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들

서울메트로의 시사회 이벤트에 당첨이 되어서, 클림트 전을 보고 왔다. 당첨된 것은 한참이나 지난 일이지만, 체력이 달려 제대로 보지 못할까봐 미루고미루다가 전시 종료 전날에야 겨우 갔다. 미루는 동안 체력을 어느정도는 회복했지만, 전시의 끝물에 몰려든 인파의 앞에서 눈곱만큼의 회복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사람은 정말 많았다. 관객의 절대다수는 젊은 여성이었고, 그 중의 상당수는 아이를 데리고 있었다. 유모차에 탄 아이부터 초등학교 3학년 쯤 되어 보이는 아이까지 수많은 아이들이 엄마(로 추정되는 사람)와 함께 클림트 전시장을 매우고 있었다.
재미있게도, 그 아이들은 딱히 방해가 되지 않았다. 유모차에 탄 아이들은 다행히 울지 않았고, 제 스스로 돌아다닐 수 있는 아이들은 그림에 관심이 없었다. 방해가 된 것은 열심히 그림을 살피는 성인 관람객들과, 시간마다 대인원을 끌고 전시장을 휩쓰는 도슨트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벽을 따라 그림을 훑으며 지나갔다. 그리고 상당수의 사람들은 바닥의 화살표와는 반대방향으로 벽을 따라 돌아 여러 사람을 곤한하게 만들었다. 심지어 마지막 방에서는 벽에 붙어 있지 않은 몇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역주행을 하고 있었다. 나만 빼 놓고 말이다.
<유디트 I> 앞에서는 그 많은 사람들이 벽을 따라 돌지도 않고 한참을 서서 그림을 보고 있었다. 우리나라 미술관에서 이런 퐁경도 볼 수 있구나 싶어 신기해 하며 사람들을 구경했다. 적지않은 사람들이 하품을 해 가면서도 그림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다들 귀에 이어폰을 꽂고 오디오가이드를 듣고 있었다. 아마도 설명이 끝나지 않아 자리를 뜨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사람들은 벽을 따라 그림을 훑으며 지나갔다. 누군가와 부딪혀도, 누군가의 밟을 밟아도, 혹은 자신과는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는 이와 맞닥뜨려도 그들은 흔들리지 않았다. 넘치는 사람에는 관심이 없다는 듯 그저 그림을 훑었다. S와 나는 전시장을 나오며, 관객의 대다수가 여성임을 새삼 다행히 여겼다. 덕분이 몇 번은 덜 부딪혔을 것이고 덕분에 자주는 아플만큼 세게 부딪히지 않았을 것이고 덕분에 좁은 전시장에서 누군가의 몸에 밴 역한 담배 냄새를 맡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니 말이다.

클림트 전시를 다 본 후에 광장에 망연히 앉아 있다가 분연히 홍대를 향했다. 나와 S가 좋아하는, 그러나 최근에 S가 자주 가지 못한 쌀국수 집에서 밥을 먹기 위해서였다. 붐비는 지하철을 서서 타고 홍대입구역에 내려서는 곧바로 식당을 향했다. 식탁 테이블 유리 아래에는 국립공원 케이블카 허용을 반대하는 리플렛이 끼워져 있었다. 밥을 먹고 나오면서는 서명판에 이름을 올렸다. 나와서는, 늘 그렇듯 무작정 걸었다.
몇 번인가 간판만을 보았을 뿐 들어가 본 적 없던 갤러리. 이번에는 간판조차 보지 못하고 지나쳤는데 뒤따라 걷던 S가 "갤러리!"하고 외치더니 계단을 내려갔다. 따라 내려간 지하 공간에는 익숙한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언젠가 일다로 메타블로그를 타고 들어간 공간에서 본 적이 있는 작품들이었다.
신문 기사들, 혹은 광고들을 색색의 펜이나 아기자기한 스티커로 꾸민 작품들이 전시장 가운데에 선 각목 구조물에 매달려 팔랑이고 있었다. 얼핏 보면 수업 시간에 교과서에다 하던 낙서와도 비슷한 그림들은 하지만 무거운 메시지를 담고 있다. 아니, 무겁다는 말은 어쩌면 어울리지 않겠고, 웃어 넘길 수만은 없다고 하는 편이 좋을지도 모르겠다.
신문의 대부분은 흑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위에 덧칠된 알록달록한 색들이 신문이 알려주지 않는 숨은 진실들을 알려주고 있다, 고 평하기 알맞은 작품들이었다. 하지만 저런 고루한 표현으로는 다 담을 수 없는 이야기들, 그리고 이야기로는 표현할 수 없을 느낌들을 담고 있는 작품들이었다. 작가의 이름은 연미, 전시회의 타이틀은 <시시한 폭력>이다.
갤러리 안에는 다른 관객은 물론이고 작가나 직원 또한 보이지 않았다. 사무실인 듯한 구석의 보이지 않는 공간에서 인기척이 나기는 했으나 내다보는 이는 없었다. 아무의 방해도 없이 작품들을 살폈다. 웃음이 나오는 것도, 소름이 끼치는 것도 있었다. 소름 끼치는 기사가 우습게 변한 것도, 우스운 광고가 소름 끼치에 변한 것도 있었다. 한참을 보고 있는데 안쪽에서 사람들이 나오더니 문 닫을 시각임을 알렸다. 그래서 나왔다. 곧 다시 가봐야겠다.

