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없는 유신론자

나는 신에 관한 네 가지 태도를 알고 있다. 스스로가 붙이는 이름들이야 다르겠지만, 늘어 놓아 보자면 이렇다. 종교 없는 유신론자, 믿는 종교인, 연구하는 종교인, 그리고 무신론자. 나는 첫 번째에 속한다.

이 넷은 전혀 다른 태도이고 전혀 다른 효과들을 갖는다고 나는 여긴다. 무신론자와 연구하는 종교인은 신을 해체한다(무신론자에게는, 그가 세계에 대한 일말의 관심을 갖고 있다는 전제를 붙여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믿는 종교인은 강화한다. 신이 아니라 그 종교를, 그 종교가 구성하는 세계를 그는 강화한다. 믿는 종교인은 세계를 굳어 가게 만든다. 종교를 갖지 않은 유신론자 또한 강화한다. 신이라는 이름이 붙지 않은 신을, 종교라는 이름이 붙이 않는 종교를, 세계라는 이름이 붙지 않은 세계를 그는 강화한다. 세계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라면 어떤 것이든 그 자리에 놓일 수 있다. 세계의 원리라고 그가 여기는 무언가를, 알고 그러든 모르고 그러든, 그는 강화한다.

나는 네 번째에 속한다. 나는 신이 있다고 믿는다. (신이 없다고 믿는다 말하면서도 여기에 속하는 이들이 있다.) 신이 ‘있다고’ 믿는 이유는 단 하나다. 그것 없이 나는 이 세계를 이해할 자신이 없다. 인격신이건 아니건, 선한 신이건 아니건, 세계의 시작과 지속을 설명해 줄 무언가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을 용기가 내게는 없다. 나는 구체적인 이름을 가진 신이건 그렇지 않은 신이건 믿지 않고 아무런 종교를 갖고 있지도 않다. 그러나 내가 신을 위해 마련해 둔 그 자리에 무언가를 두는 것은 쉬운 일이다. 어쩌면 이미 그렇게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예컨대 나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게으름을 믿는다. 그것이 세계를 구성하는 주된 원리 중 하나라고 여긴다. 나는 인간이 사유할 수 있고 스스로를 창조할 수 있다고 또한 믿는다. 그것이 세계를 구성하는 주된 원리 중 하나라고 여긴다. 이런 자리들에 언젠가 내가, 인간의 욕심, 자본의 힘 같은 것을 두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내가 믿고 있는 무언가가 그것들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할 근거는, 연구하지 않고 다만 믿기만 하는 내게는 없다.

나는 신에 관한 네 가지 태도를 알 고 있다. 그 넷은 전혀 다른 태도이고 전혀 다른 효과들을 갖는다고 나는 여긴다. 그저 믿는 종교인은 좋은 점이라고는 없는 태도라고 여긴다. 종교 없는 유신론자는 그와 다를 바 없다고 여긴다. 나는 그에 속한다.

오늘 안 한 말

쌍용차 평택 공장을, 공장 굴뚝 위에서 홀로 남아 92일차 농성을 하고 있는 이창근을 방문하는 집회가 있었다. 집회를 몇 시간 앞두고 평택역 광장에서는 행동 독서회라는 행사가 열렸다. 작은 무대에는 "함께 살자"라고 적힌 천이 걸려 있었고, 그 옆으로 『이창근의 해고일기』를 파는 부스가 있었다. 거기서 그 책을 산 사람들, 혹은 다른 곳에서 이미 산 사람들이 모여 광장 여기저기서 책을 읽었다. 이윽고 그들은 문장을 골라 작은 천에 옮겨 쓰고, 돌아가며 자기가 고른 문장을 낭독했다. 목숨을 끊은 동료 해고자에게 그가 쓴 편지의 한 구절을 읽은 사람, 그가 제 괴로움을 읊은 부분을 읽은 사람, 그가 이 사회의 문제를 지적하는 부분을 읽은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늦게 도착했다. 책은 읽지 못했다. 혹시 사회자가 근처에 있던 내게도 마이크를 들이 댈까 두려워 아무데나 몇 군데를 펼쳐 문장을 찾아 보았다. 대여섯 군데를 훑어 봤지만 크게 들어 오는 문장은 없었다. 그러다 마지막 페이지를 펼쳤다. 2014년 12월 20일, 한겨레신문에 실은 글이었다. 굴뚝 농성 6일차를 맞은 그가 쓴 글이었다.

