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 너머의 익숙한 고민들 ― 영화 〈24주〉와 〈가타카〉가 던지는 재/생산에 관한 질문들

들어가며
가끔 쳇바퀴를 돈다는 느낌을 받는다. 한국에서 현행법상 낙태는 불법이므로, 낙태에 관한 구체적인 이야기들은 공식적인 담론의 장에 진입하지 못한다. 낙태에 관한 공식적인 담론이 형성되지 못하므로, 낙태를 처벌하는 현행법을개정하는 논의는 제대로 진행되지 못한다. 낙태가 죄로 남아 있기에 담론이 형성되지 못하고, 담론이 형성되지 못하므로 낙태는 죄로 남는다. 그렇게 생각하면 낙태죄 폐지 요구가 거세지고 있는 요즘의 분위기는 고무적인 일이다.지난해 폴란드의 시위에서 영감을 받아 한국에서도 열린 “검은 시위” 등이 많은 사람들의 참여를 이끎으로써 공식적인 담론이라 할 만한 것이 형성되어 가고 있는 시기를 우리는 맞고 있다.검은 시위의 주요 구호 중 하나는 “내 자궁은 나의 것”이라는 말이었다. 여성의 신체적, 성적 자기결정권을강조하는 이 말은 (일각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의 공감을 샀다. 일견 이론의 여지 없이 명백해 보이는 이말은 어쩌면 위험을 안고 있다. 태아의 생명권과 여성의 자기결정권이라는 해묵은, 그리고 허구적인 양자 대립 구도를 반복할 위험 ― 다시 말하자면 임신과 출산 혹은 낙태 (그리고 양육) 과정에 수반되는 수많은 요소들을 간과하게만들 위험 말이다.물론 “내 자궁은 나의 것”이라는 구호는 일시적인 전략일 뿐일 수도 있다. 임신 및 그 이후의 과정들을 둘러싼 다양한 요소들을 논하는 것은 그 이후의 일일 수도 있다. 아니, 그 이후에야 가능한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여성의 자기결정권만을 생각할 때에도 형법상의 낙태죄 폐지는 시작일 뿐 궁극적인 목표일 수 없다 ― 법 개정 이후에도여전히 여성의 몸을 통제하려드는 사회와 싸워야 할 것이므로 ― 는 점에서 그 고민들을 마냥 미루어 둘 수는 없을것이다. 나는 믿는다. ‘이후의 삶’을 상상할 수 없다면 그것을 쟁취할 수조차 없다.특별히 새로운 것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제목에 쓴 대로 그것은 “익숙한 고민들”이다. 다만, 최소한의 자기결정권마저 보장하지 않는 한국 사회의 현실 속에서 고민의 뒤켠으로 밀려나 있는, 그래서 종종 잊혀지곤 하는,그런 고민이다. 영영 잊혀져서는 안 될 것이기에 간단히나마 기록해 두려는 것이 이 글의 작은 목표다. 추상적인 고민은 어려운 것이므로, 누군가가 상상한 어떤 ‘미래들’을 고민의 단초로 삼으려 한다. 영화 〈24주〉와 〈가타카〉가 그리는 미래들을 통해, 우리의 미래를,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들을, 조금이나마 ― 대개는 장애에 관해 ― 살펴 보려한다.

[후략]

  •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적녹보라의제행동센터 2017년 상반기 특강 “영화로 얘기해보는 ‘낙태죄’ 폐지와 재/생산 정치”에서 했(어야 했)던 이야기들을 정리한 것이다.
  • 전문: https://www.dropbox.com/s/lrapyzt74cgaamb

