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V 낙인이 망가뜨린 관계가 얼마나 많을까

원문: “How Many Relationships Has HIV Stigma Destroyed?”(Neal Broverman, PLUS, 20.04.27.)

십여 년 전, 나는 남자친구―여기선 데니스라 부르기로 하자―에게 푹 빠져 있었다. 잘생기고 재밌고 정열적인 사람이었다. 하지만 슬프게도, 장벽이 많았다. 그는 직업이 불안정했고 중독 치료를 받고 있었으며 나는 남자친구가 절실했다. 우리를 갈라놓은 것이 또 하나 있었다. 그는 HIV 양성이었다.

HIV 음성이었던 나는 바이러스에 집착해 줄곧 어떤 성적 행위가 위험하고 어떤 것이 그렇지 않은지에 관한 불안을 표했다. 그가 공포를 덜어주길 바라며, 걱정을 속에 담아두지 않고 종종 데니스에게 쏟아부었다. 나의 HIV 불안증이 데니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그가 더럽고 바람직하지 않다(undesirable)는 느낌을 받게 만든다는 것을―미처 알지 못했다. 우리의 관계를 파국으로 몰아 넣은 것은 그의 HIV가 아니라 나의 무지였다.
얼마 전 캐나다 뮤지션 디즈(Dizz)를 인터뷰하면서 문득 데니스가 생각났다. 디즈는 지난 9월에 HIV 진단을 받았다. 이 소식을 전하자 그의 파트너는 디즈를 안아주며 HIV가 자신들의 관계를 흔드는 일은 없을 거라 약속했다. 디즈의 파트너가 어떻게 그렇게 훌륭하게 반응했는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2010년 이후의 변화와 닿아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검출되지 않으면 전파되지 않는다'(undetectable equals untransmittable), 그러니까 U=U 개념 말이다.

미검출=전파불가[1][역주] 한국에서 U=U 슬로건은 “미검출은 전파불가” 혹은 “미검출은 감염불가” 등으로 번역된다. 자세한 내용은 이 게시물 등을 참고.는 바이러스가 검출되지 않는 HIV 감염인(people with HIV)는 다른 사람에게 바이러스를 전파할 수 없다는 뜻으로,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가 지지하는 과학적으로 증명된 사항(consensus)이다. 단정하고 깔끔했던 데니스는 HIV 약도 꼼꼼히 챙겼다. U=U를 알았더라면 나는 걱정할 일이 없었을 것이다. 낙인이 아니라 앎을 택할 수 있는 길이 있었더라면 우리의 삶이 달라졌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떨치기 힘들다.

지금 혈청학적으로 불일치하는(serodiscordant) 관계를[2][역주] sero-는 혈청을 뜻하는 접두사로 흔히 혈액 속의 HIV 등 바이러스를 가리키는 데에 쓰인다. 혈청학적 불일치, 혹은 혈청불일치는 … (계속) 헤쳐가고 있는 사람들, 혹은 온라인에서 연인을 찾는 이들(여기에서 훌륭한 디지털 데이트 팁을 참고하라)은 아마도 그때의 나보다는 훨씬 정보를 잘 갖추고(informed) 출발할 것이다. 여전히 U=U에 관한 논의가 너무 적기는 하지만, 분명 달라지고 있다. 얼마 전 성인영화 배우 케이든 그레이(Kayden Gray)는 신작 《검출 안 되면 전파 안 되는 섹스(Undetectable Equals Fucking Untransmittable)》를 집필하고 출연도 했다. 물론 하드코어 섹스가 나오는 영화지만 쾌락의 신음들 사이에 U=U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루폴의 드래그 레이스(RuPaul’s Drag Race)》로 알려진 비앙카 델 리오(Bianca Del Rio)가 카메오로 출연하기도 하는 《UEFU》는 HIV를 겁낼 이유가 없음을 모두에게 알릴 훌륭한 터다.

우리가 이토록 멀리까지 나아 왔음이 믿기지 않을 정도다. 최초의 “게이 암(gay cancer)” 기사들이 주류 언론에 실리고 40년이 지나, 정치부 편집차장 트루디 링(Trudy Ring)은 당시에 활동했던 몇몇 언론인, 활동가, 의사들에게 거의 보도가 되지 않았음을, 또한 동성애혐오가 언론의 반응에 미친 영향을 고백했다. 언론인 사라 슐먼(Sarah Schulman)은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방대한 저서 『기록이 보여주게 하라: 1987년에서 1993년까지, 액트업 뉴욕의 정치사(Let the Record Show: A Political History of ACT UP New York, 1987-1993)』에 대유행 이후의 연년를 기록했다. 프라이드 미디어(본지의 모기업) 팟캐스트 국장 제프리 매스터스(Jeffrey Masters)가 최근 슐먼과의 대담에서 이 책과 여성이 HIV 논의에서 종종 지워지는 이유를 논했다.

또한 본지 객원편집자 존 케이시(John Casey)는 ‘매일 복용’(Daily Dose) 칼럼에 놀라운 인스타그램 에이즈 추모관―에이즈 합병증에 스러진 이들에 관한 사진과 이야기를 모은 아름다운 보고(寶庫)―에 대해 썼다. 이 온라인 추모관은 케이시가 HIV로 힘들었던 스스로의 관계와 자신이 1980, 90년대에 그 병에 걸린 모든 이들을―그저 건강 상의 두려움 뿐만 아니라 자기혐오와 내면화된 동성애혐오로 인해서―어떻게 피했는지를 돌아보게 만들었다.

과거와의 화해는 어른이 되는 과정에 있어 가장 어려운 일 중 하나이지만 반드시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데니스에게 그렇게 대했던 것을 전에도 사과한 적이 있지만 아무리 더 해도 부족할 것이다. 데니스, 사랑해. 그리고 미안해.

1 [역주] 한국에서 U=U 슬로건은 “미검출은 전파불가” 혹은 “미검출은 감염불가” 등으로 번역된다. 자세한 내용은 이 게시물 등을 참고.
2 [역주] sero-는 혈청을 뜻하는 접두사로 흔히 혈액 속의 HIV 등 바이러스를 가리키는 데에 쓰인다. 혈청학적 불일치, 혹은 혈청불일치는 HIV감염인-비감염인 커플의 경우와 같이 어떤 (성적) 관계가 HIV 양성/음성 여부가 서로 다른 이들로 구성됨을 뜻한다.

성적 건강 교육가들이 온라인에서 활동하는 이유(2020)

성적 건강 교육가들이 온라인에서 활동하는 이유

교육은 급진적일 수 있다.

소날리 라샤트워(Sonalee Rashatwar)는 교육이 급진적일 수 있다고 믿는다.

“누군가에게 그의 몸에 대한 정보를 준다는 건 그의 권리에 대해 알린다는 거죠, 이건 정치적인 거예요.”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맞추려고 애쓸 필요 없다고 말해주는 건 구조를 흔들거든요.”

라샤트워는 임상사회복지사, 섹스 치료사이자 풀뿌리 조직가이다.

인스타그램 “뚱뚱한 섹스 치료사”(TheFatSexTherapist) 계정으로 알려져 있는 그녀는 또한 연설가, 성교육가로도 일하고 있다.

그녀는 퀴어이고 남아시아계이자 뚱뚱한 사람으로서의 자신의 렌즈를 통해 이런 일들을 한다. 그 상당 부분은 자신의 개인사―다이어트, 성적 트라우마, 양성애혐오, 비만혐오(fatphobia), 외국인혐오에 관한 경험들―을 나누는 것이다.

“일반화, 보편화하는 게 아니에요. 사람들이 저의 이야기에 자신들의 실제 경험을 겹쳐볼 수 있게 하죠.”

