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우리의 삶을 보도한다 (카삼 무아디, 2026)

원문: Qassam Muaddi, “Palestine Letter: Reporting our lives, not your ideology,” Mondoweiss, 2026.09.09.

내 정체성이 정치적 문제가 된 것은 내가 선택한 일이 아니다. 팔레스타인 언론인들은 그저 우리의 비탄과 경험을 말하기만 해도 ‘이데올로기적’이라는 낙인이 찍힌다.

팔레스타인인들이 알 자지라 통신원 아나스 알-샤리프Anas Al-Sharif의 시신 앞에서 슬퍼하고 있다. 그는 동료들과 함께 가자시의 천막에서 이스라엘의 야간 공습에 살해 당했다. 2025년 8월 11일. (사진: 오마르 아시타위Omar Ashtawy / APA)

어느 날, 나도 글을 실은 적이 있는 가톨릭 잡지사에서 일하는 동료가 팔레스타인 기독교인에 관한 기사를 쓰고 있다며 나를 팔레스타인 기독교인으로서 인터뷰하고 싶다고 했다. 유럽 출신인 그는 인터뷰를 하다 내게 기독교인과 팔레스타인인 중 어느 정체성이 우선이냐고 물었다. 나는 그에게 그런 질문을 받아 본 적이 있느냐고, 신앙이나 종교적 유산과 국적/민족nationality 사이에서 우선순위를 정해야 했던 적이 있느냐고 되물었다. 그는 없다고 했고, 이유를 묻자 자신의 경우에는 그런 걸 물을 이유가 없다고, 정치적인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했다.

어째선지, 다른 누구나와 마찬가지로 다층적인 나의 정체성은 정치적인 문제가 되었다. 정치적이라고는 해도 내 답이 나의 가치관이나 사상에 대해 무언가를 말해주리라는 의미에서는 아니다. 내가 무어라 말하든 그 답이 — 그 중 어느 것도 내 것은 아닐 수 있는, 격돌하는 갖가지 세계관들 사이에서 — 논쟁거리가 되리라는 의미에서 그렇다. 바꾸어 말하자면, 내가 정체화하는 방식이 다른 누군가에게 이데올로기적인 선언이 되리라는 의미에서.

심히 곤란하다. 내가 선택한 일이 아니니 말이다. 우리에게서, 팔레스타인인에게서 나오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다른 이들에게 이데올로기적으로 중대한 것으로, 따라서 논쟁적인 것으로 만든 것은 내 나라의 상황과 지난 한 세기 내 민족의 운명이다. 이는 내가 하는 일을, 그리고 세상에 우리 나라와 우리 민족의 이야기를 전하는 데에 시간을 쏟는 팔레스타인 언론인들이 하는 일을 정의 상 위험한 일로 만든다. 우리의 관점과 우리가 제시하는 서사가 이데올로기로, 따라서 가치가, 중요도가, 신뢰도가 떨어지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것은 권력 역학의 산물이다. 무엇이 일반적인 생각이고 객관적인 현실인지, 무엇에 이데올로기적이고 정치적이라는 딱지가 붙는지를 규정하는 것은 정복자, 힘 있는 쪽이다. 이 정의는 힘 있는 쪽의 이데올로기를 토대로 내려진다. 힘 없는 쪽은 자기 자신에 대한 지극히 단순한 의견마저도 이데올로기적이라 여기도록 강요 받는, 그런 권력 역학의 문제다.

언론학을 전공하면서 나는 특정한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입장을 지지하는 우를 범하지 않도록, 대립하는 관점들을 똑같은 비중으로 다루도록 훈련 받았다. 팔레스타인에 관한 글을 쓰면서 전문적이고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글이 되려면 팔레스타인 난민들의 귀환권을 여러 관점 중 하나로 제시해야 함을 깨닫게 되었다. 이는 정치 과정의 결과다. 팔레스타인의 여러 운동은 귀환권을 지지했고 이스라엘은 이를 거부했으며, 팔레스타인 운동이 귀환권을 주장하고 협상을 거부할수록 그것은 더 ‘급진적’으로 비치게 되었다.

이 귀환권 문제는, 사회 조직 방식, 경제 모델 선택, 공적 삶에서 종교의 역할에 관한 차이들보다도 더, 팔레스타인의 ‘이데올로기적’ 스펙트럼을 결정하는 데에 큰 영향을 미쳐 왔다. 그런데 개인이 언제든 자신의 나라를 떠나거나 그곳으로 돌아갈 권리는 국제 인권 선언에 천명된 근본적인 권리이다.[역주1] 그럼에도 팔레스타인 난민들의 귀환권은, 자신들의 땅에 대한 팔레스타인인들의 권리는, 팔레스타인 기독교인의 정체화 방식과 마찬가지로, 궁극적으로는 팔레스타인이라는 이름 자체와 마찬가지로, ‘이데올로기적’이라 여겨지며 괄호 속에 들어가야 한다.