또 지고 돌아왔다

몇 번인가, 매주 촛불집회에 나갔다. 오랜 시간을 있지는 않았다. 모여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공연만 보고 발언만 듣는 집회는 익숙하지 않다. 그런 집회엔 안 간지 꽤 되었지만, 내게 익숙한 집회는 조직된 사람들이 함께 작전을 짜서 움직이는 집회다. 그 작전이란 때론 경찰 저지선을 뚫고 어딘가를 점거하는 것이고 때론 행인들을 상대로 유인물을 돌리는 것이었다. 누군가를 설득하기 위한 것도, 직접적으로 위협하기 위한 것도 아닌 집회는 아직도 익숙하지 않다.
하지만 사람이 많다는 건 역시 위협이 되는 모양이다. 경찰과 충돌하지도 통제선을 넘지도 않는 백만 명이 위협이 되었던 모양이다 — 물론 그 와중에 피를 흘리며 싸운 전봉준투쟁단 같은 이들도 있었지만. 그 위협에, 국회가 움직였다. 박근혜가 탄핵소추되었다. 직무가 정지되었고, 이제 헌법재판소에서 무언가 판단을 내릴 것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국민이 승리했다고.
백남기 씨는 결국 운명했고 전봉준투쟁단의 트랙터는 광화문 앞을 밟지 못했지만, 새벽의 광화문에서 또 누군가 무력진압을 당했지만, 광화문에서 열린 혹은 서울을 제외한 각 지역에서 함께 열린 집회들만을 생각하면 상대적으로 크게 무언가를 잃지는 않았다 — 많은 이들이 체력과 시간과 돈을 썼지만, 그걸 ‘잃은 것’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잃지 않고 무언가 얻어 보기는 오랜만이다. 아니, 어쩌면 처음이다.
그럼에도 이겼다는, 승리했다는 생각은 좀처럼 들지 않는다. 백만 명이 넘는 이들이 모여서도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국회의, 혹은 대통령의 결단을 기다리는 것 뿐이었다. 드디어 그 결단을 끌어냈지만, 여전히 할 수 있는 것이라곤 헌재의 판단을 기다리는 것 뿐이다. 그래서일 것이다. 이겼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여전히 모든 것이 간접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대의민주제라는 체제 하에서 이는 물론 자연스러운 일이다. 민주제라는 형식을 깨지 않는 한, 백만이 아니라 천만이 모여도 청와대에 들어가 박근혜를 거리로 끌고 나올 수는 없는 일이다. 직접민주제를 채택하지 않는 한, 국회의 결단을 기다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럼에도 기분이 찝찝한 것은, 지금의 대의민주제가 성에 차지 않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대통령에 대한 국민소환이 불가능하다는 점, 이것만으로도 지금의 대의민주제 하에서는 언제든 같은 일이 반복될 수 있다. 또 한 명의 대통령이 비리를 저질렀을 때, 국민들로서 할 수 있는 일은 국회를, 그 때에도 보수적일 국회를 압박하는 것 뿐일 테니 말이다. 그것을 바꾸지 않는 한, 이겼다는 기분은 들지 않을 것 같다.
또 있다. <수취인분명>이라는 노래로 여성혐오를 표출했던 DJ doc는 결국 무대에 오르게 되었다. 메인 무대가 아니라고는 해도, ‘민주주의’라는 이름을 걸고 있는 모 단체가 주관하는 무대인 모양이다. 소수자들을 배제하는 허점투성이, 아니 거짓말투성이 민주주의는 여전히 굳건하다. 이것이 바뀌지 않는 한, 이겼다는 기분은 들지 않을 것 같다.
사람들은 말한다. 국민이 승리했다고. 국민의 명령을 국회가 받든 것이라고. 반만 사실이다. 정권이 말하는 국민에 노동자가 없었듯, 지금 승리를 만끽하는 이들이 말하는 국민에는 여성이, 성소수자가, 청소년이, 없다. 절반의 국민만이, 혹은 그보다 적은 국민만이 승리했다. 국민에 끼지 못한 이들의 싸움은 여전히 진행중이다.
누군가가 시민대표자회의 같은 것을 추진하는 모양이다. 거론되는 대표자들은 하나 같이 ‘중진’이다. 정말로 중년 남성인 경우가 많고, 그렇지는 않더라도 학벌이든 무엇이든 든든한 것 하나쯤은 가진 이들이 더러 있다. 그 든든한 무언가가 지금껏의 활동으로 쌓은 지지도라면 또 모르겠지만, 그렇지만도 않다. 그저 다른 무언가로 명성을 가진, 이 일에 관해서는 해낸 바 없는 이들이다.
그런 식으로, 가진 것 없는 이들, 힘 없는 이들은 또 한 번 밀려난다. 그래서 나는, 승리를 즐길 수가 없다. 늘 이런 식으로 씁쓸하게 무언가를 마무리하고 싶진 않지만, 씁쓸한 맛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겼다는 기분이 들 때까지, 게으르게나마 무엇이라도 하는 수밖에.

 

광장의 언어

어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웹진 《글로컬 포인트》 광장 특별호에 공동저술로 실은 글(http://blog.jinbo.net/glocalpoint/65)의 초고. 브레인스토밍 정도 식으로 쓴 거라 흐름이 잘 잡혀 있지는 않다. 다른 글들은 흐름이 잘 잡혀 있다는 건 아니지만.

 

광장의 언어

 

2016년은 육십갑자로 따져 병신년(丙申年)이라고 합니다. 때문에 여성인 박근혜와 병신(病身)을 엮어 "병신년”이라는 조롱이 적지 않습니다. 조롱만으로도 부족하다는 심정 이해합니다. 그러나 병신년은 장애인과 여성을 비하하는 말입니다. 악의 없는 비유라도 상처받는 이들이 있다면 버리고, 피할 수 있으면 다른 방법을 찾는 게 길입니다. 때론 언어가 의식과 행동을 규정합니다. 근로자, 민노총, 노가다, 잡부, 노무자 등 민주노총은 잘못된 언어의 피해자기도 합니다. 무심코 던진 말과 언어의 유희에 애꿎은 피해자가 있을까 걱정합니다. 민주노총은 약자에 대한 비하 우려가 있는 말을 쓰지 않도록 노력할 것이며, 구성원들도 함께하길 권유할 것입니다. 내년에도 민주시민들의 멋진 풍자를 기대합니다.

 

이 짧은 글은 민주노동조합총연맹, 우리가 익히 아는 민주노총이 지난해 마지막 날 낸 논평의 전문이다. 현장에서 부딪혀 온 이들에게서는 미처 기대하지 못했던 글이었다. 놀라웠고, 반가웠다.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무대에 오르지 못한 이들이 있다. 무대에서 끌어 내려진 이들이 있다. 평소 같으면 이런 수식어들은 논의에서 배제된 이들에게 가닿아야 했겠지만, 이번엔 달랐다. 혐오 발언으로 누군가를 ― 어쩌면 티나지 않게 ― 배제하는 이들이 무대에서 끌어내려 졌고, 입장을 허락받지 못했다. 야유를 받았다. 그들 중 누구는 “우리끼리 싸울 때가 아니다”라고 말하며 자신의 잘못을 묻으려 들었다. 그러나 이미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아니라는 것을. 여성의, 장애인의, 청소년의, 비정규직의, 성소수자의 요구는 “우리”의 요구와는 달랐다.

