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약자”의 자리를 빼앗아 그 자리에 또 다른 “사회적 약자”를 가두었다

지난 5월 21일, 서울남대문경찰서 앞에는 한 장의 공고문이 붙었다. 6월 28일자 집회 신고는 5월 29일 0시부터 가능하며 경찰서 정문 옆 경사로에서의 대기 순번대로 신고서를 접수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6월 28일은 제 16회 퀴어문화축제의 퀴어퍼레이드가 예정되어 있는 날이다. 보수 개신교회들에서, 퀴어퍼레이드 저지를 위해 집회를 열겠다고 선언한 날이다. 5월 21일은 퀴어퍼레이드 부대 행사에 대한 서울광장 사용승인이 나온 바로 다음날이었다. 평소에는 따로 하지 않는 공고였다. 양측이 모두 집회신고를 할 것임을, 그리고 그 중 하나인 보수 개신교회측에서는 이미 경찰서 앞에 진을 치고 있음을 경찰은 물론 알고 있었다. 기왕에 경찰서 앞에 있던 그들이 1순위 대기 번호를 받았다. 뒤늦게 모여든 퀴어문화축제를 열고자 하는 이들이 그 뒤에 줄을 지었다. 두 번 꺾인 세 구역의 경사로가 그렇게 가득 찼다. 그들은 일주일 내내 그 자리를 지켰다.

경사로는 휠체어 이용 장애인을 비롯해 계단 이용이 어려운 이들의 통행을 위한 곳이다. 우습게도 계단을 없앨 생각은 않는다. 경사로를 만든 것으로 제 할 일은 다 했다고 믿는다. 계단을 걸어 오를 수 있는 사람들만이 건물을 마주하고 나아갈 수 있다. 썩 건강치 않은 노인들의 생활공간인 합천 원폭 피해자의 집은 건물의 모든 층이 계단이 아닌 경사로로 이어져 있다.

더군다나 경사로를 막는 것은 더욱 곤란한 문제다. 휠체어 이용 장애인 등의 통행을 막는 것이며, 비상시 대피로 하나를 막는 것이기도 하다. 경찰의 농간에 나 또한 그 길을 막고 앉아 있었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 국민안전처 안전신문고라는 곳에 민원을 넣어 보았다. 5월 25일의 일이었다. 이틀이 지난 5월 27일, 민원이 경찰청에 접수되었다는 회신이 왔고 6월 3일에는 사실 확인을 위해 처리 기한이 12일까지로 연장되었다는 연락이 왔다.

그리고 오늘 6월 12일, “남대문 경찰서 담당부서(정보과) 정보관”이라는 자로부터 최종 답신이 왔다. 물론 경사로 담당부서가 아니라 경사로에 팻말과 의자를 설치하고 경사로를 민원인 대기 장소로 만든 그 일의 담당부서였다. 그는 “’15.6.28字 집회 신고를 위하여 첨예하게 대립되어 있는 단체들이 많은 인원을 동원하여 경찰서 정문 앞에 장시간 대기하게 될 경우 경찰서를 내방하는 많은 민원인들의 출입이 어려워져 부득이하게 경사로를 사용케 한 것”이라며 “만약 경사로를 이용해야 하는 민원인이 경찰서를 방문할 경우 경사로 이용에 어려움이 없도록 안내해 줄 것을 경찰서 정문 근무자에게 주지를 시켜 놓았”다고 했다. “향후 동일한 사안이 발생되지 않도록 노력하겠으며, 저희 남대문 경찰서에서는 사회적 약자 및 소외계층 보호에 더욱 힘을 기울이도록 하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단체들이 “첨예하게 대립” 중이라는 핑계로, 남대문경찰서는 행진 금지 통고를 보내왔다.

