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과 손수건

새벽 지하철에는 약간의 개운함이 있다. 상쾌한 공기, 뿌듯한 성실함 따위의 것은 물론 아니다. 내가 새벽에 지하철을 탄다는 건 밤새 술을 마셨거나 밤새 뒤척이다 끝내 잠을 포기했거나 둘 뿐이므로, 날씨야 어떻건 새벽은 늘 자욱하다. 새벽 지하철에는, 간밤 퇴근길의 빽빽함이 온데 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약간의 개운함이 들어선다.
오늘 새벽에도 지하철은 한산했다. 뒤꽁무니 마지막칸, 넓은 공간에 나를 포함해 네 명이 있었다. 빈 자리는 많았고 비는 흩뿌려 우산은 거의 젖지 않았으므로 옆자리에 우산을 얹고 그 위에 가방을 두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자리가 부족해질 참이라 얼른 가방을 품에 올렸다. 그러는 사이 그 자리 앞에도 한 사람이 섰고, 기껏해야 습기나 좀 찰 줄 알았던 의자에는 물이 고였다. 가방이 있는 것을 보고 다른 자리로 가려던 그는 내가 손으로 물을 훔치는 것을 기다렸다. 마지막 몇 방울을 겨우 다 턴 순간 그는 손수건으로 의자를 닦았다. 죄송합니다, 말하며 치어다보자 뜻모를 미소를 지은 그는 이마가 훤했다.
자리에 앉은 그는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았고, 책도 전화기도 꺼내지 않고 가만 앉아 여러 정거장을 지났다. 무릎 위에 올린 큰 가방이 그의 다리에 닿는 것 같아 바닥으로 내렸다. 이윽고 그는 다리를 벌렸다. 그가 잠든 것이기를, 그래서 다리에 힘이 풀린 것이기를 바라며 나는 두어 번 곁눈질을 했고 그는 줄곧 큰 눈을 껌뻑이고 있었다.

