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자보다 큰 가자 (헬가 타윌-수리, 2016)

원문: Helga Tawil-Souri, “Gaza as Larger than Life,” in Helga Tawil-Souri and Dina Matar edited, Gaza as Metaphor, London, UK: Hurst, 2016, pp. 15-27.
* 원제의 “Larger than Life”는 직역하자면 ‘삶보다 크다’, ‘실물/현실보다 크다’는 뜻으로, 대단하거나 비범한 것을 가리켜 관용적으로 쓰이는 표현이다. 이 글에서는 가자가 시공간적으로 정의되는 가자 지구, 그곳에서 지금 현실적으로 영위되는 삶보다 더 큰 맥락과 의미, 미래에의 열망 등을 갖고 있다는 뜻으로 쓰인 말로 이해할 수 있다. 본문에서는 문맥에 따라 ‘삶보다 크다’ 혹은 ‘가자보다 크다’, ‘그보다 더 크다’ 등으로 옮겼다. (원문에서는 “가자보다 크다larger than Gaza/itself”라는 표현 또한 쓰인다.)

그대가 가자를 떠나면서 느꼈던 이 알 수 없는 기분, 그 작은 기분이 깊숙이에서 거인처럼 자라나야 하네. 커져야만 하네. 자네는 자신을 찾기 위해 여기 못난 패배의 잔해 속에서 그것을 찾아야 하네 […]
가산 카나파니, 「가자에서 온 편지」[1]

저 깊은 곳의 거인

가자에는 거의 이백만 명이 살고 있다 — 제각기 고유한 한 사람 한 사람의 삶과 경험이 들어차 있다. 이백만 개의 꿈, 인생사, 욕망, 두려움. 이백만 개의 고유한 지문과 이백만 쌍의 눈, 이백만 개의 고유한 억양. 좁디 좁은 땅에서 넘쳐 흐르는 이백만 개의 성격. 물자 부족과 폭력의 구조가 강제되는 데 굴하지 않고, 하나 하나 제 길을 연다. 그들은 그저 존재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는 삶이 있다. 또한, 삶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드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번성하기까지 한다. 가자에는 이윤을 좇는 이들, 사업가들, 미술가들, 무용수들, 마라톤 선수들, 서퍼들, 요리사들, 제빵사들, 번역가들, 강도들, 범죄자들, 연인들, 교사들, 목사들, 사진가들이, 연 날리는 이들이, 야심찬 의사들과 채식주의자들이 있다.

이백 만 개의 생존과 창조의 경험들이 있다. 그들을 가로막고 있는 상황들을 생각하면 대단한 일이다. 매일의 지략과 임시변통이 가자를 키운다. 가자는 열의로 가득하다. 배우려는, 매일 잠에서 깨려는, 시궁창 같은 곳에서 티끌만한 멀쩡한 것이라도 찾아내려는, 계속해서 — 그저 살아남기 위해서는 사랑을 위해서든 혹은 싸움을 위해서든 — 애쓰려는 열의로. 그 또한 장대하다.

가자는 거의 이백만 개의 이야기다. 제한된 자원으로 용케 길을 찾고 박탈과 폭력과 전쟁으로 정의되는 삶을 어떻게든 이어가는 이야기들이다. 끈기와 결의를 실천하는, 개인적으로도 집단적으로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날이면 날마다 그리 하는, 이백만 가지 방법이다. 때로는 제정신을 놓게 되리라는, 때로는 굶주리고 얼어죽고 팔다리를 잘리거나 폭격 당하거나 마비 상태에 빠지리라는 뜻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또한 잔해를 걷고 새로 시작하는 법을 배우리라는, 어떤 경우에는 잔해를 파쿠르 장으로 쓰는[2] 법을 배우리라는 뜻이기도 하다. 가자는 크나큰 삶에의 의지다.

가자는 생산적이다. 그저 살아남기 위해 재활용하고 재사용하는 식일 때가 많기는 하지만 새로운 무언가를 창조할 때도 있다. 가자는 자투리천을, UNRWA 캔버스백의 푸르고 흰 조각들을, 폐식용유를 활용해 옷을, 집의 ‘벽’을, 개조 엔진에 쓸 연료를 만드는 법을 배운다. 가자는 입에 치약을 한가득 문 채 창문 뒤 혹은 커튼 뒤에서 훔쳐보는 꼬마 아이들이다. 화장실이 없는 탓, 이를 닦을 ‘알맞는 시간’이 없는 탓, 할 수 있을 때 할 수 있는 데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사는 탓이다. 가자에서는 그때 그때 가능한 대로 해야 하기 때문이다. 바깥에서는 그저 혹은 타고나기를 폭력적이라 여겨지는 일들도 그 자체로 생성적이고 창의적인, 점령과 집단 수단이라는 고압적인 구조적 폭력에 저항하는 데 따른 필연적인 결과다. 땅굴도, 카삼 미사일도, 웹사이트 해킹도, 약물 밀수도. 파쿠르 공연자들이 그러하듯, 가자는 돌아가고 가로지르고 통과하고 타고넘고 파고드는 움직임으로 지형지물을 탐색하고 주위환경과 대면하는 법을 배워나간다. 학교가 대피소가 된다. 허물어진 정착촌이 을씨년스러운 놀이터가, 고된 나날을 벗어나는 곳이 된다. 거실이 인터넷 카페가 된다. 놀이터가 시위 행진장이 된다. 가자에서는 그 무엇도 그냥 버려지지 않는다.

대부분을 그날 그날 되는 대로 할 수밖에 없지만, 가자에서는 수많은 것을 계획해야만 한다. 전기, 식량, 물이 있을지 없을지, 학교 친구나 선생님이 내일 살아있을지 아닐지 결코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가자는 거의 이백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구할 수 있는 — 얼마 없고 낡았대도 — 기술적, 자연적, 상징적 자원을 계속해서 생산적으로 활용하는, 소리 없는 생명력을 보여준다. 가자에는 학교가, 대학이, 문화 허브가, 경찰서가, 감옥이, 과수원이, 공장이, 인쇄소가 있다.

