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전태일 평전>, 조영래, 돌배게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난장반에 배정되어 가입한 학회 ‘광장’의 선배였던 영민이 형이 준 가입축하 선물. 사실 아직 읽어보지 않았다―앞의 몇 페이지를 읽어보기는 했지만. 형이 적어 준 말은 "부디 학회 생활을 하며 ‘회의주의자’에서 벗어나자!!" 예나제나 나는 스스로를 회의주자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지만.<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신영복, 삼우간
역시나 학회 광장의 가입 선물로 자연 누나가 준 책. 첫 속지가 까만 색인데, 그 위에다가 까맣고 깨알 같은 글씨로 꽤나 긴 글을 적어 주었다. 이 책은 신영복 씨가 옥중에서 때로는 스스로를 갈고 닦으며, 때로는 주변을 관망하며 쓴 글들을 모아 놓은 것이다. 자연 누나는 그것을 두고 " 너와 내가 함께 해야 할 과정이겠지. 잘 부탁한다."고 썼다. 누나는 잘 살고 있으려나.<역사란 무엇인가>, E.H. 카, 청년사
이것도 학회 광장의 가입 선물, 나름 라이벌 학회였던 ‘파문’의 학회장 민진 누나가 준 선물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나를 학회 광장에 가입시킨 장본인. 학회 발대식이 있던 날 받은 것이니 순서로는 자연 누나의 것보다 이게 먼저. 발대식을 하는 술집에 가기 전에 같이 헌책방에 들러서 산, 학회 세미나의 첫 텍스트였다. 즉석에서 사서 준 것이라 아쉽게도 아무 말도 적혀 있지 않다.<해변의 카프카> 상, 무라카미 하루키, 문학사상사
내가 가입했던 난장반의 다른 모임인 ‘주인공―주체적인 인간들의 공동체’의 가입선물로 추정되는 책. 책을 준 당사자가 가입선물임을 당시에는 밝히지 않아서, 나에게만 주는 건 줄 알았었는데 알고보니 다른 애들도 한 권씩 다 받았더라. 편지와 함께 받은 것이라 책에는 별다른 말이 적혀 있지 않다. 그는 내게 상권을 주며 하 권은 사서 읽으라고 했지만, 나는 결국 그의 것을 빼앗았다. 책에 적혀 있는 말은, "종주에게 희선이. 4월 16일에 주다."<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박완서, 웅진닷컴
<해변의 카프카>를 준 그가 5월에 준 책이다. Zzoi라는 칵테일 바에서 마주 앉아 한참을 이야기한 날이었다. 수능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아서 <엄마의 말뚝>조차 제대로 읽어 본 적이 없었는데, 이 책을 통해 박완서를 알게 되었다. 그 뒤로는 박완서 책을 참 많이 읽었다. 전쟁 중의 여성들을, 그들의 고난과 대화, 그리고 변화를 담은 이 책을 그는 가슴 설레하며 또 아파하며 읽었다고 했다. 책에 길게 적혀 있는 말은, "사람의 아픔을 어루만지며 살자, 사랑한다"라는 문장으로 끝난다.<권리를 위한 투쟁>, 루돌프 폰 예링, 범우사
2005년 2학기에는 난장반 밖의 동아리인 인문학회에서도 활동했던다. <권리를 위한 투쟁>은 인문학회에서 9월 부터 세미나를 시작한 2학기의 첫 텍스트. 이 책을 준 것은, 안타깝게도 위의 두 권을 준 이와 같은 사람이다. 인문학회에는 정을 붙이지 못해 한 학기밖에 활동하지 않았지만, 이 책은 여전히 내 책꽂이에 있다. 그때 함께 세미나를 했던 사람들의 얼굴을 기억한 채. " 많은 말들과, 그보다 더 많은 시간을 공유할 것이란 기대를 하며…"2006년
<걸리버, 세상을 비웃다>, 박홍규, 가산출판사
학회 광장과 주인공을 함께 했던 헌일이가 준 생일 선물. 학회 광장은 내게 잘 맞지 않은 공간이었고, 그래서 다른 이들과 자주 부딪혔었다. 어떤 책을 읽은 것인지에 대해서 주로 싸웠는데, 내게 무의미했던 철학 개론서, 사회과학서 대신 내가 반 농담조로 제안했던 책이 <걸리버 여행기>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어디서든 독특한 사람이고, 주변 사람들에게 말로써 내 마음을 이해시키기는 여전히 어렵다. <걸리버 여행기> 이야기 역시 주변 사람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는데, 이 책을 받게 된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다.