권문석과 1년

죽음이 망각되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망자의 삶이 송두리째 망각되는 것이다. 뉴스에서 소상히 알려 주는, 낯모르는 이들의 삶과 죽음, 그러한 방식으로 내 삶과 먼 곳에 있었던 이들의 죽음이 그런 경우에 속한다. 연쇄 살인범에게 살해당한 어느 피해자의 일생과 죽음, 혹은 누군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름 없는 의인들의 죽음이 내게는 그러하다. 어떤 경우에는 그저 죽음만이 망각된다. 비교적 가깝지만 겹치지는 않았던 삶들의 경우가 그러하고 너무도 가까워서 그 삶을 지울 수 없는 경우가 그러하다. 함께 했던 이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해 날마다 우는 사람들, 때로는 시신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의 경우가 후자에 속할 것이다. 익숙하지만 챙겨 찾지는 않는 연예인의 죽음, 오래 전 어느 시기에 삶을 나누었던 이의 죽음, 면식은 없지만 먼 곳에서나마 나와 같은 삶을 살고 있음을 알고 있는 어떤 이의 죽음이 그 나머지에 속할 것이다.
권문석의 1주기 추모식에 다녀왔다.
내게 권문석의 죽음은 마지막의 방식으로 망각되어 있었다. 무대에 올랐던 누군가는 여전히 그의 죽음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어 슬프다고, 또는 슬퍼하지만은 않으려 애쓰고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누군가는 그가 여전히, 어디에선가 일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라고 말했다. 내게 그는 가끔씩 마주치는 사람, 그래서 가끔씩만 생각나는 사람, 그러나 교류가 많지 않아 생각할 거리 역시 많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가 죽었지만, 애초에 그의 삶이 내 삶에 크게 접해 있지 않았으므로, 죽음으로 인한 빈자리를 나는 경험할 수 없다. 그래서 그의 죽음은 쉽게 망각되고, 그를 떠올리는 나의 기분은 여전하다. 어디선가 우연히 마주칠 사람, 실없는 소리를 한두 마디 나누고는 곧 흩어질 사이.
그와 처음 만난 것은 2007년 가을이었다 ― 정확히 기억나지 않아, 연도를 찾아보았다. 그리고 이 문장을 쓰면서, 그가 죽은 직후에도 무언가 써보려 하다 포기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와 처음 나누었던 대화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처음부터 반말을 썼던 것을 기억한다. 말은 빠르고 발음은 불분명해, 몇 번인가 못 알아듣고 되물었던 것도 같다.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지난 해 봄, 그가 세상을 뜨기 한 달 전쯤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자리에서 그가 처음 건넨 말은 왜 그렇게 살이 쪘냐는 물음이었다. 눙을 치며 받아 넘겼다.
그가 처음 내게 건넨 말도, 마지막으로 건넨 말도, 그래서 권문석이라는 사람도 마뜩치 않았다. 그 사이의 여섯 해 동안 띄엄띄엄 건넨 말들 중 그 인상을 바꿔 놓을 만한 것은 크게 없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내게 그러하듯, 그는 반가운 사람 중 하나였다. 빼어나다고 할 수 없는 언변으로, 지친 표정으로, 항상 어딘가 신이 나서 말을 늘어놓는 사람, 멈추지 않고 무언가 고민하고 그것을 털어 놓는 사람, 그래서 반가운 사람들 중 하나였다.
가까이서 일한 적 역시 없으므로 그가 평소에 어떠했는지는 알지 못한다. 다만 늘, 전날 늦게까지 일했다며 퀭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을, 그럼에도 여전히 말하고 있는 것을 보았을 뿐이다. 그의 친구들은 그에게 투명인간이라는 별명이 있었다고 말했다. 살금살금 다가와 장난을 치는 투명인간이 아니라, 누구에게도 드러나지 않는데도 늘 일하고 있는 투명인간이었다고, 그의 친구들은 말했다.
내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그가 한 고민이나 그의 생각, 그가 살았던 방식들은 아니다. 정당 홈페이지에서 혹은 신문 기사에서 본 그의 이름과 몇 줄의 문장들, 처음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의 얼굴, 그 사이 보았던 그 얼굴의 그림자들 ― 그런 것들만이 남아 있다. 그런 단편들의 뒤에 갑자기 죽음이 이어질 수는 없기에, 그의 죽음은 내게서 망각되었다.
권문석의 1주기 추모식에 다녀왔다.
그의 친구들은 그에게 편지를 한 통 써달라고 했다. 권문석 못난 놈, 이라고 적고 싶었지만 나는 그의 친구가 아니었으므로 아무것도 적지 못했다. 그의 장례식에, 사십구재에, 1주기 추모식에 모두 가 끝날 때까지 앉아 있었지만, 나는 여전히, 그의 죽음을 알지 못한다. 상상하지 못하고, 기억하지 못한다.

예쁘고 고운 것만 보고 살고 싶은데

밤중에 창밖에서 비명 소리 비슷한 무언가가 들릴 때면 안절부절 못한다. 그 고음이 괴로움이나 두려움의 비명이 아닌, 괜히 질러 본 소리거나 즐거움의 소리임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마음이 가라 앉지 않는다. 비명에 이어 웃음이 들려 오지 않으면, 기어코 나가 밖을 살펴 보아야 한다.
예쁘고 고운 것만 보고, 밝고 고운 것만 들으며 살고 싶지만 녹록지가 않다. 지금 사는 곳에서는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술집들이 모여 있고 밤마다 취객들이 넘치는 거리를 지나야 집에 당도한다. 얼굴을 찌프리고 걷는 여자와 그 뒤를 따르는 남자를 보면, 술에 취해 몸을 가누지 못하는 사람과 그 옆에 멈춰 있는 사람을 보면, (그래 봐야 불확실하지만) 위험한 상황이 아니라는 단서가 나오기 전까지는 멀찌감치 서서 지켜 보게 된다.
오늘은 한 남자가, 이미 늦었다는 여자를 쫓아 가며 아이스크림만 먹고 가라고 매달리는 모습을 보았다. 둘 다 술에 취한 것 같지는 않았고 나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조금 가다가는 지나가는 여자들을 붙잡고 반말로 호객하는 나이트 직원을 보았고, 또 더 가다가는 한껏 인상을 쓰고 어떤 남자에게 팔을 꺾이다시피 손목을 잡힌 채 걷는 여자, 그 손목을 잡은 남자, 그 옆을 걷는 남자를 보았다.
그 여자가 행인들에게 도움을 청하지는 않았지만, 옆을 걷던 남자가 손목을 잡은 남자에게 야 그거 성추행이야, 하고 말했기 때문에 눈을 뗄 수는 없었다. 멈춰 서서 그들이 걷는 것을 한참을 보다, 여자가 남자를 밀쳐 내고 지인들 사이에서 내는 낄낄거리는 웃음을 웃을 때에야 돌아서 발을 움직였다. 이윽고 그들의 일행인 다른 여자 한 명이 당도했다.
매일 밤 길에서는 흔들리는 취객들을 보며 마음 졸이고, 집에서는 제대로 들리지도 않는 골목의 소리에 마음 졸여야 하는 일상이 싫다. 안전하고 믿을 수 있는 세상에서 살지 못한다면, 의심스럽고 불안한 꼴을 볼 일 없는 한적한 곳에 살고 싶다. 그래 봐야 티브이 뉴스며 신문 기사며를 보며 또 마음 졸이고 화내겠지만. ‘남의 일’에 내가 아무리 마음 졸여 봐야, 당사자들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겠지만.

