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에서 신림까지

이명박 탄핵을 촉구하는 가두 시위는 아침까지 이어졌습니다. 제가 도착한 어제 밤 열 시 경에는, 정동길 등 몇 가지 루트를 통한 청와대 진입 시도가 실패로 끝나고 사람들이 광화문 네거리에서 경찰과 대치중인 상태였지요. 경찰은 버스를 ㄷ자로 주차해 행렬의 길을 막고는 해산할 것을 촉구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사람들은 불복종으로 대응했지요. 누군가 가져 온 밧줄을 버스에 걸어서, 무려 세 대를 한참이나 끌어내 틈을 만들었습니다. 전경 대원들로 그 틈을 메운 경찰은 소화기를 비롯해 가스 스프레이, 곤봉, 방패 등으로 사람들을 막았습니다.


짧지 않은 시간을 대치하며 전경들과 싸웠지만, 어제도 많은 사람이 연행되는 등의 강경 진압 과정을 거쳐 우리들은 인도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와중에 저는 발가락을 방패에 찍혔고, 같이 있던 이들 중에서는 턱이나 팔을 방패에 맞은 사람들도 있었죠. 밀려 나면서도 밤새 거리를 떠나지 않고 대치한 끝에, 해가 떠 사방이 환해진 다음에야 우리들은 시청 앞 서울광장으로 물러 났습니다. 그곳에서도 사람들은 소고기 수입 개방 반대와 이명박 탄핵을 외쳤고, 그것은 아침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집회가 끝난 다음에는,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어제 집회가 새벽녘에 끝나면 한 번 타고 와 보려고 지하철로 가져 갔다가 옷이 젖어서 두고 온 것이었지요. 길을 잘못 드는 바람에, 경복궁에서 서울역, 용산을 거쳐 마포대교를 건너 여의도를 통과해 겨우 집으로 왔습니다. 그런데도 의외로 얼마 걸리지 않더군요. 채 두 시간이 안되어서, 길을 묻기 위해 행인들을 기다린 것을 빼면 한 시간 반 정도밖에 되지 않아 집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한강은 아름다웠습니다. 비록 흐린 물이지만 유유히 흐르는 그 물결이, 강변이나 섬에 자라고 있는 온갖 풀과 나무들이 참 아름다웠습니다. 강가나 교량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는 크고 작은 공사의 소음과 공사장의 설비들이 그 풍경을 망치고 있었음에도 강은 꽤나 아름다웠습니다. 대운하를 위한 부두 시설 같은 것들이 들어 오기에는 너무나도 아까울 만큼이었어요. 누가 어찌 해 주지 않아도 강물은, 행복하게 잘도 흐르고 있었습니다.


여의도에서는 길을 가다가 <처음처럼>이라는 노래를 들었습니다. 고개를 돌리니 알리안츠 생명 건물 앞에 쳐 진 천막이 보이더군요. 서울의 대표적인 투쟁 사업장 중 하나인데, 아직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입니다. 자전거를 세우고 들러서 이야기도 듣고 인사도 드리고 할까 하다가 문득 지난 시간에 못다한 수업 발표를 마저 해야 함을 깨닫고는, 아쉬워하며 페달을 밟았습니다. 국회 의사당 앞을 지나니 평소에 자주 다니는 길이 제 앞에 있더군요.


집에 오는 길에는 모자원고개라는 길목이 있습니다. 말 그대로 고개입니다. 이름은 물론이거니와 그 길 또한 제게는 익숙한 곳이지요. 그런데도 저는 자전거를 타고 오면서 앞에 고개가 있는 것을 보고 제가 길을 잘못 든 줄로만 알았습니다. 낯선 고개를 끝까지 올라가, 제일 위에 있던 ‘모자원 고개’라는 버스 표지판을 보고서야 그 곳이 어디인지를 저는 알게 되었습니다. 늘 버스로만 다니다보니, 그곳에 오르막이 있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었던 것입니다.