그때의 지난한 싸움을 지금 설명하기는 힘드니까, 그냥 그렇다고만 해 두자. 헌일이는 무려 두 페이지에 걸쳐 주절주절 말을 풀어 놓았다. 몇 개의 칭찬 사이에 그가 내게 바랐던 것들이 자세하게 적혀 있는데, 미안하게도 그 바람들을 채워주지는 못했다. 그 긴글 끝에 그는, "같은 반/「광장」 동기/「주인공」 동기 박헌일이."라고 서명했다.<세계를 뒤흔든 열흘>, 존 리드, 책갈피
역시나 난장반의 동기이고, 주인공을 함께 했던 강은이가 준 생일 선물. 생일날 밤 강은이와 헌일이는 수퍼에서 도넛 세 갠가를 사고 나무젓가락 두 개를 챙겨서 내 방에 찾아 왔다. 도넛을 쌓아 놓고는 초 대신 나무 젓가락을 꽂아 두고 불을 붙여 생일 파티를 해 주었다. 러시아 혁명일 기록한 책인데, 아직 읽지 못했다. 사실 헌일이가 준 책도 띄엄띄엄 거의 다 읽기는 했지만 완전히 다 읽은 것은 아니고. 지금은 둘 다 군대에 가 있어서, 제대하기 전에 꼭 다 읽어야겠다는 다짐을 해 둔 상태다. 강은이가 적어 둔 말의 요지는 친해지고 싶은데 아직 친해지지 못해 아쉽고 미안하고 답답하는 것. "앞으로 2006년에는 나의 아쉬움이 그저 단순한 아쉬움으로 그치지 않기를 빌며 스무번째 생일을 축하한다. 생일 축하해요 종주군-_-…" 저 표정의 의미는 아직까지도 미상.<서 있는 여자>, 박완서, 세계사
2006년 4월 나와 그의 연애는 많이 힘들었었나 보다. 서로가 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에서 시작했던 관계였을 텐데, 날이 갈수록 서로의 차이를 발견하고 그것이 서로의 바람과 얼마나 먼 것인지를 확인하는 것은 꽤나 힘든 일이었다. 서로에게 상처가 쌓여 말을 꺼내는 것조차 힘들어 졌을 즈음 그는 내게 이 책을 선물했다. 절반밖에 읽지 못했지만 자신의 답답한 속을 건드린 이 책의 나머지를 나와 함께 읽고 싶다고 그는 써 두었다. 덕분에 우리가 지금가지 온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내게 당신이 있어서 다행이에요. 함께 책을 읽어주고, 함께 고민 나눠 줄. 함께 있어 줄. 책을 줄 수 있어서, 그런 사람이 당신이어서, 많이 고맙고 많이 미안해.."<타인에게 말걸기>, 은희경, 문학동네
2006년 2학년이 되어 처음으로 후배를 맞던 나와 동기들에게, 주인공의 선배들은 선물을 주었다. 정확히는, 주려 했다. 주기 전에 우리가 먼저 알아버리는 바람에, 이 책은 내가 직접 고른 것. 선배들은 세 명이 각자 다른 포스트 잇 하나씩에 글을 써어 첫장부터 하나씩 붙여 주었다.
