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들어 밤에 잠들기가 어렵다. 몸은 극도로 피곤한데도, 낮에까지 내내 잠이 오는데도, 정작 밤이면 잠이 달아난다. 어제는 끙끙거리다가 5시가 넘어 겨우 잠들었는데, 오늘은 그조차도 되지 않을 것 같아 잠들기를 포기하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일다로 메타블로그를 뒤지다가 누군가의 블로그에서 mi-ring이라는 생소한 블로그 목록을 발견했는데, 그곳을 통해 들른 어느 블로그에서 엄마와 가사노동에 관한 글을 읽게 되었다. 블로그의 주인인 필자가 가사노동에 대한 견해를 필자의 엄마와 나누던 중 엄마가 표한 불편함에서 글은 시작했다.
문든 떠오르는 게 있었다. 아니, 꽤 오랫동안 종종 떠오르던 것이 또 한 번 떠올랐다. 당시에는 얼렁뚱땅 넘어갔는데 후에 내내 가슴에 걸리는 일들이 있다. 늦었지만, 뭐라고 짧게라도 변명해야 할 어떤 사건이 말이다. 나 역시 지난 23년을 살면서 그런 일들을 몇 개 만들었는데, 그 중 하나가 또 떠오른 것이다.
대학에 입학한 2005년, 나는 내가 속한 난장반의 모임인 "주체적인 인간들의 공동체"에 가입했다. 약칭인 ‘주인공’으로 불리던 그 모임은, 주제를 정해 영화를 보고 그에 관해 멤버들끼리 토론을 하는 공간이었다. 지금 변명하려는 사건이 일어난 것은, "메커니즘과 인간"이라는 주제의 텀을 진행하며 영화 <효자동 이발사>를 보고 세미나를 하던 중이었다.
옅은 기억을 되살려보자면, <효자동 이발사>에서 송강호 분의 이발사는 문소리 분의 이발사 보조를 방으로 끌고 들어가 임신시킴으로써 결혼을 성사시킨다. 방으로 들어간 후의 상황은 생략되었고, 방으로 들어가기 전 이발사가 이발사 보조의 몸을 보며 군침을 삼키는 장면은 생략되지 않았다. 그 상황에서 이발사 보조가 느끼는 감정은, 약간의 당혹스러움 이외에는 표현되지 않았다.
세미나의 원래 초점은 유신 정권 하에서 개인의 삶이 체제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았는가 하는 류의 것이었지만, 위의 장면 역시 주요하게 다루어졌던 것 같다. 세미나의 형식은 자유로운 편이었고, 적지않은 멤버가 성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덕일 것이다. 한 친구가, 이발사가 이발사 보조를 ‘강간했다’는 말을 꺼냄으로써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그 뒤로 어떤 이야기들이 오갔는지는 사실 잘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은, 그러니까 지금까지도 종종 떠올라 가슴에 걸리고, 십 몇 분 전에 누군가의 글을 읽음으로써 또 다시 떠오른 한 장면은, 그의 발화에 이어 튀어 나온 나의 한마디였다. 나는, "덮쳤죠."라고 말했다. 그러자 "강간했다"고 표현한 이는 다시 한 번 자신의 표현을 반복했다.
누군가가 나서서 표현이 다를 수 있음을 지적했고, 이야기의 초점이 그 행위에 대한 평가보다는 그런 상황 속에서의 여성의 삶에 관한 것으로 맞추어진 탓에 나와 그가 설전을 벌이거나 하지는 않았다. 서로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지만 애써 잊은 채 다음 화제로 이야기를 진행시켰다.
그 상황이 4년이나 나를 붙잡고 있었던 것은, 내가 선택한 "덮치다"라는 표현이, 이발사의 행위에 대한 옹호로 읽힐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니, 내 의도와는 상관없이, 이발사의 행위를 옹호하는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치 판단이 약화된’ 단어를 굳이 고른 나의 의도는 그것이 아니지만, 나의 선택이 성폭행이라는 행위에 대한 가치 판단 자체를 유보하거나 혹은 약화시키는 데에 일조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내가 굳이 덮친다는 모호 단어를, 그것도 굳이 강간했다고 표현한 사람의 말을 자르며 들이댄 것은 이발사가 아닌 이발사 보조가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나의 표현―나의 가치 판단이 단순히 이발사의 행위를 규정하는 것일 뿐만이 아니라, 이발사 보조의 상황 자체를 규정하는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인 것이다.
