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태죄’를 ‘현행과 같음’으로 계속 유지하겠다는 것은 임신중지를 정당한 의료서비스로서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임신중지를 결정한 사람과 임신중지를 돕는 모든 사람들을 당장에 현행법을 피할 수는 있을지라도 계속해서 잠재적 범죄자로 만들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것이다.
최예훈, 「’낙태죄’ 개정안 ‘현행과 같음’에 대한 단상」
0.
“형법(1995. 12. 29. 법률 제5057호로 개정된 것) 제269조 제1항, 제270조 제1항 중 ‘의사’에 관한 부분은 모두 헌법에 합치되지 아니한다.” 2019년 4월 11일 헌법재판소가 2017헌바127 형법 제260조 제1항 등 위헌소원 사건에 내린 주문이다. 그리고 며칠 전 정부는 이 둘 모두를 그대로 유지하는 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임신 14주 이내에 의사에 의하여 의학적으로 인정된 방법으로 이루어진 때에는 처벌하지 아니한다”, “임신 24주 이내에 의사에 의하여 의학적으로 인정된 방법으로 이루어지고 [… 강간 등으로 인한 임신, 혈족 또는 인척 간의 임신, 임신 당사자의 건강을 심각하게 해치고 있거나 그럴 가능성이 있는 임신, 사회경제적 사유로 임신 당사자를 심각한 곤경에 처하게 하고 있거나 그럴 가능성이 있는 임신의 경우 중] 하나에 해당하는 때에는 처벌하지 아니한다”는 조항을 (대개는 현행모자보건법 14조의 위법성 조각사유에서 옮겨 와) 추가했을 뿐이다. 이 개정안에 따르면 ‘의사에 의하지 않고’ “부녀가 약물 기타 방법으로 낙태한 때에는” 여전히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는 처벌 조항이 효력을 갖는다.
1.
법의 역할이 원칙을 선언하는 것이라면―형법은 죄로 규정되어야 마땅한 행위들과 그에 합당한 처벌 범위를 지정하고 검찰과 법원은 이 원칙 내에서 개별 사건에 대한 세부적인 판단을 내린다―이 개정안은 아무리 많은 이들이 ‘낙태’를 행한다 해도, 그들에 대한 처벌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거나 무의미하다 해도, 그것은 죄로 천명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고수하기 위해 이런 형태를 띤 것이라 해도 좋을 테다. 개정안이 신설 조항에서는 “임신한 여성”이라는 표현을 쓰면서도 기존 조항은 “부녀”조차 고치지 않고 두는 것은 다분히 상징적이다.
원칙을 정하는 것은 법이 포기할 수 없는 역할이므로 어떤 이들은 이것이 현실적이고 합리적이면서도 옳은 결정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내게 이 개정안은 원칙의 파기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형법 제269조 1항이 헌법에 위배된다는 헌재의 판결을 무시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최예훈의 지적대로, 여기서 “‘낙태’는 ‘죄’이면서 동시에 ‘의사에 의하여’” 행해져야 한다는 점에서 “의사에게도 모순적”이다. 임신중지는 죄이지만 당사자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시혜적인 관점에서의 불벌이라면 당사자 스스로 해결하거나 하다못해 국가가 개입할 일이지 별개의 사인인 의사에게 죄를 행할 역할을 부과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는 그저 저 범죄행위에 가담한 이가 의사라면 벌을 면해 준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는 없다. 정부는 “약사법 개정을 통해 형법과 모자보건법에서 허용하는 의약품에 대해 낙태 암시 문구나 도안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하고, […] 이에 따라 자연유산유도 의약품 허가를 신청받고 필요한 경우 허가 신청을 위한 사전상담도 추진”한다. 벌받지 않는 범죄를 용이하게 하는 조치들이다. 또한 이 영역에서 의사의 역할을 크게 잡는 논리는 단 하나, 임신한 여성의 건강과 안전이다. 당연하게도 이는 중요한 문제이며 보건의료 서비스로서 임신중지를 의료 전문가에게 맡기는 것은 아마 필요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의료 전문가가 아닌 이가 함부로 타인의 몸에 해를 가하는 경우가 아닌, 스스로의 건강에 해를 가하는 일을 막기 위해 당사자를 처벌한다는 것 역시 수없이 지적되어 온 대로 어불성설이다.
이런 복잡한 사정들 속에서, 나는 아무런 원칙도 읽어낼 수 없다. 직접 하면 처벌 받지만 타인에게 의뢰하면 벌을 면하는 죄, 게다가 범행을 국가가 지원하는 죄의 영역을 둘 수 있는 논리적 원칙을 상상할 능력이 내게는 없다.
2.
