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 텍스트
대체 텍스트(alternative text)
[웹에서] 텍스트 아닌 콘텐츠를 대신하기 위해 제공되는 등가의 텍스트를 의미한다. […] 사용자가 장애 유무 등에 관계 없이 웹사이트에서 제공하는 모든 콘텐츠를 동등하게 인식할 수 있도록 […] 텍스트 아닌 콘텐츠는 그 의미나 용도를 인식할 수 있도록 대체 텍스트를 제공해야 한다.
빠짐 없이 삽입하지는 않지만, 웹에 이미지나 동영상을 올릴 때면 늘 의식한다. 행사 홍보물 같은 것은 비교적 간단하다. 주요 이미지를 설명하고 문자―행사의 제목이나 일시 같은―는 그대로 옮겨 쓴다. 그 정도는 아니라도 정보를 전달하기 위한 이미지의 대체 텍스트 작성은 크게 어렵지 않다. 무엇을 찍은 사진인지, 사진 속 인물은 누구인지 하는 것들을 적는 것으로 일단락된다. 문제는 ‘느낌’이다. 어떤 풍경에서 따스함을 느껴서 찍은 사진이라면, 따스한 느낌의 풍경이라고 적어도 어느 계절 몇 시 경에 어디에서 찍은 하늘에 구름이 몇 개가 떠 있는지를 적어도 마뜩지 않다. 사진 속의 현실과 볼 때의 느낌 혹은 정보에 대한 판단이 일치하지 않는다면 더 어려워진다. 새벽녘에 찍은 하늘이지만 설명 없이 본다면 대다수가 석양이라고 생각할 사진에는 어떤 설명을 붙여야 할까. 자세히 보면 까만 고양이지만 얼핏 보면 그저 검은 덩어리만 보이는 사진이라면. 이런 식의 설명까지를 모두 적는 일이야 어렵지 않지만 착각, 다시 보기, 깨닫기 같은 일련의 과정들은 여전히 재연되지 않는다. 고민하다가 종종, 포기하고 만다.
많은 경우 대체 텍스트는 애초에 제공되지 않으며 제공되는 경우에도 또 많이는 숨겨져 있고 그렇지 않다 해도 보통은 (내가 이미 사진이나 그림으로 얻은 정보의 열화된 버전일 뿐이므로) 자세히 보지 않았다. 남들이 어떻게 쓰는지를 의식하기 시작한 것은 겨우 몇 년 전부터다. 한국 영화를 한국어 자막을 띄워두고 보면서였다. (그보다도 몇 년 전부터, 영어 자막이 달린 영화를 보면서도 같은 것을 보았지만 어째선지 깊이 생각하지는 않았다.) 곳곳에서 어긋났다. 아마도 내가 악기 소리와 선율에 둔하기 때문일 것이다. 대사도 효과음도 없이 고요한 가운데 연주곡이 깔리고 자막으로 ‘긴장되는 음악’, ‘장엄한 음악’ 같은 말이 뜬다. 나는 긴장하지도 장엄함을 느끼지도 않았으므로 의아해진다. 긴장감을 자아내는 상황이므로 아무것도 못 느낀 나나 아무것도 못 들은 누군가에게는 어쩌면 큰 문제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상황과 충돌하는 음악이라면, 혹은 그 음악을 넣은 사람과 그 자막을 단 사람과 그 음악을 듣는 사람과 그 자막을 보는 사람이 모두 다른 것을 느끼고 있다면, 조금 복잡해질 것이다.