흔히들 ‘87년 체제’를 이야기한다. 민주공화국으로서의 2016년 한국을 지탱하는 근간이다. 이명박 정권 때부터 이미, 혹은 그 전부터도, 87년 체제를 넘어서야 한다는 이야기가 쉼 없이 나왔다. 좀 더 강력한 삼권분립, 대통령 권한의 축소와 같은 것들이 언급되곤 했다. 개헌을 통해 새로운 공화국을 만들어야 한다고들 했다. 기본소득 운동이나 인권 운동 등의 영역에서 조금은 다른 이야기들이 나오기도 했지만, 힘을 가진 쪽에서는 대개 87년 체제 ― 형식민주주의의 완성 이상을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여전히 우리가 같다고 믿었다. 제도를 정비하면, 우리가 “공화국”을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공화국이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한 교수는 최근의 칼럼에서 “공화국의 최후 골간”은 “공공성”이며 이것은 “군인과 음부를 뜻했다”고 썼다. “그것이 없다면 인간과 국가 생명은 죽기 때문”이란다.(명림,​ ​「민주공화국의​ ​부활은​ ​광장에서…사실상의​ ​하야와​ ​헌법적​ ​하야」,​ ​《한겨레》​ ​,​ ​2016.11.11.) 나라를 지키는 사람이 없으면, 새로운 국민을 생산하는 사람이 없으면, 나라가 유지되기 힘들 테니 틀린 말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민중총궐기의 한 사회자는 “국가는 모두의 어머니여야 한다”고 말했다. 국부 이승만, 제 2의 국부 박정희 모두 국민들을 죽이기만 했으니 이제쯤 어머니를 그리는 그 마음을 이해해 주어야 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음부에게도 자신만의 쾌락이, 어머니에게도 자신만의 꿈이 있을 것이다. 여성은 자식을 낳고 기르기 위한 존재가 아니다. 그렇게 믿는 이들이 항의했다.

광장의 언어. 성차를, 민주주의를, 공화국을, 박근혜 이후를 말하기로 한 이 글에 썩 어울리는 제목은 아니다. 광장에서는 많은 이들을 만난다. 서울말을 쓰는 이도, 전라도 말을 쓰는 이도 있다. 무능한 나로서는 대화할 수 없는 수어를 쓰는 이들, 외국어를 쓰는 이들도 있다. 서로 다른 말들이 서로 다른 내용들을 담고 광장을 떠돈다. 그런 점에서 광화문 광장은 백만이 모이든 이백만이 모이든 아직 그리 큰 광장은 아닐 성 싶다. 서로 다른 이야기가, 아직 부족하다. “광장의 언어들”을 알 때에야 87년 체제의 완성이 아닌 극복을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

흔히들 하는 말로 본론을 시작하자. 공화국을 뜻하는 영어 단어 republic의 어원은 ‘공공의 것’을 뜻하는 라틴어 res publica이다. 국어대사전은 “공공”을 “국가나 사회의 구성원에게 두루 관계되는 것”이라고 풀이한다. 국가의 체제와 제도가 누구 하나에게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에게 두루 관계될 수 있는 것, 그것이 공화국이다. 이런 말로 풀어 쓴 사람도 있다.

 

공화국이라는 것이 무엇이고 그것은 어떻게 운용, 유지되는가? 간단하게 말해 공화국이란 사회적 갈등이 제도 정치의 영역에서 말과 협상으로 해결될 수 있다고 믿는 체제가 아닌가? 말로 하자는 것, 제도권의 영역에서 말로 타협하여 사회를 유지할 수 있다고 믿는 체제, 그것이 바로 공화국이다. 그래서 공화주의자 안에는 사회주의자도 있고, 자유주의자도 있고, 보수주의자들도 있을 수 있다. 공화주의는 철저하게 제도의 운용에 대한 형식적 문제이지 정책 내용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엄기호,​ ​「공화국의​ ​죽음과​ ​새로운​ ​시민의​ ​탄생」,​ ​《프레시안》,​ ​2009.06.05.)

 