상대방의 의중을 따지지 않고 무력을 행사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욕망을 채운 이발사의 행위를 비판, 혹은 비난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를 구시대적이고 마초적인 소시민이라 부르는 것도, 파렴치하고 부도덕한 강간범이라 부르는 것도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의 행위 뿐 아니라 그의 인격 자체를 싸잡아 비판하는 데에도 크게 거리낌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강간했다’는 표현은 시대를 앞서 나가는 페미니스트가 되지 못한 것 이외에는 죄가 없는 이발사 보조의 삶까지를 흔들어 놓는다. 세상 물정 모른 채 서울에 와서 일하다가, 이발사가 밀어 붙이는 바람에 어쩌다 보니 애엄마가 되었지만 그래도 크게 괴롭지 않은 삶을 살아 온 한 인간―여성의 삶을, 극단적인 객체인 ‘피해자’의 것으로 한순간에 바꾸어 버릴 수 있는 것이다.
거기다 대고 당신이 피해자였음을, 객체였음을 인정하라고 외칠 수는 없는 일이다. 한마디 쉬운 말로 그의 지난 수십년 삶을 부정하고 붕괴시킬 수는 없는 일이다. 그것은 내가 온전한 책임을 질 수 있다는 확신이 있을 때에 감히 시도를 꿈 꿔 볼 수 있는 일일지는 몰라도, 아무 대답도 할 수 없는 상대를 앞에 두고 함부로 내뱉아도 좋은 일은 절대 아니다.
물론 이야기를 꺼낸 그가 그런 의도를 갖고 있지는 않았겠지만, 나는 순간 울컥하고 말았었다. 1년이라는 짧은 대학생활 중에도 수없이 보고 또 들었던, 대학생의 입바른 소리들, 너무나도 쉽게 지껄여지는 그 말들에 대한 염증이 그 순간 거부반응이 되어 튀어나왔던 것이다.
그가 당시의 상황이나 나의 말을 기억하고 있을는지, 나처럼 가슴에 담아 두고 있을는지는 모르겠다. 또한 이 글을 과연 그가 보게 될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혼자서 이렇게 주절거린다고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렇게나마 변명을 해보고 싶었다.
변명에 또 변명을 덧붙이자면, 이 변명은 나를 위한 것만은 아니다. 아니, 이것이 나를 위한 것으로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 이발사의 행위를 보며 분노했던 그에게, 당신의 곁에 있는 누군가가 그 이발사를 옹호하는 것이 아님을, 나 역시 당신과 같은 감정을 갖고 있음을, 그러니 당신은 혼자가 아님을 알릴 수 있으면 좋겠다. 나의 입으로 감히 그런 말을 하지는 못 할 테니, 우연히라도 그가 이 글을 볼 수 있기를, 그래서 이 글이 나만을 위한 것으로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
(내가 본 블로그의 글은 2008년 7월이 것이며, 그 블로그의 마지막 글이다. 다시 말해 그 글을 쓴 이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 또 그 글을 읽을 수 있기를 바라기에 여기에 링크를 걸어 둔다.)
시골이 즐거운 것은
시골이 즐거운 것은 죽음이 자연스러운 탓이다. 잡동사니를 태우는 냄새가 솔잎의 향기와 하나로 어울리는 것은 시골집 마당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잡동사니를 태운 흰 연기가 하늘로 피어올라 구름 앞에서 스러지는 것은 시골의 하늘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다.
삶이 그렇듯 죽음이 축복받을 수 있기에 시골은 즐겁다. 죽음이 다가와도 숨을 필요가 없기에, 삶을 주위와 함께 했듯 죽음 역시 저들과 함께 맞을 수 있기에 시골은 즐거운 곳이 된다. 죽음은 어두운 골방이 아니라 환한 거리에서 찾아 온다.
