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매매와의 전쟁?

나는 모든 종류의 임금 노동에 반대한다. 임금을 받고 노동력을 판매한다는 것은, 사실 존엄성과 자존감을―영혼을 파는 것과 다르지 않으니까. 그래서 나는 임금 노동이 없는 세상을 꿈꾼다. 다른 어떤 형태의 노동이 세상을 구성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사실, 유토피아적인 기대만을 갖고 있을 뿐이지만.
매춘에서부터 성매매까지, 몇 개의 이름을 갖고 있는 일명 ‘성 노동’을 일단은 가장 반대하고 있다. 성이 개방된 사회, 양성이 평등한 사회, 성 행위로부터 신체가 자유로울 수 있는 사회가 온다면 어떻지 알 수 없으나, 현재로서의 ‘성 노동’은 가장 극심한 착취이자, 가장 극심하게 존엄성-자존감을 짓밟는 행위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장안동 일대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성매매와의 전쟁’이 한창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성매매 업소―성매매 행위라기보다는―를 근절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이는 동대문구 경찰서장을 영웅시하는 말들도 종종 보인다. 서울을 비롯해 각지에 포진해 있는 성매매업소 밀집 지역들을 비교 분석하는 기사들도 올라오고, 현 정부의 성 정책을 분석하는 글들도 찾을 수 있다.
인권 유린이 가장 심한 ‘유천동 텍사스촌’이라는 데서는, 하루를 쉬면 벌금이 백 만원이란다. 임금은 140 만원 정도를 준다며 취업을 유도하지만 콘돔 값부터 화장품값까지를 공제하고 실제로 주는 돈은 10만원 남짓이라고도 한다. 폭행과 감금은 기본이고, 살 찐다며 밥은 하루에 한 끼만 준다고. 이 곳의 관할 경찰서장 역시, 업소를 모조리 뿌리 뽑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고 한다.


저쯤 되면, 성매매가 사라 져야 한다는 말에 반대하기는 누구에게도 쉽지 않을 터. 나 역시 다르지 않다. 성매매에 반대하는 가장 큰 이유는 어쩌면, 존엄성이니 자존감이니 하는 정신적인 문제보다도 감금과 폭행 같은 신체적인 안전의 문제에 있는지도 모른다. ‘돈을 냈으니 맘대로 해도 된다’고 여기는 남자와 함께 좁은 방에 갇히는 여성의 공포감을 사실 나는 상상조차 할 수 없지만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성매매 근절, 혹은 성매매 단속을 아무에게나 맡길 수는 없는 일이다. 똑같은 업소를 단속해도 잡아 가는 사람이 다르고 뒤처리가 다를 것이며 언론 보도 또한 달라질 테니까. 지금의 정부와 그 결찰이라면 말할 것도 없겠다. 법적인 근거나 인권의 문제보다도 성경의 구절을 먼저 들이밀 것 같다는 건 나만의 걱정일까.


그들의 처절한 삶이, 한낱 땅값 떨어뜨리는 요인이나 주거환경을 헤치는 요인으로 비치는 모습을 나는 보고 싶지 않다. 세상으로부터 추방당한 그들이, 타락한 영혼이나 엇나간 막장 인생으로 구설에 오르는 꼴을 나는 참을 수 없다. 나는 성매매가 사라지기를 바라지만, 단속되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자의를 통하든 타의를 통하든 성매매로 그들은, 몰아 세워진 것이니까.

잘 지내고 있나요

    그는 내가 속한 단체의 대표를 맡고 있었고, 나와 함께 일하고 있었다. 어느 날 그는 내게, 내가 속한 다른 단체―나와 그가 일하고 있던 단체에 속해 있는―의 대표를 맡지 않겠냐고 권해 왔다. 물론 그가 내게 그 자리를 주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를 맡을 마음을 내가 먹고, 실현을 위해 어느 정도의 애를 써야 하는 일이었다.
    자신이 어떻게 대표라는 자리를 맡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것을 통해 무엇을 배웠는지를 그는 내게 한참 이야기했다. 내가 대표라는 자리를 맡아 보기를, 그리고 그것을 통해 자신이 배운 것과 같은 것을 배울 수 있기를 그는 바란다고 했다. 나는 한참을 고사한 끝에, 결국은 그러마고 대답했다.
    그는 몸이 아팠다. 그가 끝내 임기를 다 마치지 못하고 대표 자리를 그만둔 시기, 그리고 활동 일선에서 물러나 요양을 시작한 시기는 내가 그렇게나 고사했던 자리를 맡게 된 시기와 거의 비슷했다. 나를 설득하기 위해 그렇게나 길게 이야기했던 그 근거가, 그에게서 사라져 버린 즈음에야 나는 일을 시작한 것이다.
    다른 이들을 만나면서 가끔 그의 이야기가 나오면 나는 농담조로 이야기하곤 한다. 나에게 대표를 맡으라고 두 시간을 내도록 이야기해놓고, 정작 내가 일을 시작할 때 자기는 쉬러 가버렸다고. 딱히 그를 원망하는 것도 아니지만, 나의 농담은 어느 정도 그를 무책임한 사람으로 몰아세우고 있었다.
    나름의 사정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나는 그에게 한 번도 연락한 적이 없다. 먼저 연락해서 그의 안부를 물은 적이 없다는 뜻이다. 정말로 어쩌다 가끔 우연히 마주칠 때쯤에나 몸은 괜찮으냐는 말을 던졌을 뿐. 내가 묻지 않은 그 안부를, 다른 이들은 한번쯤 물었을까. 내가 그를 책하며 술을 마시고 웃던 때에, 그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방앗간 삼거리

