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선물

그리고 싶은 게 떠올라서 그려야지 했다가, 내 능력으론 그릴 수 없음을 떠올리고 그냥 글로 써 두기로 했다.
십여 년 전의 일이다. 집을 나서 길을 걷고 있었다. 내 앞에는 공사장 노동자가 걷고 있었다. 양쪽에 들통이 달린 긴 막대를 어깨에 지고. 아마 조금 쌀쌀한 때였던 것 같다. 희미하지만, 그가 입고 있었던 쥐색의 얇은 점퍼가 기억난다. 공사 중인 건물로 들어가는 그를 좇아 고개를 돌리고, 비계 구조물에 묶인 무언가가 보였다. 엷은 갈색의 주먹만한 곰인형이었다. 길에서 짧지 않은 시간을 보낸듯, 여기저기 털이 뭉쳐 있었다. 공사장에서 일하는 누군가가, 소중한 이에게 선물하기 위해 챙겨 둔 것이라고 생각했다. 길에 버려진 곰인형을 보고 소중한 사람을 떠올린 누군가가, 잘 씻어다 그에게 주기 위해, 챙겨 둔 것이라고 생각했다. 작은 공사장엔 사물함 같은 것이 없었을 터이므로, 아마도 가방을 챙기지 않고 맨몸으로 나왔을 터이므로, 잃어버리지 않게 잘 보이는 곳에 철사로 묶어 둔 것이라고 생각했다. 멋대로 상상한 것일 뿐이지만 그 마음을 잊고 싶지 않아 사진으로 남겨 두기로 했다. 그러나 이튿날 카메라를 챙겨 나갔을 때, 그 자리는 비어 있었다. 잊지 않고 가져가 깨끗이 빨아 말리는 중이었으리라.
다이소니 양파주머니니 하는 저가형 매장의 물건을 애인에게 선물한다는 남자들 ― 늘 남자로 지칭되는 이들이 여자로 지칭되는 이들에게 선물했다는 이야기만을 접한다 ― 을 욕하거나 비웃은 글들을 이따금 보게 된다. 왜 저러고 살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말로 뱉지는 못한다. 어쩌면 그들 중엔 정말로 가난했을 뿐인 사람들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보다도 더 가난했던 시절의 나는 길에서 주운 물건들을 누군가에게 선물하곤 했다. 서랍을 주워다 칠해 수납장을 만들어서, 혹은 주운 널빤지, 누군가가 준 선물의 포장지, 다 마시고 씻은 플라스틱 커피잔 같은 것들을 붙여 스탠드를 만들어서 선물했던 적이 있다. 손 댈 필요 없이 멀쩡했던 ― 정확히 말하자면, 멀쩡하지는 않지만 쓸만했던 ― 커다란 가방을 주워다 선물했던 적이 있다. 기껏해야 삼만 원이면 더 나은 것을 새것으로 살 수 있을 물건들이었지만, 삼만 원이 없었던 적이 있다. 그걸 받아든 이가 속으로 어떤 생각을 했는지 나는 모른다. 다만 그때의 나로서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었다. 공사장의 누군가가 곰인형을 주웠던 것과 아마도 같았을 마음으로.
문득 그날이 떠올랐다. 모래인지 시멘트인지로 가득한 들통을 메고 비척비척 걷던 그의 뒷모습과, 어두운 공사장 안으로 사라지던 그의 곁에서 내 눈을 사로 잡았던 꾀죄죄한 곰인형이 떠올랐다. 그림을 그릴 줄 알았다면, 이런 비루한 이야기는 쓰지 않을 수 있었을 텐데.

나도 징계하라

  • 서울대 본부 점거 참여 학생들에 대한 학교 측의 징계 방침에 항의하는 대자보.

