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만으로 힘이 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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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히 말하자면, 중학교 때, 고등학교 때의, 그리고 대학교 때의 몇몇 친구들에게 나는 존재만으로 힘이 되는 존재다. 그러니까, 굳이 찾아 연락하지 않더라도, 나라는 사람이 어딘가에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언젠가 만날 수 있음을 아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는, 그런 존재 말이다.
거기까지다. 존재만으로 힘이 되지만, 그 이상 딱히 힘이 되지는 않는 존재. 시간 내어 만나 봐야 자신에게 나누어 줄만큼의 기력을 갖고 있지도 않고, 설혹 가끔 갖고 있는 때에 만나게 되더라도 말 한 마디 하지 않아서 나누어 받을 수 없는 존재.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왠지 힘이 될 것도 같지만 실은 별 도움이 안 되는 사람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늘 고민이었다. 아무에게도 말 못할 고민이 있을 때, 아니면 고민은 없지만 괜히 힘들 때 나를 찾는 친구들이 몇 있지만, 늘 나를 찾은 그 친구들은 아무 것도 얻지 못하고 돌아가곤 했다.
말수도, 말재주도 조금은 늘었다고는 해도 거기서 거기, 여전히 나는 존재만으로‘만’ 힘이 되는 사람에 머물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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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은 사람보다는 버린 사람이 많고, 버린 사람보다는 얻은 사람이 많다. 모임을 엎어가며 사람들과 서로 열변을 토한 적은 몇 번인가 있지만, 싸우거나 다툰 기억은 딱히 없다. 가리지 않고 사람을 만나고, 만나보고 아니다 싶으면 내치고, 나는 잡았으나 상대가 나를 내치면 아쉬워하고, 그렇게만 살았다.
그래서, 애인과의 관계가 아니고서는 큰 트러블을 겪어 본 적이 없다. 사이가 틀어진 경우야 없지 않지만 매번 그저 어쩌다 보니 멀어지게 되는, 그런 형국이었다. 덕분에 작은 트러블이라도 생기면, 그야말로 어쩔 줄 모르게 되고 만다.
때로는, 너무 많은 사람을 버리고 살아 왔나 싶기도 하다. 길에서 마주치면 반가이 인사하지만 실은 아무 것도 공유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버려둔 사람이 너무 많은가 싶기도 하다. 끝내 길에서 인사도자 하지 않는 사이가 되어버릴지 몰랐다 하더라도, 그래도 몇 번쯤은 더 물고 늘어졌어야 했나 하는 생각을 한다.
몇 안 되는 잃은 사람들은 너무도 먼 곳에 있다. 외려 버리고 내친 사람들은 길에서 만나면 아무렇지 않게 인사를 하고 근황을 묻고 수다를 나눈다. 그 모습을 본 한 친구가, 대체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느냐고 물어볼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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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와 통증을 몸에 달고 살아서, 피곤하다는 말도 아프다는 말도 입에 달고 산다. 사람들이 걱정하는 말을 건네 오면, 하루 이틀도 아니니 괜찮다, 고 답하지만 실제로 나도 괜찮지 않고 상대방도 괜찮지 않을 것이다. 다른 이들이 얼마만큼을 읽어 낼지 몰라도, 나는 내가 입으로 뱉는 것 이상으로 아프고 피곤하다.
몸이든 마음이든 어딘가 아프다고 징징거려 본 것은 최근의 일이다. 최근의 몇 달, 몇 명에게 좀―혹은 많이― 징징거리면서 살았는데, 이제 그것도 좀 질린다. 이야기를 들어 준 사람들은 질리다 못해 지쳤겠지만. 그래서, 이젠 뭘 해야 할까, 신나는 이야기를 하면 좋을까 싶지만 원래가 그런 것은 없는 사람이니.
행복하다, 고 느껴 본 적은 별로 없다. 아주 어릴 때부터, 우울하지 않았던 날도 딱히 없다. 그냥 타고 난 성정이 그러려니 하고 살다가, 최근에 좀 심해져서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해 봤지만 별 효과가 없는 걸 보니 타고난 성정이 그런 게 맞나 싶기도 하다. 전문가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누군가는, 우울하게 타고난 사람은 없다고 단언하더라만.
불행하다고 느껴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별로 없는 것도 아니고 딱히 없는 것도 아니고, 전혀 없다. 괜히 그렇게 한 번 말해 본 적이야 어디서든 몇 번 쯤 있겠지만. 그래서 누가 뭐가 문제냐고 물으면, 모르겠다, 고밖엔 할 말이 없다.
징징거리는 이야기를 들어 준 몇 명―그래봐야 다섯 명도 채 안 되지 싶은데― 중, 두 명이 내게 그런 말을 했다. 말하는 내용을 들어 보면 굉장히 심각한 것 같은데, 말투나 분위기에는 전혀 그런 게 느껴지지 않는다고. 마치 남의 일 이야기하듯이, 너무 담담하게 이야기한다고.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 불행하다고 느껴 본 적이 없는 것인지, 불행하다고 말하면 안 된다고 스스로를 다그쳐 온 것인지 모르겠더라. 성적이 모두인 중고등학교 시절을 나는 그 ‘모든 것’을 가진 자로 보냈고, 고등학생 때도 대학생 때도 학교 밖에서 ‘가진 것 없는 이’들을 만나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으니, 감히 나의 불행을 이야기하면 안 된다고 스스로에게 말해 왔는지도 모를 일이다 싶더라.
정말로 내가, 타인과 나의 불행을 비교하며 스스로에게 엄숙함을 요구해 왔는지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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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나는, 어떤 이유에서든 늘 힘이 없었고, 아무에게도 힘을 주지는 못하며 살고 있다. 어쩌면 좋을까, 늘 고민만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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