학교에서 흔히 받는 식의 성교육이 아니다. 라샤트워가 자라면서 받은 것과 같은 것도 아니다.

[관련 기사: 성적 공격 혹은 학대 이후, 사랑을 찾는 법]

그녀가 만난 선생님들은 섹스를 하는 이들 대부분은 시스젠더, 이성애자, 비장애인, 마른 사람, 백인이라는 전제를 깔고 가르쳤다. 섹슈얼리티, 성정체성, 여러 가지 체형에 관한 정보는 없었다.

미국의 주들(states) 중 성교육 프로그램에 인종이나 젠더에 관한 편견이 없어야 한다는 요건을 둔 곳은 단 하나밖에 없으며 성적 지향에 관한 정보를 포함하도록 의무화한 주도 8개 주밖에 없다.

“섹스는 대개 저처럼 생긴 사람에게는 쾌락을 주지(happen pleasurably) 않는 걸로 생각되어 왔죠.”

하지만 성교육 각본을 뒤집은, 라샤트워 같은 이들의 새로운 성교육 수업이―인터넷에, 그리고 그 너머에―있다.

그들은 이를 정의 운동(justice movement)으로, 액티비즘으로, 개인적인 것으로 교육한다. 또한 이들은 이전에는 이 대화에서 배제되었던 집단들, 정체성들을 포용한다.

섹슈얼리티를 평범한 것으로 만들기(Normalizing Sexuality)

많은 청소년(adolescents)이 섹슈얼리티에 관한 정보를 인터넷에서 찾는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토론토에서 활동하는 성교육가 에바 블룸(Eva Bloom)은 따뜻하고 가벼우며 비난하지 않는 어조로 잘 알려져 있는 “섹스플레인(Sexplanations)” 같은 유튜브 채널들을 보며 자랐다.

그녀는 늘 인터넷을 통해 틈을 메웠다.

성교육가가 된―마침내 유튜브 채널 “내 몸은 뭐하고 있지?(What’s My Body Doing?)”를 연―그녀가 그런 어조를 따르기로 한 것은 바로 그래서다.

한편 블룸은 얼마 전 7월에 섹스팅(sexting)에 주목한 석사 학위 논문을 낸 연구자이기도 하다. 그녀는 흔치 않은, 연구에 기반한 접근법을 활용해 영상―자신과 마찬가지로 퀴어인 청소년들에 초점을 맞춘 것이 많다―을 만든다.

교실에서는 무시되는 것, 바로 쾌락(pleasure)에 대해서도 말한다.

“섹스토이에 대한 이야기도, 변태적인 것(kink)에 대한 이야기도 해요. 흥미롭게, 신나게 접근하고 그 모든 것을 평범한 것으로 만들려고 하죠.”

블룸은 네이딘 손힐(Nadine Thornhill)과 함께 어린이(kids)를 위한 유튜브 시리즈 “성교육 학교(Sex-ed School)”도 만들고 있다. 주제는 동의(consent), 성정체성, 성적 지향, 자위 등이다.

“‘논바이너리인 우리 아이랑 같이 볼 수 있어서 너무 좋아요’라는 댓글 하나가 마음에 남아요” 하고 말하는 블룸의 목표는 드라마틱한 게 아니라 [섹슈얼리티를] 평범한 것으로 만드는 영상을 제작하는 것이다. 영화 《퀸카로 살아남는 법》에 나오는 성교육의 정 반대를 생각하면 된다.

손힐과 블룸은 많은 어린이들이 이미 섹스와 섹슈얼리티에 대해 알고 있다는 점도 고려한다. 그렇기에 어린이들이 프로그램의 중심이 되며, 그들에게 말하는 것보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더 중요하다.

정의로서의 접근성(Access as justice)

미국 청소년(young people) 일부에게는 인터넷이 성적 건강에 대해 알 수 있는 유일한 창구다. 다수의 십대가 성교육을 전혀 받지 못하고 있다.

단 24개 주만이 성교육을 의무로 두고 있으며 “사실에 있어서든 기술에 있어서든 의학적으로 정확(medically, factually or technically accurate)”해야 한다는 의무가 있는 곳은 20개 주밖에 안 된다.

헤일린 빌레이(Haylin Belay)는 성교육이라곤 금욕 교육밖에 없는 텍사스에서 자랐다. 그래서 그녀의 경력은 십대에, 학생들이 운영하는 LGBTQ+ 청소년과 이성애자 앨라이(straight allies)를 위한 조직 GSA의 청소년 인턴, 동료 교육가로 시작되었다.

10년이 흐른 지금도 그녀는―주로 성교육을 전혀 받아 본 적이 없고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탐구하며 그 빈자리를 느끼는 성인들에게―성교육을 하고 있다.

“섹스가 처음인 건 아니지만 배울 기회는 전혀 없었던 거죠, ‘당신의 몸은 이런 식으로 쾌락을 경험해요, 섹스 경험이 불편하다면 이런 걸 배워볼 수 있어요’ 같은 것 말이에요”라고 말하는 빌레이는 현재 뉴욕에서 활동하고 있다.

“…자신의 몸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눈이 번쩍, 하는 게 보여요.”

그녀는 성교육을 할 때 “모든 사람은 통합적인(integrated) 성생활을 누리고 건강하게 쾌락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는 선언문을 활용한다.

“이러한 정보에의 접근성은 일종의 정의예요, 권리죠. 이건 물론 제가 고등학생 때 퀴어 단체에서 일하며 배운 거예요.”

교실에서 청소년들에게 성적으로 책임 있는 어른이 되는 법에 대해 이야기하든 섹스숍에서 성인들에게 소통에 관한 워크숍을 하든 해방운동(liberation)이라고 그녀는 말한다. 1990년대 재생산 정의 운동(reproductive justice movement)과 함께 시작된 활동이다.

그렇기에, 스스로 활동가라고 칭하지는 않지만, 그녀가 하는 일은 액티비즘과 함께 간다. 정보가 힘이다.

생존자를 위한 공간(Space for survivors)

성교육가이자 트라우마 전문가인 지매네키아 이본(Jimanekia Eborn)은 “예스나 노를 말하는 법을 교실에 들이고 싶다”고 말한다.

“…저는 몰랐거든요. 동의와, 그리고 경계(boundaries)를 배우는 것과 통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트라우마 퀸(Trauma Queen)”이라고도 불리는 이본은 처음에는 청소년(young adults) 정신건강 시설에서 위기상담가로 일했다. 성폭력(sexual assault) 경험이 반복해서 화제가 되었다.

성폭력 생존자인 이본은 다른 생존자들, 특히 주변화된 정체성을 갖고 있는 이들에게 맞춘 성교육의 필요성을 느꼈다.

그런 공간은 그녀가 직접 만들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의 성교육은 생존자에게 맞춘 것이 아니다.

“쾌락의 측면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많죠, 트라우마 때문에 그런 측면엔 가지 못하는 사람들을 잊고서요.”

그녀는 정서를 중심으로(emotionally-focused) 접근하며 트라우마로부터의 회복을 여행으로 여긴다. 흑인, 퀴어, 폴리아모리 펨으로서 이본은 자신과 같은 이들이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쉽지 않은 일이다. 이본은 스스로를 드러내고 자신의 이야기를 나누며 교육을 한다. 성폭력을 당했지만 이를 표현할 언어가 없는 이들이 많다고 생각한다.

“이 일을 통해 치유를 하는 거예요, 늘 스스로에 대해 새로운 발견을 하죠”라는 그녀.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을 만나는 건 좋은 일이잖아요.”