아마 또 지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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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8일, 민주노총 총파업 집회에 다녀왔다. 사람은 많지도 적지도 않았다. 서울시청 광장은 스케이트장으로 반토막이 나 있고, 그걸 또 경찰이 틈 없이 둘러싼 통에 붐비기는 했지만. 그래서 결국 무대가 보이는 곳으로 들어가지는 못하고 주변을 맴돌다, 카페에 들어가 찬바람을 피하다 하며 시간을 보냈다. 3시에 집회 하나, 4시에 또 하나가 예정되어 있었다. 이런 저런 안내 방송들이 이어지다 3시 반이 조금 넘은 시각에야 사회자는 집회 시작을 선언하고 민중의례를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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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파업 집회였다. 어쨌거나 이름은 그랬다. 하지만 모두의 총파업은 고사하고 민주노총 총파업도 성사될 리 없었다. 집회 장소까지 가는 버스도 지하철도 문제 없이 다녔다. 하지만 어쨌거나 총파업 집회였다. 파업을 외치며 가는 길을, 파업에 참가하지 않거나 못한 노동자의 힘을 빌려 움직이기엔 괜히 찝찝했다. 집에서 서울시청까지는 5.2km쯤 되었다. 도보로 이동하는 데에는 정확히 한 시간이 걸렸다.(하지만 그 후 커피를 마시고 밥을 먹고 집으로 돌아오고 친구들과 술을 마시는 내내 나는 누군가의 노동력을 구매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집회 장소에 왔을 것이다. 택시를 타고 온 사람도 있겠고, 멀리서 단체로 온 이들은 대절 버스를 타고 오기도 했다. 총파업 운운하며 타인의 노동력으로 집회에 왔음을 비난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그냥, 그 상황이 내게는 이상하다. 진짜 총파업이 이루어지면 우리는 겨우 이만큼 되는 규모의 집회도 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이, 타인의 노동력 없이는 아무것도 못할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무대에 오른 사람 중 하나가 철도 투쟁은 이미 승리했습니다, 하고 외쳤다. 민주노총은 침탈 당했고, 총파업은 아무런 힘을 내지 못했으며, 수서발 KTX 법인에 철도 사업 면허가 나왔는데도 그는 그렇게 외쳤다. 또 누군가 승리를 말한다면 슬플 것 같다, 고 앞의 글에 썼지만 슬프지는 않았다. 뭐라도 좀 알고 이해가 되어야 슬프든 말든 하는 법이다. 아무것도 알 수 없었고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았다. 그저, 누군가는 그렇게 외쳤다.