"너한테 좀 고심하고 책 사줘야 하는데 ㄱ- 너가 갖고 싶대서 그냥 「타인에게 말걸기」 샀어. 담엔 꼭 내가 사주고픈 거 주마~"라고 영아누나가 썼는데 아직 책은 안 줬다.[!] 내게서 인류애가 무엇인지를 느낀다는 황송한 말을 종종 하는 바오란은 "가장 먼저 나를 알아 준 후배. 말하지 않아도 웬만한 건 느끼는 팬 일호― 사실 내가 네 팬인지도 몰라"라고 쓰고, "네 사랑 바오란"이라는 서명을 달았다. 이 글에 너무 자주 등장해 좀 민망한 김희선 씨는, "가득히 느끼는 시간, 다시 만들자. 다시 만들어가자"고 적어 두었다.<함께 보는 한국근현대사>, 역사학연구소, 서해문집
이름을 밝히지 않은 한 선배가 준 책. "우리, 서로의 든든한 울타리가 되며, 살맛나는 세상- 함께 만들어 가보자!!"2007년
<인간실격>, 다자이 오사무, 민음사
일본 작가인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과 <직소直訴> 두 편이 실려 있는 이 책은 혜진이가 생일 선물로 준 것이다. 올해 생일에는 무려 현금을 준 혜진이, 이 책의 첫장 첫줄에는 책을 선물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 뭔가 엄청나게 특이한 물건을 선물해야겠다는 마음을 버렸다고 써 두었다. 어디서 무슨 일을 함게 해도 든든한 혜진이(절대 수업 노트를 빌려주기 때문은 아니다.), "생일 축하드리고, 살롱(?) 만드시면 제가 단골 될 거랍니다. 꼭 만들어 주세요"라라도 썼다. 살롱은, 어디든 땅 열 평만 있으면 만들고 말 내 고물상에 딸린 담소 공간이다.<사회적 공화주의>, 금민, 박종철 출판사
선물이라고 하긴 뭣하지만 일단 받은 책이니 여기에 넣는다. 무려 저자의 친필 싸인과 함께 받았지만, 집단으로 받은 거라. 2007년 여름, 희망 실천단 활동을 대학생사람연대와 사회당이 함께 했는데, 그때 실천단을 찾은 금민 당시 사회당 대표님께서 주신 책. "박종주 동지께 금 민 드립니다"라고 적혀 있다. 사실 이 책은 지금은 갖고 있지 않고, 김해 집에 보냈다. 집에서 내가 운동하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내가 자세한 설명은 하지는 않기 때문에, 혹시나 뭣 좀 더 알게 될만한 게 있을까 싶어서 말이다.<나는 유령작가입니다>, 김연수, 창비
늘 자기 아니었으면 나는 왕따가 됐을 거라고 말하는 이은혜의 선물. 이 책을 고른 것은,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조남현 선생님이다. 수업 교재인데, 반 농담으로 사달라고 졸랐더니 덜컥 사준 착한 이은혜는 속지 둘째장에다가 무려 "참 쓸말 없네"라고 적었다. 물론 그 말만 적은 건 아니지만. 늘 아낌없이 먹고 마실 것과 잠자리를 제공해 준 이은혜, 이 책에는 "늘상 피곤해하고 쩔어있는 모습만 보니 박종주의 유쾌한 웃음이 그립다"고 썼다.2008년
<작은 인디언의 숲>, E.T. 시튼, 두레
지금은 병상에 있는 원재가 생일 선물로 준 책. 정작 이 책을 산 것은 자신의 생일 바로 전날이었다. 사람들이 자기 생일 챙겨줄 것을 알고, 며칠 전에 그냥 넘긴 내 생일 선물을 산 것. 정작 나는 이 때 원재 생일 선물을 주지 못했다. 첫장에는 생일 선물이 늦은 상황과 책을 고르기가 어려웠음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앞으로 2008년 대사람 잘 이끌어 보자"라는 말을 적었다. 이걸 어쩌나, 나는 졸업하는데 원재는 대사람 1년 더 하는구나.<다음 중에서 옳은 것은>, 홍승진