정치를 거부하는 것,
그것을 우리는 독재라 부른다

시흥캠퍼스 실시협약 철회와 총장 퇴진을 요구한 학생들에게 대학 본부는 징계로 답했다. 무기정학 8명, 유기정학 6명. 4명에 대한 형사고발 역시 현재진행형이다. 대학민주화 이후 상상할 수 없었던, 그야말로 초유의 사태다.
징계를 받은 학생들은 별다른 일을 하지 않았다. 학생 총회의 결정에 따라 행정관을 점거했다. 무시로 일관하는 총장을 찾아가 구호를 외쳤다. 광장에게 동료 학생들에게 유인물을 나누어 주었다. 집회에서 마이크를 잡았다. 이런 행위들을 우리는 정치활동이라 부르고, 그것이 가능한 조건을 우리는 민주주의라 부른다.
그렇다. 본부의 징계 결정은 다름 아닌, 학내 민주주의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이다.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것, 정치를 거부하는 것, 그것을 우리는 독재라 부른다. 사복 경찰의 감시가 없다고 해도, 최루탄이 터지지 않았다고 해도, 우리의 사전에 이 상황을 설명할 말은 독재 이외에는 없다.
본부는 최소한의 형식적 절차마저도 무시하고 대상 학생들에게 소명 기회조차 주지 않은 채 징계를 강행했다. 스스로가 정당하지 못함을 본부가 알고 있다는 것, 이것이 지금의 사태에서 유일하게 다행인 일이다. 알고 있다면 실천해야 한다고 배웠다. 스스로의 부당함을 아는 본부와 총장은 실천해야 할 것이다. 징계 철회를, 그리고 총장 퇴진을 말이다.
모두가 자유롭게 말할 수 있어야 할 학교라는 공론장을 노욕으로 더럽히지 말라. 교육공공성이라는 신념을 위해 행동한 학생들을 치졸한 징계로 모욕하지 말라. 수많은 사람들이 몸 바쳐 이룩한 민주주의를, 당신의 독재로 갉아 먹지 말라.

우리 모두를 징계하라

학생들은 외치고 있다. “나도 징계하라”고. 학생 총회에 참석했던 모두를, 행정관에 출입한 모두를, 게시판에 자보를 붙인 모두를, 유인물들 나눠 주고 받아 든 모두를, 감히 교육공공성을 요구한 모두를 징계하라. 모두를 징계하지 않는 한, 모두를 쫓아 내지 않는 한, 당신의 독재는 완성되지 못할 것이다.
우리 모두를 징계하고 진정한 독재를 완성함으로써야, 반대하는 모두를 내쫓음으로써야 깨닫게 될 것이다. 모두의 학적을 지울 수는 있어도 민주주의를 없앨 수는 없을 것임을 ― 우리의 정치를 지울 수는 없을 것임을, 뒤늦게 깨닫게 될 것이다.
더 이상 늦기 전에 학생 사회의 요구를 들으라.

대학 본부는 학생 징계와 형사 고발을 철회하라.
대학 본부는 시흥캠퍼스 실시협약을 철회하라.
성낙인 총장은 자리에서 물러나라.

미학과 박종주

삼성전자-반올림 합의에 부쳐

반도체노동자의건강과인권지킴이 반올림, 이라는 데에서 활동하는 이들을 처음 만난 것은 아마 2010년이었던 것 같다. (반올림은 2008년 초에 결성되었고, 그 전신쯤 되는 삼성반도체집단백혈병진상규명과노동기본권확보를위한공동대책위원회는 2007년 말에 발족했는데 구성단체 중에 당시 내 소속 단체인 대학생사람연대도 있었으니 아마 존재는 그 전부터 알았을 것이다.) 당시에는 서교동에 살면서 자전거로 신림동을 자주 오갔는데, 지나는 길목에 근로복지공단 서울남부지사가 있었다. 어느날 그 앞에서 방진복을 입은 사람들을 보았다. 그들이 바로 반올림 활동가들이었다.
그땐 기자로 일하고 있었으므로 요즘보다는 훨씬 쉽게 누군가에게 다가가 말을 붙이곤 했다. 아마 약속조차 잡지 않고 불쑥 찾아가 즉석에서 인터뷰를 요청했었던 것 같다. 당시에 쓴 짧은 기사는 “이훈구 활동가는 “피해자가 100명이 넘어서가 문제가 아니라, 단 한 명이라도 일하다 병들고 죽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이라며 “삼성 전자가 사과와 보상을 하는 것은 당연한 순리고, 정부 역시 관리 감독을 소홀히 한 데 대해 사과하고 속히 산재 승인을 해서 피해자들이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이라는 말로 끝났다.
공대위로 시작돼 반올림으로 이어진 운동의 촉발점이 되었던 2007년 삼성전자 기흥공장 반도체 노동자 황유미 씨의 죽음 이후 11년만에, 지난 24일 반올림과 삼성전자가 중재합의서에 서명을 했다. 상대가 삼성이니만큼 좀 더 지켜 보아야 한다는 마음이 가시지 않지만, 이 폭염에 이어가야 했을 천막농성을 (무려 1023일만에) 마무리한 것으로 한시름을 덜었다. (라고 쓰기에는, 나는 자주 찾아가지도 딱히 시름하지도 않았지만.)
많은 사람이 죽거나 병들었다. 삼성이 사과와 보상을 약속하긴 했지만, 삼성 못지 않은 책임을 가진 정부와 관련 입법 활동을 했어야 할, 그리고 해야 할 국회에 대해서는 여전히 더 할 말이 많이 남았다.