 

굴뚝에 오른지 6일째를 맞고 있다. 차가운 날씨는 견디면 되고, 내리는 비는 부는 바람에 맡겨 말리면 되고, 쏟아지는 눈은 눈사람을 만들어 벗 삼으면 된다.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직 우리가 바라는 건 공장 안 동료들의 따뜻한 시선이며 악수다. 이젠 이 지긋지긋한 쌍용차 문제를 풀자고 공장 안 동료들이 나서줬으면 좋겠다. 정리해고로 인해 공장 안팎이 무간지옥의 6년이었다. 이제 새 길을 쌍용차 구성원이 함께 만들자는 말을 이제 우리 스스로가 했으면 좋겠다. 마음이 동한다면, 결코 어려운 일 아니다. 이 바람이 꼭 실현되길 바란다. 굴뚝은 우리들의 고향이다. 기대고 싶고 응석 부리고 싶고 하소연하고 싶다. 공장 안 동료들에게 손을 내민다. 쌍용차 문제의 매듭을 함께 풀어보자고.

 

「하늘 아래선 마주 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이창근, 『이창근의 해고일기』, 오월의봄, 2015, 417-426쪽.

 

하필 이 글이 마음에 걸린 것은 다름 아닌 "고향"이라는 단어 때문이었다. 지난 십 년간, 공장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외치는 수많은 이들을 보았다. 늘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생계 때문에, 혹은 자존심 때문에 — 거기까지가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전부였으나, 그들에게는 그 이상의 이유가 있어 보였다. 한 곳에서 오래 일한 이들, 공장의 역사와 제 삶의 역사가 겹치다시피 하는 이들은 더했다. 인생을 부정당해서 — 그 이상의 이유가 그들에게는 있어 보였다. 이창근은 잘 모르는 이이지만, 적어도 그가 쓰는 글들에서 그는 제 회사를 사랑하고 있었다. 늘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를 버린, 그가 찾아간, 그가 싸우고 있는 그 공장을 그는 제 고향으로 여긴다고 했다.

고향, 도시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요즘 세상에서 그곳은 '돌아갈 곳'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그곳이 돌아갈 곳이라는 것은 그곳을 떠나온 이들이 있음을 뜻한다. 고향, 그것은 떠날 수 있는 곳 — 떠난 곳이든 떠날 곳이든 — 에만 쓸 수 있는 말이다. 제 삶이 시작된 곳, 그것만으로 어떤 곳이 고향이 되지는 않는다. 떠날 수 없다면 그곳은 그저 감옥일 뿐이다.

굴뚝을 이창근이 어떤 마음으로 고향이라고 칭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바랄 뿐이다. 그곳이 그에게 고향이 될 수 있기를. 버림 받고 쫓겨 나는 것이 아니라, 안에 갇히거나 밖에서 막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 스스로 떠날 수 있는 곳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정년을 채우고라도 좋고 어느날 지쳐서라도 좋다, 어떤 이유로든 떠날 수 있는 곳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다행히 사회자는 나를 지목하지 않았고, 나는 아무 말도 않았다.

노동자들의 오체투지 행진에 다녀왔다

간만에 카메라 배터리를 충전했다. 낡아서 혹은 애초에 정품이 아니라서, 그것도 아니라면 충전기가 정품이 아니라서, 지난해부터 이미 시원치 않다. 충전은 더디고 방전은 빠르다. 추위까지 겹치면 더하다. 카메라를 켠지 두 시간이 채 안 되어 배터리 잔량이 부족하다는 경고가 떴다. 손으로 데우니 한동안 잘 작동하다가 이번에는 아예 카메라가 꺼져 버렸다. 핫팩을 사서 카메라에 붙였다. 600 원짜리 손난로는 한데서는 열을 전혀 못 내는 듯했지만, 그래도 어찌어찌 카메라는 여섯 시간쯤을 작동했다. 날이 어두워질 기미가 보였다.