두 달여 전에는 ‘장애·비장애 문화예술 동행’이라는 슬로건을 건 행사를 방청했다. 입 모양이 보이게 만든 마스크를 쓴 사회자가 수어통역사 옆에 서서 자기소개를 한다. 이름이며 직함 같은 것들 뒤에 자신의 머리길이나 옷차림을 설명한다. 몇 살 정도로 보이는 사람, 이라는 말도 한 것 같다. 생경하다. 시청각 장애인의 접근성을 고려해 준비된 행사에 참석한 것이 처음이 아님에도 낯선 풍경이다. 아마 그 덕에 나는 한참이 지나고도 그의 차림새를 조금은 기억하고 있다. 보통은 옷차림 같은 것은 신경쓰지 않으므로, 그 후에 참석한 행사들에서 사회자나 발표자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던가는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모두가 이렇지는 않다. 단숨에, 순서 없이, 주어지는 수많은 정보를―그가 스스로 언급한 정보들은 물론 말하지 않은 것들, 예컨대 허리가 꼿꼿한지 혹은 굽어 있는지, 옷에는 주름이 얼마나 져 있는지 같은 것들까지를―무의식적으로 분류하고 선별한다. 나에게서는 생략된 것이 누군가에게는 주요하게 남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주요하게 남은 것이 내게서는 생략될 것이다. “등가”는 (적어도 쉽게는) 달성될 수 없다. (“용도”는 차치하고라도) “의미”는 제시된 후에야 확정된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그의 차림새가 아니라 그것에 대해 그가 한 말을, 그가 무언가 말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
포기된 번역
기본적인 룰 중 하나는 장식―의미와는 무관한 것―에는 대체 텍스트를 제공하지 않는 것이다. 앞에서 인용한 지침을 다시 한 번 인용하자면 “단순히 장식이나 시각적인 형태를 위해 사용되는 콘텐츠의 경우, 보조 기술을 통해 해당 설명을 제공받을 때 오히려 혼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으므로 대체 텍스트로 공백 문자를 제공해야 한다.” 보조 기술, 입력된 텍스트를 음성으로 변환해주는 기술을 이용하는 사람―대개 시각 장애인―에게 이것이 혼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는 것, 그러므로 이를 빼는 쪽이 훨씬 효율적이라는 것은 아마도 분명한 사실이다. 책의 매 쪽 아래나 위에 넣어놓은 장식을 전자책 TTS 프로그램이 매번 ‘로코코 풍의 장식적인 선’ 따위로 읽어준다면 얼마나 성가실까. 그러나 어떤 장식들은 느낌과 함께 의미를―혹은 의미에 대한 지침을―담는다는 점을, 어떤 느낌들은 그 자체로 의미가 된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룰은 다소 과하다. 한 쪽을 넘길 때마다 로코코를 운운하면 피곤할 뿐이지만, 첫머리에서 이 책이 로코코 풍으로 꾸며져 있음을 소개한다면, 적어도 어떤 경우에는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 정도조차 아니다. 저 룰 조금 위에는 “특정 감각으로만 제공되는 콘텐츠인 경우 : 플루트 독주나 시각적 예술 작품 등의 경우, 해당 콘텐츠에 대한 간략한 용도를 알려주는 대체 텍스트만으로 충분하다”라고 적혀 있다. (“공백 문자를 제공해야 한다”, “간략한 용도를 알려주는 대체 텍스트만으로 충분하다”는 문장은 접근성 테스트 통과 기준을 서술하는 맥락에서 쓰인 것이다.) “플루트 독주”나 “시각적 예술 작품”은 느낌이 의미가 되는 영역일 것이다. 느낌은, 그리고 그 출처가 되는 세부 사항은 종종 각자에게 서로 다를 것이므로 쉽지 않은 일이지만 “간략한 용도를 알려주는 대체 텍스트만으로 충분하다”는 말은 시험 통과 최저선을 설명하는 말로서는 너무도 단호하다.
하지만 겸양에서 나오는 단호함이라고 해도 좋겠다. 느낌이니 어쩌니 하는 말들은 성공과 실패를 나누는 데에 끌어들이기는 곤란한 말인데다 그럴싸하게 설명하기조차 어렵다. 능력 밖의 것을 깔끔하게 포기하는 겸양, 저 단호함의 이면에는 그것이 있다고 하자. 섣부른 포기, 귀찮은 일에 대한 섣부른 포기만은 아니다. 여기에는 분명 애초부터 불가능성이 놓여 있다. 불가능한 번역을 포기한 것 뿐이라면, 누구도 이렇다 할 성공을 해내지 못할 일이라면, 섣불렀는지 어땠는지 알 길이 없는 셈이다. 다만 무언가가 포기되었다는 사실만이 분명하다. 내가 종종 포기하는 거기서, 또 다른 누군가도 포기했다는 사실만이 말이다.