  사는 곳에서 멀지 않은 곳임에도 그간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곳에서 약속이 있었다. 지하철 봉천 역에서 마을 버스를 타고 ‘방앗간 삼거리’에서 내리라 하기에, 일단 버스에 올라탔다. 하지만 웬걸, 버스 노선에는 방앗간 삼거리는커녕 방앗간도, 삼거리도 표시되어 있지 않았다. 기사 아저씨에게 물었더니 아직 멀었으니 가서 앉아 있으란다.(하지만 버스는 초만원이었다.) 무학 초등학교 지나서라고만 하고, 초등학교 지나서 어느 정거장인지는 말해주지 않았다.
  자리에 돌아와 다시 노선표를 보다가, 반대쪽에 다른 노선표가 붙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노선표에는 앞의 노선표에 나와있지 않은 몇개의 정거장이 표시되어 있었는데, 그 중에 ‘방앗간’이 있었다. 저긴가보다 하며 고개를 내리는데, 앞에 앉아 있던 할머니께서 어딜 찾으냐신다. 방앗간 삼거리엘 간다 했더니 무학 초등학교 다음 정거장이고, 아직 좀 남았다고 했다. 감사하다고 간단히 인사한 후, 두 개의 노선표를 번갈아 보며 기사 아저씨와 그 할머니를 생각했다.
  "다음 정거장은 방앗간 삼거리입니다."
  드디어 내릴 곳에 당도했다. 이제 내려야지, 생각하며 손에 들고 있던 전화기를 집어 넣고 지갑을 꺼내 들었다. 이번에는 또 옆에 앉아 있던 할아버지가 나를 툭툭 치신다. 여기가 방앗간 삼거리니 지금 내리면 된다신다. 인사를 한 후 내리는 문을 향했다. 버스카드를 찍고 내리자 앞에 방앗간이 있었다. 가야할 곳은 문경 수퍼 골목 언덕을 100m쯤 올라가면 있다는 어느 성당.
  그 언덕을 오르며 나는, 손을 잡고 다정히 이야기하며 내려오는 중년의 부부를 보았다. 동네 사람처럼 보였는데도 그들은, 전혀 옅어지지 않은 경상도 말씨로 대화하고 있었다. 봉천동의 지붕들은 신림동의 것들보다도 훨씬 낮았다. 높아가는 언덕의 옆으로, 좁은 마당들은 갈수록 낮아졌다. 이런 동네에도 습기가 안 차는 집이 있을까. 습기 가득한 집들에도, 낮은 천정 아래 허릴 숙인 사람들이 살겠지. 못사는 동네에 흔히 있는 허름한 점집과 낡은 교회를 지나, 나는 목적지에 도달했다.

배움,

하루가 이렇게 길기는 처음입니다.
한 시간이, 일 분이, 얼마나 긴 시간인지를 배우고 있습니다.


멍하니 앉아서 시간을 보내는 방법도,
이유도 없이 움직이며 잡다한 일들을 하는 방법도,
정말이지 엄청난 가슴의 통즘을 참는 방법도 조금씩 배우고 있습니다.


모두 다 배울 때 쯤이면,
나는 다시 즐거운 하루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많은 것을 배운 나는,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요즈음은-

괜찮았던 적도, 좋았던 적도 없다.
다만 그나마 좀 나았을 뿐.
말하자면, 요즘은, 그나마 낫지조차 않다는 거다.
내가 변했든, 그것이 변했든.

요컨대,
시기가 좋지 않다는 것.

버티기를 시작해야 하나보다.

이런 식의 글쓰기는 영 내키지 않지만,
말할 수 있는 것이 정말로 요만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