오늘 꾼 꿈

온몸이 마비되는 꿈은 꽤 자주 꾸는 편이지만 대개는 일시적 마비임을, 애초에 꿈임을 알고 있다. 물론 꿈이라도 괴롭지만―대부분 움직임이 마비된 상태에서 통증을 느끼거나 누군가가 집에 들어오거나 하는 식의 상황이다―깨어나면 끝날 일이므로 어려울 것은 없다. 종종 오래 걸리거나 몇 겹의 꿈을 헤쳐 나와야 하지만, 아무튼 어떻게든 잠을 깨기만 하면 되고 깨려는 시도만 하면 된다.

꿈인 걸 모르는 상태에서, 게다가 장기적으로 마비를 겪을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에 놓인 것은 아마 처음이다. 꿈에서 장애인이 되었던 셈이다. 그냥 (disorder든 disability든) 장애를 겪은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무능화 당하는disabled 사람이 되었다. 오늘 오후의 일이었다. 오랜만에 책상에 엎드려 20분, 길면 30분 쯤 되는 시간을 자다가 그랬다. 오랜만에 불편한 자세로 자서 그랬는지, 최근에 줄곧 낑낑대며 장애학 책을―장애학이라서가 아니라 책이라서―꾸역꾸역 읽다 자서 그랬는지 모를 일이다.

첫 장면에서는 꿈인 걸 알고 있었다. 척추와 경추가 둥글게 말린 채로 강직됐다. 입도 움직이지 않았다. 걸을 수도 없었다. 구급대원이었을까, 누군가 다가와 움직이지 못하는 나를 날랐다. 꿈인 걸 알았으므로 깨려는 시도를 할 순서였지만 곧 경황을 잃었다. 꿈이라는 사실도 잊었다. 다음 장면의 배경은 장애인 시설이었다. 아마도 그랬던 것 같다. 여전히 내 고개는 아래를 향한 채 굳어 있었으므로 내 무릎밖에는 보지 못했고, 입 역시 굳어 있으므로 묻지도 못했다.

그렇다면 병원이었을 수도 있겠다. 시설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렇다 할 근거가 기억나지는 않는다. 아까와는 다른 사람들이 달라붙어 내게 무언가를 했다. 옷을 갈아입히거나 소변줄을 채우거나 하는 일들이었던 것 같다. 우악스러웠다. 등과 목은 뻣뻣한 느낌이 선명했는데 하반신에는 감각이 없었을까. 소변을 본 모양이다. 그들은 여전히 우악스러웠고 나는 여전히 단단히 굳어 있었다. 그들 중 누군가가 소변이 담긴 주머니인지 컵인지를 들다가 내게 쏟았다.

그가 숙인 내 고개 아래로 얼굴을 비집어 넣었으므로, 그런 그의 얼굴이 섬뜩한 희열에 찬 표정을 하고 있었으므로, 들다가 쏟은 것이 아님을 알고 말았다. 다른 이들은 몇이나 있는지, 그들은 과연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는, 문제의 그는 여전히 내 옆에 있는지,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무어라 외쳐 보았지만 그들에게 나는 그저 알 수 없는 괴성을 지르고 이유도 없이 몸을 떠는 사람일 뿐이었다.

뒤로는 꿈답게 흘렀다. 날다시피 벌떡 일어나 그를 지목해 모든 것을 말했다. 하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탈출밖에는 수가 없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를 문으로 무작정 들어가 만난 계단을 전혀 밟지 않고 난간에서 난간으로, 층층이 뛰어 내렸다. 그러다가 깼다. 끝내 꿈인 건 깨닫지 못했다. 잠에서 깨면 흉내도 못 낼 몸짓으로 도망을 치면서도, 나는 여전히 몸이 굳은 사람이었다.

코로나 검사를 받았다

2021년을 자가 격리로 시작했다. 2021년 1월 1일 18시 03분, 문자 한 통이 왔다. “〈관악구 보건소에서 알려드립니다〉 / 12월 24일 ~ 12월 30일 ○○○○○ 본점(△△로 ×××)에 방문하신 분께서는 증상 유무와 관계없이 ★가까운 보건소★에서 코로나 검사를 받으시길 바랍니다.” 미리보기 창에 뜬 이만큼을 읽고 카드 결제 내역을 확인했다. 며칠 전에 어디에선가 낙지덮밥을 먹었기 때문이다. 내가 간 그곳이었다. 발신 번호로 전화를 걸어 선별진료소 운영 시간을 확인했다. 누군가가 구청 당직실이라며 전화를 받았다. 내일 아홉 시에 오면 된다고 했다. 그리고는 문자 메시지를 마저 읽었다. “검사 전까지는 외출, 타인 접촉을 피해주시기 바라며 검사 후에도 결과가 나올때까지 외출을 자제하고 자택에서 대기하여 주시기 바립니다. // 이 문자는 방명록을 기준으로 발송되오니, 동행인에게도 알려 검사 받으시길 바랍니다.”

방명록에 “외 1인”과 같은 식으로들 적는 것을 보며 그날 누구와 식사했는지 기억이 안 나면 어떡하나 하고 종종 생각했다. 나는 혼자였으므로 적어도 당장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다. 다만 내가 그 식당에 간 것은 12월 27일. 그 후로 두 번을 마스크 없이 누군가를 마주했으므로―밥을 함께 먹었다―그들에게 우선 알렸다. 나를 거쳐 누군가에게 옮았다면 물론 큰일이지만, 저 식당에서는 말없이 밥만 먹고 금방 나왔으므로 많이 걱정하지는 않았다. 다만 오늘 저녁을, 내일 낮에 검사를 받고 결과가 나오기까지 꼬박 하루 더를, 집에서 밥을 해 먹어야 한다는 사실이 곤란했다. 요샌 도통 밥할 마음이 생기질 않아서 거의 식당에서만 먹는다. 아침부터 이런저런 일을 하면서도 해 질 녘에야 첫 끼를 먹는 날도 종종 있다.

이튿날 일어나자마자 씻고 보건소를 향했다. 보건소 외에도 진료소 두 곳이 더 있지만 이곳이 제일 가까웠다. 대기실이 보일 즈음 그 앞에 선 누군가가 무어라 말을 걸며 손짓을 했다. 검사를 받으러 왔느냐, 그렇다면 저 뒤로 들어가라. 줄은 길었지만 사람들 사이에 간격을 꽤 두고 있었으므로 수가 많지는 않았다. 여남은 명 쯤 되었을까. 줄을 서 있자니 아까 그와 같은 옷을 입은 사람―같은 사람이었을지도 모르지만, 방역복을 입고 마스크를 쓰고 있었으므로 알 도리가 없었다―이 비닐장갑을 건넸다. 잠시 후 또 같은 옷을 입은 사람이 서류를 들고 다가왔다. 증상이 있는지, 왜 왔는지를 물었다. 흡연 여부도 물었다. 문자 메시지를 받고 왔다고 하자 그가 먼저 식당 이름을 댔다. 그렇게 몇 가지를 기입한 후 그는 서류를 내밀며 인적사항을 쓰라고 했다. 이름과 주민등록 번호, 성별, 주소, 연락처, 직업 정도를 쓴 것 같다. 허위 사실을 적으면 처벌받는다는 문장이 보였다. 웹사이트 회원 가입 할 때 보는 것만큼 자세한―어떤 정보를 수집해 어떤 용도로 쓰며 그것을 몇 년간 보관하는지, 파기 요청은 어떻게 할 수 있는지 등등의―안내는 받지 못했다.