그런 점에서 한국은 공화국이 아니고, 아니었다. ― 저 글을 쓴 이는 공화국이었던 시기가 있다고 믿는 것 같지만 말이다. 단순히 이명박, 박근혜 정권이, 혹은 그 이전의 정권들이  여론을 무시하고 소수의 뜻대로 권력을 휘둘렀음을 지적하려는 것은 아니다. 지역적으로는 호남과 강원을, 사상적으로는 진보주의자들을, 성적으로는 여성과 성소수자들을, 또한 장애인들을, 비-성인들을, 언제나 배제해 온 것이 한국의 역사임을 말하려는 것이다. 공화국다운 헌법을 마련한지 이미 스무 해가 넘었다고는 해도, 한국은 늘 죽은 공화국이었다.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이다” ― 2008년 촛불집회 이후 심심찮게 울려퍼지는 노래다. 누군가는 대한민국 헌법 제 1조를 금과옥조처럼 여기며 저 노래를 따라 부르지만 탐탁지 않아 하는 이들이 한구석에는 있다. 지금의 집회에서 “페미가 당당해야 나라가 산다”, “청소년이 당당해야 나라가 산다”, “퀴어가 당당해야 나라가 산다”, “장애인이 당당해야 나라가 산다”고 외치는 이들이다. 무대에서 혐오 발언을 하는 이들을 끌어 내리는 이들, 무대의 사회자에게 야유할 줄 아는 이들, 여지껏 “두루 관계되지” 못했던 이 사회의 구성원들이다.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자신이 속한 국가가 자신을 혐오하는 것을 보면서도 그 나라의 국민으로 남는, 자신이 속한 정당이 자신을 혐오하는 것을 들으면서도 그 정당의 당원으로 남는,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집착하고 있다, 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바꾸고자 하는 이들, 바뀌고자 하는 이들 ― 이들이야 말로 공화주의자임을 말하려는 것이다. 87년 헌법을 지키고자 하는 이들, 그것을 완성하고자 하는 이들, “우리”가 하나임을 믿는 이들이 아니라 말이다.

 

광장에서

이들의 이야기를 빼고 나면 나는 광장에 대해 별로 할 말이 없다. 합심해서 박근혜 하야를 요구하는 이들, 백만이 모이건 이백만이 모이건 그 사이에서 나는 “광장의 언어”를 찾을 수가 없다. 차벽을 넘을지 말지에 관한 논쟁에 흥미가 가지 않는 것은 그래서다. 차벽을 넘으면 청와대가 있다. 청와대에는 박근혜가 있다. 차벽을 넘을 수 있다면 박근혜를 끌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다음엔? 아무것도 없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렇다.

박근혜를 하나의 오점으로 생각하는 한, 그 오점을 지우면 그 이전으로 돌아갈 뿐이다. 포스트박근혜 시대가 저절로 열리는 것은 아니다. 다른 무언가를 상상할 줄 모르는 한, 남는 것은 여전히 죽어 있는 공화국 뿐이다. 우리는 역량을 길러야 한다, 같은 이야기가 아니다. 공화국이라는 ‘최소한’에 멈추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앞에서 인용한 대로 “공화주의는 철저하게 제도의 운용에 대한 형식적 문제”라면, 공화국은 영원한 거짓말이다. 제도에 누가 어떻게 접근할 수 있는가, 누가 진정한 의미에서의 “사회 구성원”이 될 수 있는가를 고민하지 않는 한 말이다. 이미 쫓겨난, 그러나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다시 돌아와 떠나지 않는 사람들이 될 수 있는 길을 찾지 않는 한 말이다. 그저 형식적인 주권자들로서가 아니라, ‘최소한’에 멈춘 자들로서가 아니라, ‘최소한’을 확보하고 거기서 출발하는 “우리”를 만들어 나가지 않는 한, 차벽을 넘건 말건 박근혜가 하야하건 말건 달라질 일은 없을 것이다.

“박근혜 이후”를 말하는 사람은 많다. 기득권 정치인들에게 어떤 처세를 권하는 이도, 새로운 경제 정책 기조를 제안하는 이도 있다. 언론에 한 줄 글이나마 실을 수 있는 이들에게서 나오는 것은 그러나 여전히 형식 민주주의 제도의 보완, 경제 양극화 완화 같은 선에 머문다. “병신”이란 말도 “년”이란 말도 쓰지 않는 세계가 아니라, 또 다른 “병신년”이 대통령이 되지 않는 세계를 그리고 있을 뿐이다.

그럴수록 우리는 더 많은 광장의 언어를 만들어야 한다. 박근혜라는 오점을 지우는 걸레질이 아니라, 박근혜 이후를 그리는 붓질을, 박근혜 이후를 조각하는 망치질을 해야 한다. 하야해야 할 것은 박근혜라는 한 명의 권력자가 아니다. 그 권력을 유지하는 모든 것들 ― 권위주의, 군사주의, 가부장주의, 개발주의, 지역주의, 반공주의 등등을 함께 허물 언어를 우리는 필요로 한다.

 

시위라는 스펙터클

시위는 축제다, 라는 말이 2008년 이후로 통용되는 듯하다. 2008년 촛불집회에선, 밤새 공연이 펼쳐졌다. 누군가는 노래를 했고 누군가는 젬베를 두드렸다. 누군가는 플룻을 불었고 누군가는 춤을 췄다. 사람들은 집에 갈 생각을 않고 공연들을 즐겼다. 그런, 축제였다.

실은 새로운 일은 아니다. 집회는 언제나 축제였다. 무대에 오른 가수들의 노래를 듣고, 문선대의 무용을 보고, 도로에서 술을 마셨다. 오랜만에 만나는 타지역 사람들과 반가이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누군가에게는 집회가 그저 경찰들과의 대거리로 여겨졌을지 몰라도, 집회는 언제나 축제였다.

요즘의 축제에서는, 그러니까 시위에서는, <민중의 노래>가 톡톡히 역할하고 있는 듯하다. 이 제목을 접한 이들을 둘로 나뉠 것이다. “어둠에 찬 반도의 땅”을 떠올리는 사람과 “너는 듣고 있는가”를 떠올리는 사람으로. 요즘의 집회에 울려 퍼지는 것은 후자지만, 나는 전자를 떠올리는 사람이다.