카메라를 들고 간 곳은 대한문 앞이었다. 흰 옷을 입은 이들이 몸을 풀고 있었다. 백기완 씨, 박제동 씨가 한 마디씩을 했고 무리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온몸을 바닥에 바싹 붙여 절을 하고, 천천히 종종걸음으로 두어 걸음을 가고, 또 온몸을 바닥에 바싹 붙여 절을 했다. 오늘로 닷새 째, 영등포와 여의도, 강남, 을지로를 거쳐 대한문 앞에서 청와대를 향해 오체투지를 시작한 이들의 제일 앞에는 쌍용차 노조 김득중 지부장이 있었다. 기륭전자 노조 김소연 지부장이 그 옆을 바쁘게 움직였다. 절을 하는 이들, 혹은 그 옆에서 피켓을 든 이들 사이에는 콜트콜텍 노동조합원이, 전교조와 언론노조의 조합원이, 알바노조의 조합원이 있었다. 여러 단체들의 활동가들이 또한 있었다. 나처럼 내세울 적이 없는 이들도 끼어 있었을 것이다.

절 몇 번에 횡단보도 앞에 닿았다. 경찰은 횡단보도는 걸어서 건너는 조건으로 행진을 허가했다며, 차도에 내려가기도 전부터 으름장을 놓았다. 늘 그렇듯 남대문 경찰서장의 명을 받아 말하는 남대문서 경비과장이었다. 약간의 시비가 있었지만, 또 여러 번 몸을 던져 횡단보도를 건넜다. 시청 광장 앞, 프레스센터 앞을 지나 청계천을 건넜다. 동아일보 앞에는 차도 위의 작은 섬으로 이어지는 횡단보도가 있었고 거기서 다시 교보빌딩 앞을 향해 횡단보도가 이어졌다. 그곳을 건너면 또 한 번 횡단보도다. 경찰들은 조를 이루어 바닥에 붙은 사람들을 들어 날랐다. 두세 개의 횡단보도를 공중에서 건넜다. 바닥에 붙었던 그 자세 그대로, 팔까지 쭉 뻗은 채 나무토막처럼 들려가는 사람도 있었고 얌전히 절하던 팔다리를 죽을 힘을 다해 버둥대는 사람도 있었다. 경찰들은 때로 흔들거렸지만 놓치지는 않았다.

경찰들은 사람들을 들어다 광화문 광장에 내려 놓았다. 광장 바닥에 나무토막들이 하나하나 쌓였다. 버둥대던 이들도 경찰이 떨어뜨리듯 내려 놓으면 다시 팔다리를 쭉 뻗고 바닥에 몸을 바싹 붙였다. 바닥 가득 사람들을 부려 놓은 경찰들이 뒤로 빠지고, 일어선 사람들은 다시 절을 했다. 세월호 희생자들, 정리해고 노동자들을 생각하며, 십육배를 했던가 십팔배를 했던가. 좁은 곳에서 사람들은 움직임 없이 절을 반복했다. 잠시 숨을 가다듬고, 이윽고 식사를 하고, 다시 모인 사람들은 또 바닥에 몸을 던졌다.

광장을 따라 한참을 몸을 던졌지만 여전히 광장이다. 광장은 넓었다. 겨우 이른 횡단보도 앞에서 경찰들은 또 사람들을 막았다. 경찰들과 대거리를 하는 사이 신고된 행진 종료 시각인 두 시는 이미 지났고, 그 사이 경고방송도 세 차례를 들었다. 남대문 경찰서장의 명을 받은 남대문서 경비과장은 한층 더 격앙된 목소리로 으름장을 놓았다. 사람들은 이번에도 횡단보도에 몸을 던졌고, 경찰들은 이번에도 사람들을 들어 날랐다. 이번에는 세종문화회관 앞에 나무토막들이 쌓였다. 또 한 번 짐짝처럼 부려진 이들은 가만히 엎드려 있지만은 않았다. 엎드린채로 기어 방금 공중으로 건너 온 횡단보도를 향했다. 횡단보도를 막고 선 경찰들의 발치에 다다라서야 그들은 움직임을 멈추었다. 또 빈자리 없이 사람들이 옮겨질 때까지, 그들은 그 자리를 지켰다.