줄이 끝나고 접수대에 이르렀다. 서류를 내밀자 담당자가 명단에 몇 가지를 옮겨 썼다. 다시 서류 하나를 받았던가, 아니면 이름과 일련번호가 붙은 검사키트를 받았던가는 기억나지 않는다. 접수대는 두 곳을 거치게 되어 있었다. 첫 번째 창구에서는 앞에 붙은 안내문을 읽으라고 했다. 먼저 입을 벌리고 그 다음에 콧구멍을 보이라는 말이 적혀 있었다. 증상 여부를 묻고 끝내지 않고 인후를 확인하나 보다 했다. 검사대 앞으로 가는데 아직 소독 중인지 물러서라고 했다. 잠시 후 그 옆 검사대에서 먼저 불렀다. 검사키트―면봉 두 개와 채취를 마친 면봉을 담는 통이었던 것 같다―를 내밀었다. 접수대에서 서류도 받았다면 같이 내밀었을 것이다. 키트를 받아 든 이가 입을 벌리라고 했다. 유리벽인지 아크릴벽인지를 사이에 두고도 잘 보일까, 생각하는 찰나 그가 면봉으로 내 목구멍을 훑었다. 코로 검사한다는 말만, 그나마도 이 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들었었는데. 당황했지만 헛구역질을 하지는 않았다. 다음으로 턱을 들어 콧구멍을 보였고 그가 다른 면봉을 밀어 넣었다. 면봉이 뇌까지 들어가는 기분이라고들 해서 겁먹고 있었으나 그렇지는 않았다. 들어올 것을 알면서도 그저 당황했지만 이번에도 헛구역질을 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무언가 소리는 낸 것 같다. 코에서 면봉을 빼며 그는 잘 하셨어요, 하고 말했다. 왜인지 그 점이 슬펐다.[1]투명한 벽에 난 구멍에 붙은 장갑에 손을 넣은 의료진이 검체를 채취하는 구조다. 초기에 한 명 한 명 검사할 때마다 방역복을 갈아입어야 했던 … (계속)

검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 왔다. 하루면 결과가 나온다고 들었지만 진료소에 최근 검사량 폭증에 따라 최대 이틀이 걸린다고 적혀 있었으므로 어쩌면 적어도 여섯 끼를 꼬박 지어 먹어야 한다는 사실에 속이 탔다. 한 시간 넘게 뭉그적대다가 조금 늦은 시각에 점심을 해 먹었다. 김치찌개를 끓이려고 부엌에 갔더니 어제 저녁을 먹고는 씻지 않은 냄비가 싱크대에 들어가 있어서 카레를 하기로 했다. 야채를 볶고 강황가루를 꺼내면서야 토마토소스가 없음을 깨달았다. 야채 간장 조림 같은 걸로 대충 메뉴를 바꿀까 잠시 고민했지만 그러기엔 기름을 너무 많이 부은 참이라 밍밍한 카레를 먹기로 했다. 오래 전에 사 둔 레드커리 페이스트(여기에도 토마토소스는 들어있지 않다)가 있는 것이 생각나 조금 섞었다. 얼마 전에 사고는 쓰지 못해 마침 남아 있는 치즈도 조금 넣었다. 못 먹을 맛은 아니었다. 그러고는 또 한참을 누워 있다가 저녁을 하러 부엌에 갔다. 어제저녁에 쓴 냄비와 점심에 쓴 프라이팬이 모두 싱크대에 있었으므로, 다시 누웠다. 또 두어 시간을 그렇게 보낸 후에야 설거지를 하고 김치찌개를 끓였다. 역시 오래전에 사 둔 고등어 통조림을 썼다. 비린내가 났지만 한참 끓이니 가셨다. 그렇게 저녁을 먹었다. 찌개는 세 끼 정도 먹을 분량이었다. 몇 시간 후 즉석밥을 데워 한 끼를 더 먹었다. 남은 찌개는 냉동실에 있다.

또 늦게 잤고, 오늘은 정오가 좀 못 되어 눈을 떴다. 10시 17분자로 문자메시지가 와 있었다. “1월 2일 실시한 △△△님의 코로나19(COVID-19Test) 검사결과는 음성(Negative)입니다. / 마스크착용, 개인위생을 위한 손씻기 강조 // ※이 문자는 검사결과에 대한 정보만을 알려드리며 해외입국자 및 자가격리, 능동감시 / 통보를 따로 받은 경우 안내받으신 수칙을 준수하셔야 합니다.” 나의 접촉자들에게 검사결과를 알리고 샤워를 했다. 원래 두 번 보내는 건지 저 식당 방문자들이 검사를 잘 안 받는 건지 첫 문자와 비슷한 내용의 메시지가 한 번 더 왔다. 이번에는“이미 검사 받으신 분들은 중복해서 받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는 문장과 보건소 운영 시간 안내가 덧붙여져 있었다.

집에 붙어 있지 않고 식당에 다닌 탓으로 이런 일을 겪은 후의 일로는 현명치 않지만, 식사는 나와서 했다. 검검사결과가 정말로 이틀만에 나왔다면, 혹은 양성이 나와서 한참을 더 격리하게 되었다면, 좁은 방에 갇혀 지내는 불편과 불안이 문제가 되었을 것이다. 다행히 그저 밥 몇 끼 해 먹는 문제로 끝났다. 그나마도 오래가지 않았을지 모른다. 배달은 최소화한다는 원칙을 두고 사느라 그런 것이지, 마음만 먹으면 밥은 전화 한 통으로 해결된다. 집에 있는 식재료가 많지 않았지만 그 역시 클릭 몇 번으로 주문할 수 있다. 격리 기간 동안의 돈벌이를 제하면, 나로서는 택배로 살 수 없는 담배 정도가 문제였을 것이다. 당뇨라든가 하는 이유로 아무 음식이나 시켜 먹을 수 없는 사람, 그러나 인터넷을 하지 못해 재료 주문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을 생각했다. 그런 종류의 문제에 대한 안내는 전혀 받지 못했으므로.

1 투명한 벽에 난 구멍에 붙은 장갑에 손을 넣은 의료진이 검체를 채취하는 구조다. 초기에 한 명 한 명 검사할 때마다 방역복을 갈아입어야 했던 문제를 해결해 준 어느 의료인의 아이디어. 키가 작거나 휠체어에 앉은 사람을 검사하기는 힘들어 보였다. 나와 같은 시간대에 검사를 받은 이들은 모두 키가 닿았고 검사대에 충분히 붙어설 수 있었으므로 그런 경우 어떻게 하는지는 보지 못했다.

대체 텍스트, 번역, 비평 혹은 패싱의 정치학

대체 텍스트

대체 텍스트(alternative text)
[웹에서] 텍스트 아닌 콘텐츠를 대신하기 위해 제공되는 등가의 텍스트를 의미한다. […] 사용자가 장애 유무 등에 관계 없이 웹사이트에서 제공하는 모든 콘텐츠를 동등하게 인식할 수 있도록 […] 텍스트 아닌 콘텐츠는 그 의미나 용도를 인식할 수 있도록 대체 텍스트를 제공해야 한다.[1]미래창조과학부·국립전파연구원, 『한국형 웹 콘텐트 접근성 지침 2.1』(방송통신표준), 2015년 3월 31일 개정판(KCS.OT-10.0003/R2), 2쪽 및 8쪽.

