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0.14.(목)

기깔나게 하루를 날려 먹었다. 일을 안 했다는 뜻이 아니라 ― 물론 안 하긴 했다 ― 쉬거나 놀거나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일을 할 생각이었지만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섯 시쯤 한 번, 일곱 시 반쯤 한 번, 열 시 반쯤 한 번 깼다. 열두 시가 좀 지나 일어났다. 씻고 어쩌고 하니 금세 한 시. 밥을 해 먹으려다가 시간을 아껴 일하기로 하고 집을 나섰다. 시내 쪽으로 한참을 가다가 괜히 발길을 돌려 반대쪽 주거 지역으로 갔다. 일대를 배회하다 베트남 음식점에 들어가 태국 음식(이거나 대충 비슷한 것)을 먹었다, 똠얌꿍 국수. (실은 상호엔 베트남이란 말이 들어가지만 동남아 음식점을 표방하는 업체다.)

그리고는 카페에 앉았다. 일기를 쓰고 가계부를 정리했다. 또 뭘 했지, 그래도 한동안 앉아 있었는데 별일 하지 않았다. 평소에 앉는 일하기 좋은 높이의 테이블에 사람이 있어서 슬펐고 앱으로 주문하다 한 번 결제 오류가 나서 슬펐고 다시 주문하면서 제대로 안 보고는 뜨거운 걸로 시켜서 슬펐다. 대각선 끝에 있는 테이블이 시끄러워서 슬펐다.

주로 양육을 화두로 이런저런 지인들의 이야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타지의 어느 대학에 갔다가 아이들 기가 세서 같이 못 지내겠다며 수능을 다시 치고 집과 같은 지역권의 다른 학교로 갔다가는 그마저 그만 두고 아르바이트로 번 돈을 모아 미국 일주에 나섰다가 어찌저찌 천직을 찾았다는 이의 이야기가 들렸다. 나중에는 스타크래프트 맵핵 같은 것에 비유해 가며, RPG 게임 매크로를 종일 돌리는 이의 이야기를 했다.

내 바로 뒤에는 초등학교 저학년 쯤 되어 보이는 이가 혼자 앉아 있었다. 자그마한 동네 카페, 같은 곳이 아니므로 흔한 풍경은 아니었다. 예의 테이블에 앉은 이들 중 누군가의 아이인 모양이었다. 보호자들과 두세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아, 그는 조용히 있었다. 무엇을 하는지까지는 보지 못했다.

결국 성과 없이 일어나 귀가했다. 와서도 주로 책상에 있었지만 별것 하지 않았다. 오는 길에는 지난 주에 산 카메라의 판매자에게 테스트를 마쳤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그제였나, 테스트 해보셨냐는 메시지를 받아 배터리가 오는 대로 알려드리겠다고 답했는데 하루를 더 묵힌 셈이다. 집에 와서는 인터넷 공유기를 주문했다. 지금도 쓰고 있지만, 공유기가 최근에 오락가락하기 시작했다. 컸다 켜면 대개는 괜찮아지므로 평소라면 ― 그러니까 재작년이나 작년 초쯤이었다면 ― 그냥 쓰고 정 안 되면 휴대전화 인터넷으로 때울 만한 상태지만 화상회의가 잦은 시절이므로 새로 사기로 했다. 원래 쓰던 것보다는 조금 좋은 것을 샀다.

저녁은 집에서 먹었다. 밥을 안치고 어제그제 먹고 남은 된장찌개와 된장국을 데웠다. 김치와 명란젓을 썰고 두부를 삶았다. 두부는 살짝 상한 것도 같은 향이었지만 나는 새로 뜯은 두부에서도 종종 비슷한 느낌을 받으므로, 그리고 맛은 멀쩡했으므로, 그냥 먹었다. 그것이 두세 시간 전의 일인데 아직 배탈이 나거나 하진 않았다. 밥 먹기 전에 돌린 빨래를 널고 설거지를 하고 걷은 빨래를 갰다.

시내까지 산책을 다녀왔다. 오늘이 시한인 쿠폰으로 커피를 샀다. 텀블러를 가져갔더니 점원이 할인이 어쩌고 사이즈 업이 어쩌고 하며 용량을 물었다. 모르겠다고 했더니 옆에 있던 계량컵으로 물을 받아 부어 보았다. 큰 사이즈도 다 들어간다며 200원을 추가해 사이즈 업을 하겠냐고 물었다. 큰 걸로 하겠냐고 바로 물었다면 그냥 기본 사이즈로 달라고 했을 텐데, 생각하며 그러겠다고 했다.

카드로 200원을 결제했다. 계량컵은 그리 깨끗해 보이진 않았는데, 다 보이는 데 둔 걸 보면 뭐가 묻은 게 아니라 착색된 거겠지. 텀블러에 음료를 붓고 얼음을 담는 모습 역시 다 보였다. 입구에 부딪고는 들어가지 못한 얼음들이 얼음통으로 다시 떨어지는 모습이. 이거야 씻어서 가져간 거지만 씻지 않은, 혹은 대강 헹구기만 한 텀블러였어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겠지.

오는 길에는 잠깐이지만, 그래봐야 도로와 몇 미터 떨어지지 않은 구간이지만, 논밭 사이도 걸었다. 별을 보거나 달을 보거나 도로 반대 방향의 멀리서 퍼지는 인가의 불빛을 보거나 했다. 개가 짖는 소리도 들었다. 고양이도 만났던가. 그건 낮이었나. 기억은 안 나지만 벌레 소리도 들렸을 것이다. 내일이 마감이므로 이제 정말로 일을 시작해야 한다. 잠깐 편의점만 다녀오고 꼭 시작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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