노회찬 부음에 부쳐

2009년 김대중이 세상을 떠났을 때 나는 기자로 일하고 있었다. 소규모 언론사였고 데스크의 개입이 거의 없는 곳이었는데, 아마 그때가 유일하게 특정 기사 작성을 요구 받은 때였던 것 같다. 별 건 아니었고, 김대중의 일대기를 작성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내게는 그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다. 그가 대통령직을 맡았던 시기의 나는 정치 같은 데엔 관심이 없었다. 중고등학교를 다니며 그의 삶에 대해 딱히 배운 것도 아니었으므로, 민주화 운동가로서의 그에 대해서 역시 잘 알지 못했다. 내게 그는 그저 노무현에 앞서 신자유주의 정책을 펼친 전직 대통령에 지나지 않았다. 김대중 퇴진을 외쳐 본 적이야 물론 없지만, 노무현 퇴진을 외치는 데에 많은 시간을 들였던 내게, 그는 탐탁지 않은 인물일 뿐이었다.
그런 그의 삶을 되짚고 업적을 기리는 글을 쓴 적이 있다는 것이 어제 저녁에 떠올랐다. 당시 일했던 언론사의 웹사이트는 사라졌기에 누군가 그 글을 찾아 읽을 일이야 없겠지만(특별한 글도 아니었으므로, 어딘가에 갈무리되어 있을 일도 없을 테다), 당시에 어떤 문장들을 썼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지만, 그런 글을 쓴 적이 있다는 사실을 적어도 나는 기억하고 있다.
노회찬이 세상을 떠났다. 면식이 있는 사이도 아니고, 내 삶에 큰 흔적을 남긴 사람도 아니다. 하지만 김대중보다 내 삶에 가까웠던 사람인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무언가 해야겠다고 느꼈다. 특별한 일을 할 것은 아니다. 김대중 일대기를 쓸 때 그랬던 것처럼, 이 사람의 활동을 되새겨 보는 일 정도는 해야겠다고 느꼈을 뿐이다.