난장반에 08학번으로 들어온 승진이의 책. 출판사를 통해 나온 것은 아니고, 자신의 글을 모아 인쇄소에서 제본한 것이다. 떡하니 책으로 만들긴 했는데 집에 백권 넘게 남은 게 쌓여 있다나 뭐라나. 절반은 승진이의 시, 나머지 절반은 승진이의 시 비평. 남의 글을 평하는 것은 좋아하지 않아 비평은 하나도 읽지 않고, 시들만 전부 읽었다. 첫장에 붓펜으로 힘주어 쓴 "만들어진 빛보다 훨씬 더 환한 빛은 네 몸속에 있을 거라고, 박종주 님께 담연 모심"이라는 문구는 ‘환하다’는 말이 얼마나 고운 것인가를 새삼 일깨워 주었다.<자연과 타협하기>, 리오 패니치·콜린 레이스 엮음, 필맥
생태주의에 관한 논문을 모아 놓은 이 책은 무려 500쪽에 달하는 데다가 가격도 2만원이 넘는다. 2008년 동아리연합회 사회학술분과 소속의 동아리들이 개최한 ‘인문사회학술주간’ 행사에서 인문학회과 고전연구회가 공동으로 운영한 <그날이 오면>(서울대 앞에 있는 인문학 전문 서점이다.) 후원 책 장터에서 혜진이가 사 준 책. 읽고 싶은 책이 있다며 사달라길래 한 권을 사주면서 농담 삼아 제일 비싼 책을 가리키며 답례를 요구했더니 그 자리에서 지갑을 열어 사 주었다. 읽고 싶었지만 가격때문에 엄두도 못 내고 있던 것을 내 손에 쥐어 준 혜진이에게 감사를. 즉석에서 책을 주고 받은 것이라 멘트는 없다.<원미동 사람들>, 양귀자, 살림
소설을 쓰고 싶던 때가 있었다. 시라는 짧은 형식은 내 속의 것을 토해내기에는 더없이 좋지만 타인에게 온전히 뜻을 전하기는
어려워 나의 이야기든 남의 이야기든 소설의 형태로 써 보고 싶던 때가 있었다. 그래서 연애 중인 이에게 이 책을 부탁했다. 그가
별 이유도 없이 한참이나 있다가, 그러니까 소설에 대한 갈망이 사라진 다음에야 이 책을 사주는 바람에 나도 한참을 버려 두고 있다가 얼마 전에야 읽었다. 그는 "늦어서 미안해요. 하지만 잊지 않고 있었어요. 난 좀 늦긴 해도 까먹진 않으니까 너무 걱정마요. 사랑해요."라고 썼다.<마르탱 게르의 귀향>, 나탈리 제먼 데이비스, 지식의 풍경
한국 최초의 진보정당 사회당의 창당 10주년이 바로 지난해인 2008년이었다. 창당 10주년 행사장 앞에서는 진보적인 내용을 주로 다루는 출판사 서너곳이 할인판매전을 열었었다. 지난 학기 동안 기자로 활동했던 인터넷 신문사 프로메테우스Prometheus의 강서희 대표님이 그곳에서 사주신 책. 갖고 싶은 책을 골라 보라시기에 여름학기 수업 시간에 듣고는 재밌겠다 싶었던 이 책을 골랐다. 받은지 두어달 남짓 되었는데 아직 읽지 못한 이 책에도 멘트는 없다.2009년
<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해냄
자신의 대학 입학 이후 맞은 내 생일 세 번을 전부 다 챙겨준 정은이의 올해 생일 선물. 끔찍한 상황을 상상해 묘사한 것이라 읽기 부담스러운 부분이 없지 않았지만, 덕분에 좋은 작가 한 명을 알게 되었다. 내가 읽은 남성 작가의 책 중에서는 최고 수준에 속한다고 해도 좋을 정도의 책. 책과 편지를 함께 받아서, 책에는 아무런 말도 적혀 있지 않다. 정은이는, 언제나 내 손 닿는 곳에 있겠다고 말해 준 사람. 앞의 생일들에 준 핸드크림과 귀걸이도 지금 바로 내 옆에 있다.
이렇게 정리해 보니 4년 동안 선물받은 책이 열아홉권이다. 여기에 더해 아버지에게 받아서 몇 권만 읽고(몇 권은 펼쳐보지도 않고) 집으로 돌려 보낸 책이 열권 남짓 되고 크리스마티 파티 때 사다리 타기로 당첨된 책도 한 권 있다. 그리고 선물받았다기보단 ‘얻었다’는 말이 어울릴 책들이 몇 권 있다. 선물 받은 책이 몇 권 더 있을 법도 한데 지금 내 책꽂이에 꽂혀 있는 것은 이게 전부다.
책이 아닌 형태로 받은 선물은 핸드 크림이 두번에 귀걸이나 옷, 그리고 카메라나 현금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것들가지를 다 정리하자니, 함께 받은 편지를 공개하지 않고서는 선물의 의미를 공유하기가 어려울 것 같아 그냥 책으로 대상을 한정했다. 이 책들을 읽으면, 나의 대학생활에 대해, 나의 벗들에 대해 조금은 알 수 있을 터이다.