꽃다지의 노래다. 민중가요, 혹은 투쟁가요로 불린다. 발표된지는 스무 해가 넘었다. 군사주의적 수사로 가득하다. 이 노래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후자의 노래가 울려 퍼지는 것이 탐탁지는 않다. (어쩌면 군가 풍이라서) 비교적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는 전자의 노래와는 달리, 후자의 노래는 공연을 위한 것이다. 그저께 집회에서는 뮤지컬 가수들이 무대에 올라 노래했다.

정부 주최의 5.18. 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이 아닌 중창으로 무대에 올린 것이 몇 차례 논란이 되었다. 이것은 단지 보수 정권의 인사들이 노래를 따라 불러야 하느냐 그러지 않아도 되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중창은 분업이다. 자신이 맡은 파트만으로는 곡이 완성되지 않는다. 순전한 관객의 역할을 맡는 이들도 있다. 모두가 모여서야 하나의 세계가 겨우 완성된다. 그러나 그 세계는, 스펙터클일 뿐이다.

제창에는, 원칙적으로는, 모두가 참여한다. 한 명 한 명이 완성된 곡을 부른다. 참여하는 사람만큼의 노래가, 참여하는 사람만큼의 세계가 펼쳐진다. 후자의 노래가 울리는 것이 탐탁지 않은 것은 그래서다. 집회가, 축제라는 이름으로,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구경하는 것이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에서다.

박근혜만 아니면 되는, 광장에서 말할 자신의 언어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많은 것은 아닐까, 그들에게는 그저 구경하는 집회로 족하기에 집회가 이런 축제가 되어 가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든다. 박근혜 이후를 고민하지 않는, 집회에서 자신의 역할을 고민하지 않는 — 실은 아무것도 바꾸지 않아도 좋은 이들이 모여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그래서, 광장의 언어

시위는 축제다. 그러나 그저 구경하면 되는 축제는 아니어야 한다. 구경거리가 많을 수는 있지만, 그것은 구경꾼을 위해서가 아니라 공연자 자신을 위해서여야 한다. 참석하는 것이 아니라 참여해야 한다는 뜻이다. 박근혜 퇴진이라는 텅 빈 말을 외치는 것이 아니라, 박근혜 이후를 고민하는 꽉 찬 말을 내어 놓아야 한다는 뜻이다.

거창하게 말하고 있지만 이 글이 어떤 답을 주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이승만의 시대에, 박정희의 시대에 머물러 있다. 어느것 하나 청산되지 않은 역사에서, 우리의 상상력은 어쩌면 빈곤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더더욱 말하려는 것이다. 상상해야 함을, 미래를 구상해야 함을.

혹자는 말한다. “광장은 앙시앵 레짐을 해체할 수 있지만, 새로운 제도를 설계하지는 않는다"고.(「박근혜 이후를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경향신문》, 2016.11.24.) 그는 그래서 직업 정치인들에게 지혜를 요구한다. 그러나 새로운 제도를 설계하지 않고 – 비록 그것이 법적인 용어들로 정제된 것은 아니라 해도 – 어떻게 앙시앵 레짐을 해체할 것인가? 프랑스의 군중은 왕을 처형했다. 그것은 단순히 구시대를 끝내는 것이 아니라 왕이 없는 새 시대를 여는 행동이었다.

장애인 혐오 없이, 여성 혐오 없이 박근혜를 내친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장애인 혐오 없고 여성 혐오 없는 새로운 체제를 여는 일이다. 혐오 없는 언어로 말한다는 것은 그 언어가 통용되는 하나의 세계를 여는 일이다. 그 시작은 광장 한 구석의 작은 무리일지언정, 그것이 무대에 전해지고 시위에 참여한 ‘동료’들에게 전해질 때, 그것은 하나의 새로운 체제를 여는 언어가 될 것이다.

그래서, 광장의 언어를 이야기하기로 했다. 침묵하며 무대를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이따금 텅 빈 구호를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언어로 이야기하기를, 각자의 새 시대 구상을 내어 놓기를, 그래서 토론하기를 바랐다. 박근혜 이후의 시대를 또 한 명의 구세력에게 맡길 수는 없는 일이다. 우리 자신이 새로운 세력이 되어, 새 시대를 맡아야 한다. 우리의 언어로, 우리의 시대를, 열어야 한다.

 

무력한 자들의 연대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글로컬 포인트》 광장 특별호에 실은 글.

http://blog.jinbo.net/glocalpoint/61

 

 