가자는 줄곧 글을, 시를, 사진을 쏟아낸다. 그 상당 부분이 지난 수십 년간 팔레스타인 문학, 미술의 기풍의 근간을 이루었다. 그러나 그 기풍이란, 그 거대함이란, ‘정상적인 삶’이 거의 불가능한 조건 속에서도 계속되고 새로이 생성된다는 것이다. 어린 소녀가 인스타그램에서 천 명도 넘는 팔로어를 모은다.[3] 새로운 시적, 미술적 형식들이 등장해 일부는 번역되고[4] 일부는 비교적 덜 알려진 채 가족이나 친구들끼리 돌려 본다.[5] 가자는 세상과, 세상은 가자와 단절되어 있지만, 가자는 최신 유행을 따라잡고 마음에 드는 것을 받아들이고 저만의 풍자를 창작하려 애쓴다. 주변화되기를 거부한다. 2014년 전쟁의 한가운데에서 합중국 전역의 사람들이, 이윽고 세계 곳곳의 사람들이 루게릭병 의식 제고를 위해 제 몸에 얼음을 끼얹는 영상을 찍었다. 가자에서도 언론이 아이만 알룰Ayman Aloul이 영상을 찍어 유튜브에 올렸다. 하지만 그는 폐허의 잔해를 쏟아 부으며 그것을 ‘돌무더기 챌린지rubble challenge’라고 불렀다 — 가자 사람들은 집에 있다가 폭격을 당한다는 데 대한 의식 제고를 위한 것이었다.[6] 세계 각지에서 퍼렐 윌리엄스의 〈해피Happy〉 뮤직 비디오를 현지 버전으로 찍어 올릴 때 가자에서도 몇몇이 동참했다.[7] 장-클로드 반담이 후진하는 볼보 트럭 두 대에 걸친 ‘궁극의 다리찢기’로 근육을 자랑하는 광고의 패러디 영상들이 나오자 금세 가자 버전도 나왔다. 사람이 미는 차 두 대에 걸친 다리찢기였다. 가자에는 연료가 없을 때가 많으니까.[8] 가자는 우리에게 말을 건다 — 종종 뿌리 깊은 유머와 아이러니한 재치로. 하지만 우리는, 가자를 둘러싼 소음이 아니라 가자의 소리를 들어야, 경청해야 한다.

가자는 끔찍하리만치 시끄러워지곤 한다. 쉼없이 윙윙대는 자나나zannana,[9] 굉음으로 구름을 찢는 F-16기, 쿵쿵대는 아파치 헬기, 발을 구르는 답케 무용수들, 기도 시간을 알리는 소리, 경적을 눌러대는 자동차와 전기자전거, 힝힝대는 당나귀, 그리고 소리를 지르고 진창을 철벅거리고 꺆꺆거리고 말싸움을 벌이고 낄낄거리고 울고 놀고 속삭이며 끝도 없는 갖가지 소리를 내는 아이들 — 정말 정말 정말 많은 아이들! — 까지. 가자는 문간에 플라스틱 의자를 꺼내 놓고 앉은 이웃들, 친구들, 가족들 사이에 날마다 이어지는 신실한 토론이다. 섬세한 타이밍으로 껍질 벗긴 마늘을 다지는 집디야zibdiya 절구질 소리, 채썬 가지 튀기는 소리다. 가자는 후두에서 나오는 ج(g) 소리다. 가자는 전투기의 배에서 나오는 폭탄이 속삭이는 휘파람을 들은 당신의 숨이 막히는 소리다. 가자는 군사 기술과 저항 전사들과의 폭력의 포효를, 혹은 돌아다니는 기계들의 포효 — D-9 불도저, 농부의 트랙터, 클라신klashin,[10] 폭격기, 감시용 드론, 빌딩 발전기, 집에서 만든 연료로 달리는 택시, 휴대전화 배터리 고갈 경고음 — 를 구분하는 법을 본능적으로 안다. 가자는 시끌벅적한 광장이고 골목길이다. 한날에 결혼식이 열리고 장례 행렬이 지나고 경찰이 행군하고 사내아이들이 축구를 한다. 박수를 치고 호각을 불고 발을 구르고 노래하고 구호를 외치고 기도하고 울고 소리지른다.

가자는 감각을 한껏 자극한다. 놀랍도록 다채롭다. 그래피티,[11] 벽화, 커튼 대신 혹은 방을 나누려 걸어둔 폴리에스테르 담요, 켜켜이 쌓인 녹, 화사한 유치원. 작은 배, 어망, 바다쳐 비쳐 춤추는 해무리, 회박죽 벽과 유리창을 비추는 석명한 석양빛. 가자는 생기로운 폐허와 잔해로 가득하다. 수백 년 된 돌결 진 대리석, 전통 방식으로 처리한 맘루크Mamluk 모스크의 석벽, 가자의 그리스 정교회들에서 볼 수 있는 하늘색, 옥색 이콘. 이스라엘의 지난 번 폭격으로 내려앉은 잿빛 잔해들 사이에서 비명을 지르는 분홍색, 초록색, 파란색 옷가지와 책. 가자에는 갖가지 향과 맛이 있다. 과즙 넘치는 토마토, 매운 맛 샐러드, 어찔해지는 아르길레argileh 물담배 연기, 썩어가는 쓰레기, 말 그대로 거리에 떠다니는 똥, 비만 오면 넘치는 하수구, 새로 짠 신선한 올리브유, 시장 매대에서 말라가는 생선, 퀴퀴한 경유, 수박, 달콤한 세이지 차, 사람의 땀. 가자는 초록색 눈에 금발인, 다크초콜릿 같은 갈색 피부인, 그리고 그 사이 갖가지 색인 이들의 다정한 목소리와 활짝 웃는 밝은 미소로 가득하다. 가자는 남자들의 빛나는 눈에서, 소매를 걷어 올린 팔뚝, 구름 위에 떠 있는 듯 온화하고 부드러우면서도 결연히 온 민족을 떠받치는 팔뚝에서 뿜어져 나온다. 가자는 검은색, 금색 토브thob를 입은 나이 든 베두인 여자들의 얼굴에 진 주름에 새겨져 있다.

가자의 거대함은 하염없이 행하는 인내에 깃들어 있다. 타오르는 뙤약볕 속에서 UNRWA 쿠폰을, 검문을, 국경 통과를, 유인물을, 휴전 중의 빵 한 덩이를, 할아버지 할머니의 발 아래에서 뜯겨나간 팔레스타인으로의 귀환을 기다리는 기나긴 시간에. 완충지대와 무인지대 건너편에서 이스라엘인들이 당신에게는 너무 짜서 어디에도 쓸 수 없는 물 몇 방울만 남겨주고는 스스로와 전 세계에 오직 자신들만이 사막에 꽃을 피울 수 있음을 증명하려 애쓰느라 당신의 지하수를 모조리 빨아들이기를 기다리는 데에 드는 인내심에 깃들어 있다. 가자의 거대함은 느닷없는, 물론 사전에 발표되지 않는, 폭풍우의 와중에 — 마찬가지로 완충지대 너머의 치들이 비가 너무 많이 오자 수문을 열어버린 탓에 — 당신의 집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3미터 깊이의 홍수에 대처하는 데 필요하는 인내심에, 결의에, 응급 조치에 깃들어 있다. 가자는 정착자들이 들어와서, 이스라엘 병사들이 보다 효율적으로 득실거리며 다닐 수 있도록 난민촌 골목을 확장해야 해서,[12] 당신 집에서 여전히 필라델피 회랑이[13] 보여서, 환중지대를 넓혀야 해서, 혹은 그저 그냥, 집을 한 번도 두 번도 세 번도 아니고 수십 번을 다시 짓는데 필요한 집요함이다.

