일상을 살아가는 것 자체가, 쫓아내려 하는 힘에의 저항이 됩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 사이에서 자주 들을 수 있는 말로 ‘알-하야트 라짐 타스타므루(الحياة لازمتستمر) —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 — 라는 말이 있습니다.
수무드의 상징으로 알려져 있는 것이 올리브 나무입니다. 몇백 년이나 되는 시간에 걸쳐 대지 깊이 뿌리를 내리는 올리브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자신들과 땅의 관계를 이야기할 때 자주 쓰는 이미지입니다.”

역주3 『성 꾸란 의미의 한국어 번역』, 사우디아라비아: 파하드 국왕 꾸란 출판청, 이슬람력 1422력, 508쪽.

역주4 2026년 9월 5일 현재, 사이트 유지보수 작업이 진행 중이라 본문에 링크된 페이지에 접속할 수 없다. “해방신학”은 여기(한국어), 제2문서는 여기(영어)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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