빠짐 없이 삽입하지는 않지만, 웹에 이미지나 동영상을 올릴 때면 늘 의식한다. 행사 홍보물 같은 것은 비교적 간단하다. 주요 이미지를 설명하고 문자―행사의 제목이나 일시 같은―는 그대로 옮겨 쓴다. 그 정도는 아니라도 정보를 전달하기 위한 이미지의 대체 텍스트 작성은 크게 어렵지 않다. 무엇을 찍은 사진인지, 사진 속 인물은 누구인지 하는 것들을 적는 것으로 일단락된다. 문제는 ‘느낌’이다. 어떤 풍경에서 따스함을 느껴서 찍은 사진이라면, 따스한 느낌의 풍경이라고 적어도 어느 계절 몇 시 경에 어디에서 찍은 하늘에 구름이 몇 개가 떠 있는지를 적어도 마뜩지 않다. 사진 속의 현실과 볼 때의 느낌 혹은 정보에 대한 판단이 일치하지 않는다면 더 어려워진다. 새벽녘에 찍은 하늘이지만 설명 없이 본다면 대다수가 석양이라고 생각할 사진에는 어떤 설명을 붙여야 할까. 자세히 보면 까만 고양이지만 얼핏 보면 그저 검은 덩어리만 보이는 사진이라면. 이런 식의 설명까지를 모두 적는 일이야 어렵지 않지만 착각, 다시 보기, 깨닫기 같은 일련의 과정들은 여전히 재연되지 않는다. 고민하다가 종종, 포기하고 만다.

많은 경우 대체 텍스트는 애초에 제공되지 않으며 제공되는 경우에도 또 많이는 숨겨져 있고 그렇지 않다 해도 보통은 (내가 이미 사진이나 그림으로 얻은 정보의 열화된 버전일 뿐이므로) 자세히 보지 않았다. 남들이 어떻게 쓰는지를 의식하기 시작한 것은 겨우 몇 년 전부터다. 한국 영화를 한국어 자막을 띄워두고 보면서였다. (그보다도 몇 년 전부터, 영어 자막이 달린 영화를 보면서도 같은 것을 보았지만 어째선지 깊이 생각하지는 않았다.) 곳곳에서 어긋났다. 아마도 내가 악기 소리와 선율에 둔하기 때문일 것이다. 대사도 효과음도 없이 고요한 가운데 연주곡이 깔리고 자막으로 ‘긴장되는 음악’, ‘장엄한 음악’ 같은 말이 뜬다. 나는 긴장하지도 장엄함을 느끼지도 않았으므로 의아해진다. 긴장감을 자아내는 상황이므로 아무것도 못 느낀 나나 아무것도 못 들은 누군가에게는 어쩌면 큰 문제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상황과 충돌하는 음악이라면, 혹은 그 음악을 넣은 사람과 그 자막을 단 사람과 그 음악을 듣는 사람과 그 자막을 보는 사람이 모두 다른 것을 느끼고 있다면, 조금 복잡해질 것이다.

두 달여 전에는 ‘장애·비장애 문화예술 동행’이라는 슬로건을 건 행사를 방청했다.[2]서울문화재단 잠실창작스튜디오 주최·주관, “2020 장애·비장애 문화예술 동행프로젝트 〈같이 잇는 가치〉”, 서울: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 … (계속) 입 모양이 보이게 만든 마스크를 쓴 사회자가 수어통역사 옆에 서서 자기소개를 한다. 이름이며 직함 같은 것들 뒤에 자신의 머리길이나 옷차림을 설명한다. 몇 살 정도로 보이는 사람, 이라는 말도 한 것 같다. 생경하다. 시청각 장애인의 접근성을 고려해 준비된 행사에 참석한 것이 처음이 아님에도 낯선 풍경이다. 아마 그 덕에 나는 한참이 지나고도 그의 차림새를 조금은 기억하고 있다. 보통은 옷차림 같은 것은 신경쓰지 않으므로, 그 후에 참석한 행사들에서 사회자나 발표자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던가는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모두가 이렇지는 않다. 단숨에, 순서 없이, 주어지는 수많은 정보를―그가 스스로 언급한 정보들은 물론 말하지 않은 것들, 예컨대 허리가 꼿꼿한지 혹은 굽어 있는지, 옷에는 주름이 얼마나 져 있는지 같은 것들까지를―무의식적으로 분류하고 선별한다. 나에게서는 생략된 것이 누군가에게는 주요하게 남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주요하게 남은 것이 내게서는 생략될 것이다. “등가”는 (적어도 쉽게는) 달성될 수 없다. (“용도”는 차치하고라도) “의미”는 제시된 후에야 확정된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그의 차림새가 아니라 그것에 대해 그가 한 말을, 그가 무언가 말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

포기된 번역

기본적인 룰 중 하나는 장식―의미와는 무관한 것―에는 대체 텍스트를 제공하지 않는 것이다. 앞에서 인용한 지침을 다시 한 번 인용하자면 “단순히 장식이나 시각적인 형태를 위해 사용되는 콘텐츠의 경우, 보조 기술을 통해 해당 설명을 제공받을 때 오히려 혼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으므로 대체 텍스트로 공백 문자를 제공해야 한다.”[3]9쪽. 보조 기술, 입력된 텍스트를 음성으로 변환해주는 기술을 이용하는 사람―대개 시각 장애인―에게 이것이 혼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는 것, 그러므로 이를 빼는 쪽이 훨씬 효율적이라는 것은 아마도 분명한 사실이다. 책의 매 쪽 아래나 위에 넣어놓은 장식을 전자책 TTS 프로그램이 매번 ‘로코코 풍의 장식적인 선’ 따위로 읽어준다면 얼마나 성가실까. 그러나 어떤 장식들은 느낌과 함께 의미를―혹은 의미에 대한 지침을―담는다는 점을, 어떤 느낌들은 그 자체로 의미가 된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룰은 다소 과하다. 한 쪽을 넘길 때마다 로코코를 운운하면 피곤할 뿐이지만, 첫머리에서 이 책이 로코코 풍으로 꾸며져 있음을 소개한다면, 적어도 어떤 경우에는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 정도조차 아니다. 저 룰 조금 위에는 “특정 감각으로만 제공되는 콘텐츠인 경우 : 플루트 독주나 시각적 예술 작품 등의 경우, 해당 콘텐츠에 대한 간략한 용도를 알려주는 대체 텍스트만으로 충분하다”라고 적혀 있다. (“공백 문자를 제공해야 한다”, “간략한 용도를 알려주는 대체 텍스트만으로 충분하다”는 문장은 접근성 테스트 통과 기준을 서술하는 맥락에서 쓰인 것이다.)[4]같은 쪽. 한국정보통신기술협회, 『한국형 웹 콘텐트 접근성 지침 2.1』(정보통신단체표준), 2013년 12월 18일 개정판(TTAK.OT-10.0003/R2) 역시 (앞에서 인용한 … (계속) “플루트 독주”나 “시각적 예술 작품”은 느낌이 의미가 되는 영역일 것이다. 느낌은, 그리고 그 출처가 되는 세부 사항은 종종 각자에게 서로 다를 것이므로 쉽지 않은 일이지만 “간략한 용도를 알려주는 대체 텍스트만으로 충분하다”는 말은 시험 통과 최저선을 설명하는 말로서는 너무도 단호하다.

하지만 겸양에서 나오는 단호함이라고 해도 좋겠다. 느낌이니 어쩌니 하는 말들은 성공과 실패를 나누는 데에 끌어들이기는 곤란한 말인데다 그럴싸하게 설명하기조차 어렵다. 능력 밖의 것을 깔끔하게 포기하는 겸양, 저 단호함의 이면에는 그것이 있다고 하자. 섣부른 포기, 귀찮은 일에 대한 섣부른 포기만은 아니다. 여기에는 분명 애초부터 불가능성이 놓여 있다. 불가능한 번역을 포기한 것 뿐이라면, 누구도 이렇다 할 성공을 해내지 못할 일이라면, 섣불렀는지 어땠는지 알 길이 없는 셈이다. 다만 무언가가 포기되었다는 사실만이 분명하다. 내가 종종 포기하는 거기서, 또 다른 누군가도 포기했다는 사실만이 말이다.