개정안에 따르면, 임신 14주는 넘겼고 24주에는 이르지 않은 시점에서 사회경제적 사유로 임신중지를 처벌받지 않으려면 “임신한 여성이 모자보건법에서 정한 상담을 받고, 그 때부터 24시간이 경과하여야 한다.” 정당한 사유의 기준을 설정하고 증명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모자보건법에서 정한 상담 절차에 따라 임신의 지속, 출산 및 양육에 과한 충분한 정보를 제공받고 숙고 끝에 임신을 지속할 수 없다는 자기 결정에 이른 경우에는 [… 상당한] 사유가 있는 것으로 추정한다.” 임신중지를 죄로 규정하면서도 상담소 방문과 24시간의 ‘숙려’, 그리고 자기진술만으로―실질적인 ‘심사’나 ‘평가’ 없이―벌을 면제한다니 그야말로 관대한 예외라고밖에는 할 수 없다. 이 역시 원칙과는 거리가 먼 일이다. 하지만 원칙이 무색해질 만큼 관대하다는 뜻이 아니다. 이것은 법이 원칙을 선언할 자격이 있다는 원칙 자체를 약화시킨다. 당사자의 판단에 대한 의심―그것도 여성만을 선택해 가해지는 의심―은 근본적인 원칙을 부정한다. 이 역시 수없이 지적되어 온 문제다.
대의민주제든 직접민주제든 내가 아는 한 보통선거의 원칙은 핵심요소다. 법을 만드는 권위와 법을 집행하는 권위가 모두 그로부터 나온다. 여기에는 전제가 있다. 모든 주권자는 스스로 판단할 능력이 있다는 것, 혹은 주권자의 무능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 공적인 판단에서건 사적인 판단에서건 개개인이 최선의 판단을 하고 있다는 것은 민주주의라는 개념 자체를 부정하지 않고서는 부정할 수 없는 단순한 전제다. 민주주의적 정치의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을 형식적인 전제일 뿐 아니라 평등한 토론과 협의를 위한 상호존중을 가능케 할 실용적인 전제이기도 하다. 국가가 사인들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사인끼리에서조차도, 최선의 판단을 요구하는 것은―지금의 판단을 부정하는 것은―그러한 전제와 원칙을 무너뜨리는 일이다.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최선의 판단이 용이할 상황을 만드는 일이며 또한 그것이 유일하게 허용되는 일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저 대목에서 해야 하거나 할 수 있는 일은 국가가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지 제공받을 의무를 부과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감히 ‘충분한’이라는 말을 쓰려면, 적어도 이 맥락에서 직접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모든 것을 언급하는 성의 정도는 있어야 할 것이다. 임신을 중지하겠다는 판단을 불신할 테라면 “임신의 지속, 출산 및 양육에 관한 충분한 정보”를 토대로 내리는 “임신을 지속할 수 없다는 자기 결정”을 인정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임신의 중지에 대한 정보만은 충분히 갖고 있으리라는 전제가 있는 것이다. 효과는 두 가지다. “임신의 지속, 출산 및 양육”이 얼마나 ‘좋은’ 일인지를 국가의 언어로 떠벌일 기회가 확보된다. 임신중지에 따른 부작용이든 후회든에 대한 책임은 온전히 “자기 결정”에 돌려진다.
당연하게도 임신중지의 악영향에 대한 정보를 제공받을 의무를 추가하는 것이 아니라 제공받을 의무 자체를, 그것도 특정한 정보만을 제공받을 의무를 삭제하는 것이 원칙에 맞는 일이다. 국가가 정보를 제공할 의무는 여전히 남는다. 이 정보를 통해 임신의 지속과 출산과 양육을 장려하고자 하는 국가의 욕망이 쉽게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최소한 주권자의 판단을 신뢰한다는 원칙을 아는 국가라면, ‘멋모르고 임신을 중지하려 드는 주권자가 모르고 있을 것이 분명한’ 정보를 제공하는 대신 그들이 판단을 돌이킬 만큼 새로운 정보를―새로운 여건들을―만들어 내는 데에 힘을 쏟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이미 있는 정보들이 어째서 일상적으로는(‘받을 의무’를 부과하지 않고서는) 전달되지 않고 있는지를, 혹은 전달된 정보들이 담고 있는 사회의 현상태에서 부족한 부분이 어디이며 그것을 어떻게 개선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데에 말이다.
3.
이렇게 볼 때 개정안에서 감지할 수 있는 것은 원칙 없는 편의주의 뿐이다. 범죄 규정과 낙인을 유지함으로써 지배와 통제의 길을 열어 둔다. 처벌을 줄임으로써 여러 요구들에 부응하는 척 한다. 공로는 정부에, 책임은 개개인에게 돌린다. 개개인이 크고 작은 책임을 질 역량은 최소화한다. 샛길을 돌고 돌아, 범죄 규정과 낙인만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