집회가 끝나갈 즈음, 이제 슬슬 행진이든 도로 점거든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야 하는 타이밍이 되었는데 사회자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리고는 집회의 종료를 선언했고 다음에 예정된 집회들을 광고했다. 모든 것이 끝나고도 어리둥절해 제자리에 서 있는 차에 사회자는 다시 마이크를 잡았고, 도로 점거가 시작되었으니 그리 이동해 달라고 말했다.
물론 가는 길은 막혀 있었다. 아니, 경찰이 막고 있었다. 버스로, 탱크로리로, 그리고 대원들로, 그들은 곳곳을 막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지하도 입구는 열어 두고 있었는데, 사람들은 한동안 지하도는 거들떠 보지도 않고 경찰들과 대거리를 했다. 몇 개의 골목을 돌고 돌아 나는 광화문 광장으로 나왔고, 그즈음 아까 경찰들과 싸우던 사람들은 지하도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두시 간 남짓 되는 시간이었을까, 우리는 그렇게 길을 막고 서 있었다. 간간히 경찰들과 싸우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본격적인 충돌은 없었고, 어느 순간 앞에서는 점거의 종료를 선언했다. 왜 끝난 것인지 구석에 있던 나는 알지 못한채, 일행들과 함께 그곳을 벗어났다. 경찰들은 마치 우리에 동물들을 몰아 넣는 사람들처럼 방패를 휘휘 저으며 사람들을 인도로 몰았다. 어느새 도로에는 차들이 다니기 시작했다.

싸웠어야 한다, 고 말할 수는 없다. 경찰이랑 싸워 봐야 서로 아프기나 하지 무슨 득이 있으랴. 그러나 여전히, 그렇게 흩어지는 것은 이상하다고 느낀다. 아쉽기 이전에, 그저 이상하다고. 친구의 말대로, 우리는 추워서 집에 갈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어떤 집회가 잘 되건 안 되건 2008년의 촛불집회를 떠올리는 사람들을 종종 본다. 희망적인 태도 따위 가져본 적 없는 나로서는, 촐불집회로 우리는 무엇을 하든 안 될 거란 사실을 배웠다고 눙치고 넘어가지만, 실은 그렇게 쉽게 넘길 수는 없는 문제일 것이다. 내게 촛불집회는 희망과 절망을 섞어 만든 거대한 족쇄처럼 보인다. 그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나와 함께 할 수 있다는 희망, 그러나 그들은 옛날처럼 한 가지 방식으로 함께 할 수 없고 그 인파가 함께 모여 무언가 해낼 수 있는 방법을 우리는 모른다는 절망을 섞어 만든.
 