죽음이 백일하에 드러난다. 일흔 해나 여든 해, 혹은 아흔 해쯤의 시간이 이웃들의 곁에서 숨을 갈무리하고, 쓸모를 잃은 잡동사니들 혹은 마른 삭정이들이 솔잎의 냄새처럼 숲을 감싸는 연기가 된다. 삶의 끝을 맞는 시간은 늘 대낮이다.
시골의 즐거움은, 고향길의 아름다움은, 지저귀는 새들이나 폴짝이는 개구리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른 곳에서는 찾을 수 없는 수많은 생명들, 그 움직임들에도 아름다움은 있지만, 시골의 아름다움은 그 정수를 다른 곳에 숨겨 두고 있다.
길가에서 썩어가는 호박들, 밭둑에서 곰삭는 거름들, 좁은집 툇마루에서 마당을 응시하는 늙은 눈빛들, 안방에 누워 움직이지 못해도 자연스레 드나드는 숨들, 그곳에 시골의 아름다움이 있다. 그 죽음들이 내는 화음에 시골의 즐거움이 있다.
서울역 그로테스크
3월 7일 저녁, 서울역에서는 달포 전 경찰의 진압 작전으로 죽음에 이른 이들에 대한 추모제가 열리고 있었다. 그런 곳이 늘 그렇듯, 무대를 바라보거나 무대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경청하는 사람들과, 하필 이런 데서 저런 일을 하느냐고 비아냥거리는 이들이 섞여 있었다.
내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 무대에 올라 있는 것은 어느 악사(樂士)였다. 낯선 악기가 낯선 가락을 흘리고 있었다. 낯선 곡의 연주가 끝나자 악사는, 그것이 몽골의 음악이며 “천상의 바람”이라는 제목의 곡임을 알려주었다. 천상에 있을 죽은 이들을 기리는 의미에서 연주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 악사가, 청중들에게 보다 익숙할 것이라는 다음 곡의 연주를 준비하는 동안 잠깐 정적이 흘렀다. 그틈을 타고 등 뒤에서도 악기 소리가 들려 왔다. 역사 입구에서 으레 열리는, 외국인 악사의 연주였다. 그곳에 서는 이들이 늘 그렇듯, 그 역시 청바지 위에 판초를 걸치고 손에는 커다란 팬플룻을 들고 있었다.
외국인 악사가 연주하는 것은 러시아의 민요로, 한국에서는 “백만송이 장미”라는 유행가의 가락으로 널리 알려진 곡이었다. 그 곡 역시, 그 악사의 차림만큼이나 그 장소에서는 익숙한 것이었다.
앞뒤에서 들려 온 두 개의 가락을 모두 받아들이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앞에서는 이 땅에서 죽은 이들을 기리는 이국의 음악을, 죽은 이들과 같은 피부, 같은 말을 가진 악사가 연주했고 뒤에서는 이 땅에서 새로운 살 길을 모색하는 다른 땅의 사람이 자신의 악기로 이 땅의 가락을 연주했기 때문이었다.
내 앞의 무대에서 펼쳐지는 죽은 이들에 대한 애도는 내게 무척이나 소중한 것이었지만, 내 등위에서 들리는 어느 외국인의 삶을 위한 연주 역시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 잠깐의 정적을 틈타 나는, 내 자리를 떠나 외국인 악사의 무대를 향했다. “백만송이 장미”의 가락은 흥겨우면서도 구슬프게, 바삐 팬플룻을 움직이는 그의 손끝에서 흘러나왔다.
광장에 펼쳐진 커다란 무대 때문인지, 아직 쌀쌀한 날씨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매일같이 열리는 비슷한 무대이기 때문인지 외국인 악사의 앞은 한산했다. 연주를 하고 있는 그와 그의 매니저쯤 되어 보이는 한 사람을 제외하고 그 무대에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는 나를 포함해도 다섯이 채 되지 않았다.