굳이 계단과 경사로를 따로 만드는 일을 차치하더라도, 경사로 이용이 필요한 사람은 안내 없이도 경사로를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평소에 꺼 놓는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지하철역 계단 리프트를 타기 위해 담당자를 부르게 해서는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경사로 역시 특별한 사유가 없다면 안내 없이도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특별한 사유라는 말을 굳이 덧붙이고는 어떤 게 있을까 생각해 봤는데, 한국어 점자를 읽지 못하는 시각 장애인에게 경사로 입구 위치를 알려준다거나 하는 정도밖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눈으로 확인해서든 유도블록을 따라서든 길을 찾을 수 있는 한, ‘안내’ 없이 이용할 수 있는 길이어야 한다. 그나마도 그는 “안내할 것”이 아니라 “안내해 줄 것”을 주지시켜 두었다고 했다. 해 준다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일주일간의 대기 시간 동안 두세 번 정도 가서 자리를 지켰다. 그 중 한 번, 휠체어를 탄 사람이 지나갈 일이 있었다. 줄지어 앉아 있던 무리가 우르르 일어나 돗자리를 접었다. 그는 경사로를 올라가며 고맙다는 인사를 했고 무리는 죄송하다는 인사를 했다. 한참이 걸린 그의 업무시간동안 무리는 돗자리를 완전히 펴지 못하고 불편하게 앉아 있었고, 나가는 길에도 그들은 서로 인사를 했다. 내일은 몇 시쯤 오는지를 말하고 그는 돌아갔다.

남대문경찰서 정보관이라는 자는 “단체들이 많은 인원을 동원하여 경찰서 정문 앞에 장시간 대기하게 될 경우 경찰서를 내방하는 많은 민원인들의 출입이 어려워져” 경사로를 대기 장소로 지정했다고 말했다. 경찰서 정면에는 여러 개의 문이 있었다. 어디든 장소를 지정하면 사람들이 그곳에서 대기하리라고 생각했으니 장소를 정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장소는 정면의 계단이 아니라 측면의 경사로가 되었다. 어지간히 모여서는 다 막을 수 없을 정도로 계단과 정문은 넓었다.

“많은 민원인들”, 아마도 ‘계단을 이용할 수 있는 많은 민원인들’의 편의를 고려한 그로 인해 “경사로를 이용해야 하는 민원인”은 원래라면 필요하지 않았을 안내를 받아야 했고, 낯선 이들에게 받은 것 없이 감사 인사를 해야 했고, 낯선 이들에게 자신의 이튿날 계획까지를 밝혀야 했다. “경사로를 이용해야 하는 민원인”의 길을 대기 장소로 지정받은 탓에, 줄서 있던 무리는 지은 죄 없이도 사과를 해야 했다.

남대문경찰서는 자신들이 “보호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사회적 약자”의 자리를 빼앗아 그 자리에 또 다른 “사회적 약자”를 가두었다. 그 “약자”들은 그 자리에서의 싸움 ― 서로 고마움과 미안함을 표하는 방식으로 숨겨진 싸움 ― 에 내몰렸다. 물론, 승자는 없었다. 구경꾼들이 있었을 뿐이다.

1년

1년 전 오늘, 나는 사무실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무엇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바빴던 모양이다. 점심을 같이 먹은 동료들도 그랬던 것 같다. 저녁이 되어 퇴근할 즈음까지, 나는 진도 바다에서, 그리고 서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몰랐다. 사건 속보도, 어이 없는 오보도 모두 지나가고 수이 입 밖으로 내진 못해도 이미 늦은 것은 아닐까 생각하는 이들이 늘어갈 때쯤에야 사건 소식을 접했다.

종편 채널을 본 것은 아마 그때가 처음이었던 것 같다. 제일 쉼 없이 뉴스를 내보내는 곳이었다. 그런 식으로 어떤 생중계를 부여 잡고 있는 것은 두 번째였다. 2011년 한진 중공업 희망 버스 생중계가 처음이었고, 지난 해 세월호 실시간 보도가 두 번째였다. 희망을 갖지도 않았고, 모니터 한 켠에 적힌 구조자 숫자 ― 이제야 나는 그 때의 그 숫자판이 실은 서울시청의 부채 감축 현황 전광판과 다르지 않다는 걸 안다 ― 가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았다. 그럼에도 며칠째 밤마다 퇴근 후의 지친 몸으로 뉴스를 보았던 것은 아마 무력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구조에 대해서는 누구도 더 희망을 갖지 않게 되었던, 시신들이 조금씩 수습되기 시작했던 즈음의 일이었을까. 혹은 그보다 조금 일렀을지도 모른다. 인터넷 메신저 프로필 사진에 노란 리본을 건 사람들이, 옷이나 가방에 노란 리본을 단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도 달까 하는 생각을 잠깐 했지만 그러지는 않기로 했다. 어떤 일에 대해서든, 프로필에도 옷에도 문구를 싣는 일은 잘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보다도, 지금 저 리본을 달았다가 어쩌면 영영 떼지 못하리라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포기하고 묻고 지나치는 것이 아니라면, 이 리본을 떼고 이 사건을 과거로 돌리는 것을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리고 1년이 지났다. 그 사이 광화문에는 몇 번 가지 못했다. 드문드문 집회에 나가기는 했지만 분향은 하지 않았다. 서명판에 이름을 적었지만 그 외에 별다른 문장을 쓰지는 않았다. 몇 권인가 출간된 책들은 읽지 않았다. 다른 일로 그곳을 지날 때면 고개를 돌렸다. 그래 봐야 어디에 눈을 두든 농성 천막이, 혹은 플래카드가, 혹은 숨죽인 사람들이 보였다. 그렇게 1년이 지났다.

