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의 거짓말

집회에 가기 위해 학교를 나서던 참이었다. 중간에 들러야 할 곳이 있었으므로 종종걸음을 걷고 있는데 누군가 말을 붙여 왔다. 학생은 아닌 것 같았다. 등산복을 차려 입고 머리에는 헤어밴드를 두른 사람이었다. 신림역 이야기를 꺼내었으므로, 길을 물으려는 것인 줄 알았으나 아니었다. 교통카드를 충전할 곳이 없다고 했다. 신림역은 멀고 낙성대역이 제일 가까우니 이쪽으로 가라고 하였으나 그는 그곳에서 온 참이라고 답했다. 몇 마디를 더 꺼낸 그는 지하철 표 살 돈이 없다고 했고, 잠시 후에는 기차표 값이 없다고 했다. 목포인지 순천인지에서 왔다고 했다. 옛날에는 이만 원이면 되었지만 이제는, KTX, 사만 원이 필요하다고 했다(실은 서울에서 목포까지 KTX를 타면 오만 원이 넘게 든다.). 길가던 학생 두 명이 만 원씩을 주어 이만 원을 갖고 있다고 했다.

그는 몇 번이나 자긴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착한 사람이라고도 했던 것 같다. 그가 나쁜 사람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는데도 몇 번이나 그 말을 반복했다. 나는 그저 그의 몸에서 냄새가 난다고 생각했고 앞니가 하나도 없던 그의 잇몸께에 남은 금색의 물체들이 무엇인지 궁금해 했으며 그가 더듬는 말을 알아 듣기 위해 약간의 인상을 썼을 뿐이었다. 내가 그랬듯, 이런 점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로부터 거리를 두게 하였을 것이고 그것이 그로 하여금 그런 말을 하게 했을 것이다. 네가 조금 더 한 생각이 있다면, 지금 이것이 그 스스로 하는 거짓말일까 누군가 시긴 거짓말일까 하는 고민 정도였다. 그는 또 몇 번인가, 말을 더듬지 말라고, 돌리지 말고 남자답게 말하라고 누군가 알려주었다고 말했다. 그 누군가가 길 가던 사람인지 그를 보낸 사람인지 나는 알지 못했다.

이런 많은 정보들을 얻기 전, 그러니까 그가 지하철 표값이 없다고 했을 즈음, 나는 현금이 없다고 거짓말을 했다. 지갑에는 만삼천 원 쯤이 들어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카드를 들고 다니느냐고, 그럼 저기서 돈 좀 찾아 달라고 말을 했다. 오죽하면 모르는 사람 붙잡고 이러겠느냐고, 나쁜 사람 아니고 멀리서 온 사람이니 한 번만 도와 달라고 했다. 타지 사람인 것을 척 보면 알지 않느냐고 했지만 그는 나보다 훨씬 자연스런 서울말을 썼고, 얼굴을 기억해 뒀다가 다음번에 자신이 서울에 왔을 때 마주치게 되면 돈을 돌려 받으라고, 아니면 전화번호라도 달라고 말했지만 계좌 번호를 달라고는 하지 않았다.

거짓말을 한 직후에 거절까지 할 배짱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그를 좇아, 거기에 있는줄도 몰랐던 현금인출기 앞까지 갔다. 저 정보들은 그 몇 분을 걸으며 들은 것들이었다. 그 길을 걸으며 나는 가방 속을 더듬어 지갑에서 현금을 꺼내 가방 구석으로 밀어넣었다.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서였다. 현금인출기는 어느 건물 현관에 있었다. 그는 현관 앞에서 인출기 위의 간판을 가리키며 저기라고, 따라 들어가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누가 말해 주었으니 자기는 떨어져 있겠다고 말했다. 건물에 들어가 가방을 열어 보니 삼천 원이 나뒹굴고 있었다. 만 원은 이미 어딘가 써버린 모양이었다. 이번에는 지갑을 열어 카드 몇 개를 꺼내 가방 깊숙이 묻었다. 지갑에는 카드 세 개가 들었다. 얼마 안 남은 생활비가 든 통장의 카드, 다음 학기 등록금이 든 통장의 카드, 그리고 원래 생활비 카드였지만 여기저기 등록된 후원금 자동이체를 감당할 수 없어 이번달엔 비워 둔 카드, 이렇게 세 개가 들었다. 앞의 두 개를 꺼내 가방 깊숙이 묻었다.

세 번째 카드를 현금인출기에 넣었다. 예금 조회 버튼을 누르고 비밀 번호를 입력하자 잔액이 표시되었다. 물론 0원이었다. 시간이 지났는데도 내가 돈을 갖고 나오지 않자 애가 탔는지 그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멀찍이 선 그를 보며 나는, 월급날이 내일 모레인데 아무래도 마지막 잔액이 자동이체로 나간 모양이라고 또 거짓말을 했다. 곤란한 표정을 짓는 그에게 이리 와서 보셔도 된다며, 다시 한 번 세 번째 카드를 넣고 예금 조회 버튼을 누르고 비밀 번호를 입력했다. 여전히 망설이는 그를 다시 불러 화면을 보인 다음, 그런데 가방을 보니 삼천 원이 굴러 다니고 있더라고 말했다. (어쩌면 세 번의 거짓말을 한 셈이다.) 이거라도 받으세요, 죄송합니다, 하는 말과 함께 돈을 건네고 그와 함께 문을 나왔다.

그는 어떻게 말하는 게 좋겠냐고 나에게 물어 왔다. 어떻게 말하든 줄 사람은 주고 안 줄 사람은 안 주지 않을까요, 나는 늘 이런 식이다. 그리고는 다시 인사를 건네고 가던 길을 재촉했다. 그러고 보니 현금 인출기까지 오는 길에 그는 내게 두 번 악수를 청했다. 그가 먼저 손을 내밀었고 나도 손을 내밀었지만, 둘의 손은 닿기만 했을 뿐 둘 중 누구도 상대의 손을 쥐지는 않았다. 두 번 모두 그랬다. 그는 삼십 대 중반쯤 되어 보였는데, 자신은 스물 아홉이라고 했다. 나에게는 자신보다 나이가 많아 보인다고, 이미지가 그렇다는 말이라고, 보면 안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착한 사람인 것도 보면 알지 않느냐고 했었다.

그와 헤어지고 다시 종종걸음을 걸어 중간에 들러야 할 곳에 들러 할일을 마치고 나오며 나는 손등에 길게 난 생채기를 발견했다. 지갑에서 돈을 꺼내어 숨기기 위해, 혹은 카드를 꺼내어 숨기기 위해 급히 손을 놀리다 다친 모양이었다. 가방 입구께에 달아둔 뱃지의 바늘이 튀어나와 있었다. 뱃지를 떼어 필통에 옮겨 꽂았다. 생채기에 난 피는 흐르지도 않은 채 이미 굳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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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개

  1. 그를 다시 만났다. 전보단 좀 더 차갑게 굴었더니 오래 말을 붙이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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