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제에 다녀 왔다

연세대학교 총여학생회 여성제 콘서트에 갔다가 문득, 이름이 하나 더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내 이름말고, 이 세상의 이름 말이다.

사회자의 말 중에 "정해진 몸을 강요하는 가부장제와 이성애 중심주의…" 어쩌고 하는 부분이 있었는데,

따지고 보면 몸의 모델을 제시하는 건 ‘이성애’ 중심주의는 아니니까 말이다.

‘이성’이라 불리는, 남성과 여성, 여성과 남성의 성애면 되는 게 아니라, 어떤 여성, 어떤 남성이 정해져 있다는 건 ‘이성애’ 이상의 무언가가 중심에 있다는 뜻이니까 말이다.

가부장제는, 여성에겐 정해진 몸을 요구하지만 남성에겐 상대적으로 관대하니까 역시나 그걸로는 부족하다 싶고.

이런 뻔한, 누구나 알지만 딱히 새로운 이름을 내긴 곤란하고 귀찮은 이야길 쓰고 있는 건, 그저 문득 떠올랐기 때문이다.

간만에 만난 한낱 님은 <우리는 긴다>라는 신곡을 부르더라.(만든지 꽤 됐다고 하더라만, 내가 처음 들었으니 신곡)

가사가 익숙하다 싶었는데, 어느 장애인 당사자가 쓴 시를 엮어서 쓴 가사라고 했다.

일다로 블로그를 통해서만 보았던 레드걸 님의 공연은 생각보다 유쾌했다.

시종일관 심각한 표정이라, 웃으라고 넣은 건지 아닌지 몰라서 안 웃긴 했지만.

퍼포먼스가 끝난 후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 한 중년(중년임을 언급하는 것은, 대학교에서 만난 그 모습이 신선했기 때문이다.) 관객은 이렇게 말했다.

"슬그지를 하다 보면, 여성으로서나 남성으로서가 아니라, 한 사람으로서 멋있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해요. 공연 잘 봤습니다."

설거지를 슬그지라고 발음하는 어느 지방인지의 방언(아마도 서울 방언인 것 같았다)이 소박하니 참 와 닿았다.

춤에는 관심이 별로 없지만, 스윙시스터즈의 모녀 공연도 멋졌고, 싼티와싼초도 지난 번에 봤을 때보단 덜 무섭…더라.

콘서트가 끝나고, 낮동안 개방된 전시장을 못 본 이들을 위한 특별 야간 개장이 있었다.

스태프들이 천막에 불을 켜는데, 갑자기 길을 가는 사람들이 몰려 들기 시작하더라.

세상에나, 했는데, 마침 그 자리가 학교 셔틀버스 정류장인 것 뿐이었다.

그나저나 콘서트 할 때 옆에 앉았 있던 사람은 뭐하는 사람이었을까.

공연 내내 디엠빈지 뭔지로 야구를 보다가 말다가 보다가 말다가 하던데.

사람들이랑 데면데면한 걸 보면 총여 활동가도 아닌 것 같고, 일하는 게 엉성한 걸 보면 강당 직원도 아닌 것 같고.

활동가 애인이라서 구색 맞추기로 온 것만 아니면 좋을 텐데. 큭.

연세대학교 12회 여성제 <몸이 없어졌다> http://nobody2010.egloos.com/

한낱 http://blog.naver.com/stoptosmoke

레드걸 http://blog.naver.com/femnist1/

다녀왔어요

어딜 간다는 말도 안 했지만, 게다가 다녀온지 이미 한참 됐지만, 어쩌다 많은 이들이 걱정을 하게 되었으니 짧게나마.

8월 7일, 밤버스로 안동으로. 안동 댐에서 야영.

8월 8일, 안동댐에서 상주까지 자전거로 이동. 상주에서 대학생사람연대 도보순례단 ‘바람’에 합류. 승곡농촌체험학교 평상에서 노숙.

8월 9일, ‘바람’과 동행. 오전에는 계곡에 누워 책읽고 낮잠. 오후에는 일선교, 해평습지 등을 차량으로 이동하며 동행 취재. 저녁에는 구미에서 칠곡군까지 자전거로 이동. 칠곡군에서 극심한 두통과 허기로 고생하다 비까지 만나 히치하이킹. 코란도를 얻어 타고 칠곡시 진입. 찜질방에서 잠.

8월 10일, 태풍 소식으로 순례 중단. 대구 시내를 헤맨 끝에 시외 버스 타고 김해로. 김해 터미널에서 아버지 차로 집으로.

8월 11일, 폭우.