나의 집회들

집회에 처음 간 것은 2005년 3월이었다. 반전평화의날. 폴리스라인 안에서 질서정연한 행진을 했고 무대엔 연예인이 올랐다. 운동은커녕 정치에도 관심은 없었지만,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그 다음으로 집회에 간 것은 4월, 장애인차별철폐의날이었다. 수업을 마치고 느지막히 도착한 나를 향해 누군가 달려 왔다. 지난번 집회에서 안면을 튼 이였다. 손으로 감싸 쥔 이마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도로 점거 농성을 벌이다 진압하는 경찰에게 맞아 생긴 상처였다. 이해할 수 없었다. 축제 같은 집회도 가능한데, 왜 이런 집회를 하는 것일까. 아는 데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대화를 할 생각조차 않는 정부를, 이렇게라도 하고 나면 무조건적으로 진압하려 드는 경찰을 아는 데엔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기억에 남는 집회들이 몇 개 있다. 
공사를 마친 청계천을 개장하기 얼마 전, 청계천변 장애인 접근권을 주장하며 집회를 열었다. 길을 가는 이들에게 유인물을 나눠 주며 한참을 붙잡고 설득했다. 문도 열지 않은 천변에 내려가 소리를 지르고 위를 올려다 보며 피케팅을 하고 스프레이로 구호를 새기기도 했다. 경찰과 추격전을 벌였다. 
부산에서 열린 APEC 회담을 저지하기 위한 행진은 두 층으로 쌓인 컨테이너 박스 앞에서 멈췄다. 밧줄을 걸고 컨테이너를 끌었다. 다행히 속은 비어 있었다. 경찰이 계속해서 막았기에 목표한 곳까지 다 가지는 못했지만, 아무튼 고비는 넘겼다. 부산 시내 곳곳을 다니며 구호를 외쳤다. 벽에는 스프레이로 구호를 새겼다. 나는 ‘실천단’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한미FTA 반대 집회는 서울 곳곳에서 벌어졌다. 어디를 가는지도 모른채 투쟁국장을 따라 다녔다. 말 그대로 몰랐다. 어디를 가는지는 투쟁국장만이 알았다. 여러 단체들이 ‘택[tactic]’을 짜고 서울 곳곳에서 거리를 막았다. 경찰이 도착하면 도망쳐서는 다른 곳을 막았다. ‘떴다비’라는 방식이었다. 빨라야 했으므로, 지하철 개찰구는 뛰어 넘었다.
2008년 촛불집회 때의 일이었다. 경찰 방패에 몸을 맞대고 서로 밀고 있던 나는 갑자기 뒷줄에서 뻗어 나온 손에 잡혀 경찰들 사이로 끌려 들어갔다. 경찰은 진압을 시작했다. 한 간부가 밑에 사람이 있다고 대열을 세우지 않았더라면 나는 크게 다쳤을 것이다. 이미 몇 차례 밟혀 안경이 부러진 참이었다. 이렇게 죽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크게 다치지 않고 나왔지만 몇 시간 뒤엔 물대포에 쫄딱 젖고 말았다.
용산참사가 일어난 다음날, 용산에서 명동까지 행진했다. 명동에서는 투석전이 벌어졌다. 사람들은 보도블럭을 뜯어 경찰을 향해 던졌다. 경찰은 잠시 밀리는가 싶더니 결국 강경진압을 했다. 한 친구는 경찰이 되던진 돌에 머리가 찢어졌고, 다른 친구는 군홧발에 밟혀 안와골절을 입었다. 이번에도 나는 안경을 잃어버렸을 뿐이니 피해는 미미한 편이었다.

그때랑은 달라

2005년 4월의 집회 후, 잠시 나는 갈등했지만 싸우기로 했다. 경찰을 따돌리고 청계천변에 내려갔고, 방패 장벽을 뚫고 건물을 점거했다. 거리를 막는 것은 일상적이었다. 동원된 경찰 개개인을 공격하는 일은 피했지만, 밀고 밀리는 몸싸움을 주저하지는 않았다. 경찰이 방패로 찍으려 들면 발을 들어 방패를 찼다. 때론 방패를 빼앗기도 했다. 가끔씩이지만, 우리는 경찰을 이기기도 했다.
하지만 수년간, 나는 집회의 면면을 싫어했다. 경찰 한 명을 끌어내 짓밟는 사람들을, 진압 병력이 아니라 그저 때가 되어 순찰을 돌고 있었을 뿐인 순찰차 앞유리에 쇠파이프를 휘두른 사람들을, 경찰에게 날계란이니 까나리액젓이니를 던지는 사람들을, 나는 탐탁치 않아 했다. 수천 명이 모여 있는 한 가운데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렇게 조금씩, 나는 집회에 덜 나가게 되었다.
나는 늘 소위 ‘조직 대오’에 속해 있었다. 때로는 방침을 정해 줄 사람이, 때로는 어떻게 싸울지 논의할 사람들이 있었다. 달라진 것은 2008년 촛불집회 때부터였다. 주말에는 ‘조직’에 속한 모두가 나왔지만 평일엔 혼자 가는 일도 종종 있었다. 혼자 보는 풍경은 달랐다.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었다. 매일같이 광화문 광장에서 밤을 샜지만 하는 일이라곤 대개 거리 공연을 보는 것이 전부였다. 아침이 되면 경찰들은 일렬로 서서 거리로 밀고 들어 왔고, 나는 다른 이들과 함께 속수무책 밀려났다.
혼자 보기 때문에 다른 것만은 아니었다. 나는 늘 조직에 속해 다른 조직에 속한 이들과 함께였다. 내가 목적지를 모른 채 서울 곳곳을 누비듯, 내 옆에 있던 다른 단체 사람들도 목적지를 모른 채 서울 곳곳을 누볐다. 내가 속한 단체만으로 뚫을 수 없는 수의 경찰 병력에 길이 막히면 다른 단체 사람들과 회의를 했다. 그러다 보면 할 수 있는 일이 생기곤 했다. 그러나 2008년의 어느 평일 새벽, 광화문 대로에서는 나도, 내 옆에 있는 이도, 모두가 혼자였다.
이 ‘혼자’들이 모여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내가 한창 집회에 다녔던 그때랑은 다르다. 투쟁국장들끼리 회의해서 짠 ‘택’을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는커녕, 단일한 의견을 갖지조차 않는 무리다. 이 ‘혼자’들의 무리란 건 말이다. 이 수많은 사람들의 한가운데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수 년을 보냈지만, 그 고민만은 내내 하고 있었다.
간단한 것은, 함께 하자고 하는 것이다. 더 이상 혼자이지 않도록, 뜻을 모을 사람을 찾는 것. 그것이 운동의 시작이고 끝이므로, 다른 고민은 어쩌면 필요치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 모인 백만 명의 사람들 중 내가 몇을 설득할 수 있을까. 박근혜가 몇 월에 하야해야 할지에 대해서조차 뜻이 갈리는데, 당장 연행을 각오하고 저지선을 넘자고 ― 그러나 그 선 너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진 모른다고 할 때, 내가 몇을 설득할 수 있을까. 그래서, 사람이 많을수록 나는 무력해진다.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 못하게 된다. 그저 분위기를 좇아, 사람들이 가는 곳엘 가고 사람들에 멈추는 곳에서 멈출 뿐이다.