이런 류의 인내와 결의는 본질적으로 가자적인 회복력이다. 연대, 우정, 종교적, 문화적 뿌리들, 그리고 역사적 권리들과 더 나은 미래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한 웅대하고 후한 끈기다. 봉쇄와 식량 부족, 단전에도 불구하고 가격을 올리지 않는 제빵사들과 의사들이 행하는 것이 바로 이런 회복력이다. 가진 것은 무엇이든 제her 주위의 이들과 나누는 회복력이다. 아무리 사정이 안 좋아도 손님에게는 — 먹을 것을, 이불을, 차를, 자리를, 혹은 대화를 — 부족함 없이 내어주는 후함이다. 모래바람 부는 무더위 속에서도, 집이 무너졌어도 말이다. 무엇보다도, 종교적으로, 정치적으로, 민족적으로, 어떤 손님이든 말읻다.

자원이 모자라도, 추방과 점령과 폭력과 상실이 초래하는 혼란 속에서도, 이백만 명이 그저 커져만 가는 끈기를 넘치도록 행한다. 가자를 쪼그라들게 하고 주변화하고 좌절 시키려는 시도가 끊이지 않는데도 그러하니 더더욱 인상적이다. 가자의 생존법은 아낌 없이 내어주는 것이며 가자 사람들의 생의 감각은 품이 넓다. 가자는 삶보다 크다. 생에의 의지가 어마어마하므로, 하루하루 생존하는 강인함이 그야말로 마음을 잡아끌기에, 넋이 사로잡힐 만한 집단적 투쟁, 신화적인 정치적 투쟁을 하기에. 가자는 삶보다 크다. 가자는 불멸한다고, 우리에게 연신 말하기에.

어떤 샘에서 물을 마시면 혹은 어떤 벤치에 앉으면 다음에 또 오게 된다는 식의 전설 같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곳은 세계 도처에 있다. 사라예보나 로마, 예루살렘 같은 도시들은 너무나도 매력적이라 한 번이라도 그 매력을 느껴보면 반드시 또 가게 된다고들 한다. 가자도 그렇다. 더하다. 인구 3/4 가량에게 가자는 원래의 출신지가 아니기에. 가자는 그들이 착륙할 곳을 찾아 한자리를 빙빙 도는 비행기처럼 떠밀려 온 곳이다. 가자에서의 삶은 삶보다 크다. 가자 역시 가자보다 크다. 그 거대함은 바깥으로 뻗어나간다.

커다란 그림자

이스라엘에게 가자는 사라지지 않을 위협적인 그림자다.

물론 가자의 ‘위협’은 이스라엘이 과거에나 현재에서 팔레스타인의 파괴 위에 지어져 있다는 역사적인 — 또한 이스라엘은 시인하지도 인정하지도 바로잡지도 않는 — 사실에서 비롯된다. 가자 지구는 자연히 형성된 ‘지구’가 결코 아니다.[역주1] 수 차례의 과정이 만들어낸 산물이며, 그중 가장 가슴 아프고 강제적이었던 것이 시온주의 군사조직들이, 나중에는 이스라엘 국가가 — 주로 팔레스타인 남부의 — 크고 작은 도시, 사막 오아시스, 농경지대의 팔레스타인인들을 몰아 넣고 문을 걸어잠근 때의 일이다. 이집트를 비롯한 공범들이, 그리고 여러 국가와 기관으로 구성된 국제 사회가 이를 도왔다. 이런 역사적 사실과 오늘날의 그 결과는 팔레스타인인들이 언젠가는 정의가 혹은 시간이 혹은 신이 자신들의 편에 서리라고 믿는 이유를 이해할 한 가지 방법이기도 하다.[14]

가자의 그림자는 크게 드리운다. 이스라엘이 가자를 떠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가자의 사방에, 위에, 아래에 상존하며 기세등등하다. 하늘과 바다를 통제한다. 감시용 체펠린 비행선에, 무인항공기에, 포함에, 둘레에 지뢰를 묻어둔 완충지대에, 적외선·감마선 탐지기에, 저 멀리 텔 아비브나 네게브에 앉아 유사시에 사살할 수 있는 군인들이 원격으로 조종하는 로봇 기관총 탑에 있다. IDF가 주문처럼 외는 “마찰 없는 통제”라는[15] 말은 원거리와 지근거리에서 행해지는 이스라엘의 통제를 은폐할 뿐이다. 이스라엘과 가자 사이의 ‘경계’는 모두, 갇혀 있는 이들에게는 그저 잔인한 농담이다. 계속되는 습격, 암살 공습, 강도 높은 공중 감시, 주기적인 대규모 침략, 드론, 위성, 살인 기계를 통한 부단한 영구적 지배. 경계와 장벽은 가자를 가두어 두기 (또한 다른 팔레스타인인들이나 이스라엘의 지배를 따르려 하지 않는 다른 이들이 들어가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며 이스라엘의 힘은 가로막지 않는다.[16] 이스라엘이 실제로 ‘철수한disengage’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게다가 가자에서 이스라엘은 스펙터클한 폭력의 순간들에만, 수천 명이 함께with(out) 사는 법을 배워야만 하는 환상지나 심리적 상처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일상사가 되어버린 — 식료품과 의약품의 제약, 연료와 하수 펌프 공급 제한, 어장 오염과 경작지 파괴를 통하는 — 미묘한 형태의 죽음들 속에도 존재한다. 이스라엘은 전기를, 인터넷 속도를, 통신 기반시설을 제한한다. 이스라엘은 모든 곳에 있다. 팔레스타인인들의 신분증에 내장된 생체정보·프로파일링 기술에, 지붕 ‘노크’와 위협적인 문자 메시지에, 프로파간다 방송을 위한 라디오·텔레비전 신호 탈취에, 그외에도 수많은 곳에. 한 순간도 놓치지 않는 이스라엘의 고집스럽고 부단하고 격렬한 존재가 가자에서의 삶을 속박한다.