아직 추웠던 얼마 전, 쌍용차 노동자들의 오체투지 행진을 촬영하러 갔다. 행렬을 따라갔더니 가운데에 광화문 농성장이 있었다. 그들은 고인들을 기리며 절하고 다시 갈 길을 갔다. 그곳에서 노란 리본 하나를 주웠다. 또 하나를 주웠는지 받았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곳을 나설 때 내 손에는 리본 두 개가 들려 있었다. 하나는 가방에 걸었고 하나는 책꽂이에 두었다. 리본을 건 가방은 최근 메지 않는다. 리본이 달려 있어서는 아니다.

오늘은 비가 온다. 낮부터 가 있을까도 했지만 할 일을 다 마치지 못한 탓에 저녁에만 갈 수 있게 되었는데, 그나마도 비가 오면 피곤한 일이다. 비가 오면 집회에 나가기 귀찮은데, 라고 쓸 수는 없어 그저 “비가 온다”라고만 썼다. 어떤 이들은 이 말을 “하늘도 운다”로 읽을 것이다. 그렇게 읽히기는 싫었지만, 안 쓰기도 싫었다. 그렇게 적었다.

비가 온다. 저녁까지도 나는 할 일을 마치지 못한 채 집을 나설 것이다. 몇 주째 피로는 누적되어 있다. 가고 싶지 않지만 갈 것이다. 가고 싶지만, 가는 것 이상을 하지는 못할 것이다. 오늘 저녁에는 유족들이 있는 곳에 갈 것이다.

포이동 266번지

만으로 3년 반쯤 되었나보다, 포이동 266번지에 다녀 왔다. 2011년 화재를 겪은 후 우여곡절 끝에 집 몇 채를 새로 지었다. 그 과정에서 마을 한쪽에는 공터가 생겼고 그곳은 주차장이 되었다. 이따금 그 공간을 빼앗으려 압박을 가해오던 강남구청에서 최근에 용역 업체와 계약을 맺었다고 한다. 하루에 두어 번씩 그들이 찾아 온다고 했다. 그들을 막을 이들을 다시 모으려, 오늘 문화제를 열었다. 그곳에 다녀 왔다.

익숙한 얼굴들이다. 주민들도 그렇고 찾아와 일하는 이들도 그렇다. 물론 낯선 이들도 많았다. 낯선 이들은 낯설게 두면 되고, 익숙한 일하는 이들은 집회에서라도 이따금 보던 얼굴들이니 그대로 괜찮다. 주민들의 얼굴을 보는 것은 만 3년 반쯤 만이다. 너무 오랜만에 온 것이 미안해, 부러 인사를 않고 구석에 있었다.

그런데도 한 명, 두 명, 나를 알아보고 먼저 인사를 건네 왔다. 포이동 266번지에 처음 간 것이 2005년의 일이니, 6년 정도를 꾸준히 보던 얼굴들이다. 주민들 중에 내 이름을 아는 이는 아마 없을 테지만, 어디에 소속되어 있고 누구와 함께 왔는지를 그들은 알고 있다. 그런 이들이 먼저 와 인사를 건넨다. 오랜만이라는 말도 없다. 늘 그랬듯, 그저 안부를 묻고 와주어 고맙다는 말을 덧붙였다.