8월 12일, 자전거로 낙동강 따라 주남저수지 방문. 차도로 귀가.

이상으로 태풍으로 엉망이 된 낙동강 자전거 순례 종료. 자전거로 움직인 건 대략 8일 90km, 9일 25km, 10일 20km, 12일 50km로 약소합니다.

본 것은 안동댐, 하회마을, 낙동강 살리기 사업 37/36/34/31/30/15/14 공구, 금호강, 주천강, 화포천, 주남저수지 등.

아래의 사람들에게 감사를 전합니다.

떠나기 전날 걱정해 준 임명화생일파티 방문자들
떠나기 직전 걱정해 준 권효성, 이은주
센트럴시티로 배웅 나와 준 이은혜
예천인지 안동인지에서 물 주신 양파 농가 주민
안락한 숙소와 식사 두 끼를 제공한 ‘바람'(하지만 이들은 일정 변경으로 나의 하루를 앗아갔다)
칠곡 시내까지 태워 주신 코란도 운전자
태풍 소식에 걱정 문자 보내 준 조은실
대구 서부 정류장 가는 길을 알려 준 예닐곱 명의 대구 행인들
태워주고 먹여준 가족들
주남저수지 오가는 길에 길을 알려 준 예닐곱 명의 김해 및 창원 행인들

그리고 길안내·푸념듣기·걱정하기·일기예보·조난시연락처 등 온갖 역할을 해 준 김희선

나무가 쓰러진다

핸드폰으로 찍은 듯 조악한 영상 속에서 사람들은 곳곳에서 울고 곳곳에서 소리 질렀다. 전기톱에 나무가 쓰러질 때, 우격다짐에 사람이 쓰러질 때, 그들은 울고 또 소리 질렀다. 나의 눈 앞에서 그들은 포크레인을 막아 섰다. 포크레인의 삽날에 쓰러질 뻔 했던 굵은 나무를 껴안고 그들은 울었다. 그 모든 이야기들을 회상하면서, 그들은 또 눈물을 흘렸다. 눈물을 삼키며, 겪고 본 일을, 그리고 하고자 하는 일을 주억거렸다.

학교를 지을 성미산 공사 현장의 입구에는 ‘성미 숲속 학교’라는 팻말이 붙어 있다. 그 옆으로는 홍익 대학교 부속 초중고등학교의 예상도가 그려져 있다. 하루에도 몇 그루 씩 나무가 베어져 나가는 그곳은 홍익 재단의 학교들이 이전해 올 공간이다. 그 전에 그곳은 바로 앞에 자리한 성서 초등학교 아이들의 놀이터이자 지름길이었다. 그 아래 있는 성미산 학교의 아이들도 그곳에서 놀았다.

성미 숲속 학교라는 팻말은 힙 없는 이들이 택한 작은 싸움일 것이다. 그들이 산에 무슨 짓을 한다 한들 나는 산을 사랑하고 또 지키겠다는, 그들에 나에게서 산을 빼앗아 간다 하더라도 나는 그곳에서 해 왔던 것을 계속 하겠다는 선언일 것이다. 몇 년 전에도 한 바탕 공사가 벌어질 뻔 했던 성미산에는, 죽다 살아난 산을 지키겠다며 사람들이 심어 놓는 나무들이 빽빽하다.

성미산의 소유주는 홍익 재단이다. 그 전에는 한양 재단의 손에 있었다. 서울시도 얼마만큼을 갖고 있는 듯하다. 산을 소유한 그들이 나무를 베고 산을 헐어 건물을 지으려 할 때마다 주민들은 천막을 티고 나무를 심어 산을 지켰다. 자신들의 것이 아니니, 산을 지킨다 한들 돈이 생기지도 당이 생기지도 않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했다.

지난 번에는 120일을 천막에서 살았다고 했다. 이번에도 벌써 두 달이 넘는 날들을 천막에서 보냈다. 몇 번이나 낫에 찢기고 발에 밟혔지만 그들은 자리를 비키지 않았다. 사람 힘으로는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아름드리 나무들을 한번에 쓰러뜨리는 포크레인을 그들은 사람의 몸으로 막았다. 날마다 산을 타며, 전기톱을 든 이들과 다툼을 벌였다.

쉬지 않고 흔들리는 영상 속에서 그들은 울고 또 소리질렀다. 아저씨, 다시 한 번만 생각해 봐 주세요, 주저 앉은 누군가가 울부 짖으면 옆에서 부탁하지 마, 부탁하지 마, 하고 중얼거리며 스스로를 다잡았다. 나무가 쓰러질 때마다, 사람이 쓰러질 때마다, 그들은 울고 또 울부짖었다.