가자는 커다랗게 다가온다. 이스라엘의 점령과 식민주의 앞에서 팔레스타인이 처한 궁지의 중심에 여전히 가자가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가자를 잘라내고 주변화하고 파편화하고 빈곤화하고 ‘쪼그라들게’ 하려는 시도가 이스라엘 작동 원리의 핵심이다. 가자는 주변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중심으로 남아 있지만, 또한 주변화되기에 중심으로 남아 있다. 바꾸어 말하자면, 더 큰 전체의 일부이기에, 가자는 가자보다 크다.

가자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역에서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가해지기도 유보되기도 하는) 분리, 불평등, 폭력이 벌어지는 체제가 발현되는 중심이자 결과다. 가자의 생산은, 그리고 빼먹으면 안 될 가자의 파괴는 — 1930년대, 1940년대를 떠오르게 하는 대규모 도시 황폐화를 비롯해 —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팔레스타인인 추방이라는 역사의 호 속에서 벌어진다. 가자는 야파, 하이파, 예루살렘과 함께 시온주의 식민 기획에 의해 돌연히 팔레스타인의 도시적 근대성이 끊어진 곳이다.[17] 그렇기에, 지구상에서 가장 인구밀도 높은 곳들을 품고 있는, 문자 그대로 암흑시대를 살고 있는, 처리되지 않은 오수와 무너진 건물들의 잔해 위에 떠있는, 줄곧 ‘다이어트’ 중인, 기반시설들은 고통에 몸부림치고 갖가지 빈곤이 늘어만 가는, 팔레스타인의 (도시적) 조건은 계속되는 팔레스타인 ‘나크바화’의 한 기능이다.[18] 1948년 이전 팔레스타인 땅에 초래된 문화적, 경제적, 사회적 황폐화는 지금까지도 팔레스타인인들을 뒤흔드는 상실이다 — 또한 난민이 원래 주민보다 훨씬 많은 가자에서 훨씬 두드러진다.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황폐화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는 점이다. 가자는 시온주의적 확장과 이스라엘의 점령이라는 현재진행형의 맥락과 떼어 놓을 수 없다.

여기에는 전진 (미래) 운동도 있다. 가자는 집단적 유폐와 감금이라는 이스라엘 정책의 정점을 보여준다. 가자의 그림자는 서안의 미래에 드리운다. 팔레스타인인은 인구 밀도가 높아지고 있어 다층 아파트로 위를 향하고, 곳곳이 갈수록 조밀해진다. 아파트 안에서나 쪼그라들고 있는 영토 전체에서나 마찬가지다. 이스라엘의 토지 수탈, 군사 지대 확장, 장벽·검문소·우회로·완충지대 건설 — 모두 줄기차게 이어진다 — 은 팔레스타인의 성장을 점점 더 좁은 조각들에 욱여 넣는다. 아마도 라말라의 버블 붐이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다. 예루살렘의 유대화와 탈아랍와, 팔레스타인 영토 전역의 경제 상황 악화가 라말라의 밀도 증가를 부추긴다. 좁다란 빈 땅들을 다층 아파트가 에워싼다. 그러나 라말라는 갈수록 죄어들기만 하는 이스라엘에, 팔레스타인을 더 많이 앗아가려는 이스라엘의 꺾이지 않는 고집에 둘러싸여 있다. 라말라는 또한 1990년대 후반 이후로 사실 상의 수도 노릇을 하고 있으며 현재는 나이트클럽과 호텔, 노천 시샤 라운지, 기업가 양성 기관, 신흥 현지·해외 엘리트들로 가득해, NGO와 디아스포라 팔레스타인인들의 투자가 몰린다. 라말라는 팔레스타인인들의 ‘수확’터가 되었다. 1990년대 초중반에는 가자도 그랬다. 가자를 (IDF의 용어를 쓰자면[19]) 지붕 없는 ‘감옥penitentiray’로 만드는 구조가 라말라와 서안에 편재한다. 우리를 미래가 어떠할지를 — 가자 같을 것임을 — 안다. 그 미래가 언제 부과될 것인가 하는 문제일 뿐이다.

가자는 이스라엘의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이스라엘이 가혹하고 잔인하게 대할수록 가자는 더더욱 이스라엘에게 거슬리는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지도는 가자를 중심으로 밖으로 퍼져나가는 위협적인 동심원과 함께 그려진다. 삽화는 가자지구에서 이집트로 이스라엘로 구불구불 뻗어나가는 촉수 같은 땅굴과 함께 묘사된다.[20] 이 또한 커다란 가자다, 종종 걷잡을 수 없이 불거지는 듯 여겨진다. 화학요법으로 치료해야 하는 암으로, 강간해야 하는 여성으로, 꾸준히 ‘풀을 깎아야’[역주2] 하는 황무지로, 더없이 가혹한 기술들, 더없이 혹독한 ‘응답들’로[21] 벌해야 하는 감옥으로. 가자는 가자보다 훨씬 더 커서,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들까지도 모두가 이미 위협이다. 아무 이스라엘인에게나 עזה라고 말해보라. 두려움과 혐오감에 벌벌 떨 것이다.

울타리, 무기, 장벽, 여행 제한, 드론 뒤에서 요새화되지만, 가자는 제 자신을 넘어, 또한 갈수록 커지는 오해와 오보의 장막을 넘어 퍼져나간다. 이런 의미에서도 가자는 생성한다 — 대부분 자의는 아니긴 하지만. 가자는 이미지들을, 고정관념들을, 두려움들을, 단정들을 만들어 낸다. 한 가자 출신 필자의 말대로, ‘가자는 새로운 소재를 만들어 내는 데 능통하다. 태평한 시청자들에게 너무도 맛 좋은 TV 요리를 지어내는 데에. 다른 정상적인 삶의 — 사랑의, 기쁨의, 소리 없는 회복력의, 인간성의 — 기미들은 그들의 구미를 끌지 못한다.’[22] 가자는 — 문제적으로, 몰역사적으로, 지극이 인종주의적이고 단순화된 방식들로 — 위협적인, 후진적인, 비진보적인 모든 것을 상징한다. 가자는 야위어 간다. 똥통에 빠진다. 암흑 시대를 산다. 신에게 매달린다. 근본주의 이데올로기에서 위안과 자원을 구한다. 가자의 상황이 악화되면 그 이미지도 나빠진다. 그래서 가자는 담론적, 상징적으로도 생산적이다. 타자가 되기 때문이다 — 텔 아비브 혹은 아슈도드와 스데롯의, 마찬가지로 라말라의 ‘성공’의.