제가 다니는 학교는 산에 있습니다. 그 덕에 등교길은 처음부터 끝까지가 그 경사도만 다를 뿐 전부 오르막입니다. 하지만 그 고개들에는 딱히 이름이 없지요. 다만 제가 그곳을 매일 걷거나 혹은 자전거를 타고 지나기에 그 존재를 확실히 알고 있는 것입니다. 모자원 고개, 그 낯선 언덕을 넘으면서 저는 그동안 얼마나 편히 살아 왔는지를, 그 편한 삶 속에서 주변의 것들을 얼마나 놓치고 있는지를 다시 한 번 생각했습니다.


이걸로 육일째, 매일을 종로에 다녀왔습니다. 매일을 전경들에게 밀리고 쫓겼지만 아마도 또 가겠지요. 일곱번째 밤에는 자전거를 타고 그곳까지 가보려 합니다. 돌아온 길보다 훨씬 더 헤메게 될 것 같지만, 더 기쁠 것 같습니다. 유유히 흐르는 한강을 다시 볼 수 있기 때문이고, 혹여 기회가 되면 또 한 번 여의도에 들어 알리안츠 생명 천막을 들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며, 자전거를 타는 모습을 통해 생태주의를 실천으로써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서울, 종로에서 신림까지 자전거를 타고 오는 길은 무척이나 행복했습니다.

고기를 먹었다

고기를 먹지 않기 시작한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고기를 먹어버렸다. 첫입을 베어물고는 실수를 알았지만 남김없이 먹어 치웠다. 그 살점의 원래 모습을 상상하며, 그 삶을 상상하며 천천히 씹었다. 여지껏 음식을 그렇게 느리게 씹어본 적이 없을 정도로 말이다.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결심이 의도치 않게 깨어진 것은 아쉽지 않았지만, 그의 삶이 아까웠다. 그렇게 상상해 보았지만 그 원래의 모습은 결국 알아내지 못했다. 아무튼, 고기를 먹어버렸다.

배가 고팠다. 아침 열 시 쯤에 작은 빵 한 조각과 우유 한 모금을 먹고, 다섯 시간이 넘도록 생수밖에는 먹지 않은 상태였다. 그나마의 아침조차도, 굶으려던 것을 지인과 우연히 만난 덕에 얻어 먹은 것이었다. 배고픈 오후, 거리에 먹을 것은 흔치 않다. 비록 생선과 계란까지 안 먹기로 결심한 것은 아니지만 가능하면 피하고 싶어 이것저것을 찾아 보았으나 마땅한 것이라고는 과일밖에 없었다. 그러다 생각난 것이 만두였다. 1인분에 천원에 파는 야채만두를 먹을 요량으로 거리의 만두 가게를 찾았다.

평소에는 만두를 즐기지 않는다. 맛이 없어서라는 핑계를 대고 있지만 사실은 밀가루가 아까워서이다. 이유 없이 속을 싸 놓은 그 밀가루가 아까워 평소엔 먹지 않던 만두를, 궁하게 되지 제 발로 찾아 먹게 되었다. 야채 만두는 없고 김치 만두가 있기에 주인에게 고기가 들었는지를 물었다. 잠깐을 망설이더니 들지 않았다고 했다. 고기 만두는 따로 있으니 아마도 없으리라, 나도 그리 믿고 일인분을 주문했다. 도시락 용기가 아까워 그냥 그 자리에 서서 먹겠다 했더니 곧 작은 만두 여덟 개와 단무지 세 개를 내어 주었다.