2009년, 그들은 오랜 싸움 끝에 주민등록증에 제 주소를 올렸다. 그래봐야 집 주소가 아닌 마을 주소다. 개포동 1266번지. 그들이 주소를 빼앗긴 사이 포이동 266번지라는 이름은 서류에서는 사라졌다. 하지만 그곳은 그들의 집이었고, 사람들은 계속해서 포이동 266번지라는 이름을 썼다.

오랜만에 찾아가니 조금 변해 있었다. 이제는 1266이라는 숫자가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화재 복구 이후 쓰기 시작한 재건마을이라는 이름도 썩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마을 사수대책위가 속한 단체의 이름도 언젠가 바뀌었는데, 그 역시 자연스레 입에서 나왔다. 대책위 간부들도 바뀐 모양이었다.

우선은 한 달에 한 번씩 문화제를 열기로 했다 한다. 며칠전엔 ‘지키미’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회의는 공개되므로 시간만 맞출 수 있다면 참석할 수 있다. 다시, 포이동에 드나들려 한다.

종교 없는 유신론자

나는 신에 관한 네 가지 태도를 알고 있다. 스스로가 붙이는 이름들이야 다르겠지만, 늘어 놓아 보자면 이렇다. 종교 없는 유신론자, 믿는 종교인, 연구하는 종교인, 그리고 무신론자. 나는 첫 번째에 속한다.

이 넷은 전혀 다른 태도이고 전혀 다른 효과들을 갖는다고 나는 여긴다. 무신론자와 연구하는 종교인은 신을 해체한다(무신론자에게는, 그가 세계에 대한 일말의 관심을 갖고 있다는 전제를 붙여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믿는 종교인은 강화한다. 신이 아니라 그 종교를, 그 종교가 구성하는 세계를 그는 강화한다. 믿는 종교인은 세계를 굳어 가게 만든다. 종교를 갖지 않은 유신론자 또한 강화한다. 신이라는 이름이 붙지 않은 신을, 종교라는 이름이 붙이 않는 종교를, 세계라는 이름이 붙지 않은 세계를 그는 강화한다. 세계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라면 어떤 것이든 그 자리에 놓일 수 있다. 세계의 원리라고 그가 여기는 무언가를, 알고 그러든 모르고 그러든, 그는 강화한다.

나는 네 번째에 속한다. 나는 신이 있다고 믿는다. (신이 없다고 믿는다 말하면서도 여기에 속하는 이들이 있다.) 신이 ‘있다고’ 믿는 이유는 단 하나다. 그것 없이 나는 이 세계를 이해할 자신이 없다. 인격신이건 아니건, 선한 신이건 아니건, 세계의 시작과 지속을 설명해 줄 무언가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을 용기가 내게는 없다. 나는 구체적인 이름을 가진 신이건 그렇지 않은 신이건 믿지 않고 아무런 종교를 갖고 있지도 않다. 그러나 내가 신을 위해 마련해 둔 그 자리에 무언가를 두는 것은 쉬운 일이다. 어쩌면 이미 그렇게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예컨대 나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게으름을 믿는다. 그것이 세계를 구성하는 주된 원리 중 하나라고 여긴다. 나는 인간이 사유할 수 있고 스스로를 창조할 수 있다고 또한 믿는다. 그것이 세계를 구성하는 주된 원리 중 하나라고 여긴다. 이런 자리들에 언젠가 내가, 인간의 욕심, 자본의 힘 같은 것을 두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내가 믿고 있는 무언가가 그것들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할 근거는, 연구하지 않고 다만 믿기만 하는 내게는 없다.

나는 신에 관한 네 가지 태도를 알 고 있다. 그 넷은 전혀 다른 태도이고 전혀 다른 효과들을 갖는다고 나는 여긴다. 그저 믿는 종교인은 좋은 점이라고는 없는 태도라고 여긴다. 종교 없는 유신론자는 그와 다를 바 없다고 여긴다. 나는 그에 속한다.