번역이라는 행위 자체의 불가능성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궁극적인 불가능성을 확인하거나 믿는 데에는 딱히 관심이 없다. 나는 대개 확인되지 않은 가능성만을 믿는다. 그러나 번역의 가능성, 소통의 가능성 같은 것을 믿기 전에 확인해야 하는 것이 하나 있다. 이를테면 소통에의 의지다. 전한 적 없는 것이 전해지기를 바랄 만큼 녹록지는 못하다.[5]이 문장을 쓰고 떠오른 노래가 제목도 가수도 정확한 가사도 생각나지 않아 한참을 고민했다. 자자(ZAZA)의 〈버스 안에서〉. “넌 너무 이상적이야, 니 … (계속) 음악이나 시각 예술이 소통에의 의지가 없다고, 무언가를 전하려 하지 않는다고야 할 수 없겠지만 적어도 배타적으로 특정 감각을―그 감각을 가진 사람만을―택했다는 점에서, 어떤 불가능성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시각장애인의 미술, 청각장애인의 음악을 시도하는 이들이 어딘가에서 어떤 성공을 해낸다는 점을 물론 알고는 있다.) 그러므로 이 번역은 번역의 시점에서 포기된 것이 아니다. 애초의 발화 시점에서 번역이, 번역의 가능성 자체가, 적어도 상당 부분, 포기된다. 이런 느낌을 줄 수 있도록 만들어진 선율이라고 혹은 듣는 사람 대부분은 이런 느낌을 받는 선율이라고 말하는 것이 한계로, 분명하게 설정되어 있는, 발화의 시점에.

음악과 미술을 지목했지만, 결과를 두고 말하자면 시각이든 청각이든 하나의 감각만을 택했다고 해서 이것들이 다른 발화들과 특별히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특히 대사가 있는) 영화나 연극 같은 것들은, 혹은 표정과 몸짓과 말씨를 모두 활용하는 어떤 말하기는 복수의 감각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기초적인 번역에 대해 보다 폭넓은 가능성을 갖는 듯하지만, 대개 그 모든 감각을 쓰는 이들의 경험을 전제로 생산되므로, 번역이 딱히 더 용이한 것은 아니다. 글조차도 글자로 읽든 말로 듣든 상관 없는 경험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예컨대 나는 (말보다 글이 익숙한, 어려운 글도 익숙한) 나의 읽기를 기준으로 쓴다. (내용이나 어휘도 종종 그렇지만, 지금은 문장을 구성하는 방식에 대해 한 말이다. 내 경우에 이것은 섣부르고 속편한 포기다.)

번역의 가능성은 그러므로, 적어도 내가 알거나 상상할 수 있는 많은 경우, “등가”를 넘어서는 데에 있다. 발화자가 전하지 않았으면서도 전달된다고 전제한 것들을 짚어냄으로써만 생겨나는 가능성이다. 혹은 발화자가 의식하지 않고 전하는 것들, 수용자가 의식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들을 짚어냄으로써만 생겨난다. 예컨대 영어 문장에 담긴 내용을 한국어로 옮기는 것으로는 완료되지 않는다. 문장에 적혀 있지 않고 것들을, 혹은 적혀 있는 말이 한국어 화자가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일 수 있음을 따로 적지 않고서는 한국어 너머의 영어를 읽을 수 있는 이들에게만 닿을 뿐이다. 본문보다도 길게 수십 개의 각주를 써야 한다는 중압감에 시달린 끝에야 조금이나마 가까워진다.
그러나 그 모든 주석은 나를 거친 것이므로―내가 지어낸 것이므로―어쩌면 온당치 않다.

“안무의 몫”[6]하은빈, 「무용수-되기」(동명의 공연에 대한 드라마투르기의 글), 57쪽, 〈같이 잇는 가치〉 프로그램북, 56-58쪽.

앞에 쓴 행사를 “창작으로의 연대”라는 프로그램이 있는 날에 참석했다. “(감각의 전환을 통한) 새로운 예술창작 방법론 탐구와 시도”라는 부제 아래 〈도착되려 하는 언어들〉(여기는 당연히, 극장 제작, 구자혜 구성·연출)이라는 연극과 〈무용수-되기〉(김원영×프로젝트 이인 제작, 라시내·최기섭 안무·연출)이라는 무용이 상연되었다. 이 중 〈무용수-되기〉는 김원영과 최기섭의 이인무다. 시작은 이본 라이너Yvonne Rainer의 〈트리오 ATrio A〉(1966, 1978)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본 라이너의 몸짓을 김원영이 재연하고 그것을 최기섭이 재연하는, 〈트리오 A〉를 변형한―혹은 번역한―춤. “원영과 같이 해보면서 하체의 움직임은 휠체어의 움직임으로 대체하고, 휠체어를 기동하느라 추가된 움직임은 최대한 본래 안무에서의 상체 움직임과 매끄럽게 연결시키고, 여의치 않은 동작은 삭제하거나 변형시켰다. 그런 다음에는 원영의 동작에 맞춰서 원래 안무를 다시 변형시켜 기섭의 동작으로 만들었다. 원영이 모든 동작을 날리지 않고 정확하게 수행할 수 있도록 템포를 상당히 늦췄다. 원영의 〈트리오 A〉를 원본으로 삼은 기섭의 〈트리오 A〉도 똑같이 느린 템포로 가게 되었다. 라이너의 움직임을 휠체어에 탄 원영의 움직임으로, 이를 다시 기섭의 움직임으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두 사람의 〈트리오 A〉는 분명 〈트리오 A〉이지만 〈트리오 A〉와는 다른 어떤 춤이 되었다.”[7]라시내, 「모든 움직임은 모든 몸에게 열려 있는가」, 웹진 《춤:in》, 2020.12.15. 이후도 대개 같은 구조다. 휠체어 이용 장애인인 김원영이 휠체어에 … (계속)

무용은 감상자에게는 시각(과 청각)을, 수행자에게는 원활한 몸짓(과 종종 특정한 형태의 몸)을 요구한다. 그 전통과 지위는 강력하므로 지체장애인이 출 수 있는 춤을 만들지 못하는 안무(가)의 실패가 아니라 안무를 해내지 못하는 지체장애인의 실패가―장애가 없더라도, ‘몸치’의 실패가―전면에 놓인다. “간략한 용도를 알려주는 대체 텍스트만으로 충분하다”는 말은 이런 구도 속에서 정당해진다. 힘을 가진 틀 밖에 놓인 이의 실패는, 틀 안에서는 책임지지 않아도 좋다. 몸을 움직이지 못할 것이므로 그 몸을 위한 안무는 불필요하다. 적어 줘도 모를 것이므로 대체 텍스트는 불필요하다. 성사되지 않을 대화를 위한 번역은 불필요하다. 최기섭과 함께 이 공연의 연출과 안무를 맡은 라시내는 〈트리오 A〉를 〈무용수-되기〉로 변형하고 번역한 질문을 이렇게 요약한다. “가능과 불능의 문제인 한계와 달리, […] 몸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의 문제[…인] 역량의 차원에서 정당한 질문은 ‘원영은 라이너의 〈트리오 A〉를 출 수 있는가’가 아니라 (이렇게 답이 뻔한 것은 애초에 어떤 물음이 아니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원영은 그의 한계에 적합하게 새로이 안무된 〈트리오 A〉를 얼마나 잘 출 수 있는가?”[8]라시내, 같은 글.