(전시 홈페이지 가기)

운수 나쁜 날

제 119주년 노동절. 운수 나쁜 날.

취재를 나가야 했다. 원래 목적은 집회 브리핑과 다양한 참가자들의 인터뷰로 구성된 기사를 쓰는 것. 청계광장에서 열리는 본대회를 보며 인터뷰를 한 후 주변 카페에 들어가 기사를 쓰고, 저녁에 다시 청계천변으로 나와 대학생사람연대 메이데이 실천단의 문화제에서 한낱 님의 공연을 보려고 했다. 아침을 먹고, 카메라와 노트북을 챙겨 집을 나섰다.

신림9동의 기나긴 내리막을 다 내려갔을 즈음 수첩을 놔두고 온 것을 깨달았다. 인터뷰 메모 해야 되는데. 누구한테든 빌릴 요량으로 그냥 버스를 타고 나서는 명함도 놔두고 온 것을 깨달았다. 인터뷰할 때 내밀어야 되는데. 결국 사무실에 들러 명함과 필기구를 챙겼다. 충무로 카메라 수리점에 들르려고 컴퓨터로 교통편을 확인하다가, 노동절 기념대회는 청계광장이 아니라 여의도에서 열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결국 카메라 수리는 포기하고 여의도를 향했다. 사무실에서 이런저런 짓들을 하다가 조금 늦게 도착해 이미 집회는 시작된 뒤였다. 무대 옆에 서서 집회 분위기를 살피는데, 스피커의 진동이 속을 뒤흔들었다. 머리도 아프고 멀미도 나고. 컨디션이 급격히 나빠져서 한참을 멍하니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다가 정신 좀 차리고 인터뷰를 시작하려는데 사회자가 갑자기 청소를 하자더라. 그러더니 선언문을 읽고, 그러더니 노래 한 곡을 하고 집회가 끝나버렸다.

행진을 하길래 집으로 가려고 했다. 무릎이 안 좋아서 매일 한의원에 가고 있는데 무작정행진을 하기는 곤란했다. 터덜터덜 집을 향하는데 나타난 희석 선배, 행진하지 말고 지하철 타고 바로 종로로 가자신다. 시청 앞에서 촛불집회가 있다던데 종로로 간다니 그리 합류하려나 싶어 잠깐 고민하다가 지하철을 탔다. 종로 3가에서 내렸다. 잠시 기다리다가, 달렸다. 참가자들이 도로를 막고 경찰들이 참가자들을 쫓았다.

눈 앞에서 사람들이 맞고 잡혀가고 하는데 이제 와서 집에 갈 수도 없고 해서, 또 아픈 무릎으로 뛰어 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그러다가 경찰에 쫓긴 사람들을 따라 어느 골목으로 들어가 무릎도 좀 쉴 겸 사진들을 정리했다. 사진 정리를 마친 후 노트북을 끄고 골목 입구까지 나가보니 사람들이 없더라. 내 시야 안에, 그러니까 골목 안쪽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아마도 좌절하거나 포기한 사람들이었나 보다.