외로운 무대에서도 연주는 이어져서, 익숙한 유행가 가락이 끝나고 아마도 악사의 고향 노래쯤 될 법한 새로운 가락이 흘러나왔다. 새로운 곡을 연주하는 데에는, 앞의 곡을 위해 썼던 것보다 훨씬 더 큰, 그래서 꽤나 다른 소리를 내는 다른 팬플룻이 사용되었다. 쇳소리가 약간 섞인 듯한 대금 소리 비슷한 소리가 흘러 나왔다.
망연히 그것을 듣고 있는데 내 곁에 누군가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비틀거리는 몸짓이 그가 술해 취했음을 말해주었다. 괜히 눈을 마주쳤다가는 원치않는 대화, 그러니까 나는 공감할 수 없는 문제들에 대한 넋두리를 주워섬겨야 할 것 같아 모른체 앞을 응시했다. 곁눈질로 그를 살폈지만, 그 역시 내 옆에 서 있기만 할 뿐 앞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가 나를 보지 않는다고 해서 그가 내게 할 말이 있음을 내가 모를 수는 없는 일이다. 그의 침묵은 결국 나를 움직이고 말았다. 내가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리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 말을 꺼냈다. 약간의 사시가 있는 그는, 무언가로 덮힌 하얀 혀를 갖고 있었다. 그 하얀 물질이 그의 혀를 잡고 있기라도 한듯, 그의 발음은 불분명했다.
그의 발음을 알아듣기는 어려웠지만, 여러번 겪어 본 상황인 덕에 그의 의도를 알아차리기는 어렵지 않았다. 그는 내게 담배를 요청했고, 나는 그가 입을 열기 전에 이미 그것을 알고 있었다. 담배를 피우지 않아 갖고 있지 않다고 말하자 그는 그렇잖아도 그래 보인다고, 그러면 혹시 이천원이 없느냐고 물었다.
죄송합니다, 지금은 돈이 없네요, 라고 답했지만 사실 돈은 있었다. 이천원은 없었지만 만원짜리 몇 장이 지갑에 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가 말을 꺼내기전부터 이미, 담배 한 갑을 사다 줄까를 고민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잠깐의 고민이었을 뿐 실행에 옮겨지지는 않았다. 내 친구들에게 권하지 않는 담배를, 한데잠 자는 이에게라고 해서 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돈이 없다고 말한 후 나는 악사를 응시했다. 하지만 가락은 내 귓속으로 들어오지 못했고 나는 고민에 빠져 있었다. 지갑에 있는 만원짜리로 그에게 무엇을 사다줄까 하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나의 재미 없는 머리로는, 그가 좋아할 만한 것이라고는 술과 담배밖에 떠올릴 수 없었다. 물론 그것들은, 차마 사다 줄 수 없는 물건이었다.
마주 앉아 술이라도 한 잔 기울일 생각이라면 못할 것도 없는 일이었지마는, 차마 그럴 용기는 생기지 않았다. 술을 마실 만큼 내 몸이 성하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의 하얀 혀를 바라보며 그의 말을 읽을 용기가 없기 때문이었다. 결국 나는, 외국인 악사의 음악을 마저 듣지 못하고 그 자리를 피하고 말았다.
돌아온 추모의 무대에서는, 고인들의 가족이나 벗들이 애도의 말을 잇고 있었다. 이미 비슷한 무대에서 몇 번인가 들은 적이 있는 이야기여서 그 울림은 오히려 방금 보고 온 하얀 혀의 것보다 적었다. 눈물과 함께 마이크를 향하는 그 소리들을 흘려 들으며 나는 무대 주변을 배회했다.
고인들과 함께 싸웠던, 다행히 죽음은 면했지만 범법자로 지목되어 재판을 받게 된 고이들의 동료들에 대한 탄원 서명을 받는 부스가 있었다. 조용히 다가가 펜을 쥐어들자 부스를 지키고 있던 이가, 읽어 보았는지를 물으며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종이를 받아들자 그는 탄원 서명 운동과 함께 재판 비용 모금 운동도 벌이고 있노라고 했다.