원영의 몸에 대한 것인 이 질문을 뒤집으면 안무(가)에 대한 질문이 될 것이다. 안무(가)는 과연 그의 몸에 적합한 춤을 고안할 수 있는가? (이것은 우선 능력의 문제나 의지의 문제가 되겠지만 그에 그치지는 않을 것이다. 그가 속한 세계―장애인의 몸에서 불능만을 읽는―가 그에게 무엇을 얼마나 허락하는지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의 책임을 덜기 위해서 이런 말을 덧붙이는 것이 아니라, 그를 비롯해 그 세계를 공유하는 이들이 흔히 갖는 한계를 생각하는 것이다. 능력이나 의지를 발휘해 무언가 해낸다 해도 어떤 면에서는 여전히 그 한계 속에 있을 것이다.) 스스로의 한계 때문이든 부과된 한계 때문이든, 이 공연의 드라마투르기 하은빈의 문장으로 말하자면, “이 몸들 앞에서 안무는 어려움을 겪는다. 계속해서 이 몸들이 계획과 예상으로부터 비껴난다는 점에서, 안무의 노력은 대개 실패로 돌아간다.” 상대를 굴복시키고 통제하지 못하는 안무, 상대에게 아무것도 전하지 못하는 발화 스스로가 실패를 겪는다. 시도되기 전까지는 실패로 명명될 일이 없는 류의 사태다. 실패가 이렇게 뒤집어지면서, 안무에서―번역에서, 대체 텍스트에서―배제되었던 몸들, 실패로서만 독해되어 왔던 몸들이 자리를 바꾸어 새로이 등장한다. “안무의 거듭되는 실패와 몸의 불완전성 속에서, 무용수의 몸은 춤의 근원 없는 근원으로서 비로소 출현[한다. …] 그렇다면 이제 스스로를 끊임없이 수정하고 굴복하는 것은 무용수의 몫이 아니라 안무의 몫이 된다.”[9]두 인용 모두 하은빈, 같은 곳. 이 절의 제목은 이 문장에서 따 온 것이다.

사후적인 개입 이외의 곳에서 번역의 불가능성에―포기의 정당성에―맞설 수 있다면, 이처럼 발화를 구성하는 논리부터를 뒤엎음으로써일 것이다. 좋거나 충분한 대체 텍스트를 쓰기 위해서는, 좋거나 충분한 ‘텍스트 아닌 콘텐츠’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내가 업로드하는 것, 그래서 대체 텍스트를 달지 말지 혹은 어떻게 달지 고민하는 것의 반나마는 내가 찍은 사진이나 내가 그린 그림이나 내가 만든 포스터다. 원본을 충분히 알지 못해서, 원본이 전하고자 하는 바를 충분히 알지 못해서 망설이고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애초에 그 너머를 생각해 본 적이 없기에, 이제 와서 새로이 고민할 열의도 충분치 않기에, 망설이고 포기한다. 이를 테면 ‘나의 몫’을 다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전히 중요한 것은, 내가 만든 것에 달건 남이 만든 것을 옮기며 달건, 주석은 나를 거친 것이라는 사실, 그러니까 원본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나를 거친 주석을 어쩌면 충분히 달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비평 혹은 패싱의 정치학

단숨에 제시되는 이미지와 선형적으로 제시되는 텍스트가 얼마나 가까운 경험을 제시할 수 있을지를 나는 전혀 알지 못한다. (매체의 특수성에 매력을 느끼는 사람조차 아니므로 내게서 이 둘이 그저 멀기만 한 뿐인 데 대해 나는 아무런 정당화도 할 수 없다.) 이미지의 많은 부분을 나는 놓친다. 사람의 차림새도 그렇고 캔버스 한 쪽 구석에 작게 그려진 사물도 그렇다. 문자를 읽을 땐 조금은 덜하지만 여전히 무언가를 뛰어 넘는다. 누군가는 보고 누군가는 읽을 것을 나는, 보고 읽은 후에 잊는 것이 아니라, 못 보고 지나친다. 오디오북을 몇 권인가 들은 적이 있다. 딴짓을 하지 않는 한, 그런 방식으로는 아무것도 놓치지 못한다. 멋대로 넘어가기 쉽지 않으므로 어쩔 수 없이 모든 단어를 듣는다. 잊을 수도 무시할 수도 있지만 듣지 않을 수는 없다. 아무것도 보거나 읽지 않고 듣는 사람들, 혹은 보기보다는 주로 듣는 사람들은 어떨까. 아직 배우지 못했다.

내가 대체 텍스트를 어떤 방식으로 다는지를 통해 많은 것이 드러날 것이다. 이미지 속의 무엇을 골라 명시했는지를 통해서. 어느 선까지는, 많이 달수록 그럴 것이다. 많은 정보를 제공하였으므로 이미지의 많은 것이 드러난다는 말이 아니다. 내가 무엇을 명시할 만한 것으로 생각했는지가, 이 주석이 어떤 나를 거쳐서 나왔는지가 드러난다는 뜻이다. 듣는 사람들이 무엇을 어떻게 듣는지를 모른 채 쓰고 있으므로, 그래서 조악할 것이므로, 더더욱 많은 것이 드러날 것이다. 무엇이 중요한지, 중요한 것을 어떻게 전해야 하는지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는 점이 말이다. 최근에는 비평을 무엇이라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여러 의미에서 딱히 답할 만한 위치에 있지 않으므로 답하지는 않았다. 무얼까, 잠깐 생각만 했다. 비평을 통해 작품이―작품의 의미나 가치 같은 것들이, 비평가가 아닌 이들이 흔히 놓치는 것들이―얼마나 드러날까. 비평을 쓴 이가 투명하게 드러나는 일이 훨씬 많다고 생각했다. 최선의 비평은, 그 작품을 왜 그렇게 보고 듣고 읽고 생각하고 느끼게 되었는지를 잘 밝히는 것, 좋은 자기소개 같은 모습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작품에 대해서 잘 아는 만큼 자신에 대해서도 잘 알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는 패싱passing을 생각했다. 성소수자의 맥락에서 누군가가 사회적으로 어떤 성별로 받아들여지는지를 설명할 때 쓰는 말로서의 패싱은 아마도 그 누군가가 ‘나는 이렇게 패싱된다’고 쓸 때가 가장 적절한 용례일 것이다. 그가 어떤 성별로 받아들여지는지를 충분히 아는 것은 대개는 (순전히, 보통은 오직 그만이 그의 삶을 빠짐없이 관찰한다는 이유로) 그 자신 뿐이니 말이다. 이따금 확장되는 용례는 이런 식이다. ‘(그의 자기정체성이나 법적 성별은 모르겠지만 혹은 그에 대해서는 판단하지 않겠지만) 그는 이러이러하게 패싱되는 사람이다. 혹은 그의 패싱성별은 이것이다.’ 타인의 성별을 함부로 재단하지 않으면서도 무언가를 설명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지만 이것은 대개 거짓말이다. 이렇게 발화된 그의 패싱과 실제 그가 경험하는 것이 같다고 해도 그렇다. 엄격히 말하자면 이렇게 고쳐야 할 것이다. 나는 그를 이런 성별로 본다고, 의식(적으로 판단을 보류)하지 않는 순간에라면 그를 이런 성별로 분류했을 것이라고.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온전히 드러나는 것은 실은 말하는 이의―누군가에게 주석을 다는 이의―틀이다.

뜬금 없이 저런 말을 하는 사람의 한계를 지적하고 싶어진 것은 아니다. 세계가 허락하는 바 속에서, 나 역시 종종 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의 발화―여기서는 말하자면 젠더 표현―가 어떤 번역의 가능성을 차단하는 종류의 것이었느냐고 묻는다면, 그렇지 않다고 답할 것이다. 성별화된 양식들에 모자람 없이 들어맞는 경우라 해도, 그가 의식적으로 그렇게 하고 있는 경우라 해도, 언제나 무언가가 비져나오기 때문이다. 그것이 어떤 발화로서 수행된 이상 그가 그 성별이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그렇게 한 것일 가능성은 배제되지 않는다. 그 가능성이 배제되지 않는다는 것을 내가 아는 한, 그의 패싱성별을 지목하는 나의 행위는 그를 위한 것도 나를 위한 것도 아니다. 그저 나의 발화를 세계의 틀 속에 남겨두기 위한 것일 뿐이다.