번역이라는 행위 자체의 불가능성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궁극적인 불가능성을 확인하거나 믿는 데에는 딱히 관심이 없다. 나는 대개 확인되지 않은 가능성만을 믿는다. 그러나 번역의 가능성, 소통의 가능성 같은 것을 믿기 전에 확인해야 하는 것이 하나 있다. 이를테면 소통에의 의지다. 전한 적 없는 것이 전해지기를 바랄 만큼 녹록지는 못하다. 음악이나 시각 예술이 소통에의 의지가 없다고, 무언가를 전하려 하지 않는다고야 할 수 없겠지만 적어도 배타적으로 특정 감각을―그 감각을 가진 사람만을―택했다는 점에서, 어떤 불가능성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시각장애인의 미술, 청각장애인의 음악을 시도하는 이들이 어딘가에서 어떤 성공을 해낸다는 점을 물론 알고는 있다.) 그러므로 이 번역은 번역의 시점에서 포기된 것이 아니다. 애초의 발화 시점에서 번역이, 번역의 가능성 자체가, 적어도 상당 부분, 포기된다. 이런 느낌을 줄 수 있도록 만들어진 선율이라고 혹은 듣는 사람 대부분은 이런 느낌을 받는 선율이라고 말하는 것이 한계로, 분명하게 설정되어 있는, 발화의 시점에.
음악과 미술을 지목했지만, 결과를 두고 말하자면 시각이든 청각이든 하나의 감각만을 택했다고 해서 이것들이 다른 발화들과 특별히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특히 대사가 있는) 영화나 연극 같은 것들은, 혹은 표정과 몸짓과 말씨를 모두 활용하는 어떤 말하기는 복수의 감각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기초적인 번역에 대해 보다 폭넓은 가능성을 갖는 듯하지만, 대개 그 모든 감각을 쓰는 이들의 경험을 전제로 생산되므로, 번역이 딱히 더 용이한 것은 아니다. 글조차도 글자로 읽든 말로 듣든 상관 없는 경험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예컨대 나는 (말보다 글이 익숙한, 어려운 글도 익숙한) 나의 읽기를 기준으로 쓴다. (내용이나 어휘도 종종 그렇지만, 지금은 문장을 구성하는 방식에 대해 한 말이다. 내 경우에 이것은 섣부르고 속편한 포기다.)
번역의 가능성은 그러므로, 적어도 내가 알거나 상상할 수 있는 많은 경우, “등가”를 넘어서는 데에 있다. 발화자가 전하지 않았으면서도 전달된다고 전제한 것들을 짚어냄으로써만 생겨나는 가능성이다. 혹은 발화자가 의식하지 않고 전하는 것들, 수용자가 의식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들을 짚어냄으로써만 생겨난다. 예컨대 영어 문장에 담긴 내용을 한국어로 옮기는 것으로는 완료되지 않는다. 문장에 적혀 있지 않고 것들을, 혹은 적혀 있는 말이 한국어 화자가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일 수 있음을 따로 적지 않고서는 한국어 너머의 영어를 읽을 수 있는 이들에게만 닿을 뿐이다. 본문보다도 길게 수십 개의 각주를 써야 한다는 중압감에 시달린 끝에야 조금이나마 가까워진다.
그러나 그 모든 주석은 나를 거친 것이므로―내가 지어낸 것이므로―어쩌면 온당치 않다.