이 재현은 스스로 무럭무럭 자라난다. 가자는 이스라엘이 가자와의 ‘전쟁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정치경제적 가치들을 생성하고 적극적으로 생산하는 데 도움이 된다. 더 늘어난 ‘방위’ 지출과 새로운 군사 기술을 합리화해 더 많은 수익을 창출한다. 더 많은 공포, 더 많은 방어, 더 많은 장벽, 가자를 ‘작아’ 보기에 만들 더 많은 기법과 기술을 요구하고 생산하기까지 한다. 가자는 군사 시험장이, 이스라엘의 감시 및 ‘안보’ 기업들을 위한 마케팅 노다지가, 드론전을 시연하는 실험 사례가, 군인들이 자신의 탱크 조종술과 들뢰즈 톡해를 결합할 수 있는 공간이 된다.[23]

가자는 이스라엘 측에 생산적이다. 서안에서 벌어지는 이스라엘의 영토-정치 운동에서, 팔레스타인 민족을 분열시키고 ‘통일 정부’를 좌절시키고 미리 막으려 하는 이스라엘의 시도에서 주의를 돌린다. 이스라엘의 가자 연안 가스전 탐사에서, 이스라엘의 가자·서안 지하수를 갈수록 많이 퍼가는 데에서 주의를 돌린다. 가자보다 큰 이 그림자의 일부는 이스라엘이 현상 유지를 위해 적극적으로 만들어낸다. 이스라엘이 줄곧 위협 속에 놓여 있다는 상상된 그리고 실제적인 감각을 키워주기 때문이다.[24] 가자는 이스라엘이 만들어낸, 이스라엘을 놓아주지 않는 소용돌이가 된다.

이 과정은 가자를 점점 더 특수한 장소로 — 군사 시험장으로, 공포에 대한 사회 실험으로, 지상의 악몽으로 — 만든다. 가자는 산산조각으로 파열되고, 그 좁은 유폐된 영토로부터 제 상징을 바깥으으로 밀어낸다. 부정적으로 말하자면 가자는 오해를, 오인을, 고정관념 — 테러의 온상, 이슬람의 후진성, 팔레스타인 민족의 생래적 폭력성 등등 — 을 생성한다.

하지만 가자는 또한 학자들, 사상가들, 문인들, 미술가들, 활동가들에게 돌아가 제3세계 연대를, 정착자 식민주의를, 반제국주의 저항를, 프레레, 파농, 레닌, 마오, 체를 공부하라고, 그들의 이론적·정치적 논고들을 근본부터 다시 읽으라고 간청한다. 가자는 인류의 역사가 진보, 평등, 정의, 혹은 보편적 권리를 향해 목적론적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님을, 그런 것들은 울퉁불퉁 구불구불한 길들로 움직이며 그마저도 오직 소수만을 위한 것일 때가 너무도 잦음을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 또한 가자는 생성적이다. 가자보다 크다. 연결선을 그리고 우리에게 생각하기를, 다시 생각하기를, 상상하기를, 다시 상상하기를 청한다.

가자는 우리의 (암울한) 학문과 우리의 정치를, 그 은유들과 용어들을, 극한까지 밀어붙이는 사례다. 가자는 토지에서 공장으로, 감옥으로, 마침내 말살로 몰아가는 ‘인클로저’ 과정과 가장 약한 이들을 가두어 놓는 정치경제 구조의 현현이다. 가자는 들뢰즈의 ‘통제 사회’와 푸코의 ‘판옵티콘’이 한데 수렴되는 곳이자 동시에 그 한계가 드러나는 곳이다 — 후자의 경우에는 근대 규율 사회를 위한, 그리고 주체들의 행동을 영원히 가시적 혹은 가독적legible이게 만듦으로써 그것들을 관찰하고 정상화하려는 만연한 경향을 위한 이상적인 건축적 형상이며 전자의 경우에는 더 이상 (혹은 오직) 구체적인 구조들이 아니라 정보 수집 알고리듬들이 두루 퍼져 있는 매트릭스가 인클로저를 제한하는 곳이다.[25] 가자는 민간인 인구와 군대 인구의 경계가 흐려지다 못해 완전히 산산조각나는, 굴라그 내의 전원이 영원히 전쟁을 준비하고 따라서 삶을 부정 당하는 비릴리오의 ‘총체적 전쟁’을 실증한다. 이스라엘이 가자에서 벌이는 ‘전쟁’은 또한 즉각적인 정보, 소통, 파괴 수단의 통제가 지배적인 사회정치적 힘이 되고 갈수록 빨라지는 정보 조작과 효과적인 미디어 정치의 필요성에 의해 결정되는, 비릴리오가 주장하는 시간정치chrono-politics를 입증한다.[26]

장기화된 비상 상태가 정부의 권력으로 번역되는, 당국(이 경우에는 이스라엘)의 권한이 법을 넘어 확대되어 개인들(이 경우에는 가자 사람들)의 시민권을 박탈하고 그리하여 이 개인들을 ‘벌거벗은 생명’ — 아무런 벌도 받지 않고 죽일 권리를 내세우는, 또한 대상이 되는 인구(이 경우에는 철수 이후의 가자)에 대한 모든 도덕적, 정치적, 혹은 인간적 책임에서 벗어난 식민 권력에 언제든 희생될 수 있는 [순전히] 생물학적인 존재 — 으로 만드는 조르지오 아감벤의 ‘예외 상태’,[27] 가자는 그 최신의, 그리고 아마 가장 단적인, 사례다. 아실 음벰베가 말하듯, 아감벤과 푸코의 생명권력(규율 권력과 생명정치의 — 후자는, 넓게 보자면, 생명이 정치적 통제와 계산의 대상이 되는 과정이다 — 아상블라주)은 더 이상 오늘날 재구성된 저항, 희생, 테러의 관계를, 혹은 더 간단히 말하자면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가자가 그 모범인 오늘날의 예속화 형식들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음벰베는 우리가 (생명권력과 반대되는) 죽음권력의 시대에, ‘파괴의 기술들은 보다 촉각적이게, 보다 해부학적이고 감각적이게 되었’고 주권 권력은 단지 그 신민들이 어떤 종류의 삶을 살지를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목숨을 거두어 가는 선택을 내리는 시대에 살고 있다고 주장한다. 음벰베가 보기에 오늘날 가장 ‘능란’하게 죽음 권력을 행사하는 것은 — ‘대다수 인구가 그들을 살아 있는 시체 상태로 몰아 넣는 생활 조건 하에 있는’ —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이다.[28]