첫 입을 베어 물었더니 이상한 것이 씹혔다. 고기였다. 닭인 것도 같았고 돼지인 것도 같았다. 한편으론 두부처럼도 보였다. 다시 한 입을 물었다. 여전히 그 덩어리는 두부처럼 생겼지만, 그 맛은 고기의 것이 확실했다. 버릴까, 아니면 따질까. 혹은 지금이라도 포장해달라고 할까. 잠시 고민했지만 그냥 먹기로 했다. 먹지 않기로 한 남의 삶을 버릴 수는 없는 일이었고, 포장해 가서 남에게 먹이자니 내가 먹지 않는 것을 남에게 권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따지기엔, 만둣집 주인의 삶 역시 너무도 팍팍했다.

그래서 천천히 씹어먹었다. 그 원래 모습을 상상하면서, 그 삶을 상상하면서. 살점의 주인에게, 난생 처음으로 미안함을 표했다. 비록 속으로 되뇌일 뿐이었지만. 나쁜 짓을 한다는 생각도, 그렇다고 해도 좋은 짓을 한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씹을 수록 머리 속은 하얘져 갈 뿐이었다. 이상한 일이다.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아무런 가책 없이 먹던 것이었는데, 그렇다고 그 전에 그들의 삶을 생각하지 않는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일주일 가까이 육류를 먹지 않았지만, 우습게도 그 결심이 깨어진 오늘, 나는 처음으로 ‘비육식’을 경험했다.

다른 생물의 ‘삶’을 먹지 않기

언제부터인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먹기 위해 동물을 사육하는 것은 그야말로 극악무도한 행위라고 말이다. 물론 개인적인, 혹은 가족의 필요를 위해 이루어지는 소규모 방목의 경우는 크게 문제가 없을 수도 있다. 동물이 나름의 생生을 살다가, 다른 동물의 생존을 위해 희생하는 과정은 자연의 원리에서 크게 벗어 나지 않은 것이니 말이다. 지나치게 좁은 곳에 가두어 놓지 않으며, 잠이나 식사 등 기본적인 생리를 억제하지 않는다면 고기’도’ 먹는 것에 반대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다들 알다시피 현대의 육식은 그렇지 않은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동물들은 좁은 우리 안에서 꼼짝할 수 없는 상태에서 사육되며, 대소변은 커녕 음식조차 가릴 수 없는 상태를 강요당한다. 그들은 운동을 금지당하며, 때로는 포육조차 허락받지 못하고, 알을 낳는 닭의 경우에는 심지어 제대로 된 잠조차 허락받지 못한 삶을 살고 있다. 그 삶의 마지막에 행해지는 도축 역시 매우 무례한 과정을 통한다. 인간이 먹는 것은 단순히 동물들의 육체나 생산물이 아니라, 그들의 ‘삶’ 자체인 것이다.
또한 그 동물들은 한 근의 고기를 제공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인간들의 삶을 담보로 하고 있는가. 소나 돼지가 먹어치우는 목초와 물, 심지어 고기는 아프리카나 라틴아메리카, 혹은 한반도 북부나 아시아 각지의 사람들이 정말로 ‘갈구’하고 있는 것들이다. 수십 톤의 음식을 먹여 만들어지는 몇 백 킬로그램의 고기, 인간이 그렇게나 사랑하는 효율성마저도 벗어난 일이 아니던가. 초원의 풀을 베지 않고 초원의 동물들을 학살하지 않았더라면, 그 무엇도 낭비되지 않고 각자의 삶을 산 후 서로를 위해 소비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꽤 오래 전부터 채식, 혹은 비육식을 하려고 했었다. 다만 한 사람의 만류가 내게 걸림돌이 되었을 뿐이다. 내게 많은 것을 주고 있는 사람이지만 내가 아무것도 주지 못하고 있는 어느 한사람이, 그래도 식사만큼은 아무런 고민없이 나와 함께 하고 싶다고 말해 와서 그간 채식을 미루어 왔다. 그리고 어제, 그의 동의를 얻었다. 그간 내가 몇 번인가 이야기를 꺼낸 것이 약간의 설득이 되었을 것이고, 최근 조금씩 변하고 있는 그의 생활 역시 그의 마음이 변하는 데에 일조했을 것이다.
그는 내가 고기를 먹기를 원하는 대신, 고기를 먹지 않을 나와 함께 먹을 수 있는 메뉴들을 꼽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내 행동의 선을 어디까지로 할 것인지를 고민했다. 최초의 기획은 ‘사육된’ 모든 것을 먹지 않겠다는 것이었지만, ‘재배된’ 많은 식물들과, ‘자연산’이라는 이름으로 파괴되고 있는 야생의 생물들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또한 양계장의 현실이 지금과 같지 않았다면 먹어도 좋다고 여겨 온 무정란 같은 것들도 고려의 대상이 되었다.
일단의 선은 ‘사육된 육류 먹지 않기’이다. 내가 먹을 것을 온전히 내가 만들지 못하는 현실적인 이유에서이기도 하고, 야생의 것만을 허하는 일이 자연산만을 고집하는 것으로 오해될 수 있음을 경계해서이기도 하다. 내가 스스로에게 생선과 우유 따위를 허하는 일이 나와 함께 식사할 다른 이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도 없지 않다.

