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포대교의 추억

어제는 모 작가님의 곧 공개될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배경 삼을 곳으로 내가 좋아하는 공간을 고르라고 하셨는데 마땅한 곳이 없었다. 자주 모여 놀고 회의를 했던 친구네 집은 친구의 유학과 함께 사라졌고, 다른 좋아했던 몇몇 장소들도 그곳에서 시간을 공유했던 이들과의 관계가 끊어지면서 잘 찾지 않게 되었다. 뒤늦게 고민을 시작했는데, 착각해서 내가 좋아하는 공간이 아닌 내게 의미 있는 장소를 찾았다. 그러다 떠올린 곳이 마포대교다.
정확히는 마포대교가 아니라 한강의 어느 대교, 까지를 떠올렸다. 그곳이 마포대교였다는 것은 기사를 검색해 보고 알았다. 2005년 4월 20일, 4.20장애인차별철폐공동투쟁단은 마포대교를 점거했다. 장애인차별금지법 제정, 장애인 이동권 보장 등을 요구하는 집회였다.(당시 기사를 보니, 공덕동에서 집회를 연 후 국회까지 행진하던 중에 점유 차선을 줄이라는 경찰과 대치하다 대교를 점거한 것이라고 한다.)
너댓 시쯤 현장에 도착했던 것 같다. 대학에 온지 50일 쯤 된, 직업 운동가가 될 생각 같은 건 없었던 나는 학교 수업을 다 들은 후에야 출발했다. 영문학과 진학을 위해 필요한 필수 과목이었다. 그렇게 뒤늦게 도착한 그곳은 이미 아수라장이었다. 낯익은 누군가가 비틀거리며 다가오는 것이 보여 자세히 봤더니 얼마 전에 안면을 튼 사람이었다. 얼굴을 감싸 쥔 그의 손 뒤로 피가 흐르고 있었다.
한 달 전인 3월 20일엔 이라크침략2년규탄3.20국제반전행동에 참석했었고 (조금 전 검색해 보기 전까지 나는 이날의 행사명을 반전평화대행진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학생회를 통해 이런저런 사회 이슈들을 접했지만 딱히 내 일로 고민하진 않았던 모양이다. ‘법 너머에서’ 싸우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제야 이런저런 고민들이 들기 시작했다.
고민이라곤 해도, 물론 기껏해야 ‘(무슨 영화를 누리겠다고)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아니면 ‘(합법적 창구들을 두고) 꼭 이런 식으로 해야 하나’ 하는 것들이었다. 같이 갔던 선배는 왜 이런 식으로 싸울 수밖에 없는지를 한참 이야기했지만 별로 설득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런 의구심을 품고서도 계속 집회에 다녔고, 현장들을 접하면서야 그런 마음이 사그라들었다.
요즘도 종종 하는 이야기지만,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나면 장애인 운동을 업으로 삼을 줄 알았다. 크게 고민했던 것은 아니다. 2005년에는 청계천 장애인 이동권 투쟁을, 2006년에는 성람재단 비리 해결 투쟁을 가까이서 접하면서, 혹은 학교에서 장애아동주말학교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정이 든 탓이었을 게다. (물론 이렇게 말하기엔 만만치 않게 많이 다녔던 한미 FTA 반대 투쟁이나 여러 노동 쟁의 현장에 정이 안 든 이유를 설명할 수 없지만.) 장애인 운동을 통해 운동을 하는 태도는 물론이고 운동의 여러 의제들 ― 용어들을 읊어 보자면 노동권, 복지, 성인지적 관점 같은 것들 ― 을 배웠다.
흐르는 대로 ― 맘 편한 곳 찾아 ― 살다 보니 대학 졸업 후에는 퀴어 운동과 페미니즘 운동의 언저리를 기웃거리기 시작했고 2015년에는 급기야[!] 페미니즘을 전면에 건 단체에서 상근을 하게 되기까지 했다. 그 해엔, 초심으로 돌아가 장애인 운동에 뭐라도 기여를 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성과재생산포럼의 전신인) 장애/여성재생산권새로운패러다임만들기기획단에 들어갔는데 어쩌다 보니 거기서도 퀴어 이슈에 관한 글을 쓰게 되었다…….
요즘은 종종 내 인생이 어디로 흘러가고 있나 하는 생각을 하는데, 어떤 역사를 쓰게 되든 그 처음에는 마포대교가 있었으면 한다. 이 역사를 끊고 전혀 엉뚱한 삶을 시작하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는 뜻이다.

p.s.

  • 3.20.국제반전행동은 경찰과의 충돌 없이 마무리 되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날은 전투경찰이 아니라 여성 경찰들이 폴리스라인을 만들고 있었다. “립스틱 라인”이라는 세칭을 듣고서 기이하게 여겼던 것이 문득 떠올랐다.
  • 4.20.장애인차별철폐의날 집회에 가기 전에 선배들이 연행될 경우에 대비한 대응 방법을 알려 주었던 것이 떠올랐다. 화장실에 붙은 쪽지를 보고 왔다고 하라고 했다. 왜 대자보도 아니고 화장실 쪽지였을까?
  • 2005년 오마이뉴스 기사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청계천’」에서 당시의 내 모습을 찾았다. 지금까지도 전경과의 직접적인 대치나 기물파괴를 선뜻 하지 않는 사람인 나는, 당시에도 스프레이로 길에 글씨를 쓰는 일은 마다하고 피켓을 들고 달리기만 했다.
  • 4월 20일에 집회 대신 택했던 강의에서는 결국 C라는 성적을 받았다. 다음 학기에 들은 다른 필수 과목은 조모임을 매주 해야 하는 커리큘럼이어서 수강을 ― 그러니까 영문과 진학을 ― 포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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