결국 애초의 발화에 내포된 번역 불가능성을 운운하는 것은 끝내 정당하지 않게 된다. “혼란”을 주지 않으면서도 “등가”의 무언가를 제공하기 위한 번역은 언제 포기하든 섣부르다. 나는 다만 나를 드러내지 않고 있을 뿐이다. 그래도 되기 때문이다. 아마도 ‘텍스트 아닌 콘텐츠’와 ‘안무’와 ‘성별’이 모두 다르겠지만, ‘대체 텍스트’와 ‘번역’과 ‘비평’과 ‘패싱’이 모두 다르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한 곳에서 만난다. 나에게서. 무언가를 전하고 무언가를 겪고 무언가를 해석하는 나에게서. 거기서 나는 나와 싸우는 중이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싸움을 피하는 중이다.

추기.

이 글을 쓰던 중에 잠시 워드프로세서를 닫고 장애여성공감 극단 춤추는 허리의 〈춤추는 혼잣말〉을 보았다. 온라인 실시간 방송 형식이었고 채팅창이 있었다. 장애여성공감은 채팅창에 이런 공지를 올렸다.

춤추는허리의 첫번째 웹독백극 「춤추는 혼잣말」은 수어와 자막을 제공합니다. 그러나 화면해설과 쉬운 말 해설 등 장애인접근권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관람 후 평가와 의견 주시면 반영하여 접근권 확대를 위해 계속 노력하겠습니다.
[자막 정보] 1. 배우들의 나레이션과 공연 독백은 기울임체로 표시함2. 음악은 음표로 가사는 음표 옆에 표시함

추기 2.

“그 의미나 용도를 인식할 수 있”게 하는 것을 확연히 넘어서는 사례로 내가 들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케이블 채널 tvN에서 유튜브를 통해 제공하는 ‘몰티’의 자막이다. 직접적으로 청각장애인 접근성을 고려해 제작한 것은 아니다. “딴짓하고 싶을 때 소리없이 몰래보는 티비”라는 슬로건대로, 아마도 기본적으로는 기존의 청인 관객들이 소리를 끄고도 감상할 수 있게 만든 것이다. 그럼에도 일반적인―대사 내용만, 기껏해야 발화자의 이름 정도까지를 담는―자막이 아니라, 나아가 넷플릭스 등이 제공하는 접근성을 고려한―효과음 묘사와 배경음악 정보를 더한―자막도 아니라, 글자에 운동을 더한 자막을 제공한다. 소리가 크면 글자도 크고, 말이 빠르면 글자도 빠르게 흘러간다. 인물이 토하는 소리를 내는 장면에서는 구토를 묘사하는 의성어가 인물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고 방귀 소리를 적은 글자는 엉덩이에서 뿜어져 나온다. 카메라가 웃는 관객들을 잡을 땐 ㅋ자가 화면 전부를 채우고 웃음이 격해지면 글자가 화면 가득 흔들린다. 자막의 위치나 흐르는 속도 등을 통해 (적어도 원래의 포맷에서 청인으로 상정되는) 관객들이 귀로 얻는 정보와 그로써 형성되는 감정의 동세動勢를 시각적으로 구현하는 것이다. 귀로 들은 적이 있는 내가 이 자막을 통해 그리는 심상을 선천적인 청각장애인이 어떤 경로로 그릴 수 있을지―직관적으로 가능할지, 어느 정도의 학습을 통해 가능할지, 혹은 불가능할지―는 나로서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후천적으로 청각장애인이 된 경우라면 이런 식의 대체 텍스트는 상당히 유용하리라고 생각했다. 거기까지만, 그런 짐작까지만 했는데, 위의 링크를 다느라 들어갔던 영상에서 이런 댓글을 발견했다.

제 동생 청각장애인인데 몰티 너무 재밌게 보는 거 보고 뭉클했네요 감사합니다

+동생한테 댓글 보여줬더니 자기 친구들(똑같은 청각 장애인 분들)도 좋아한다고 재밌다고 했다네요 작은 바램이지만 앞으로도 이런 청각 장애인분들을 위한 프로그램이 많이 늘어났으면 좋겠어요 언니로서 동생 얼굴에 웃음꽃 피는 게 왜 그렇게 예쁜지 괜히 고마워서 댓글 남겼는데 많은 분들이 좋아요 눌러주셔서 감사하네요 🙂

여기 언급된 청각장애인들이 어떤 경우인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누군가에게는 의미가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남은 궁금증은, 한국어 영화에 평범한 한국어 자막을 다는 일도 거부하는 이 사회가, 코미디가 아닌 영역에서 이런 자막을 언제쯤 어떻게 얼마나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하는 것. 이런 자막을 다는 데에, 기획·연출과 영상 편집 모두에 있어, 상당한 ‘추가 노동’이 필요하다는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진지함이니 영상미니 하는 통상의 가치들 사이를 이것이 얼마나 비집고 들어갈 수 있을지가 궁금한 것이다.

1 미래창조과학부·국립전파연구원, 『한국형 웹 콘텐트 접근성 지침 2.1』(방송통신표준), 2015년 3월 31일 개정판(KCS.OT-10.0003/R2), 2쪽 및 8쪽.
2 서울문화재단 잠실창작스튜디오 주최·주관, “2020 장애·비장애 문화예술 동행프로젝트 〈같이 잇는 가치〉”, 서울: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 2020.10.16-11.04. 이 기간 동안 기획전시, 워크숍 등 여러 행사가 열렸다. 나는 10월 16일부터 이틀간 열린 오픈포럼의 둘째날에 방문해 토크 프로그램과 공연을 관람했다.
3 9쪽.
4 같은 쪽. 한국정보통신기술협회, 『한국형 웹 콘텐트 접근성 지침 2.1』(정보통신단체표준), 2013년 12월 18일 개정판(TTAK.OT-10.0003/R2) 역시 (앞에서 인용한 것들을 포함해) 같은 내용으로 되어 있다. 한편 이 둘이 참조하는 월드와이드웹 콘소시엄의 지침 2.0판은 동영상 접근성 평가 기준을 설명하며 “제목, 움직임, 작곡가 등을 비롯해 사용자가 해당 오디오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모든 정보”라는 표현을 쓴다.
5 이 문장을 쓰고 떠오른 노래가 제목도 가수도 정확한 가사도 생각나지 않아 한참을 고민했다. 자자(ZAZA)의 〈버스 안에서〉. “넌 너무 이상적이야, 니 눈빛만 보고 네게 먼저 말 걸어줄 그런 여자는 없어. 나도 마찬가지야, 이렇게.”
6 하은빈, 「무용수-되기」(동명의 공연에 대한 드라마투르기의 글), 57쪽, 〈같이 잇는 가치〉 프로그램북, 56-58쪽.
7 라시내, 「모든 움직임은 모든 몸에게 열려 있는가」, 웹진 《춤:in》, 2020.12.15. 이후도 대개 같은 구조다. 휠체어 이용 장애인인 김원영이 휠체어에 앉아서, 혹은 휠체어에서 내려 두 다리와 두 손으로 몸을 지탱하며, 휠체어와 몸을 이용해 만드는 움직임을 (적어도 춤에 한해서는) 비장애인인 (또한 김원영과는 달리 훈련된 무용수인) 최기섭이 휠체어 없이 소화한다.
8 라시내, 같은 글.
9 두 인용 모두 하은빈, 같은 곳. 이 절의 제목은 이 문장에서 따 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