무릎도 갈수록 아파오고, 이미 놓친 사람들을 찾아 돌아다니기도 힘들고 해서 집으로 돌아 왔다. 버스를 타려는데 집회때문인지 도통 오지 않아 지하철을 탔다. 노량진에서 내려 버스를 탔는데 그게 하필 또 집에서 먼 곳에 서는 152번. 결국 아픈 무릎을 끌고 노트북과 카메라를 매고 집까지 터덜터덜 걸었다. 인터뷰는 못했지만 찍은 사진이라도 올려야지 싶어 간단하게나마 기사를 쓰는데 익스플로러 오류까지.

아흐, 지친다.

그렇게 해서 겨우 나온 기사.

2009 노동절 기념대회 집회
현장(서울)
제 119주년 노동절 기념대회가 ‘119주년 세계노동절
기념.촛불정신 계승, 민생&#8228;민주주의 살리기, MB정권 심판 범국민대회’라는 이름으로 서울 여의…
[박종주 기자 2009/05/01]

4.20 문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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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 마지막 학기를 함께 한, 인터넷신문사 프로메테우스에서 일을 계속하게 되었다. 두 달의 휴식을 끝내고 다시 기사를 쓰자니 머리가 띵하다. 쓰고 싶은 말을 다 못 쓰는 것 역시 괴로운 일이지만, 쓰고 싶지 않은 말을 쓸 일은 없으니 우선은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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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취재차 4.20 문화제에 갔다. 기사엔 못다한 이야기들.
  마이크를 잡은 비장애인들, 그 중에서도 장애인 운동과 그간에 연이 없었던 사람들의 발언을 듣고 있자면 늘 내심 불편하다. 그들이 장애인을 칭할 때면 자주 ‘우리’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우리 장애인들이 이렇게 고생하고 있는데, 저희도 꼭 함께 싸우겠습니다"라든가 하는 식으로. 어쩌다 그런 말을 사용하지 않은 사람이라도, 장애여성을 피해가지는 않는다. "우리 장애여성이 그런 일을 당했습니다"라든가 하는 식으로.
  철도/지하철 안전대책 수립을 요구하는 캠페인이 문화제 전에 있었다. 철도/지하철 인원감축과 관련된 문제인 덕에 장애인운동과 철도노조운동의 사람들이 함께 하게 되었다. 사회는 철도노조 쪽 사람이 보았다. 캠페인 전의 기자회견과 캠페인 후의 보고대회, 사회자는 ‘노동의례’를 이야기했다. 기자회견 후에는 철의 노동자를, 보고대회 중에는 파업가를 불렀다.
  기자회견이 끝나고 철의 노동자를 부르자는 사회자의 제안에 장애인운동과 연이 있는 이들 중 상당수는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렇다고 처음 장애인운동을 만난 사회자를 탓할 수도 없는 일이다. 사람들은 술렁였지만 사회자를 따라 노래를 불렀다. 다만 도무지 그러고 싶지 않았던 누군가가, 우리가 왜 여기서 이걸 부르고 있냐, 고 옆사람에게 나지막히 속삭였을 뿐이다.
  사실 나는 믿고 싶다. 장애인운동을 경험해보지 못한 노동운동의 사람들이 장애인운동 쪽의 노래를 알지 못하니 일단 그런 노래를 부르기로 사전에 합의했던 것으로. 이번엔 미처 못했지만 다음번엔 꼭 노래를 배워오마고 약속했던 것으로. 하지만 분위기가 너무도 확연히 이야기한다. 그렇지 않음을 말이다. 그리고 노동의례라니. 4.20 장애인차별철폐의날, 올해의 9대 요구안에도 어김없이 ‘장애인노동권’이 들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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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꼭 민망한 집회인 것만은 아니었다. 멀리서 좋아만 하고 있는 ‘장애여성공감’. ‘여성장애인독립생활운동을 독립시켜라’는 피켓을 들고, 관련내용을 담은 유인물을 쿠키와 함께 참가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있었다. 운동의 내부를 향해 또 다른 운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 나는 그런 이들이 좋다.
  길에다 누군가가 버려놓은 유인물을 주워다 읽은 후 주머니에 챙겼다. 그런 한참 후에야 공감에서 활동하시는 분이 내게도 유인물과 쿠키를 건냈다. 유인물은 있다며 쿠키만 받으려니 둘 다 받으라고 정색을. 못 들으셨나 싶어 유인물은 땅에서 하나 주웠다, 고 구체적으로 말했더니 멋쩍게 웃으며 유인물을 되받아 가셨다. 종이가 아까워도 그냥 좀 받을 걸 그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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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만에 본 한낱 님. 두 곡 부르고 가셨는데, 우울한 곡을 부를 때나 발랄한 곡을 부를 때나 표정은 똑같이 심각하다. 가사 안 잊어버리려다보니 그렇게 되는 거라나. 기사 쓸 때 사진 실어주마고 약속했는데, 아는 사람 나왔다고 너무 가까이서 찍었더니 관중이 하나도 안 나와서 약속을 못 지키게 되었다. (누나가 나온 사진엔 관객이 두 명밖에 없는 것처럼 보여서… 대신 여기 올립니다.)