아무 대답을 않았지만 그는 말을 이었다. 지금 만원을 기부해 주시면 재판정에 설 이들에게 큰 힘이 될 거라고 했다. 나는 아까 뱉었던 말을 또 한 번 했다. 잠시 망설였지만, 죄송합니다, 지금은 돈이 없네요, 라고 나는 다시 말했다. 그는 나중에 생각나면 계좌로라도 꼭 넣어달라며, 유료로 배포하는 소책자까지를 내 손에 쥐어 주었다.
하얀 혀를 보며 고민했듯, 지금이라도 돌아가 돈을 낼까 잠시 고민했지만 결국 그러지는 못했다. 지갑에 손을 댈 수록 눈 앞에 하얀 혀의 이미지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가 담배 없는 밤을 보내는 대신, 나는 지갑 없는 밤을 보내야 할 성 싶었다. 한켠에서 죽음을 기리고 한켠에서 삶을 찾아 서로 다른 음악이 흐르는 서울역에서 나는, 늘 그렇듯, 삶도 죽음도 아닌 나의 당당함을 찾아 남을 속였다.
아직 끊지 못한 것들
수업에서는 아니었지만, 대학에서는 참 많은 것들을 배웠고 또 깨쳤다. 아는 것이 하나씩 늘어갈수록 해야 할 일도 늘었지만 반대로 해서는 안될 일들 또한 늘었다. 그것들을 하나하나 해 나가면서 생활의 많은 부분이 바뀌었지만 여전히 해내지 못한 것들도 꽤 있다. 그 중 내가 오래동안 노력하고서도 아직 완전히 해내지 못한 몇 가지를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을 졸업 전부터 했었다. 그러고서도 이제야 이것을 쓰게 되는 나의 게으름 역시, 내가 어찌하지 못한 것들 중 하나일 테다.
‘집에 내려 간다’는 말
내가 보아 온 세계전도나 지구의에는 항상 북극이 위쪽이 그려져 있었다. 당연히 서울이 김해보다 높은 곳에 그려져 있었고. 하지만 서울 올라간다, 혹은 김해 내려 간다는 말은 단순히 그런 지리적인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애초에 우주의 위아래를 알기는 어려우니 그 지리적 문제 역시 허구에 불과한 것이겠지만.
그 말들은 김해에 살 때에도 썩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때에야 서울과 김해를 오갈 일이 없으니 딱히 쓸 일 또한 없었다. 하지만 서울에 살게 된 4년 전부터 상황은 달라졌고, 나는 말을 버리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덕분에 ‘서울 올라 간다’는 말을 쓰는 일은 없게 되었지만 ‘집에 내려 간다’는 말은 여전히 종종 튀어나오곤 한다.
비슷한 말 중에 ‘아래로부터’라는 표현이 있다. 대의민주주의 형식을 갖춘 곳에서 대표자가 아닌 이들을 종종 ‘아래’로 칭하곤 한다. 아래로부터의 의견 수렴, 아래로부터의 복지, 뭐 이런 식으로. 그들을―그리고 나를 ‘아래’로 칭하는 것은 유쾌하지 않은 일인데, 이 말 역시 아직 완전히 입에서 떼어 내지 못한 채 살고 있다.
유제품
육류를 먹지 않은지 어느덧 열달 가량이 되었다. 먹기 위한 사육에 반대하는 것이 애초의 동기였기에 계란이나 유제품 역시 최대한 먹지 않으려 하고 있고, 그 중 계란은 빵을 먹을 때가 아니면 섭취하는 일이 딱히 없을만큼의 생활을 하고 있다.
하지만 유제품은 아직 상당한 양을 먹고 있다. 물론 생우유를 사서 마시는 일은 많지 않지만, 커피나 빵에 곁들여 먹는 경우는 아직 상당히 있고 치즈는 돈이 허락할 경우의 이야기지만 그냥 간식으로도 종종 먹는다. 그런 식으로 직접 섭취하는 것과 빵이나 과자, 피자 등을 통해 섭취하는 양을 합치면 만만히 넘길 수준은 아닐 것이다.
유제품을 끊지 못하는 것은 ‘우유의 처지’가 내게 그만큼 강하게 와닿지 않기 때문이다. 어릴적부터 보아온 육우肉牛나 (알을 낳는)닭은 그야말로 몸부림칠 틈조차 없는 곳에 갇혀 있었지만 어쩐 일인지 내 주위의 젖소들은 상대적으로 훨씬 자유로운 환경에 있었다. 그나마 저정도면 살만하겠네, 라는 인식이 베어 있는 것이다.