무력한 자들의 연대

어쩌면 ‘즐거웠던’ 나의 ‘폭력 집회’ 경험을 되새기는 것에서 시작해, 이제는 무력해진 나에 대한 소외로 이야기를 옮겼다. 그러나 이전의 경험들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소속이 다르거나 아예 소속이 없는 백만 명이 함께 ‘군대처럼’ 움직이지는 못할 것이므로 (또한 그래야 할 필요도 없으므로) 나는 앞으로도 계속 무력할 것이다. 적어도 내가, 내가 속한 단체의 회원들 백 명만이 외로이 무언가를 요구하기보단 행인들과 뒤섞인 천 명 혹은 만 명이 함께 하기를 바라는 한, 나는 내내 무력할 것이다.
내가 무력해진다는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힘이 약해진다는 것, 그것은 어쩌면 평등한 관계를 맺기 위한 나쁘지 않은 출발점이다. 학생운동 단체의 대표였던 내가 다른 회원들을 상대로 건넨 말과, 지금 여기 수많은 혼자들의 사이에서 평범한 혼자일 뿐인 내가 누군가에게 건네는 말의 무게는 전혀 다르다. 모두가 무력한 혼자라면,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평등하게 토론하는 관계가 말이다.
물론 모두가 똑같이 무력하지는 않다. 장애인과 비장애인, 여성과 남성, 트랜스젠더퀴어와 시스젠더, 한국인과 외국인(특히 백인이 아닌), 청소년과 비청소년, 청년과 중년, 화이트칼라와 블루칼라, 이들 모두 광장에서는 무력한 혼자지만 혼자들이 만나는 순간 둘 사이에 숨겨져 있는 무게차가 드러난다. 이렇게 말해도 좋을까, 더 무력해져야 한다고. '조직'이 갖고 있던 힘을 버리는 것 이상으로, 이 사회에서 다수자로서 갖는 힘을 버리고서 시작해야 한다고, 그렇게 토론에 임해야 한다고.
지금까지의 토론들은 성에 차지 않는다. 경찰의 저지선을 넘을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토론을 예로 들어보자. 그저 경찰 저지선을 넘지 않는다는 결론이 답답한 것이 아니다. 이 체제 내에서 법이 갖는 무게를 생각지 않고서 그저 준법을 주장하는 이들이, 혹은 사다리를 갖고 와도 차벽을 넘을 수 없는 이들을 생각지 않고 그저 넘는 것이 능사인 듯 말하는 사람들이 답답한 것이다. 준법이라는 말이 갖는 무게, 폭력투쟁이라는 말이 갖는 무게, 이런 것들을 우선 버리지 않고서 우리는 평등한 토론을 할 수 없다. 서른 해 전 집회를 조직했던 경험을 권위 삼아 내세우는 한, 평등한 토론은 불가능해진다. (경험이 주는 교훈을 모두 버려야 한다는 말은 물론 아니다.) 여자와 아이는 뒤로 빠지라고, 싸움은 성인 남성들이 하겠다고 하는 한, 저지선을 넘어 청와대를 점거한다 해도 새로운 세상은 열리지 않는다.
그래서 어쩌면, 시작은 우리끼리 싸우는 것일지도 모른다. 스스로는 쉽게 버리지 못하는 그 무게들을 없애기 위해, 우리끼리 싸우는 것 말이다. 광장의 무대에 수화통역을 요구하는 것, 무대의 혐오발언들에 사과와 재발방지를 요구하는 것 – 이미 일어나고 있는 그 싸움들 말이다.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도 함께 했던 '페미존' 사전집회가 그 예가 될 것이다.
무게를 가진 자들은 도처에 있다. 박근혜를 그저 몰아내기만 한다면, 그 다음 무게를 가진 사람이 그 자리에 가게 될 뿐이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진정한 '박근혜 이후'를 상상할 수 있도록, 우리는 그 무게들을 없애야 한다. 서로를 더욱 무력하게 만들어, 새로 시작해야 한다. 누구 하나가 강한 것이 아니라 연대로써 비로소 강해지는 그런 연대가 그 토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제안한다. 무력한 자들의 연대를. 기존의 체제에 힘입어 갖고 있는 무게들을 먼저 버리고 스스로 무력해지고자 하는 이들의 연대를, 그 무게를 끝끝내 버리지 못하는 자들을 쫓아가, 함께 무력해지도록 싸우고자 하는 이들의 연대를 말이다. 