서점에서

  한나절 내내를 사무실에서 보낸 후, 지친 몸을 아픈 다리에 싣고, 손으로는 주린 배를 움켜 쥔 채 나는 집이 아닌 서점을 향했다. 며칠 전 읽다 만 책을 마저 읽기 위해서였다. 글을 읽거나 쓸 때에는, 평소에 없던 그런 힘이 대체 어디서 나오는지 모른다.
  몇 안되는 의자에는 이미 죄 사람이 앉아 있었다. 지난 번에 읽다가 꽂아 두었던 책을 뽑아 들고 서성이던 나는 책이 있던 책꽂이 바로 옆에 자리를 잡았다. 책꽂이와 기둥의 사이로,사람 하나 들어가기에도 좁은 틈이 있었다. 몸을 밀어 넣으니 어깨가 걸렸다.
  상반신을 약간 앞으로 굽히고 선 상태에서 책을 읽었다. 들고 있던 물병과 매고 있던 가방은 발치에 내려두었다. 책에는 슬프고 아픈 이야기가 실려 있었다. 내가 읽은 책에는 늘 아픈 이야기가 있다. 내용을 알지 못한 채 집어든 책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간혹 그렇지 않은 이야기가 있다 한들, 나에게는 그 속에서까지 슬픔을 찾아내는 재주가 있다.
  중편 소설 세 개가 엮여 있는 책의, 못 읽은 마지막 이야기를 다 읽는 데에는 30분 쯤이 걸렸다. 마지막 소설을 읽고, 평론가의 긴 글을 뛰어 넘은 후 지난 번에 홀깃 보았던ー못 읽은 마지막 이야기 대신이었다ー작가의 말을 마저 읽은 후에 책을 덮었다. 그때까지는 들리지 않았던, 서점치고는 시끄러운 소리들이 귀로 들어왔다.
  다 읽은 책을 제자리에 가져다 꽂는데, 그 바로 위칸에 익숙한 제목의 책이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읽어본 책도, 들어 본 책도 아니었다. 얼마 전에 광고를 본 책과 비슷한 제목의 책일 뿐이었다. 하지막 작가는 아는 이름이었다. 두 권짜리, 그리고 세 권짜리, 장편소설 두 편, 도합 다섯 권의 책을 읽은 적이 있었다.
  그 작가는 고달픈 삶을 산 여성이었다. 가난도, 폭력도, 외로움도, 내가 열거할 수 있는 대부분의 고통을 극한까지 겪은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 경험들을 자신의 글에 담아내는 인물이었다. 나는 그의 글을 읽으면서 숨이 막혔고 가슴이 아팠고 눈 앞이 아득했지만 울지는 않았다.
  내가 운 것은 오히려, 주인공의 엄마를 다룬 평범한 소설이었다. 그 작가 역시 여성의 아픔을 섬세하게 잡아내는 것으로 유명한 이였지만 그 전까지는 읽어 본 적이 없었고, 내가 읽은 책은 그런 범주에서는 약간은 벗어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울었다. 서울에 오는 기차에서 책을 읽으며, 눈물을 떨구고 코를 훌쩍였다.
  누군가의 삶이 누군가의 삶보다 더 고되거나 더 아프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아마도 그것은 누군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자신의 글을 통해 할 수 있었고, 또 다른 누군가는 그렇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스스로는 할 수 없는 인생, 남의 입이나 남의 글을 통해서, 그래서 얼마만큼은 깎이고 또 휘어서 전해질 수밖에 없는 삶이 슬프기 때문일 것이다.

