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Maya Mikdashi, “Exile, Part One,” Jadaliyya, 2012.12.21.
내 어머니의 모어는 아랍어가 아니었다. 이 사실 하나가 레바논에서의 내 삶과 학업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베이루트로 이사했을 때 그녀에게는 아이 둘이 있었고 뱃속에 나도 있었다. 마야라는 학생을 만난 그녀는 아름답고 생경한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자신이 태어난 — 그녀의 가족이 살고 명절을 챙기고 나이 먹어가는 — 나라에서 살지 않은 시간은 이제 서른 해가 넘었다. 이 사실이 나를 겁먹게 한다.
그녀가 레바논으로 이사 오기 전, 내 아버지는 합중국에서 거의 열다섯 해를 보냈다. 대학에 다녔고 나중에는 강의를 했다. 그는 늘 내게 언제 집에 돌아올 거냐고 묻는다. 이제 스마트폰이 생긴 그는 내가 과일과 채소를 충분히 먹는지 늘 확인한다. 그는 내가 여기 살기를 바란다. 십 년도 넘게 지난 언젠가 집에 온 내가 떠나겠다고 했을 때 나서서 지지해 준 게 당신이었으면서. 일을 구할 걸라고 혹은 학교에 다닐 거라고 하지 않았다. 그냥 떠나겠다고 했다. 행동하겠다고. 쓰겠다고. 사랑하겠다고. 레바논에서 평생 미국 영화를 통해 본 그것 — “나를 찾기” — 을 하겠다고. 나머지는 일단 떠나고 나면 어떻게든 될 거라고. 그는 레바논 대학에서 예술을 전공한 스물한 살짜리가 뉴욕에서 반 년도 못 버틸 거라고 생각했다. 어머니는 더 잘 알았다.
당신은 “외부인”이라는 아픈 말에 담겨 있는 낙인을 (자기 의심으로) 언제 내면화하게 되는가? 어떤 지점에서 스스로를 “인재 유출”로, 재외 국민으로 인식하게 되는가? 언제 비행기에 탄 레바논에 미국인, 레바논계 파리 사람들의 이상한 억양과 더더욱 이상한 과잉보상을 놀리지 않게 되는가? 그들로 똑같이 당신을 읽고 있으리라는 것을 언제 깨닫게 되는가? 망명exile 생활이 “선택”이라는 기만적인 말을 경유할 때 당신의 삶이 추방당한exilic 삶이 될 수 있을까? 당신이 집을 떠나기로 선택한다면, 그것이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이었대고, 그건 망명인 걸까? 당신이 이미 떠난 이들의 빈자리로 가득한 지역, 나라, 가족을 떠날 때, 추방당한 삶을 산다는 건 무슨 뜻일까? 망명이란 미완未完이요 불편하고 우울하게 지내는 일이라면, 누가 망명을 제 삶이라 할 수 있을까? 나는 왜 베이루트에서 이 글을 쓰면서 에드워드 사이드를, 뉴욕에서 팔레스타인, 이라크, 레바논 등등 각지에 관해 썼던 그를 떠올리는 걸까? 그는 이렇게 적었다. “[망명]은 인간과 고향땅 사이, 자아와 진정한 집 사이에 강제된 치유할 수 없는 균열이다. 망명의 본질적인 슬픔은 결코 극복되지 않는다.”
명확하면 안전할까? 이, 나의, 망명의 고유성을 내세우면 더 안전한 기분이 될까? 더 당당해질까? “나”라고 쓰면?
망명은 언제나 미뤄지는 — 지금은 아닌 — 귀환의 약속이다. 박사 학위를 따고 나서. 직장을 구하고 나서. 책이 나오고 나서. 종신재직권을 받고 나서. 내가 진정으로 베이루트에서 숨기는 것 없이 자유롭게 살 수 있다면, 그 때가 되면. 내가 아이를 가질 준비가 되면.
망명은 아랍어로 웃고 사랑하고 꿈꾸는 일이다. 영어로 글을 쓰는 일이다. 한 글자 한 글자가 당신이 떠나온 궤적을 되짚는다. 종이 한 장을 펼쳐 놓고 구부정한 자세로 어떤 생각이나 느낌의 첫 머리를 쓰는 바로 지금 당신이 이동하는 거리를. 망명은 라브네 가격이 오천오백 리라일 때 떠났다가 돌아와 이제 육천 리라임을 알게 되는 일이다.
망명은 당신이 왜 아직 돌아오지 않았는지를 끊임없이 정당화하는 일이다. 한 번씩 집에 돌아올 때마다 늘어만 가는 아버지의 흰머리다. 함라에 새로 문을 연 식당들, 옛날부터 있었지만 의미가 달라져 비꼬는 말이 된 단어들, 이제 결혼해 떠났거나 갔다가 돌아왔거나 계속 돌아오는 친적들, 친구들, 옛 연인들이다.
망명은 촉각적이다. 감각적이다. 결코 오지 않는 감촉을, 냄새를 미리 느끼는 일이다. 당신이 더는 모르는 사람, 더는 구체적으로 떠올릴 수 없는 맛, 오래전에 중국산 옷으로 가득 찬 가게로 바뀌어 버린 어린 시절 가장 좋아했던 주스 가게다. 언어를, 번역할 수 없는 것을 갈망하는 일이다. 타인들에게 의지해 오 년 전, 십 년 전의 당신을, 떠나기 전을, 이전을 기억하는 일이다. “향수”라는 말로는 결코 다 전할 수 없는 날카로운 통증이다. 전쟁이 벌어지는 것을 보며 집으로, 전쟁과 가족과 친구가 모두 있는 그곳으로 달려가고 싶어하는 일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어디가 아픈 건지 아니면 너무 자기 생각만 하는 건지를 묻게 되는 일이다. 그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면, 그런 사상을 좇지 않았다면, 그렇게 멀리 가버리지 않았다면 삶이 어땠을지 알고 싶다는 마음만으로도 스스로를 둘로 만들고 싶어하게 되는 일이다.
실은 여기에도 거기에도 속하지 않게 되는 일이다. 여기에서 보낸 시간과 거기에서 보낸 시간을 따져 보면 실은 겨우 대여섯 해밖에 안 된다고 우기게 되는 일이다. 여기서 여덟 달, 거기서 네 달. 여기서 이 년, 거기서 이 주. 산술로서의 시간, 미적분으로서의 거리다. 사이에서, 전화로 이메일로, 보내는 삶이다. 양쪽에서 스스로를 설명해야 하게 되는 일이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너무도 쉽게 아닌 체하다 놀라는 일이다. 다른 존재 방식은 상상하지 못하게 되는 일이다. 귀환을 꿈꾸고 계획하는 일이다. 왜 지금은 아닌지, 이유를 찾는 일이다. 이런 말들을 영어로 쓰는 일이다. 레바논을 떠나지 않았대도 아마 그랬겠지만 이제 의미가 사뭇 다르다. 스무 살의 내가 부모님 앞에서서 떠나야만 한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했다. 망명은 떠날 이유로부터, 계획으로부터 멀어지는 일이다.
망명은, CRJ 제임스의 말대로, 언제나 — 마침내 돌아간다 해도 — 편도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