다시 인도를 따라 가다가, 결국에는 막히고 말았다. 이번에는 방패까지 챙겨든 경찰들이 미리부터 길을 막아 섰다. 제일 앞에 있던 김득중이 방패에 손을 대고 엎드리자 모두의 움직임이 멎었다. 누구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한참을 그렇게 있다, 뒤에 있던 이들이 꾸물꾸물 기어 하나둘씩 방패 앞으로 모였다. 방패와 땅이 맞닿은 선을 따라 사람들의 손이 놓였다. 그러고도 뒤에는 여전히, 엎드린 사람들의 긴 줄이 있었다. 삼십 분이 지나고 한 시간이 지나도 그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보다 못한 세월호 유가족들이 담요를 보내 왔다. 경찰은 막아 섰다. 한참의, 수차례의 대거리 끝에 담요 몇 장이 몇 사람의 몸을 덮었다. 피켓을 들고 서 있던 이들은 겉옷을 벗어 그들의 배에 깔았다. 또 몇 번의, 한참의 대거리를 거쳐 담요와 침낭, 은박 깔개가 전해졌다. 일어서지조차 않고서 배만 조금 들어 깔개를 끼우고, 그 다음에는 다리를 들어 깔개를 끼웠다. 그렇게 그들은 두 시간이 지나도록 바닥에서 몸을 떼지 않았다.

잠깐 쉬기로 했지만 몸들은 여전히 바닥에 붙은 채였다. 잠시 지켜보자 하나둘씩 굳은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어날 기운이 없어 그저 몸을 돌려 등을 바닥에 댄 채 가늘게 숨을 쉬는 이들이 많았다. 기지개를 켠 이들은 화장실에 다녀오고 옷매무새를 고쳤다. 잠시 후 또 바닥에 몸을 던질 참이었다. 경찰이 비켜주지 않는다면, 바닥에 몸을 바싹 붙인 채로 밤을 보내기로 했다.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나는 거기까지밖에 함께 하지 못했다. 그곳을 벗어나 해야 할 작은 일이 있었다. 그들은 아홉 시를 훌쩍 넘기고서야 죽으로, 컵라면으로 허기를 떼웠다고 한다. 경찰들 앞에서 스물여섯 번의 절을 했다고 한다. 그들의 동료 스물여섯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 쌍용차 노동자만이 아니라 거기 모인 모든 이들의 동료를 생각하면 훨씬 더 많은 숫자다. 평택의 농성장에, 구미의 농성장에 있던 이들이 서울로 출발했다고 한다. 흰옷 입은 이들은 밤새 절을 하기로, 그 옆에 있는 이들은 밤새 곁을 지키기로 했다고 한다.

저들의 영광과 우리의 채널, 그리고 나의 배역

2012년에는 "저들의 영광"이라는 글을 썼다. 유신시대를 추억하는 사람들에 대해 생각했다. 그 시대가 자신들에게 먹고 살 것을 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갖은 탄압 속에서도 그 시대에 그들은 주인공일 수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그 때를 추억하는 것이리라고 생각했다. 산업화의 흐름에서는 산업역군으로, 민주화의 흐름에서는 민주투사로 그들은 주인공일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 이전 세대에게는 또 반공의 흐름 속에서 참전용사라는 자리가 주어졌다. (물론 이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주인공이 되지 못한 사람이 많을 터이지만.) 이름뿐일지언정, 그들은 주인공이었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노동력 없는 노동자, 구매력 없는 소비자가 되어버린 그들이 옛날을 그리워하는 것은 그래서일 거라고, 그렇다면 그것은 당연한 일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저께에는 "우리에겐 채널이 없다"라는 글을 썼다. 90년대, 혹은 2000년대 초반쯤에 청소년이었던 ‘우리들’은 채널을 갖지 못했다고 썼다. 우리들의 스타들이 활약하던 공중파 채널들에는 이제 그 다음 세대의 스타들이 나오고, 우리들만의 케이블 채널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애매한 노동력과 애매한 경제력만을 가진 우리들에게는 여전히 욕망이 있고, 그 욕망을 해소할 채널을 갖지는 못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리는 ‘열풍’의 방식으로 그 욕망을 해소하고, 또 누군가는 그 열풍을 통해 무언가를 판다고 생각했다. 복고의 흐름 같은 것은 없는 것이 아닐까, 그저 건물 모퉁이에 생길 수밖에 없는 작은 회오리 같은 것이리라 생각했다.