지난 3년간 우리는 주류 매체에서 이 논리가 극에 달하는 것을 보았다. 살해 당한 팔레스타인인들의 수를 말하는 것이 이데올로기적 발언이 되었다. 그들이 이스라엘의 폭탄에 살해 당했다고 말하는 것이 이데올로기적 발언이 되었다. 그 대부분이 민간인이었다고 말하는 것 역시 이데올로기적 발언이 되었다. 지금은, 가자 사람들의 재건, 식량, 의료에 대한 권리가, 그들의 삶을 되찾고 그 삶을 스스로 꾸릴 권리가 괄호 속에 들어간다. 주류 매체에서 초청하거나 인용하는 팔레스타인인의 목소리는 논쟁에 — 제 것이 아닌 이데올로기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제 민족이 인간인지에 관한 논쟁에 — 쓰인다.

주류 매체 바깥에서 우리가 어떤 언론 활동을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다시금 제기된다. 어떤 이들은 독립·대안 매체를 팔레스타인 대의 같은 대의들을 전한다는 이유로 이데올로기적으로 여긴다. 하지만 이는 식량, 의료, 이동의 자유, 존엄, 자신의 삶에 대한 통제권 등 근본적이고 기본적인 것들이 당연하게 주어지는 — 이런 것들에 대한 논의는 언제나 다른 이들의 사정에 대한 논의인 — 위쪽에서 붙이는 딱지다.

그런 것들을 갖지 못한 이들, 박탈 당한 이들, 그것 없이 하루하루 생존해야만 하는 이들에게 이는 논의나 논쟁의 대상이 아니다. 정치적인 문제가 아니다. 언젠가 제 아이들이 이 세상에 살 기회를 가질 수 있을지 없을지를 가르는 문제다.

인종학살 초기에 TV로 알 자지라에서 한 팔레스타인 노년 여성을 인터뷰한 것을 보았다. 그는 이스라엘의 폭격을 피해 손주들의 부축을 받으며 걸어서 남쪽으로 가는 중이었다. 눈물을 참으며 1948년 이후로 같은 길로 세 번이나 피란했다고, 죽기 전에 한 번은 고향 마을이 있었던 곳에 다시 가보리라는 희망으로 지금껏 살아왔다고 했다. 그런 그가 또 한 번 피란길에 올랐다.

팔레스타인의 교육가이자 사상가인 무니르 파셰흐Munir Fasheh가 떠올랐다. 2019년에 라말라에서 그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그 역시 예루살렘에 와서 그의 부모님이 살았던, 누구 것인지도 모르는 채 그곳을 차지한 낯모를 이스라엘 가족의 것이 되어버린 집을 본 이야기를 하며 눈물을 참느라 애를 먹었다.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저 할머니가 파괴 당한 고향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자신의 ‘이데올로기’라고 생각할까? 무니르 파셰가 예루살렘과 부모님의 집에 느끼는 애정을 정치적 입장으로 생각할까? 내가 감히, 누구든 감히, 그들에게 그렇다고 말할 자격이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독립 언론은 이데올로기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다른 누군가의 삶에 관한 추상적인 사상들을 두고 추상적인 논쟁을 벌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세계 곳곳의 사람들의 삶을 — 기본권을 빼앗기고 정체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 보도한다. 팔레스타인부터 미니애폴리스까지,[역주2] 이런 이들이 세계의 다수이며 따라서 독립 매체에는 세계의 가장 큰 일부를 있는 그대로 비추어야 할 사명이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보편적 상식common wisdom’에 따라 무엇이 이데올로기이고 무엇은 이데올로기가 아닌지를 가르는 딱지를 따르지 않는다. 보편적 인간성의 보편적 현실에 근거한다.

적어도 그러려고 노력한다.


역주1 1948년 국제연합 총회에서 제정된 《세계 인권 선언》의 제13조는 다음과 같다. “1. 모든 사람은 자국내에서 이동 및 거주의 자유에 대한 권리를 가진다. 2. 모든 사람은 자국을 포함하여 어떠한 나라를 떠날 권리와 또한 자국으로 돌아올 권리를 가진다.”

역주2 미국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는 2020년 5월 25일에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가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사망한 곳이다. 이 사건은 2010년대 초반에 시작된 흑인의생명은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운동이 더더욱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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