나는 정당 정치나 의회 정치에 큰 관심이 없고 그와는 당적도 달랐으므로 그의 활동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그에 대한 주된 감정은 막연한 불안감 같은 것이었는데, 이것은 내가 말이 많은 사람, 특히 비유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종종 갖는 불안감이다. 그에 대한 가장 선명한 기억은 그가 말실수를 한 장면이다. 2009년 한 방송 토론에서 진보 인사의 정치적 전향을 비판하며 그는 “내가 국회 법사위 있을 때 성전환 하는 분들, 소수자들의 권리를 옹호해온 사람인데, 국민 다수가 그렇게 성전환 하는 것은 곤란하지 않는가”라고 말했고, 이 일로 성소수자 사회의 비판을 받았다.1
그러나 많은 이들은 또한 그를 성소수자 인권 옹호에 적극적이었던 이로 기억할 것이다. 2007년 그는 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로부터 무지개인권상을 받은 바 있다. 당시 친구사이 간사는 노회찬이 트랜스젠더의 입양권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한 일을 언급하며 “동성애자 사회에서도 하리수씨 입양에 대해서 ‘너무 앞서나간 것 아닌가’라는 생각에 입장 정리를 못하고 있었는데 노회찬 의원실에서 입장을 발표해 문제를 가십거리가 아니라 ‘인권의 문제’로 환기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평했다.2
2006년 그는 성전환자의성별변경등에관한특별법안을 발의했다. 비록 현행 대법원 예규와 같은 수준의 요건을 제시하고 있지만, 국회와 정부는 여전히 그만한 법조차도 만들지 못하고 있다.3 2008년에는 차별금지법안을 발의했다. 역시 통과되지 못한 이 법안의 차별 금지 사유에는 “성적지향”과 “성별정체성”이 명시되어 있었다. 같은 시기 법무부가 제출한 안에서는 삭제된 항목들이다.
한편 2005년에는 장애인차별금지및권리구제에관한법률안을 발의했다. 2004년에는 국가보안법폐지법률안을 발의했으며, 또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를 보장하는 내용의 병역법개정안을 내기도 했다. 의회 안팎에서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활동해 온 것이나 여러 집회에 참석하며 사람들과 함께 싸워 온 것을 새삼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가 대표발의한 백 건이 넘는 법안 중 원안 혹은 수정안이 가결된 것은 그리 많지 않다. 그나마도 누군가가 그의 업적으로 기억해 줄 만한 사안들은 아니다. 그러나 그 숫자가 그의 삶에 대한 지표가 되어 줄 수는 없는 일이다. 폐기된 수많은 법안들은 물론, 정당인으로서 다른 당이나 정부를 향해 그가 발언했던 것들은, 한국 현대사에, 적어도 그 근처에 있었던 나의 삶에, 어떤 식으로든 얕지 않은 흔적을 남겼다.
조금은, 다른 기억을 가져보려 한다.

  1.  http://runtoruin.com/1489 참조.
  2. http://legacy.h21.hani.co.kr/section-021013000/2007/12/021013000200712060688026.html?fbclid=IwAR2ijXjChlkpzeAn4Yi9IR4M1b7-I0qLy8bnrG0fzszrXN1VW550lCrpzEk 참조
  3. 성별 정정에 관한 법안이 발의된 것은 2002년 김홍신 의원안, 2006년 노회찬 의원안의 두 건이 전부다. 2008년에는 국가인권위원장이 법 제정을 권고한 바 있다.