“안무의 몫”
앞에 쓴 행사를 “창작으로의 연대”라는 프로그램이 있는 날에 참석했다. “(감각의 전환을 통한) 새로운 예술창작 방법론 탐구와 시도”라는 부제 아래 〈도착되려 하는 언어들〉(여기는 당연히, 극장 제작, 구자혜 구성·연출)이라는 연극과 〈무용수-되기〉(김원영×프로젝트 이인 제작, 라시내·최기섭 안무·연출)이라는 무용이 상연되었다. 이 중 〈무용수-되기〉는 김원영과 최기섭의 이인무다. 시작은 이본 라이너Yvonne Rainer의 〈트리오 ATrio A〉(1966, 1978)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본 라이너의 몸짓을 김원영이 재연하고 그것을 최기섭이 재연하는, 〈트리오 A〉를 변형한―혹은 번역한―춤. “원영과 같이 해보면서 하체의 움직임은 휠체어의 움직임으로 대체하고, 휠체어를 기동하느라 추가된 움직임은 최대한 본래 안무에서의 상체 움직임과 매끄럽게 연결시키고, 여의치 않은 동작은 삭제하거나 변형시켰다. 그런 다음에는 원영의 동작에 맞춰서 원래 안무를 다시 변형시켜 기섭의 동작으로 만들었다. 원영이 모든 동작을 날리지 않고 정확하게 수행할 수 있도록 템포를 상당히 늦췄다. 원영의 〈트리오 A〉를 원본으로 삼은 기섭의 〈트리오 A〉도 똑같이 느린 템포로 가게 되었다. 라이너의 움직임을 휠체어에 탄 원영의 움직임으로, 이를 다시 기섭의 움직임으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두 사람의 〈트리오 A〉는 분명 〈트리오 A〉이지만 〈트리오 A〉와는 다른 어떤 춤이 되었다.”
무용은 감상자에게는 시각(과 청각)을, 수행자에게는 원활한 몸짓(과 종종 특정한 형태의 몸)을 요구한다. 그 전통과 지위는 강력하므로 지체장애인이 출 수 있는 춤을 만들지 못하는 안무(가)의 실패가 아니라 안무를 해내지 못하는 지체장애인의 실패가―장애가 없더라도, ‘몸치’의 실패가―전면에 놓인다. “간략한 용도를 알려주는 대체 텍스트만으로 충분하다”는 말은 이런 구도 속에서 정당해진다. 힘을 가진 틀 밖에 놓인 이의 실패는, 틀 안에서는 책임지지 않아도 좋다. 몸을 움직이지 못할 것이므로 그 몸을 위한 안무는 불필요하다. 적어 줘도 모를 것이므로 대체 텍스트는 불필요하다. 성사되지 않을 대화를 위한 번역은 불필요하다. 최기섭과 함께 이 공연의 연출과 안무를 맡은 라시내는 〈트리오 A〉를 〈무용수-되기〉로 변형하고 번역한 질문을 이렇게 요약한다. “가능과 불능의 문제인 한계와 달리, […] 몸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의 문제[…인] 역량의 차원에서 정당한 질문은 ‘원영은 라이너의 〈트리오 A〉를 출 수 있는가’가 아니라 (이렇게 답이 뻔한 것은 애초에 어떤 물음이 아니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원영은 그의 한계에 적합하게 새로이 안무된 〈트리오 A〉를 얼마나 잘 출 수 있는가?”
원영의 몸에 대한 것인 이 질문을 뒤집으면 안무(가)에 대한 질문이 될 것이다. 안무(가)는 과연 그의 몸에 적합한 춤을 고안할 수 있는가? (이것은 우선 능력의 문제나 의지의 문제가 되겠지만 그에 그치지는 않을 것이다. 그가 속한 세계―장애인의 몸에서 불능만을 읽는―가 그에게 무엇을 얼마나 허락하는지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의 책임을 덜기 위해서 이런 말을 덧붙이는 것이 아니라, 그를 비롯해 그 세계를 공유하는 이들이 흔히 갖는 한계를 생각하는 것이다. 능력이나 의지를 발휘해 무언가 해낸다 해도 어떤 면에서는 여전히 그 한계 속에 있을 것이다.) 스스로의 한계 때문이든 부과된 한계 때문이든, 이 공연의 드라마투르기 하은빈의 문장으로 말하자면, “이 몸들 앞에서 안무는 어려움을 겪는다. 계속해서 이 몸들이 계획과 예상으로부터 비껴난다는 점에서, 안무의 노력은 대개 실패로 돌아간다.” 상대를 굴복시키고 통제하지 못하는 안무, 상대에게 아무것도 전하지 못하는 발화 스스로가 실패를 겪는다. 시도되기 전까지는 실패로 명명될 일이 없는 류의 사태다. 실패가 이렇게 뒤집어지면서, 안무에서―번역에서, 대체 텍스트에서―배제되었던 몸들, 실패로서만 독해되어 왔던 몸들이 자리를 바꾸어 새로이 등장한다. “안무의 거듭되는 실패와 몸의 불완전성 속에서, 무용수의 몸은 춤의 근원 없는 근원으로서 비로소 출현[한다. …] 그렇다면 이제 스스로를 끊임없이 수정하고 굴복하는 것은 무용수의 몫이 아니라 안무의 몫이 된다.”