이스라엘이 가자에 휘두르는 정치적 폭력은 또한 도시들을 죽이거나 없애려는 의도로 설계된 것으로 이해된다. 스티븐 그레이엄Stephen Graham은 이를 ‘도시살해urbicide’’라 칭한다.[29] 가자는 근대적 도시적 삶을 이루는 생활 수단들의 체계적 파괴, 군대와 인간이 벌이는 ‘탈근대화’ 과정이다. 무력으로 혼돈의 도시 지독을 만듦으로써, 이스라엘의 폭력은 아랍 도시들에 대한 자기실현적 예언 — 데릭 그레고리Derek Gregory의 말을 빌리자면, ‘비유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근대의 바깥에 있는’ 혼돈적이고 단절된 도시 세계들 — 을 생산한다.[30] 이 과정에서 가자는 또한 도시 통제, 진정鎭定, 진압전의 새로운 기술들을 (말 그대로) 시험하는 곳이 된다. 이는 이윽고 몇몇 학자들이 가자를 도시전의 끔찍한 미래로, 도시 자체와 도시를 정의하는 조건들이 폭력의 전쟁의 (새로운) 징후가 되는 그런 곳으로 선포하는 데로 이어진다.[31] 에얄 와이즈만Eyal Weizman이 보기에 그 끔찍한 미래는 더 멀리, ‘ […] 문턱들 — 법의 한계들, 한 국가가 가하고 국제적으로 용인되는 폭력의 한계들 — 을 시험하고 밀어붙이는 데로 나아간다.’[32]

그래서 가자는 그 경계를 한참 넘어 커지고 퍼진다. 가자는 가자보다 크다. 가자는 우리에게 세계에 대해 말해주기에, 또한 가자는 우리 세계의 수많은 과정들 — 가두는 기술들, 군대의 권력, 전지구적 자본주의, 법적 공격, 전방위적 감시, 현대판 식민주의 등등 — 이 한데 모이는 곳이기에. 한편으로는 또한, 저항하기에, 가자는 마찬가지로 아파르트헤이트, 정착자-식민주의, 신자유주의, 인종주의, 빈곤, 다양한 형태의 불평등과 착취를 이겨내고 종식시키려 하는 다른 운동들과 이어진다. 그렇기에 가자는 바깥으로 뻗어나간다. 가자의 그림자는 예컨대 미주리주 퍼거슨으로 이어지는 모든 길에 — 흑인들과 가자 사람들이 공유하는 박탈과 계속되는 구조적 폭력의 역사에, 계속해서 흑인과 팔레스타인인의 몸들을 공격하면서도 (백인) 미국 경찰과 이스라엘 군대가 누리는 면벌권에, 비슷한 저항 전술과 자료를 사용하는 데에, 그 외의 여러 유사성들에 — 가닿는다.[33]

이것이 가자보다 큰 가자다. 부분적으로는 가자가 너무나도 (영토적으로) 접근불가능한 곳이 되어버렸기에 크게 드리우는 그림자다. 바깥에서 가자에 관해 보여지고 이론화되는 것 대부분은 그 참상, 결핍, 빈곤, 고립, 비참에 관한 것들이다. 이스라엘은 아무런 벌도 받지 않고 합중국은 폭력의 지원과 지속에 너무도 구체적으로 가담하고 있다는 데 관한 것들이다. 국제 사회의 침묵과 공모에 관한 것들이다. 요컨대 가자는 우리 근대 사회의 모든 병폐를 상징하게 된다. 이것은 더 이상 그저 있는 그대로의 가자가 아니라, 은유적인 가자다.

그러나 우리는 가자의 참상에 사로잡히기도 하지만 그 반대의 것 — 가자가 얼마나 웅대한지 — 에도 끌린다. 여기서 나는, 무엇이 가자를 그렇게 갇혀 있는 중에서 커지게 만드는지를, 팔레스타인의 — 그리고 인간의 — 투쟁에 있어 가자의 거대함을 다시 보고자 한다.

한 민족의 위대함

가자는 어쩌면 우리를 어둠의 핵심을 일별하도록 떠밀겠지만, 또한 그만큼, 포기하지 않은 인간성의 핵심을 드러낸다. 가자는 각주가 아니다.[34] 식민자가 두려워하는 것 — 진압할 수 없는 민중 —의, 그보다 더 큰 그림자다.

가자는 두말 할 것도 없이 팔레스타인 저항의 둥지다. 가자를 빼고서는, 또한 동시에, 팔레스타인 민족과 저항을 가자에 다시 끼워넣지 않고서는, 팔레스타인의 민족성nationhood과 저항, 그 역사와 미래를 이해할 수 없다. 가자는 우리의 저항이 가장 강력한 곳, 우리의 슬픔이 가장 깊은 곳, 우리의 외로움이 가장 선연한 곳이다. 세계의 무관심이 가장 가혹하고 가장 쓰라린 곳이다. 가자는 광대하다. 무엇보다도, 움 일 무카와메umm il muqqawameh (저항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가자는 사지를 자르고 턱을 으스러뜨려도 필사적으로 싸운다. 맞선다. 소리 지른다. 당신은 우리를 가둘 수 없다. 우리를 쥐어짤 수는 있을 것이다. 굶길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건재할 것이다. 가자는 팔레스타인의 버드나무다. 구부러지고 뒤틀리겠지만 꺾이지 않는다. 가자는 앞으로도 우리 고향땅의 이야기의 최전선을 지킬 것이다. 그러므로 가자는 가자보다 크다. 팔레스타인의 상황 — 그 병폐와 참상만이 아니라 그 끈질긴 존재 — 의 중심에 있기 때문이다.

기실, 이스라엘과 합중국, 이집트와 PA, 가자 너머의 다른 이들이 가자를 ‘쪼그라뜨리려’ — 가자를 영토적으로 가두어두려, 사기를 꺾으려, 그 최신의 정치적·종교적 분파들을 주변화하려, 가자 경제 발전을 막으려, 그 기반시설들을 수십 년 전으로 되돌려 묶어두려 등등 — 하면 할수록, 가자는 중심이며 거대하다는 점이 더더욱 명백해진다. 이 가자보다 큰 가자가 바로, 시온주의 기구들과 이스라엘 체제가 숱하게 가로막으려, 부단히 무너뜨리려 해 온 상대, 계속해서 그에 실패하고 있는 상대다. 이 가자보다 큰 가자는 이스라엘과 세계의 양심을 이겨낼 것이다. 가자가 가닿는 것은 우리 팔레스타인인들은 오래 전부터 이미 알고 있는 바로 그것 — 우리는 아무 데도 가지 않는다 — 이기 때문이다.