시작은, 오늘부터다. 의도치 않게 어제 저녁부터가 되긴 하였지만.

노점상, 쓸려 나가다

2008년 5월 13일 오전 4시 30분 경, 관악구 봉천사거리. 서울대입구역 3번 출구 앞에 있던 노점상들의 포장마차와 천막농성장이 싸그리 철거되었다. 갑자기 들이닥친, 100 여 명 용역 철거반에 의해서였다. 주말에 이어 초파일이 있었던 연휴의 끝물, 천막은 단 한 명의 사람만이 지키고 있었다. 초토화된 그 곳에는 빈자리만이 휑하니 남았을 뿐이었다. 옆에 있는 지하철역 입구 공사장을 가린 함석판이 유난히 높아보였다.
다음날인 14일 오전에, 노점상인들은 자신의 마차가 없어졌음을 알고서도 꾸역꾸역 출근하기 시작했다. 마음같아서는 얼른 구청으로 달려가 한 판 싸움이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이미 재판에 회부된 고소고발 건 수가 너무도 많았다. 그야말로 꾸역꾸역 모여, 느릿느릿 걸으며 시간을 보내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없었다. 경비실 앞을 지나기도 전에 막혀버리는 해고 노동자들의 출근 투쟁을 노점상들 역시 하고 있었다.
노점의 철거는 서울시의 주요 정책이자 관악구의 시범 사업인 ‘디자인 거리 조성’을 위한 예비 작업이었다. 걷고 싶은 거리, 노점 없는 거리를 만들고자 한다고 했다. 이미 행해졌어야 할 철거이나, 달포 쯤 전에 십수일 천막 농성을 한 끝에 구청에서 당분간은 건들지 않겠노라 약조를 했던 것이었다. 그 ‘당분간’이 어제자로 끝나버린 것이다.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구청에서의 약조가 있었을 때 노점상들은, 한동안 잠잠한 후 한차례 전쟁이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했었다. 그것이 약간 당겨졌을 뿐이다. 5월이 가기 전에 올 줄은 알았지만, 연휴 끝의 새벽이 될 줄은 알지 못했다. 어차피 할 싸움이라면, 사람이 다치지 않은 것이 오히려 다행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노점상 연합의 지역 회원들을 비롯해 다른 지역의 회원들, 그리고 회원들이 키우는 개까지가 대낮 출근 투쟁을 할 수 있었다.
저녁이면 다른 지역의 회원들은 장사를 하러 돌아가야 할 것이다. 철거당한 몇 안되는 상인들만의 힘으로 장사를 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용역반이 언제 올지 역시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노점 마차가 있던 자리에 구청에서는 화분을 가져다 놓았다. 키작은 전나무를 담은 화분이었다. 노점상인들의 허리까지 오는 높이였다. 그나무들의 운명만큼이나 노점상인들의 운명은 애처로웠다.