사후적인 개입 이외의 곳에서 번역의 불가능성에―포기의 정당성에―맞설 수 있다면, 이처럼 발화를 구성하는 논리부터를 뒤엎음으로써일 것이다. 좋거나 충분한 대체 텍스트를 쓰기 위해서는, 좋거나 충분한 ‘텍스트 아닌 콘텐츠’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내가 업로드하는 것, 그래서 대체 텍스트를 달지 말지 혹은 어떻게 달지 고민하는 것의 반나마는 내가 찍은 사진이나 내가 그린 그림이나 내가 만든 포스터다. 원본을 충분히 알지 못해서, 원본이 전하고자 하는 바를 충분히 알지 못해서 망설이고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애초에 그 너머를 생각해 본 적이 없기에, 이제 와서 새로이 고민할 열의도 충분치 않기에, 망설이고 포기한다. 이를 테면 ‘나의 몫’을 다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전히 중요한 것은, 내가 만든 것에 달건 남이 만든 것을 옮기며 달건, 주석은 나를 거친 것이라는 사실, 그러니까 원본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나를 거친 주석을 어쩌면 충분히 달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비평 혹은 패싱의 정치학
단숨에 제시되는 이미지와 선형적으로 제시되는 텍스트가 얼마나 가까운 경험을 제시할 수 있을지를 나는 전혀 알지 못한다. (매체의 특수성에 매력을 느끼는 사람조차 아니므로 내게서 이 둘이 그저 멀기만 한 뿐인 데 대해 나는 아무런 정당화도 할 수 없다.) 이미지의 많은 부분을 나는 놓친다. 사람의 차림새도 그렇고 캔버스 한 쪽 구석에 작게 그려진 사물도 그렇다. 문자를 읽을 땐 조금은 덜하지만 여전히 무언가를 뛰어 넘는다. 누군가는 보고 누군가는 읽을 것을 나는, 보고 읽은 후에 잊는 것이 아니라, 못 보고 지나친다. 오디오북을 몇 권인가 들은 적이 있다. 딴짓을 하지 않는 한, 그런 방식으로는 아무것도 놓치지 못한다. 멋대로 넘어가기 쉽지 않으므로 어쩔 수 없이 모든 단어를 듣는다. 잊을 수도 무시할 수도 있지만 듣지 않을 수는 없다. 아무것도 보거나 읽지 않고 듣는 사람들, 혹은 보기보다는 주로 듣는 사람들은 어떨까. 아직 배우지 못했다.