며칠전 스펀지라는 티브이 프로그램에서 각종 기능성 우유의 허와 실을 밝히는 코너를 방영했다. 그 중 ‘잠 잘 오는 우유’라는 것이 있었는데, 이 우유를 만들기 위해서 농장에서는 소의 멜라토닌 수치가 높은―즉 소가 잠오는 상태인 새벽 세 시에 소의 젖을 짠다고 했다. 그쯤 되는 것을 보았으면 이제 우유도 과감히 끊어야 하는데, 사실 약간은 자신이 없다.
1인칭 주어 ‘형’
주변에 1인칭 주어로 형/오빠, 혹은 언니/누나라는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청자와 자신과의 관계를 우선시한 단어 선택이라든가 친밀감의 표현이라든가 하는 여러가지 변명이 있겠지만,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어느 정도의 권위 의식에 기반한 단어 선택임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동생이’로 시작하는 문장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그 반증일 터.
하지만 나로서는, 의식적으로는 물론이고 실수로조차, 혹은 농담으로조차 사용해 본 적이 없는 표현이다. 그러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그런 말을 쓰는 일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몇번인가 자조적인 농담으로 써 보려 했던 적이 있으나, 그조차도 되지 않았다. 그만큼이나 내게는, 감히 사용할 수 없는 표현인 것이다.
대신 ‘형아가’라는 표현을 때때로 사용한다. 원래는 종종 사용했었는데, 스스로가 그런 표현을 사용하고 있음을 인식하고부터 의식적인 노력을 통해 그 빈도를 떨어뜨렸다. 내게 이런 표현으로 시작하는 문장을 듣는 사람은 딱 한 명, 일곱 살이라는 꽤나 큰 터울이 있는 내 동생이다. 주로 무언가를 해줄 때 이 표현을 사용한다. "형아(물론 경상도 방언으로 발화하기때문에 실제 발음에는 꽤 차이가 있다.)가 나중에 해 주께."하는 식으로.
터울이 큰 막내가 그나마 ‘형아’로 스스로를 지칭하지만, 아마 나이 차이가 더 적었거나 우리 둘의 나이가 더 많았더라면 ‘형님’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을 것이다. 내가 이런 표현을 유독 동생에게만 사용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아마 작년이나 재작년쯤의 일이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1년 혹은 2년 동안이나 신경 쓰고서도 아직 완전히 버릇을 고치지 못했다는 뜻이다.
끊지 못한 것이 어디 이것 뿐이랴만.
(이 글을 쓰기 시작할 당시 떠올렸던 것이 분명히 세 개의 항목이었는데 쓰다 보니 둘밖에 기억나지 않아 두 개의 항목만을 정리해서 게시했었다. 뒤늦게 나머지 하나가 다시 떠올라서, 늦게나마 추가한다. 순서대로 앞의 두 개가 처음에 쓴 것이고 마지막 것이 후에 추가한 부분이다.)
어제는 3.8 여성의 날
1.
난생 처음으로 3.8 여성의 날 행사에 다녀왔다. 내 정보력의 범위 내에 있는 여성의 날 행사는 여성연합 등에서 주최하는 전국여성대회와 전국학생행진 등에서 주최하는 여성의 날 문화제, 이렇게 두 개인데 둘 다 내가 그리 좋아하지 않는 단체들에서 여는 거라 그간 한 번도 가 보지 않았다.(어제 다녀와서 좀 찾다보니 민주노총에서 하는 여성 노동자 결의대회 같은 것도 있긴 하더라.) 작년에는 주변 사람들이 꽤나 간다길래 은근슬쩍 묻어서 가 볼까 했으나 마침 다른 일과 겹쳐서 가지 못했다.