나는 오늘도 지고 돌아왔다

간만의 휴가를 맞아 서울로 놀러 온 친구를 포함해, 네 명이 모여 점심을 먹었다. 이런 저런 대화를 하다 철도 노조 이야기가 나왔다. 다들 민주노총 건물에 경찰이 들어갔다는 정도까지를 알고 있었다. 대강의 소식을 알아보니 연행 중이자 대치 중이라고 했다. 밥을 먹고 우리는 민주노총 사무실을 향했다.
시청역에서 민주노총 사무실까지 쭉 이어진 길 곳곳에 경찰이 진을 치고 있었다. 일부는 대기 중이었지만 아예 길을 막고 있는 곳도 있었다. 작은 승강이 끝에 도착한 민주노총 사무실 앞에는 경찰이 포위선을 치고 있었고, 그 안 쪽으로 경찰이 진을 치기 전에 도착한 지지자들과, 건물 앞에 놓인 에어매트 몇 개가 보였다.
경찰은 들여보내 주지 않았다. 옆 건물 옥상으로 올라가 아래를 보내 건너편에서는 경찰 저지선을 뚫으려는 사람들이 경찰에게 맞고 있었다. 최루액을 쏘는 모습도 보였다. 이때까지도 나는 정확한 상황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근처를 배회하며 주워들은 정보들을 이어 붙여서야 겨우, 철도 노조 간부에 대한 체포 영장을 발부 받은 경찰이 수색 영장도 없이 민주노총 건물을 습격했음을 알 수 있었다.
일행 중 일부는 경찰의 태세가 느슨한 틈을 타 포위선 안으로 들어갔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고, 종일 하릴 없이 주변을 맴돌았다. (어느 노조 소속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노조에서 소화전으로 뿌린 물에 맞기도 했고, 방패를 사이에 두고 경찰과 맞붙기도 했다. 몇 번인가 거세게 밀렸고 신발과 바지 밑단이 다 젖었지만 큰일은 없었다.
모두가 포위선 뚫기를 슬슬 단념해 갈 무렵, 민주노총 건물에 철도 노조 간부는 없다는 소식이 공식적으로 확인되었다는 말이 들려 왔다. 신나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경찰 대원들이 물벼락을 맞을 때 신나 했던 그 사람들인지는 모르겠다. 적어도, 그 두 무리의 사람들 모두가 건물 밖에서 항의하고 경찰과 대치하던 사람들이 맞을 때 분노했던 사람들의 일부이기는 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렇게, 화내다가 웃다가 했다.
철도 노조 간부가 이미 새벽에 건물을 빠져 나갔다는 소식을 경찰이 그대로 믿어 주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변두리에 있어서 모습을 보지는 못했지만, 경찰은 건물에 남아 있던 사람들 모두의 신원을 결국 확인했다고 들었다. 밤 9시 께였을까, 건물에서 나온 이들이 행진 아닌 행진을 했고 사람들은 ― 그리고 나도 ― 그들을 박수로 맞았다. 어떤 면에서 그들은 영웅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들이 영웅이 되어서는 절대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경찰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자기 자리를 지킨, 그것도 다름 아닌 제 신념의 자리를 지킨 영웅들이다. 그러나 어쩌면 그저 노조 간부들을 ‘위해’ 고생한 이들이자 영장도 없이 들이닥치니 경찰에게 당한 권력의 피해자들이다. 게다가, 그들처럼 자리를 지킨 사람들 건물 밖에도 많았다. 고생 끝에 건물을 나선 그들에게 박수를 쳐 준 이들 모두가, 경찰의 위협과 폭력에 굴하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참이었다.
경찰의 무리한 체포 작전이 실패로 돌아간 것은 우스운 일이지만 신나는 일은 아니다. 그 성패에 관계없이 그것은 그저 어이없는 일이고 화나는 일일 뿐이다. 화나야 할 일이 실패한 꼴을 본다 해도 신이 날 수는, 그 화가 가라앉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들이 무엇을 신나 했는지 알 듯 모를 듯하다.
누군가는 철도 노조가 투쟁으로도 승리하고 법적으로도 승리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그저 패배만을 보았다. 경찰은 이미 법을 무시하고, 법을 이기고 그곳에 와 있었다. 법적인 승리, 는 힘없는 수사일 뿐이다. 지도부를 내어 주지 않은 것이 투쟁의 승리라고 하기엔, 그 하루 동안 너무 많은 사람들을 내어 주었다. 애당초, 경찰이 법을 무시하고 그곳에 온 셈에서, 철도노조도 민주노총도, 그 모든 역사를 갖고서도 싸움에 진 셈이다. 더 이상 정부와 경찰이 절차적 정당성을 갖출 필요도 못 느낄 만큼 우리는 이미 진 상태에 있었다.
내일부터 민주노총 확대 간부 파업이 시작되고, 한 주 동안 현장을 조직해 28일에는 총파업을 시작하겠다고 한다. 그것이 성사될지 어떨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내가 아는 것은 기껏해야, 내가 파업에 일조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점 정도다.) 정말로 총파업을 할 수 있다면 그 때쯤은 투쟁의 승리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요구안이 받아들여지건 그렇지 않건, 파업만으로도, 적어도 나는 그것을 승리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연승이 아니라, 역사를 부정당한 오늘의 패배를, 그 설움을 양분으로 삼은 첫 승리일 것이다. 사람들이 이렇게 여기지 않는다는 나는 슬플 것 같다. 오늘 두들겨 맞은 그 사람들을 기억한다면 더더욱 슬플 것 같다. 그것이 연승으로 명명된다면, 내게는 그것이 오히려 패배일 것이다. 노동운동의 역사가 부정당하고 무시당한 데에 대한 분노로 만든 새 시작이 아니라, 어쨌거나 지도부는 잡히지 않았고 (그렇게 다치고 끌려가면서) 겨우 경찰을 놀려 주었다는 것으로 기세등등해 져 해 낸 일로 된다면 말이다.
집회에 갔을 때든 기사를 접했을 때든, 나는 늘 졌다고 여겼다. 그래서 지금 이 모양인지는 모르겠지만, 여전히, 졌다고 여겨야 할 것 같다. 오늘도 우리는 승리했습니다, 집회를 마친 후 초췌한 몰골로 이렇게 외치던 사람들의 삶도 즐거워 보이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