내가 대체 텍스트를 어떤 방식으로 다는지를 통해 많은 것이 드러날 것이다. 이미지 속의 무엇을 골라 명시했는지를 통해서. 어느 선까지는, 많이 달수록 그럴 것이다. 많은 정보를 제공하였으므로 이미지의 많은 것이 드러난다는 말이 아니다. 내가 무엇을 명시할 만한 것으로 생각했는지가, 이 주석이 어떤 나를 거쳐서 나왔는지가 드러난다는 뜻이다. 듣는 사람들이 무엇을 어떻게 듣는지를 모른 채 쓰고 있으므로, 그래서 조악할 것이므로, 더더욱 많은 것이 드러날 것이다. 무엇이 중요한지, 중요한 것을 어떻게 전해야 하는지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는 점이 말이다. 최근에는 비평을 무엇이라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여러 의미에서 딱히 답할 만한 위치에 있지 않으므로 답하지는 않았다. 무얼까, 잠깐 생각만 했다. 비평을 통해 작품이―작품의 의미나 가치 같은 것들이, 비평가가 아닌 이들이 흔히 놓치는 것들이―얼마나 드러날까. 비평을 쓴 이가 투명하게 드러나는 일이 훨씬 많다고 생각했다. 최선의 비평은, 그 작품을 왜 그렇게 보고 듣고 읽고 생각하고 느끼게 되었는지를 잘 밝히는 것, 좋은 자기소개 같은 모습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작품에 대해서 잘 아는 만큼 자신에 대해서도 잘 알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는 패싱passing을 생각했다. 성소수자의 맥락에서 누군가가 사회적으로 어떤 성별로 받아들여지는지를 설명할 때 쓰는 말로서의 패싱은 아마도 그 누군가가 ‘나는 이렇게 패싱된다’고 쓸 때가 가장 적절한 용례일 것이다. 그가 어떤 성별로 받아들여지는지를 충분히 아는 것은 대개는 (순전히, 보통은 오직 그만이 그의 삶을 빠짐없이 관찰한다는 이유로) 그 자신 뿐이니 말이다. 이따금 확장되는 용례는 이런 식이다. ‘(그의 자기정체성이나 법적 성별은 모르겠지만 혹은 그에 대해서는 판단하지 않겠지만) 그는 이러이러하게 패싱되는 사람이다. 혹은 그의 패싱성별은 이것이다.’ 타인의 성별을 함부로 재단하지 않으면서도 무언가를 설명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지만 이것은 대개 거짓말이다. 이렇게 발화된 그의 패싱과 실제 그가 경험하는 것이 같다고 해도 그렇다. 엄격히 말하자면 이렇게 고쳐야 할 것이다. 나는 그를 이런 성별로 본다고, 의식(적으로 판단을 보류)하지 않는 순간에라면 그를 이런 성별로 분류했을 것이라고.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온전히 드러나는 것은 실은 말하는 이의―누군가에게 주석을 다는 이의―틀이다.
뜬금 없이 저런 말을 하는 사람의 한계를 지적하고 싶어진 것은 아니다. 세계가 허락하는 바 속에서, 나 역시 종종 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의 발화―여기서는 말하자면 젠더 표현―가 어떤 번역의 가능성을 차단하는 종류의 것이었느냐고 묻는다면, 그렇지 않다고 답할 것이다. 성별화된 양식들에 모자람 없이 들어맞는 경우라 해도, 그가 의식적으로 그렇게 하고 있는 경우라 해도, 언제나 무언가가 비져나오기 때문이다. 그것이 어떤 발화로서 수행된 이상 그가 그 성별이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그렇게 한 것일 가능성은 배제되지 않는다. 그 가능성이 배제되지 않는다는 것을 내가 아는 한, 그의 패싱성별을 지목하는 나의 행위는 그를 위한 것도 나를 위한 것도 아니다. 그저 나의 발화를 세계의 틀 속에 남겨두기 위한 것일 뿐이다.
결국 애초의 발화에 내포된 번역 불가능성을 운운하는 것은 끝내 정당하지 않게 된다. “혼란”을 주지 않으면서도 “등가”의 무언가를 제공하기 위한 번역은 언제 포기하든 섣부르다. 나는 다만 나를 드러내지 않고 있을 뿐이다. 그래도 되기 때문이다. 아마도 ‘텍스트 아닌 콘텐츠’와 ‘안무’와 ‘성별’이 모두 다르겠지만, ‘대체 텍스트’와 ‘번역’과 ‘비평’과 ‘패싱’이 모두 다르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한 곳에서 만난다. 나에게서. 무언가를 전하고 무언가를 겪고 무언가를 해석하는 나에게서. 거기서 나는 나와 싸우는 중이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싸움을 피하는 중이다.
추기.