언제 한 번 내가 선물한 책들도 정리해 볼까 싶지만, 그러기엔 요즘 기억력이 너무 떨어져서 조금 망설여진다. 좀 더 여유가 생기면, 내가 책을 준 이들에게 내가 준 책을 빌려서 다시 읽어 보아야겠다. 책도, 첫 장에 내가 써 둔 말들도. 헌책방에 팔아버렸다는 사람이 없기를 빌어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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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할아버지 제사에 갔다가, 몇 년만에 외가 친척들을 만났다. 그 중에서도 외삼촌 외숙모 가족은 거진 6, 7년 만에 본 셈이니, 정말로 오랜만의 일이다. 그 집에는 아이가 셋이다. 제일 큰 애가 열여섯, 둘째가 열하나, 막내가 일곱살이다. 징그럽게도 매달리는 막내랑 놀아주고 있는데 문득 그아이가 내 나이를 물었다. 스물 셋이라고 답했더니 군대 가야겠네, 라고 반문한다. 그렇다고 하니 하는 말이 아주 가관이다. 그렇게 작은 키로도 군대 갈 수 있냔다.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그 아이의 열한살짜리 누나가 끼어든다. 키가 작다고 하는 말에 아마도 자기 동생의 일로 잘못 들은 듯, 엉뚱한 소리를 한다. 작아도 군대 가야지. 가기 싫으면 여자 해. 그런데 여자 되면 집안일 해야 된다. 막내가 일하기 싫다고 답하니 당연하다는 듯 덧붙인다, 그래도 해야지. 여자들 일 하는 거 몰라?
아, 이 얼마나 처절한 진실인가. 열한살짜리가 이미 알아버린 여성의 현실이 다름아닌 집안일이라니. 남성의 군 복무 문제와 관련해 늘 나오는 이야기가 겨우 출산에 관한 것으로 국한되어 있음을 생각한다면, 이 아이는 스무살 서른살 씩이나 먹은 어른들보다도 훨씬 나은 셈이다. 생물학적이고 특수한 경험을 넘어서, 사회적이고 일상적인 문제를 이미 깨닫고 있지 않은가. 아, 처절한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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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나 버스를 탈 때면 늘 옆자리에 아무도 앉지 않기를 기도한다. 여석이 없어 누군가 꼭 앉아야 한다면 그는 어린 사람일 수록, 그리고 여성일 수록 좋다. 물론 통계적인 가능성의 문제일 뿐이지만,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나 남성은 옆사람, 그러니까 나에 대한 배려심을 갖고 있지 않은 경우가 허다해서 너무 힘들다.
오늘의 기차여행에 나와 동석한 사람은 예순이나 일흔쯤 되어 보이는 할머니다. 내가 탄 다음 역에서 기차에 오른 그에게는 네 명의 일행이 있다. 그 일행들이 짝을 지어 앉은 옆에서 생면부지의 사람과 함께 않아 있는 것이다. 원래는 다른 이가 내 옆에 앉겠다고 했으나, 불편한 타인과의 동석을 그가 자청하는 모습을 나는 보았다.
"아이고, 젊은 총각 옆에 한 번 앉아 보겠다고."
"그런 게 아니라, 느그들 이야기하면서 앉으라고 안 그라나. 요는 꼭 내 아들 같구만 무슨."
나를 옆에 앉혀 두고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자기들끼리 농을 주고 받는 모습이 재미있어서 피식 하고 웃었다. 내가 웃는 걸 봤는지 못 봤는지 내 옆의 그가 내게 말을 붙인다.
"안 그렇소, 총각?"
반말이었다면 어쩌면 그 앞의 웃음까지도 무르고 싶을만큼 기분이 상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혹은 그렇게 이야기 한 후에 너른 자리를 차지하고 활개를 펴고 앉았더라도 그랬을 것이다. 다행히 그는 덩치가 그리 크지 않았고, 활개를 펴지는 더더욱 않았다. 일행들과 함께 싸온 먹을거리를 내게도 권하면서도 그는 말을 놓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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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의 글에 썼던, 태안 사진을 받은 이들 중 한 사람에게서 문자가 왔다 ‘사진ㅡ첫팀’이라는 이름으로 저장된 사람이다. 잊고 있었던 사진을 보내주어 고맙다고, 좋은 추억거리가 될 거라고 그는 말했다. 그리고 덧붙인 한마디, "언제 청주 오면 연락주삼 밤 한끼 살게요". 이 문자의 주인공은 4, 50대의 여성이었다. 다른 사진들을 받은 것은 비슷한 나이대의 남성들. 그들이 문자를 할 줄 모르는 것인지 혹은 사진이 안 간 것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그저 무뚝뚝할 뿐인 것인지는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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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인데도 부산에 가지 않았더니, 시간이 많이 남는다. 정확히는, 리포트 작성에 투자해야 할 시간을 딴짓하느라 남겨먹고 있는 중인 거지만. 게으르게 뒹굴거리면서도 하루 세 끼는 다 챙겨먹고 있다. 놀고 또 놀다가, 거진 1년 쯤 묵은 일 두 가지를 드디어 해치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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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작년 겨울, 그러니까 2007년 12월에 태안엘 갔었다. 다들 그랬듯, 기름을 닦으러 말이다. 인연맺기 운동본부의 프로그램으로 간 것이었는데, 나는 기름을 닦는 대신 사진을 찍는 일을 맡았다. 2박 3일의 일정 동안 일과 시간에 한 일이라고는 자세히 보지 않으면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엷은 기름을 닦아 내는 것뿐이라, 사진을 딱히 제대로 찍은 건 아니지만.