어제 다녀온 것은 여성연합 등에서 연 전국여성대회를 비롯한 몇 가지 행사들. 2시부터 열린 여성의날 기념식에서 아는 선배가 공연을 한다기에 가기로 맘 먹었던 건데, 늦잠을 자는 바람에 정작 공연은커녕 선배 얼굴조차 보지 못했다. 행사는 역시나 그저그랬지만, 의외로 다양한 단체들에서 부스를 열고 있어 그리 아깝지는 않은 시간을 보냈다.
어제의 견문을 꽤나 자세히 썼었는데, 뭔가 오류가 생겨 날려먹는 바람에 자세한 이야기는 생략하기로 한다. 자세한 내용을 보고 싶다면 이 글을 참조할 것. 나와 동행한 이의 후기로 연결된다.
2.
나를 여성의날 행사로 이끈 다른 요인도 하나 있었다. 여성 민우회 홈페이지에 올라와 있는 여성의 날 공지 게시물 중 ‘3.8을 맞이하는 민우회원의 자세’라는 파트다.
미션1. 봄날 어김없이 찾아오는 황사에 대비해 마스크를 챙긴다!
미션2. 초봄 쌀쌀한 기운을 든든히 막기 위해 후드티를 입는다!
미션3. 즐겁고 신나게 여성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간편한 차림에
운동화를 신고, 배낭을 맨다!
그리고 미션 4. 자외선을 피하기 위해 썬글라스를 필참한다!
위의 ‘미션’ 네가지는 이명박 정권의 복면금지법을 풍자하기 위한 것이다. 집회에서 얼굴을 가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황사와 쌀쌀한 날씨를 피하기 위해 얼굴을 꽁꽁 가리자는 것. 이 중 나를 잡아 끈 것은 바로 세 번째 미션이다.
대학에서 4년 동안 이런저런 모임들, 특히나 종종 집회에 나가는 모임들에서 활동했고 그 중 3년은 선배-경험자-로서, 혹은 어떤 일의 담당자로서 공지를 보내거나 상대방이 겪을 상황에 대한 조언을 주며 시간을 보냈다. 그 시간동안 집회는 늘 격했고, ‘뛸’ 일들로 가득했다.
당사자의 안전과 건강을 위한 것이라고는 해도, 집회에 가면 뛰거나 싸워야 하니 편한 옷(대개는 ‘안 예쁜’ 옷)을 입고, (구두가 아닌)운동화를 신고 오라고 말하는 것은 늘 조심스러운 일이었다. ‘뛰기 위해 어떤 차림을 하라’고 말하는 것보다는 ‘뛰기 힘들어 보이니 같이 뒤로 빠지자’고 말하는 편이 내겐 훨씬 쉬운 일이었다.
평소에는 늘, 여성의 외모가 사회에 의해 규제받고 있는 것이며 불편한 복장과 화려한 화장은 온전한 개인의 선택이 아님을 강조하던 이들이 집회나 새터, 혹은 비슷한 행사들이 있을 때마다 ‘활동하기 편한 복장’을 요구하는 것을 보는 것은 또한 내 입에 그 말을 담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여성단체’에서도 똑같은 이야기가 나오더라. 그래서 궁금해졌다, 그들의 3.8이 말이다.
3.
여성의날 행사에 참가한 이들은 아름다웠다. 그들의 몸이나 얼굴이 아닌, 복색과 태도가 말이다. 어느 집회에서나 흔히 볼수 있는 통일된 차림을 하고 있는 이들도 별로 보이지 않았고, 감정이 과잉한―혹은 결의가 과잉한 노래도 별로 들리지 않았다.
다만 참가단체별로 한 두가지씩의 아이템은 공유하고 있었다. 어떤 이들은 보라색 원통을 머리에 쓰고 있었고 또 어떤 이들은 보라색 풍선을 손에 들고 있었다. 주최측에서 나눠준 듯한 붉은색과 노란색의 술을 들고 있는 사람들도 꽤나 있었다.
내가 늘 보아오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들 역시 ‘같은 것’에서 아름다움, 혹은 강함을 찾는 듯했으나 다행히 그것이 나의 소름을 끼치게 할 만큼은 아니었다. 그 한두가지 물건들로 인해 하나가 되기에 그들은 너무도 다양한 표정과 다양한 몸짓을 갖고 있었던 덕이다.