Stop Crackdown, 광화문 교보문고 앞

반갑습니다, 대학생사람연대에서 활동하고 있는 박종주라고 합니다. 저는 대학교에서 4 년 째, 인문학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조금 거창하게 말하면 인문학은 사람이 무엇으로 사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탐구하는 학문인데요, 저는 그 중에서도 한국 사람들의 삶에 관한 국어국문학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국문학의 역사를 살펴 보면, 고대에는 이 땅에서 신이 중심이었고 중세에는 나라가 중심이었으며 그 이후에는 민족이 중심이었습니다. 저는 지금이야말로, 이 땅에 살고 있는 다양한 사람들, 그 모든 사람들이 중심이 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국문학은 문학을 통해서 문화를 공부하는 학문입니다. 문화와 관련해서, 요즘 정부에서 다문화라는 말을 많이 쓰고 있는 게 눈에 띕니다. 오늘 올림픽 공원에서는 문화관광부 주최의 다문화축제라는 행사가 있었습니다. 문화 다양성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 아래, 우리나라에 살고 있는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을 모아서 각 나라의 문화나 음식 등을 체험할 수 있는 행사였습니다. 그 축제에 초정받은 사람들 중에는 분명, 방글라데시, 네팔, 인도네시아 등 가난한 나라의 국민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듭니다. 이 땅에서 무려 16년 동안 일했던 토르나 위원장은 과연 이 나라에 어떠한 문화적 영향을 줄 수 있었을까요. 이 나라의 말을 배우고, 일을 배우고, 한참을 이 땅에 살았지만 그는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을 것입니다. 자신의 문화를, 자신이라는 존재를 드러내지 못한 채  그저 일하며, 돈조차 받지 못해도 그저 일하며 그는 노예처럼 살았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살았던 노동자가 미등록이라는 이유로 체포되어 지금 감옥에 가 있습니다.
축제가 벌어지는 동안, 또 한 쪽에서는 방글라데시, 네팔, 인도네시아 등에서 온 이주노동자들이 찾취 당하고 탄압받고 있습니다. 돈을 벌지 못해서, 폭력과 욕설을 참을 수 없어서 작업장을 이탈했다는 이유로, 등록기한을 넘기고도 일했다는 이유로 그들은 불법 체류자라는 딱지를 달고 살고 있습니다. 법을 어기고 잘못을 저질렀다면 감옥에 가야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한국에 가면 돈을 벌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었던 것, 본국에 돌아갈 뱃삯이나 비행기삭을 벌지 못했던 것, 임금체불과 폭력을 참지 못했던 것, 혹은 이 나라가 너무 좋아 떠나지 못했던 것, 그 이상의 어떤 죄가 있습니까?
정작 죄는 그들을 속여서 데려오고, 그들을 착취하고 탄압한 이 나라가 저지르고 있습니다. 길을 가시는 분들 중에도 여수에서 있었던 외국인 보호소 화재 참사를 기억하시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도망칠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화재 속에서 문도 열어주지 않아 타 죽어야만 할 만큼의 죄를 과연 그들이 지었습니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신다면 저희의 이야기를 들어 주십시오. 저기 서명판에 서명을 해 주십시오. 이주노동자들의 삶에, 그리고 운동에 지지를 보내 주십시오. 그들이 살 수 있도록, 노동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광화문 앞에서 있었던 이주노조 탄압규탄 촛불집회에서 한 발언. 갑작스레 요청받은 것이라, 며칠전의 발언보다 훨씬 더 버벅거렸다. 이번에도 역시나 약간의 거짓…을 섞어서. 버벅거린 말들을 글로 주워 모으느라 좀 허술하지만, 대강 저렇게 이야기했다. 촛불집회 후에는 청계광장으로 이동해 촛불집회에 참여한 인파를 향해 피케팅. 나는 그곳에서 놀라운 광경을 보았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