거슬리는 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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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린지 페스티벌에 갔다가 공연을 보고 알게 된 어느 밴드. 앨범이 나왔다기에 친구에게 선물해 달래서 사흘째 내리 그것만 듣고 있다. 그 공연을 보기 전까지는 전혀 알지 못했던 ‘스카’라는 장르를 하는 밴드인데, 목소리와 곡이 참 잘 어울린다. 가사도 괜찮은 편.
  발음을 또박또박 하는 편은 아니라서 전곡의 가사를 다 알지는 못하지만, 현재까지 두 곳의 거슬리는 부분을 발견했다. 하나는 ‘빈병만이 나를 감싸네’이고 또 하나는 ‘아가씨 이리 와서 한 잔 따라줘요’이다. 전자는 계속 ‘이명박이 나를 감싸네’로 들려서 거슬리고, 후자는 다른 부분에 나오는 ‘사장님 이리 와서 한 잔 같이 해요’라는 부분과 대비되어서 거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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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 덕분에 챙겨보다시피 하는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ㅍ’. ‘ㅍ’에 나오는 연예인들 중 초창기 멤버인 ㅇ과 후반에 투입된 멤버인 ㅈ 사이에는 주변사람들의 농간으로 인한 스캔들이 있다. 둘이 가까이만 있어도 주변에서 ‘그렇게 대놓고 같이 있어야겠느냐’고 놀리는 식.
  이 프로그램의 메인 MC 격인 ㅁ은 둘을 놀릴 때 종종 ㅇ을 제수씨라고 부른다. 가족적인 분위기를 만들고 싶으면, 초기 멤버인 ㅇ을 여동생으로 설정하고 ㅈ을 매부로든 서방으로든 불러야 할텐데 도통 그러지를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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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시나 S 덕에 챙겨보다시피 하는 또 다른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ㅁ’. 긴 시간 동안 부동에 가까운 시청률 1위를 고수하고 있는 이 프로그램은 피디가 사회의식을 은근슬쩍 담아 정부 풍자를 잘하기로도 유명한 프로그램이다. 그것이 정말인지 얼마 전에는 여성의 날 특집 방송을 하기도 했다. 출연자들의 난리야 접어두고, 피디가 제시한 결론은 ‘여성은 스스로의 삶을 스스로 구성할 수 있기를 바란다’였다던데 보지는 못했다.
  ‘ㅁ’에 출연하는, 결혼한지 얼마 되지 않은 ㅁ은 얼마 전 연애중임을 밝힌 ㅈ에게 결혼하게 될지도 모르니 가상인터뷰를 해보자며 막무가내로 질문을 던졌다. 그가 던진 질문이 가관이다. ‘(ㅈ이)나이가 있으셔서 2세 문제가 급할 텐데, (부인될 사람이)일을 계속하시게 하실 건가요, 아니면 그만 두고 살림에 전념하게 하실 건가요?’라니 세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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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여자 한 명이 교도관입네 장군 딸입네 거짓말을 하며 젊은 군장교들을 속여 돈을 뜯어냈단다. 피해자는 꽤 여러 명인데 대부분 실제로는 만나지도 않고 문자로만 친분을 쌓아 돈을 받아냈다니 참 대단도 하다. 그런데 이 여자, 몸무게가 좀 많이 나간단다.
  언론들의 관심이 그 몸무게에 쏠렸다. 기사 제목들은 온통 ’90kg 녀에 장교들 왜 속았나’, ‘꽃뱀 아닌 90kg녀 장교들 넘어간 이유는?’ 뭐 이런 식들이다. 나는 피해자 편을 들고 싶은데, 언론들이 나를 가해자 편으로 만든다. 이것 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