어디에서 누굴 비추나 비슷한 모양이 나와, 적지 않은 시간을 황망히 돌아다녔다. 괜찮은 피사체를 찾는다는 명목이었지만 반쯤은 유람이고 관광이었다. 오랜만에 본 바다가 너무 아름다웠거든. 조약돌도, 파도도, 물결도, 그리고 기름물에서도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갯강구들도. 아무리 명분을 갖다 붙여도 그렇게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는 건 다 티가 나는 법이다.
그런 한가함을 읽어 낸 다른 방문객들, 그러니까 나와 같은 프로그램에 참여하지 않은 이들이 몇 번인가 나를 불렀다. 카메라를 안 갖고 왔다거나, 필름을 안 갖고 왔다거나 하는 사정을 대며 사진을 찍어달라고들 했다. 포즈를 잡고 단체 사진을 찍은 이들도 있었고, 그냥 자료로 쓰게 일하는 모습을 찍어 달라는 이들도 있었다. 한 팀을 찍고 있으면 그걸 본 다른 팀이 또 다가오곤 해서 내리 다섯 팀 정도의 사진을 찍어 주었다.
사진을 찍은 후에는 주소를 받았다. 대개가 노인분들이라, 사진은 인화해서 우편으로 보내야 할 형편이었다. 다들 인화비는 주겠다고 했지만, 굳이 경비까지를 받아 낼 생각은 없었다. 모르는 사람의 사진을 찍는 건 사실 즐거운 일이다. 한편으론 긴장하면서도 한편으론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이는 피사체의 오묘한 위치가 사진에 묘한 기운을 실어주기 때문이다.
그렇게 찍었던 사진들을 이제야 보낸다. 몇 번인가 보내려고 했었지만 늘 딴 일을 하다가 잊어버리곤 했다.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는 동안 주소를 저장해두었던 핸드폰이 고장나 버리는 바람에, 사진을 보내 줄 수 있는 것은 세 무리의 것밖에 없다. 그나마도 정확하지가 않고. 사진은 결국 인화하지 못하고 CD에 저장해서 보내기로 했다. 그 당시에 비하면 지금이 돈도 시간도 부족한데, 괜한 욕심을 부렸다간 또 기약없이 멀어질지도 모를 일이니 말이다. 사진이 담긴 CD 세 장이, 내일이면 우체통에 들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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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블로그를 하다가 알게 된 사람 중에 화가가 한 명 있다. 기교가 뛰어난 사람도 아니고, 화려한 색을 쓰는 사람도 아니다. 애초에 직업 화가도 아니다. 여기저기를 떠돌며 소위 ‘막일’이라 불리는 일로 먹고 사는 사람이다. 소박하고, 때론 투박함에도 삶의 무게가, 살아 있음의 환희가 느껴지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다.
지난 해 이맘 때쯤 그에게 초상화를 부탁했었다. 그는 흔쾌히 그려주겠다고 했고, 사진을 보내달라고 했다. 얼굴 사진이라도 좋고, 내가 좋아하는 사진 아무것이라도 좋다고도 했다. 나는, 기왕이면 실물 사진을 보내고 싶다며 그에게 주소를 물어 보았다. 그가 자신은 언제 거처가 바뀔지 모르니 전자우편을 통하는 쪽이 좋을 거라 했지만 나는 버텼다.
그랬던 사진도, 방금에야 겨우 보냈다. 결국 전자우편으로 보냈다. 다시 거처를 확인할까 하다가, 괜히 미루다간 또 그를 귀찮게만 하고 사진은 보내지도 못하게 될까봐 그냥 그렇게만 하기로 했다. 뻔뻔하게 이제야 보내면서도, 어떻게 그려달라는 요구 사항까지도 빼 놓지 않았다. 내일이나 모레쯤, 아마 그는 사진을 볼 것이다.