이 글을 쓰던 중에 잠시 워드프로세서를 닫고 장애여성공감 극단 춤추는 허리의 〈춤추는 혼잣말〉을 보았다. 온라인 실시간 방송 형식이었고 채팅창이 있었다. 장애여성공감은 채팅창에 이런 공지를 올렸다.
춤추는허리의 첫번째 웹독백극 「춤추는 혼잣말」은 수어와 자막을 제공합니다. 그러나 화면해설과 쉬운 말 해설 등 장애인접근권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관람 후 평가와 의견 주시면 반영하여 접근권 확대를 위해 계속 노력하겠습니다.
[자막 정보] 1. 배우들의 나레이션과 공연 독백은 기울임체로 표시함2. 음악은 음표로 가사는 음표 옆에 표시함
추기 2.
“그 의미나 용도를 인식할 수 있”게 하는 것을 확연히 넘어서는 사례로 내가 들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케이블 채널 tvN에서 유튜브를 통해 제공하는 ‘몰티’의 자막이다. 직접적으로 청각장애인 접근성을 고려해 제작한 것은 아니다. “딴짓하고 싶을 때 소리없이 몰래보는 티비”라는 슬로건대로, 아마도 기본적으로는 기존의 청인 관객들이 소리를 끄고도 감상할 수 있게 만든 것이다. 그럼에도 일반적인―대사 내용만, 기껏해야 발화자의 이름 정도까지를 담는―자막이 아니라, 나아가 넷플릭스 등이 제공하는 접근성을 고려한―효과음 묘사와 배경음악 정보를 더한―자막도 아니라, 글자에 운동을 더한 자막을 제공한다. 소리가 크면 글자도 크고, 말이 빠르면 글자도 빠르게 흘러간다. 인물이 토하는 소리를 내는 장면에서는 구토를 묘사하는 의성어가 인물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고 방귀 소리를 적은 글자는 엉덩이에서 뿜어져 나온다. 카메라가 웃는 관객들을 잡을 땐 ㅋ자가 화면 전부를 채우고 웃음이 격해지면 글자가 화면 가득 흔들린다. 자막의 위치나 흐르는 속도 등을 통해 (적어도 원래의 포맷에서 청인으로 상정되는) 관객들이 귀로 얻는 정보와 그로써 형성되는 감정의 동세動勢를 시각적으로 구현하는 것이다. 귀로 들은 적이 있는 내가 이 자막을 통해 그리는 심상을 선천적인 청각장애인이 어떤 경로로 그릴 수 있을지―직관적으로 가능할지, 어느 정도의 학습을 통해 가능할지, 혹은 불가능할지―는 나로서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후천적으로 청각장애인이 된 경우라면 이런 식의 대체 텍스트는 상당히 유용하리라고 생각했다. 거기까지만, 그런 짐작까지만 했는데, 위의 링크를 다느라 들어갔던 영상에서 이런 댓글을 발견했다.
제 동생 청각장애인인데 몰티 너무 재밌게 보는 거 보고 뭉클했네요 감사합니다
+동생한테 댓글 보여줬더니 자기 친구들(똑같은 청각 장애인 분들)도 좋아한다고 재밌다고 했다네요 작은 바램이지만 앞으로도 이런 청각 장애인분들을 위한 프로그램이 많이 늘어났으면 좋겠어요 언니로서 동생 얼굴에 웃음꽃 피는 게 왜 그렇게 예쁜지 괜히 고마워서 댓글 남겼는데 많은 분들이 좋아요 눌러주셔서 감사하네요 🙂
여기 언급된 청각장애인들이 어떤 경우인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누군가에게는 의미가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남은 궁금증은, 한국어 영화에 평범한 한국어 자막을 다는 일도 거부하는 이 사회가, 코미디가 아닌 영역에서 이런 자막을 언제쯤 어떻게 얼마나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하는 것. 이런 자막을 다는 데에, 기획·연출과 영상 편집 모두에 있어, 상당한 ‘추가 노동’이 필요하다는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진지함이니 영상미니 하는 통상의 가치들 사이를 이것이 얼마나 비집고 들어갈 수 있을지가 궁금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