오늘 안 한 말

쌍용차 평택 공장을, 공장 굴뚝 위에서 홀로 남아 92일차 농성을 하고 있는 이창근을 방문하는 집회가 있었다. 집회를 몇 시간 앞두고 평택역 광장에서는 행동 독서회라는 행사가 열렸다. 작은 무대에는 "함께 살자"라고 적힌 천이 걸려 있었고, 그 옆으로 『이창근의 해고일기』를 파는 부스가 있었다. 거기서 그 책을 산 사람들, 혹은 다른 곳에서 이미 산 사람들이 모여 광장 여기저기서 책을 읽었다. 이윽고 그들은 문장을 골라 작은 천에 옮겨 쓰고, 돌아가며 자기가 고른 문장을 낭독했다. 목숨을 끊은 동료 해고자에게 그가 쓴 편지의 한 구절을 읽은 사람, 그가 제 괴로움을 읊은 부분을 읽은 사람, 그가 이 사회의 문제를 지적하는 부분을 읽은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늦게 도착했다. 책은 읽지 못했다. 혹시 사회자가 근처에 있던 내게도 마이크를 들이 댈까 두려워 아무데나 몇 군데를 펼쳐 문장을 찾아 보았다. 대여섯 군데를 훑어 봤지만 크게 들어 오는 문장은 없었다. 그러다 마지막 페이지를 펼쳤다. 2014년 12월 20일, 한겨레신문에 실은 글이었다. 굴뚝 농성 6일차를 맞은 그가 쓴 글이었다.

 

굴뚝에 오른지 6일째를 맞고 있다. 차가운 날씨는 견디면 되고, 내리는 비는 부는 바람에 맡겨 말리면 되고, 쏟아지는 눈은 눈사람을 만들어 벗 삼으면 된다.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직 우리가 바라는 건 공장 안 동료들의 따뜻한 시선이며 악수다. 이젠 이 지긋지긋한 쌍용차 문제를 풀자고 공장 안 동료들이 나서줬으면 좋겠다. 정리해고로 인해 공장 안팎이 무간지옥의 6년이었다. 이제 새 길을 쌍용차 구성원이 함께 만들자는 말을 이제 우리 스스로가 했으면 좋겠다. 마음이 동한다면, 결코 어려운 일 아니다. 이 바람이 꼭 실현되길 바란다. 굴뚝은 우리들의 고향이다. 기대고 싶고 응석 부리고 싶고 하소연하고 싶다. 공장 안 동료들에게 손을 내민다. 쌍용차 문제의 매듭을 함께 풀어보자고.

 

「하늘 아래선 마주 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이창근, 『이창근의 해고일기』, 오월의봄, 2015, 417-426쪽.

 

하필 이 글이 마음에 걸린 것은 다름 아닌 "고향"이라는 단어 때문이었다. 지난 십 년간, 공장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외치는 수많은 이들을 보았다. 늘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생계 때문에, 혹은 자존심 때문에 — 거기까지가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전부였으나, 그들에게는 그 이상의 이유가 있어 보였다. 한 곳에서 오래 일한 이들, 공장의 역사와 제 삶의 역사가 겹치다시피 하는 이들은 더했다. 인생을 부정당해서 — 그 이상의 이유가 그들에게는 있어 보였다. 이창근은 잘 모르는 이이지만, 적어도 그가 쓰는 글들에서 그는 제 회사를 사랑하고 있었다. 늘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를 버린, 그가 찾아간, 그가 싸우고 있는 그 공장을 그는 제 고향으로 여긴다고 했다.

고향, 도시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요즘 세상에서 그곳은 '돌아갈 곳'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그곳이 돌아갈 곳이라는 것은 그곳을 떠나온 이들이 있음을 뜻한다. 고향, 그것은 떠날 수 있는 곳 — 떠난 곳이든 떠날 곳이든 — 에만 쓸 수 있는 말이다. 제 삶이 시작된 곳, 그것만으로 어떤 곳이 고향이 되지는 않는다. 떠날 수 없다면 그곳은 그저 감옥일 뿐이다.

굴뚝을 이창근이 어떤 마음으로 고향이라고 칭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바랄 뿐이다. 그곳이 그에게 고향이 될 수 있기를. 버림 받고 쫓겨 나는 것이 아니라, 안에 갇히거나 밖에서 막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 스스로 떠날 수 있는 곳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정년을 채우고라도 좋고 어느날 지쳐서라도 좋다, 어떤 이유로든 떠날 수 있는 곳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다행히 사회자는 나를 지목하지 않았고, 나는 아무 말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