2010/07/29 – [스크랩] – [스크랩]“성미산에는 숲을, 학교는 평지에”

http://www.prometheus.co.kr/articles/105/20100727/20100727184500.html

http://www.prometheus.co.kr/articles/102/20100729/20100729141900.html

http://www.prometheus.co.kr/articles/102/20100729/20100729142400.html

一夜

모니터 구석의 시계는 두 시 삼십 분을 가리킨다. 밖에서 높은 톤의 여자 목소리가 들려 온다. 무어라 말을 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비명 소리 같기도 한다. 신경이 곤두선다. 이윽고 따라 나오는 남자의 대거리. 그렇게 몇 번을 말이 오간다. 누군가의 비명이 들려 올까봐, 비명을 들은 내가 뛰어 나가지 못하거나 뛰어 나가서 아무 일도 하지 못할까봐 두려운 밤이 잦아진다. 다행히도 오늘은 뛰어 나가지 않아도 좋다 싶다.

시계는 이윽고 세 시를 가리킨다. 뛰어 나가지 않아도 좋겠지, 나는 침대에 눕는다. 어디선가 울먹이는 소리가, 그 사이사이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 온다. 싸움의 끝이 안 좋았던 것일까, 싸움이 아니었던 것일까―싸우는 연인의 대화라고 생각하고 성가셔 했던 그 소리가 실은 그게 아니었을까봐 또 두려워진다.

지금이라도 나가볼까 싶어 창으로 귀를 가져 가면 바깥은 고요하기만 하다. 숨을 죽이고 귀를 이리 저리 돌려 봐도 밖에서 울고 있는 사람은 찾을 수 없다. 다시 침대에 누우면 귓가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소용돌이 친다.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을 것을 알면서 다시 몸을 일으켜 창문에 귀를 댄다. 창틀 너머 방충망에까지 귀가 닿아도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침대에 누우면 어김없이 울먹이는 소리가 귀를 메운다.

결국 잠들기를 포기한다. 컴퓨터를 켜서 의미 없는 일을 하며 시간을 보낸다. 지칠대로 지쳐서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게 될 때까지를 버티면 시계가 가리키는 시각은 다섯 시를 넘어 선다. 다시 한 번 지친 몸을 침대로 가져 간다. 다행히도 귓속에서는 아무도 울지 않는다. 다만 밝아 오는 거리에서 사람들의 소리가 들릴 뿐이다. 거리를 청소하는 소리가 들려 온다. 재활용품 수거일이 아닌 새벽, 제멋대로인 사람들이 내어 놓은 종이들을 모으는 소리다.

뒤척이고 또 뒤척였으니 잠든 것은 아마 여섯 시 쯤일 것이다. 아홉 시가 채 못 되어 눈을 뜬다. 몸은 잠들기 전보다 더 무겁다. 다시 잠들어 보려, 부족한 잠을 마저 자 보려 애를 쓰지만 역시나 잠들기는 쉽지 않다. 침대에서 몸을 세우려 하자 마자 간밤의 소리들이 떠오른다. 귓속에서 다시 누군가 울기 시작한다. 날은 이미 밝았는데.

액막이

한동안 어째선지, 계속 연이 날리고 싶었다.

그러다 마침 한강에 가자는 김희선에게 연과 얼레를 갈취해서, 한참의 숙원을 풀었다.

바람이 불안정한 데다 옆 날개가 없어 연이 이리저리 흔들렸지만 그래도 잘 날았다.

천원 짜리 쟈이안트 얼레는 실이 짧았다. 

아직 연은 땅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는데 어느 순간 탁, 하고 얼레가 멈추더니 실의 끝이 보였다.

실 끝은 얼레에 묶여 있긴 커녕 한 번 감기지도 않은테 종이 테이프로 위태위태 붙어 있었다.

그것을 발견하고 제대로 묶어야지, 하고 생각하며 실을 잡는 순간, 또 한 번 탁, 하더니 연이 멀리 날아 갔다.

정월은 아니지만, 뜻한 것도 아니었지만, 액막이를 했다.

정월에는 이름과 셩년월일, 그리고 액을 날려 보내는 문구를 적은 연을 하늘에 띄우고는 싫을 끊는다.

한 해의 액운을 멀리 날려 버리는 의식인 셈이다.

물론 내 연에는 액을 날려 보내는 문구는 커녕 이름조차 적혀 있지 않았으니 액막이는 무효.

애꿎은 한강에 비닐이며 철사며만 빠졌다. 미안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