조금 더 생각해 본다.

저들의 영광은 조금은 유지되고 있다. 실제로 해 주는 거야 전혀 없지만 여전히 그들을 추켜는 주는 보수 정권이 있고, 그때의 문화를 지켜주거나 미화해 주는 방송들이 있다. 회사에서는 상사로, 가정에서는 부모로 권위자 혹은 결정권자의 자리를 갖고 있다. 산업역군은 관리직이 되었고, 민주투사는 정치인이 되었다. 한 해에 한 번 정도는, 대통령까지가 나서서 참전 용사들에게 감사를 표한다. 제 먹고 살 길쯤은 갖고 있다면, 달리 주는 것 없어도 이 정도면 괜찮을는지도 모른다. 자기네 삶이었으므로 그들은 일상적으로 추억하고 자랑할 수 있고, 여전히 가진 것이 있다면 일상적으로 힘을 쓸 수 있다.

우리는 어떨까. 적어도 지금까지, 우리가 주인공이었던 곳은 그 ’90년대’의 대중 문화 시장 뿐이다. 더 이상 부모님이 씨디를 사주지 않고, 그렇다고 스스로 벌어 사기도 빠듯한 ‘청년’이 된 지금, 우리는 무력하다. 오직 소비자로서만 주인공 자리를 겪었는데, 소비할 능력을 갖지 못한 지금 우리에게는 아무런 배역도 주어지지 않는다. 새로운 것을 살 수 없으므로, 소비자로서의 그때를 추억하는 것 역시 용이하지 않다. 이따금 바람이 불어 주지 않는다면, 말라 죽어 버릴 것이다.

다시 조금 더 생각해 본다.

오직 과거의 영광만을 가졌을 뿐, 지금은 아무 힘도 없는 사람들이 있다. 더 이상 가정의 권위자가 아닌 노인 세대, 은퇴하거나 해고 당한 중년들, 모두가 주인공인 그 틈에서도 주인공 자리는 가져 보지 못한 혹은 너무 빨리 무대에서 내려온 전업주부, 혹은 장애인, 혹은 다른 어떤 소수자들. 쌓아둔 것이 없다면 그들은 아무 힘도 없고, 힘이 없다면 추억할 여유도 없다. 가끔 보이는 만만한 상대에게나 늘어놓을 수 있을까, 그들이 추억하는 영광은 더 이상 그들의 것이 아니다.

종일 트로트를 틀어주는 케이블 채널이나, 시간 맞춰 그들을 겨냥한 드라마를 틀어 주는 공중파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 볼 시간이 없거나, 볼 티브이조차 없을 때도 많다. 만만한 상대를 자주 볼 수 없다면, 그러니까 온순한 자식이 있어서 잔소리를 할 수 있거나, 자신이 모는 택시나 지하철에서 젊은 여성들을 만나 되먹지 못한 훈계를 할 수 있거나, 그런 식으로 분풀이조차 할 수 없는 이들은 무엇을 택할까. 어버이연합이니 뭐니 하는 것들이 나올 것이다. 그것으로 과거의 영광을 새로 실천하고 현재화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한다면 교회에 나가도 좋다. 신과 목사로부터 영원한 주인공 배역을 받고, 어버이연합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한때 맡았던 배역을 다시는 되찾을 수 없게 된 우리는, 새로이 오디션에 나서는 수밖에 없다. 리메이크 영화에서 산업역군 배역을 따내기 위해, 그 출연료로 다시 한 번 소비하는 주인공이 되어볼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기도 하므로, 끊임 없이 오디션에 나서는 수밖에 없다. 진짜 배우가 되려는 이들은 종종, 하찮은 배역으로 무대에 오르기보다는 차라리 한 끼 굶고라서 방에서 연습을 하는 법이다.(물론 정작 성공한 배우들의 궤적은 다른 것 같지만.) 우리는 숨고 또 숨어 든다. 오디션에 합격하는 그날이 오기까지, 없는 사람이 된다.