나의 요구 사항은, 그가 내 글에서 읽었다는 나의 표정을 그려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의 그림에서, 그는 나의 글에서, 서로의 웃는 표정을 본다는 이야기를 전에 했던 적이 있다. 나의 표정을 본 적이 없는 이가 내 글을 통해 본 나의 표정이 궁금했다. 더구나 웃는 표정이라니. 나는 아직도 웃는 일이 어색한데 말이다. 그가 나의 무례한 청을 받아들여 주기를 기다려야겠다.
서울에서 자전거를 탄 것도 어느새 반년이 넘었다. 처음 탔던 자전거는 7만원인가를 주고 산, 투박한 물건이었다. 무거운 물건이었고, 튼튼한 물건이었다. 그럭저럭 굵은 자물쇠도 달려 있었고, 어느것 하나 싣지 못한 적 없는 짐받이에, 흙받이까지도 달려 있었다. 전지 값을 댈 자신이 없어 등은 달지 못하였지만, 앞뒤로 반사경 역시 빠짐없이 붙어 있었다.
그것을 잃어버리고 새로 산 물건은 가격이 그 두배 쯤 되는 것이었다. 무거운 원래의 자전거에 지쳐 갈 무렵이었고, 여태껏 만져보지 못한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도 있었다. 비슷한 물건들 중에서는 역시 가장 싼 것이라 썩 좋은 것은 아니었지만, 잘 깔린 서울의 도로를 달리기에는 모자람 없는 물건이었다.
예정에 없던 지출을, 앞번 자전거의 두 배나 되는 가격으로 한 탓에 흙받이나 짐받이는 달지 못했다. 자물쇠는 앞의 자전거를 사면서 덤으로 받은 작고 가는 것이었고, 반사경은 뒤쪽에만 달았다. 바퀴가 가늘어 제동력이 약하기에 더 위험한 것이었지만, 여전히 전지값을 댈 자신은 없어 등은 달지 못했다.
타이어의 지름은 27인치, 앞의 것보다 1인치가 더 큰 물건이다. 핸들은 동물 다큐멘터리에서나 볼 수 있는 커다란 소의 것처럼 굽어 있고, 몸체는 가늘다. 날렵하고 높은 차체에서 생략된 짐받이와 흙받이는 ‘없음’이라기보다는 ‘불필요함’으로 비쳤다. 늘 그래왔듯 가장 싼 것을 샀음에도, 사람들은 뭔가 비싼 것을 산 것으로 생각했고, 늘 지고 다니던 짐을 배낭에 넣었을 뿐임에도 사람들은 짐도 없이 가볍게 다니는 줄로 알았다.
하지만 사람들의 오해 따위야 신경 쓸 바가 아니었다. 그들의 생각이 진실이 아닐 뿐더러, 그 생각들이 그들의 삶에 영향을 끼치지도 않을 테니 말이다. 내가 13만원 짜리 자전거를 샀다고 해서, 그러지 못하는 자신의 형편에 자괴감을 느낄 사람이나, 무거운 책가방을 들고 다니지 않는다고 해서 스스로의 수고로운 삶을 괴로워할 사람은 주변에 딱히 없었다.
오히려 신경 쓰이는 것은 자전거를 타는 다른 사람들이었다. 운동삼아 자전거를 타고 마실을 다니거나, 헬멧부터 타이즈까지 성장盛裝을 하고 ‘자출'(자전거 출퇴근)을 하는 사람들이 신경 쓰였다는 것은 아니다. 내 눈에 늘 밟힌 것은, 짐받이 가득 폐지를 싣고 신림로를 다니는 이들이나 짐받이로 모자라 양쪽 핸들에 걸린 주머니에까지 배달할 물건을 가득 담고 종로를 가로지르는 이들이었다.
그들의 투박한 자전거, 짐받이를 높이고 스탠드를 튼튼하게 만들려고 용접한 자국까지 선명한 그 자전거들에게 내 자전거는 그야말로 사치로 보일 것이었다. 짐받이 가득 실린 그들의 온갖 짐에게, 짐받이 없는 나의 자전거는 어느 것 하나 질 필요없는 여유로운 삶으로 비칠 것이었다. 전조등이 없는 것조차가, 밤에는 나다니지 않고 따뜻한 집에서 쉬는 삶으로 비칠 지도 모를 일이었다.