하지만 그들의 행진은 늘 보아 오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비록 ‘대중가요’에 속하는 노래들이 종종 흘러 나왔고 여성 사회자들이 마이크를 잡았지만, 그리고 내가 보아온 것보다 다양한 연령과 성별의 사람들이 방송차를 따랐지만 말이다. ‘퍼레이드’라는 이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늘 보아오던 평범한 행진과 다르지 않았다.
방식도, 구호도, 시작과 끝을 알리는 인삿말도 소위 ‘남성적’인 것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하면 조금은 설명이 될까. 당연하다는 듯 ‘쇳소리’로 인사를 하고 발언 중에 설움이 북받쳐 눈물을 터뜨린 후에야 겨우 자신의 목소리로 이야기를 잇던 여성 연사들을 볼 때와 비슷한 심정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청계광장에서 시작한 행진은 국가인권위원회와 프레스센터 앞에서의 퍼포먼스를 포함하고 있었다. 인권위 축소해 반대하는 줄넘기와 언론법 개악을 반대하는 상자밟기, 이 두개의 퍼포먼스를 하는 동안 행진 대열에 있던 한 휠체어 장애인은 그저 박수를 치며 환호하고 있었다.
늘 주제넘은 짓일지 모른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광경을 볼 때면 나는 늘 그 당사자만큼의 웃음을 지을 수가 없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가 짓는 웃음만큼의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다. 물론 어제도 그랬다.
4.
집에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나는 그의 어깨에 기대어 앉았다. 그러다가 한 번, 서로 입을 맞추었다. 작았지만, 쪽, 하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가시기 무섭게 머리 위에서 거친 음성이 들려 왔다. "그런 건 집에서 해." 뭔가 싶어 고개를 들자 그는 다시 한번 확인해 주었다, "그런 건 집에 가서 하라고."
몇 분 전인가 버스에 타 내 옆에 서서는 거친 숨을 뿜고 있던 이였다. 그의 숨에는 약한 술냄새과 짙은 담배냄새가 섞여 있었다. 독한 그 냄새와 씩씩거리는 커다란 소리가 뜨거운 숨결을 타고 내 얼굴에 날아왔다. 물론 나는 기분이 상했지만, 늘 그렇듯 티내지 않고 있었다.
나는 그렇지 않지만, 타인의 애정표현―신체접촉을 보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불편하거나 불쾌한 일일 수 있다. 충분히. 하기에 그의 문제 제기에 내가 할 수 있는 이의 제기는 딱히 없다. 물론 긴 대화가 가능하다면 그것이 왜 불편한지, 볼편해야만 하는 일인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 볼 수 있겠지만.
아무튼 그래서 나는 조용히 있었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 문제 제기에야 항변할 말이 없지만, 그의 ‘반말’에는 충분히 할 말이 있으니 말이다. ‘그런’ 이라거나 ‘집에서’라는 표현에도 충분히 따질 여지는 있었지만 굳이 그러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저 입에서 "엇다 대고 반말입니까"라는 말이 맴돌았을 뿐.
그렇게 시간이 가는 동안 그의 숨 속에서 술 냄새는 차츰 옅어졌지만 하루 이틀된 것이 아닐 담배 냄새는 좀처럼 가시지도, 그렇다고 익숙해지지도 않았다. 버스에 사람이 더 탈수록 그는 내 의자에 다가왔고, 불룩 나온 그의 배는 내 어깨를 밀고 들어왔다. 열린 단추 아래 펄럭이던 그의 코트자락은 기어코 내 무릎을 그의 품 속으로 넣고야 말았다.
5.
집에서 쉬며, 곰TV에 업데이트 된 ‘우리 결혼했어요’라는 프로그램의 영상을 재생시켰다. ‘남편’들의 모습이 너무 역해서, 결국 끝까지 보지는 못했다. 그 전날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나왔던, 여성들에 대한 가정 폭력이나 1900년대 초반 남아프리카의 여성들이 겪었던 온갖 고난이 떠올랐다. 뻔뻔하게도 나는, 그들의 잔혹사만이 괴로운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