마포대교의 추억

어제는 모 작가님의 곧 공개될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배경 삼을 곳으로 내가 좋아하는 공간을 고르라고 하셨는데 마땅한 곳이 없었다. 자주 모여 놀고 회의를 했던 친구네 집은 친구의 유학과 함께 사라졌고, 다른 좋아했던 몇몇 장소들도 그곳에서 시간을 공유했던 이들과의 관계가 끊어지면서 잘 찾지 않게 되었다. 뒤늦게 고민을 시작했는데, 착각해서 내가 좋아하는 공간이 아닌 내게 의미 있는 장소를 찾았다. 그러다 떠올린 곳이 마포대교다.
정확히는 마포대교가 아니라 한강의 어느 대교, 까지를 떠올렸다. 그곳이 마포대교였다는 것은 기사를 검색해 보고 알았다. 2005년 4월 20일, 4.20장애인차별철폐공동투쟁단은 마포대교를 점거했다. 장애인차별금지법 제정, 장애인 이동권 보장 등을 요구하는 집회였다.(당시 기사를 보니, 공덕동에서 집회를 연 후 국회까지 행진하던 중에 점유 차선을 줄이라는 경찰과 대치하다 대교를 점거한 것이라고 한다.)
너댓 시쯤 현장에 도착했던 것 같다. 대학에 온지 50일 쯤 된, 직업 운동가가 될 생각 같은 건 없었던 나는 학교 수업을 다 들은 후에야 출발했다. 영문학과 진학을 위해 필요한 필수 과목이었다. 그렇게 뒤늦게 도착한 그곳은 이미 아수라장이었다. 낯익은 누군가가 비틀거리며 다가오는 것이 보여 자세히 봤더니 얼마 전에 안면을 튼 사람이었다. 얼굴을 감싸 쥔 그의 손 뒤로 피가 흐르고 있었다.
한 달 전인 3월 20일엔 이라크침략2년규탄3.20국제반전행동에 참석했었고 (조금 전 검색해 보기 전까지 나는 이날의 행사명을 반전평화대행진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학생회를 통해 이런저런 사회 이슈들을 접했지만 딱히 내 일로 고민하진 않았던 모양이다. ‘법 너머에서’ 싸우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제야 이런저런 고민들이 들기 시작했다.
고민이라곤 해도, 물론 기껏해야 ‘(무슨 영화를 누리겠다고)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아니면 ‘(합법적 창구들을 두고) 꼭 이런 식으로 해야 하나’ 하는 것들이었다. 같이 갔던 선배는 왜 이런 식으로 싸울 수밖에 없는지를 한참 이야기했지만 별로 설득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런 의구심을 품고서도 계속 집회에 다녔고, 현장들을 접하면서야 그런 마음이 사그라들었다.
요즘도 종종 하는 이야기지만,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나면 장애인 운동을 업으로 삼을 줄 알았다. 크게 고민했던 것은 아니다. 2005년에는 청계천 장애인 이동권 투쟁을, 2006년에는 성람재단 비리 해결 투쟁을 가까이서 접하면서, 혹은 학교에서 장애아동주말학교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정이 든 탓이었을 게다. (물론 이렇게 말하기엔 만만치 않게 많이 다녔던 한미 FTA 반대 투쟁이나 여러 노동 쟁의 현장에 정이 안 든 이유를 설명할 수 없지만.) 장애인 운동을 통해 운동을 하는 태도는 물론이고 운동의 여러 의제들 ― 용어들을 읊어 보자면 노동권, 복지, 성인지적 관점 같은 것들 ― 을 배웠다.
흐르는 대로 ― 맘 편한 곳 찾아 ― 살다 보니 대학 졸업 후에는 퀴어 운동과 페미니즘 운동의 언저리를 기웃거리기 시작했고 2015년에는 급기야[!] 페미니즘을 전면에 건 단체에서 상근을 하게 되기까지 했다. 그 해엔, 초심으로 돌아가 장애인 운동에 뭐라도 기여를 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성과재생산포럼의 전신인) 장애/여성재생산권새로운패러다임만들기기획단에 들어갔는데 어쩌다 보니 거기서도 퀴어 이슈에 관한 글을 쓰게 되었다…….
요즘은 종종 내 인생이 어디로 흘러가고 있나 하는 생각을 하는데, 어떤 역사를 쓰게 되든 그 처음에는 마포대교가 있었으면 한다. 이 역사를 끊고 전혀 엉뚱한 삶을 시작하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는 뜻이다.

p.s.

  • 3.20.국제반전행동은 경찰과의 충돌 없이 마무리 되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날은 전투경찰이 아니라 여성 경찰들이 폴리스라인을 만들고 있었다. “립스틱 라인”이라는 세칭을 듣고서 기이하게 여겼던 것이 문득 떠올랐다.
  • 4.20.장애인차별철폐의날 집회에 가기 전에 선배들이 연행될 경우에 대비한 대응 방법을 알려 주었던 것이 떠올랐다. 화장실에 붙은 쪽지를 보고 왔다고 하라고 했다. 왜 대자보도 아니고 화장실 쪽지였을까?
  • 2005년 오마이뉴스 기사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청계천’」에서 당시의 내 모습을 찾았다. 지금까지도 전경과의 직접적인 대치나 기물파괴를 선뜻 하지 않는 사람인 나는, 당시에도 스프레이로 길에 글씨를 쓰는 일은 마다하고 피켓을 들고 달리기만 했다.
  • 4월 20일에 집회 대신 택했던 강의에서는 결국 C라는 성적을 받았다. 다음 학기에 들은 다른 필수 과목은 조모임을 매주 해야 하는 커리큘럼이어서 수강을 ― 그러니까 영문과 진학을 ― 포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