가자는 가자보다 크다. 매혹적이고 경이롭고 신화적이고 넑을 사로잡고 비범하고 인상적이고 어마어마하고 비현실적이고 무겁디 무겁고 기적적이고, 무엇보다도, 견고하다. 가자는 우리의 의무다.

물론 묻고 싶을 것이다. 그게 가능할까? 당신이 계속 살아남을 수 있을까? 당신이 영원히 저항할까? 당신이 팔레스타인의 근간으로 남을 수 있을까? 당신이 앞으로도 줄곧 우리의 대의에 생명의 숨길을 불어넣을 수 있을까? 당신이 식민주의, 군사주의의 추악함과 악독함을 견뎌낼 수 있을까? 당신이 세계의 온갖 참상을 극복할 수 있을까? 당신이 삶보다 클까?

그렇다 — 가자는 이렇게 답한다.

주

* 대괄호 속의 것은 역자가 추가한 말이다.
* 출처로 제시된 웹페이지의 상당수는 현재 열리지 않는다.

↥1 Ghassan Kanafani, ‘Letter from Gaza,’ Short Story & Essay Writing, 1991, pp. 77-80 [번역은 직접 한 것이다. 공식 국역본은 가산 카나파니, 윤희환 역, 『뜨거운 태양 아래서』, 열림원, 2026에 수록되어 있다.]

↥2 파쿠르는 인체의 강인함과 유연성, 그리고 (주로 도시의) 주위 환경에 있는 모든 것을 활용하는데, 체조 및 스트리트 댄스와 결합된 군사 장애물 코스 훈련과 비슷하다. 개인으로든 단체로든 공연을 할 때 공연자는 주위 지형지물을 돌아가고 넘고 통과하고 그 위아래로 움직여야 한다. 예로 가자 파쿠르·프리러닝 팀의 페이스북 페이지를 보라. https://www.facebook.com/Gaza.PKT, 2016년 1월 7일 최종 접속.

↥3 마라 마제드 엘와디아Marah Majed Elwadia의 인스타그램 주소는 다음과 같다. https://instagram.com/marahgaza/

↥4 최근 사례 둘을 들어보자면 다음과 같다. Refaat Alareer (ed.), Gaza Writes Back: Short Stories from Young Writers in Gaza, Palestine (Chrlottesville, VA: Just World Books, 2014); Atef Abu Saif (ed.), The Book of Gaza: A City in Short Fiction (Manchester: Carcanet Press Ltd., 2014).

↥5 예로 사라 알-카티브Sarah Al-Khatib의 핀터레스트 페이지를 보라. https://www.pinterest.com/sarahsos946/my-paintings/, 2016년 1월 7일 최종 접속.

↥6 다음을 보라. http://www.dailymail.co.uk/news/article-2734142/People-Gaza-turn-RUBBLE-bucket-challenge-html, 2016년 1월 7일 최종 접속.

↥7 적어도 두 가지 버전이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nFtG3ZZKCSk 및 https://www.youtube.com/watch?v=S4gu27QVzOCc.

↥8 다음을 보라. https://www.youtube.com/watch?v=a5LuoVZNCXM, 2016년 1월 7일 최종 접속.

↥9 드론의 소리를 표현하는 의태어로, 내가 아는 한 가자 특유의 단어다.

↥10 [소련의 미하일 칼라시니코프가 개발한 AK-47 돌격 소총의 통칭인] 칼라시니코프Kalashnikov의 현지 발음.

↥11 예로 다음을 보라. Mia Grondahl, Gaza Graffiti: Messages of Love and Politics (Cairo: The American University in Cairo Press, 2010); Bill Rolston, ‘Messages of allegiance and defiance: the murals of Gaza,’ Race & Class 55(4), 2014, pp. 40-64; Julie Peteet, ‘The writing on the walls: The graffiti of the Intifada,’ Cultural Anthropology 11(2), 1996, pp. 139-159.

↥12 1967년 전쟁 이후 남부 사령관으로서 아리엘 샤론은 좁은 난민촌 골목에 길을 내어 탱크와 무장 병력 수송 차량이 쉽게 다닐 수 있도록 수천 채의 가옥을 불도저로 밀어버리라는 명령을 내려 ‘불도저’라는 별명을 얻었다. 나는 라파 난민촌에 사는 사람들이 이를 두고 ‘샤론 대로Sharon’s boulevards’라고 부르는 것을 들어보았다.

↥13 라파 접경 옆에 위치한 14km짜리 경계 지대로, 1979년 이스라엘과 이집트의 평화 협정에서 비무장 완충 지대로 지정되었다. 당시 이스라엘과 이집트는 이스라엘이 이곳을 통제하는 데 합의했다. 가자에서 이집트로 이어지는 땅굴을 판 지역이자 1990년대 이후로 이스라엘군이 가옥들을 밀고 (가자 쪽의) 완충 지대를 확장해 온 지역이기에 무수한 폭력이 벌어져 온 곳이다.

↥역주1 ““가자 지구strip”라는 말은 1948년 나크바 이후에야 생겨났다. 그 전에는 가자 지방district이 있었다. 대략 1,196 평방킬로미터에 이르는 크기였다. 나크바 이후에는 — 원래 크기의 1/4에 못 미치는 — 겨우 365 평방킬로미터로 줄었다. 1948년 이전, 가자 지방에는 15만 명의 팔레스타인인이 살았다. 나크바 후에 새로 형성된 가자 지구 인구는 28만 명 — 원래 인구 중 8만 명, 다른 곳에서 피란 온 난민 20만 명 — 으로 불었다.” 아베드 아부 샤데, 「가자 인종학살은 ‘버그’가 아니다 ― 이스라엘 체제의 작동 원리다」, 2025)

↥14 물론 역사를, 말하자면 ‘정 반대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의 역사는 억압이 종식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형태를 취함을, 패자들이 아무리 정당한 대의를 갖고 있어도 마침내 혹은 반드시 승리하지는 않음을 몇 번이고 보여준다. 그러므로 어쩌면 팔레스타인인들은 그저 망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논쟁은 끝없이 이어질 수 있다. 역사적으로 ‘패배자’는 유대인이었으며 이스라엘은 어떤 역사적 과오들을 ‘바로잡은’ 결과라고 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15 다음을 보라. Helga Tawil-Souri, ‘Digital Occupation: Gaza’s High-Tech Enclosure,’ Journal of Palestine Studies 41(2), 2012, pp. 27-43.