내 집을 갖지 못한 탓이다

네 잔. 그리고 세 잔. 어제와 오늘 마신 커피의 수다. 내 집을 갖지 못한 탓이다. 눈을 뜨자마자 씻고 집을 나섰다. 분식집에 들러 천 원짜리 주먹밥 하나를 사서는 길을 걸으며 꾸역꾸역 씹었다. 카페에 들어섰다. 익숙한 풍경이다. 적당한 빈 자리를 골라 짐을 내려 놓았다. 커피를 주문한다. 아메리카노, 이천 원이다. 물가가 싼 동네에서 싼 카페를 찾고 거기서 제일 싼 음료를 찾는다. 내 집을 갖지 못한 탓이다.
커피를 홀짝이며 아르바이트를 한다. 아르바이트라고 해 봐야 큰 돈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일을 위해 새로 산 컴퓨터, 일을 위해 매일 마시는 커피. 여기까지만 해도 급여의 대부분이 사라진다. 돈을 모으기 위한 일은 아닌 셈이다. 그저 번 만큼 씀으로써 하루하루를, 일상을 유지하기 위한 일이다. 내 집을 갖지 못한 탓이다.
월세방에 산다. 한 달에 이십팔만 원. 공과금을 더하면 매달 삼십만 원 가량이 꼬박꼬박 빠져 나간다. 삼십만 원. 월세를 제외한, 밥값이며 교통비며를 더한 돈이기도 하다. 아르바이트를 하는 동안에는 조금 더 쓴다. 카페에 다녀야 하기 때문이다. 내 집을 갖지 못한 탓이다.
집은 좁다. 벽을 따라 책장이며 서랍, 옷걸이며 냉장고며가 늘어서 있고 방바닥에는 이부자리가 깔려 있다. 그러고 나면 남는 공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 어딘가에 쓸모가 있는 공간이라기보다는, 그저 머리칼이며 먼지며가 뒹구는, 쓸모 없는 공간일 뿐이다. 하지만 그 공간마저 없으면 더 숨이 막힐 것이다. 집은, 아니 방은, 좁다.
방 한켠엔 빈 맥주캔이 쌓여 있다. 커피는 싼 동네지만 술값마저 싸지는 않으므로, 혼자 술집에 가는 호사를 누리지는 못한다. 술은 집에서 마신다. 술을 마시는 것 자체가 호사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한 캔에 천오백 원, 이따금 한 캔 정도씩 마실 만큼은 돈을 번다. 아직은 말이다. 캔을 찌그려 비닐봉지에 담고 있자면 묵은 술냄새가 훅 하고 올라온다. 술 생각이 가시는 냄새다.
다른 쪽엔 라면을 끓여 먹고 씻지 않은 냄비가 있다. 냉장고가 있기는 하지만 든 것은 없다. 불규칙한 생활, 몇 달을 열지 못한 김치통엔 곰팡이가 슬었다. 곰팡이 슨 김치를 내다 버리고 나자, 냉장고 속엔 남은 것이 없었다. 가끔의 사치로 산 과일이 들었다. 내가 사치를 부렸다는 사실을 어느 날 이후로 냉장고는 열리지 않았고, 두 알 남은 참외는 뭉그러진 채 냉장고 속에 남았다.
음식물 쓰레기를 만드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므로, 참외는 껍질째 먹었다. 꼭지가 있는 부분은 먹을 수 없었지만, 날이 쌀쌀하므로, 그 정도는 쓰레기통에 버려도 좋다. 담뱃재가 수북한 쓰레기통이다. 집에서는 하는 일이 거의 없으므로, 쓰레기는 많이 나오지 않는다. 쓰레기통을 비우는 것은 두어 달에 한 번 정도다. 여름에는, 적잖은 벌레가 오랜 시간을 보내는 곳이다.
잠만 자는 집을 나서면 가는 곳은 주로 카페다. 아침을 대강 해결하고 카페에 앉아 일을 한다. 점심을 먹을 때가 되면 짐을 싸서는 싸구려 식당을 향한다. 운이 좋으면 밥을 먹은 후에 원래 앉았던 자리에 다시 앉을 수 있다. 이따금 컵을 치우지 않고 나가는 수를 부리기도 한다. 내 자리라는 것은 없으므로, 다른 이가 앉아버렸다면 하릴 없이 다른 자리를 찾아야 한다. 내 집이 없는 탓이다.
집은 좁다. 카페의 작은 테이블이 더 움직이기 편할 만큼, 집은 좁다. 카페 테이블에 물건들을 늘어두면 내 방 같다. 남는 공간이란 존재하지 않아서, 키보드를 아슬하게 올려두고 손목을 겨우 걸치고 일한다. 저녁이 되면, 점심 때와 같은 일을 반복한다. 오늘은 점심으로 자장면을, 저녁으로 라면을 먹었다. 커피는 세 잔 모두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잠을 자지 못한 것은, 어쩌면 그 탓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