내게도 그리 보이는 자전거들이 많은데, 그들에게야 오죽하랴. 길에서 만나는 수많은 화려한 자전거들을 나는 늘 따라잡는다. 수많은 사람들은 내 한달 월세보다 비싼 브레이크를 단 자전거에 올라 앉아 내 자전거 가격과 맞먹는 타이즈를 입고 도로를 달린다. 역시나 유명 브랜드에서 나온 저지와, 가벼우면서도 튼튼한 차체, 선글라스와 헬멧, 그리고 깜빡이는 전조등까지를 합치면 나의 한 학기 등록금 쯤은 가볍게 넘길 자전거들을 보고 싶지 않아 나는 그들을 기어이 따라잡는다.
자전거야 이미 사버린 것이었지만, 그래서 나는, 헬멧 만큼은 쓸 수가 없었다. 바퀴 폭이 좁아 유난히 많이 흔들리는 내 자전거가 한강을 건너고 고개를 미끄러지는 것을 보며 가슴 졸이는 이들이 내게, 제발 헬멧이라도 쓰라고, 너무 걱정된다고 그렇게 말을 해도,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신호등이 바뀌기 무섭게 교차로를 가득 메우는 종로 3가의 자전거들, 성긴 백발 사이로 흐르는 땀을 보고서 내 머리에 헬멧을 씌울 수는 절대로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제발 헬멧을 쓰라고 말하는 이들에게 그리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당신이 내게 하는 걱정보다, 내가 일방적으로 느끼는 저들의 삶에 대한 연민이 더 무겁다고 말하는 것 역시, 절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늘 핑계를 댔다. 저지와 타이즈를 갖춰 입지 않고 헬멧을 쓰면 보기 우스우니 그러지 않겠다는둥, 열이 많은 체질이라 헬멧을 쓰면 더워서 안된다는둥, 가당찮은 말들로 그들의 걱정을 따돌렸다.
그런데 울어버렸다. 나를 걱정하던 한 사람이, 자전거를 타고 차들 사이를 지나는 내 뒷모습을 보면 너무 무섭다며, 눈물을 터뜨렸다. 버스를 타고 내 자전거 곁을 지나다 내가 안 보이게 되는 순간이나, 거리에서 사고가 난 것을 볼 때면 너무도 무서워서 가슴이 두근거려 참을 수가 없다며, 그는 눈물을 흘렸다. 그 눈물은 아마도, 종로의 자전거들에게 내가 흘린 눈물보다는 훨씬 뜨거웠을 것이다.
그 눈물을 보고서도 나는 헬멧을 쓰마고 말하지 못했다. 아마도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 눈물에 대한 답으로써 헬멧을 쓴 채로, 높다란 짐받이 옆을 지날 용기가 없었을 것이다. 그것이 아니었다면 아마도, 지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내 마음에 품은 알량한 도덕을, 그 눈물 앞에 무릎 꿇게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일 터이다. 그저 미안하다고만 했다. 아니 어쩌면, 미안은 하지만 헬멧을 쓸 수는 없다고 못을 박아버렸던지도 모른다.
그런데 마침, 그 다음날엔가 혹은 그 다음날엔가 어느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사용하지 않는 헬멧이 하나 있으니 받아달라고 그 친구는 말했다. ‘받아 달라’는 말을, 선물을 줄 때 사용한다고 그는 설명했다.그제서야 나는 알량한 나의 고집을 꺾을 수 있었다. 감사히 받겠노라고 그 친구에게 답하고서야 헬멧을 쓸 마음을 나는 겨우 먹을 수 있었다.
그러고서도 한참이 지나서야 헬멧을 받을 수 있었다. 한 번은 그 친구가 잊고 헬멧을 가져 오지 않았고, 그 이후로는 내가 바쁜 통에 시간이 맞질 않아서 지난 금요일에야 겨우 헬멧을 전해 받았다. 토요일 아침에는 그래서 헬멧을 쓰고 자전거를 탔다. 학교 정문 앞의 고갯길을, 헬멧을 쓰고 넘었다. 여전히 길 가는 사람들이, 그리고 혹시 마주칠지 모르는 자전거들이 신경 쓰이지만, 그래도 고마운 일이다.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헬멧을 쓴다. 알량한 나의 연민 대신, 내 사랑하는 사람들의 진심어린 걱정에 대한 예의를 다할 수 있게 되었다. 불편하지만, 아마 언제까지고 늘 불편하겠지만, 그래도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참 고마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