↥16 다음을 보라. Helga Tawil-Souri ‘The Technological End Between the “Inside” of Gaza and the “Outside” of Gaza,’ 7iber, September 2014, https://www.7iber.com/the-technological-end-between-the-inside-of-gaza-and-the-outside-of-gaza/, 2016년 1월 7일 최종 접속.

↥17 Lisa Taraki, ‘Urban Modernity on the Periphery: A New Middle Class Reinvents the Palestinian City,’ Social Text 26(2), 2008, pp. 61-81.

↥18 이와 비슷하게, 조셉 마사드Joseph Massad는 팔레스타인인들을 ‘재앙 당한, 혹은 재난 당한 사람들catastrophe-d or disaster-ed people’을 뜻하는 만쿠빈mankubin이라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Joseph Massad, ‘Resisting the Nakba,’ Al-Ahram Weekly 897 (15-21 May, 2008). http://weekly.ahram.org.eg/2008/897/op8.htm

↥19 Israel Ministry of Foreign Affairs, ‘Agreed Documents on Movement and Access from and to Gaza,’ 15 November 2005.

↥20 이스라엘의 여러 공식 기구들은 물론 이스라엘 국내외 언론들에서 미사일 위협 지도를 작성한다. 《예루살렘 포스트》에 처음 실린 한 지도는 여기에서 볼 수 있다. http://www.cameraoncampus.org/blog/wp-content/uploads/2013/05/map.jpg, 2016년 1월 7일 최종 접속. IDF의 트위터에 게시된 지도는 여기에 올라와 있다. http://www.idfblog.com/wp-content/uploads/2014/07/Map-Amlach-new-EN1jpg, 2016년 1월 7일 최종 접속. IDF는 가자와 이스라엘 사이에 뚫린, 2014년 여름 전쟁 당시 지하 연결망에서 전사들이 개미떼처럼 쏟아져 나오는 땅굴 이미지 여러 장을 트위터에 게시하기도 했다. https://kristiann1.files.wordpress.com/2014/07/10466976_812423412113864_7528886616213082666_0.jpg 및 http://honestreporting.com/wp-content/uploads/2014/07/IDF-tunnels.jpg, 2016년 1월 7일 최종 접속.

↥역주2 이스라엘의 “잔디 깎기” 전술을 가리킨다.

↥21 이스라엘 참모총장 모세 야알론은 2002년에 가자를 두고 ‘화학요법이 필요한 […] 실존적 위협을 가하는 […] 암’이라고 말한 바 있다. Baruch Kimmerling, Politicide: Ariel Sharon’s War Against the Palestinians (New York: Verso, 2003), p. 165에서 재인용. 2014년 여름 전쟁이 벌어진 동안 가자 여성들을 강간해야 한다는 함의를 띤 여성혐오적, 폭력적 수사가 몰아쳤다. 다음을 보라. David Sheen ‘Israel’s War Against Gaza’s Women & Their Bodies’ (23 July 2014): http://muftah.org/israels-war-gazas-women-bodies/, 2016년 1월 7일 최종 접속. 이스라엘 정착자 식민 기획의 인종화된 제거 논리가 구조적으로 팔레스타인 여성들의 신체와 섹슈얼리티를 표적으로 삼아 온 긴 역사에 대해서는 다음을 보라. Nadera Shalhoub-Kevorkian, Sarah Ihmoud and Suhad Dahir-Nashif, ‘Sexual Violence, Women’s Bodies, and Israeli Settler Colonialism,’ Jadaliyya (17 November 2014): http://www.jadaliyya.com/pages/index/19992/sexual-violence-women’s-bodies-and-israeli-settler, 2016년 1월 7일 최종 접속.

↥22 Atef Abu Saif, The Drone Eats With Me: Diaries from a City Under Fire (London: Comma Press, 2015), p. 76.

↥23 Eyal Weizman, ‘The Art of War,’ Frieze 99, May 2006, http://www.frieze.com/issue/article/the_art_of_war/, 2016년 1월 7일 최종 접속.
[24]: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상징적으로 비대칭적이지만, 이스라엘 역시 포위 당해 있는 국가임을 적어두어야 할 것이다.

↥25 예로 다음을 보라. Michael Dahan, ‘The Gaza Strip as Panopticon and Panspectron: The Disciplining and Punishing of a Society,’ Proceedings Cultural Attitudes Towards Technology and Communication, 2012, pp.25-37, http://sammelpunkt.philo.at:8080/2136/, 2016년 1월 7일 최종 접속.

↥26 Paul Virilio, Desert Screen: War at the speed of light (London: A&C Black, 2005). 예로 다음을 보라. John Collins, Global Palestine (London: Hurst Publishers, 2011).

↥27 예로 다음을 보라. Lisa Bhungalia, ‘Im/Mobilities in a “Hostile Territory”: Managing the Red Line,’ Geopolitics, 17(2), 2012, pp. 256-275.

↥28 Achille Mbembe, ‘Necropolitics,’ Public Culture 15(1), 2003, pp. 11-40.

↥29 [라틴어 urbs(도시)와 cide(살해)를 결합한 조어다. ‘도시 파괴’, ‘도시 환경 파괴’ 등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Stephen Graham, Cities Under Siege: The new military urbanism (London: Verso Books, 2011).

↥30 Derek Gregory, ‘Defiled Cities,’ Singapore Journal of Tropical Geography 24(3), 2003, pp. 307-326.

↥31 Saskia Sassen, ‘When the city itself becomes a technology of war,’ Theory, Culture & Society 27.6 (2010): 33-50.

↥32 Eyal Weizman, The Least of all Possible Evils: Humanitarian Violence from Arendt to Gaza (London: Verso Books, 2012), p.96.

↥33 퍼거슨과 가자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가장 폭넓게 분석한 글은 David Palumbo-Liu, ‘Ferguson and Gaza: The definitive study of how they are and are not similar’ Salon (22 August 2014), http://www.salon.com/2014/08/22/ferguson_and_gaza_the_definitive_study_of_how_they_are_and_are_not_similar/이다. 2016년 1일 최종 접속.

↥34 의도적으로 조 사코Joe Sacco가 쓴 책의 제목과 ‘역사는 각주 없이도 나아갈 수 있다. 각주는 제아무리 그래봐야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라는 대목을 비튼 것이다. Joe Sacco, Footnotes in Gaza: A graphic novel (London: Macmillan, 2009), p.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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