또 한 번 생각한다.

애초에 주인공이라는 자리는 막이 내리면 사라지는 법이다. 촬영해 놓은 것이 있다면 재방송을 할 수 있겠지만 재방송은 무한히 행해지지 않는다. 다음 공연이 있다면 또 다시 그 무대에 오를 수 있겠지만, 캐스팅은 철마다 변하기 마련이다. 무대에 오른다는 것은 처음부터 퇴장을 전제하고 있다. 수차례의 공연으로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더 이상 새 배역을 맡지 않아도 인정 받는 사람이 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더 이상 추억하지 않고도 현재를 충분히 살 수 있을까. 선생님 소리를 듣는 지난 세대의 배우들이, 감독이 되고 제작자가 되고 숫제 사업가가 되는, 그리 하려고들 하는 이유를 나는 알지 못한다.

우리는 무슨 채널을 가질 수 있을까. 소비자로서의 주인공이라는 배역을 어디선가 다시 맡게 된다면, 그걸로 만족할 수 있을까. 그것이 의미가 있을까. 소비할 능력을 갖춘 노동자가 되어도, 막은 또 내릴 것이다. 앞 세대의 그들처럼 우리는 또 채널을 찾아 헤맬 것이고, 그 마지막은 결국 다음 세대의 어버이연합인 것은 아닐까.

나는 우리에 속해 보지 못했다. 내 부모에게는 나를 소비자로 만들어 줄 능력이 없었고, 그래서인지 혹은 다행히도인지 나는 소비자가 될 생각이 많지 않았다. 우등생이라는 다른 주인공 자리를 겪었고, 여전히 학교에 남은 내게 그것은 퇴색하지 않는 영광이자 추억할 가치가 없는 기억이다.

이쯤에서 나는 내게로 돌아온다. 나는 어떤 채널을 가져야 할까. 학자가 될 것은 아니므로 학계는 나의 채널이 아니다. 운동을 나의 채널로 삼고 싶은 마음이야 있지만, 나는 성실한 주인공은 아닌데다 그것이 ‘청년’이라는 이름의 세대에 속한 자리이기는 더더욱 바라지 않는다. 실은 주인공이고 싶기는 한지부터가 문제이지만, 어쨌거나 이미 무대에 오른 이상 무어라도 배역은 있어야 하니까. 그냥 나라는 배역이면 좋겠는데, 여전히 나는 내가 누구인지 모른다.

live long, die young

"live long, die young", 며칠 쯤 전이었더라, 별다른 이유 없이 이 말이 쓰고 싶었다. 앞뒤에 덧댈 문장도 없이 그저 이 한 마디를 적고 싶었다. 쓰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래서다. 이 말을 적고 싶었을 뿐, 하고 싶은 이야기도 없었고 해야 할 이유도 없었다. 쓰지 못한 것은 젊어 죽은 사람이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물론 늘 많았다. 사고로, 병으로 죽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은 늘 많았다.

유독 마음에 걸리는 것은, 단지 지난 해에 그런 사람이 평소보다 많았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그들의 죽음에 보탠 말이 너무도 적었기 때문, 정작 말해야 할 사람들은 딴소리만 하고 말을 들어야 할 사람들이 말을 토해내는데도 내가 거기에 보탠 말이 너무도 적었기 때문일 것이다. 연말에도 많은 일들이 있었다. 사람이 죽었고, 농성들이 시작되었다. 끝난 농성들도 있다. 병역거부를 선언한 사람도 있었고 잡혀 간 사람도 있었다. 대개는 가 보지 못했고, 그래서 좀 더 찾아가기로 마음 먹었다.

그래놓고 정작 어제 아침에만도, 기껏 시간 맞춰 일어나 나갈 채비를 마치고는 마음이 가라앉아 다시 침대에 누웠다.

뭘 먹고 살까 하는 고민이 한창이다.

뭘로 먹고 사는 것이, 내 삶을 덜 괴롭힐까 하는 고민이 한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