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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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년 반쯤만의 일인가, 학교 앞 자취촌, 그러니까 신림동 고시촌으로 이사를 했다. 학부에 다닐 때 살았던, 주방과 화장실을 타인들과 공유하는 10만원 대 중반의 옥탑방을 얻는 것이 목표였지만 늘어난 신축 건물들 틈에서 그런 구조의 건물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결국 주방과 화장실이 딸린 독립적인 옥탑에, 지금의 월수입보다 높은 월세를 주고 살게 되었다.
대학 4년 동안 자취촌에서 방을 구하러 다니면서 늘어난 것은 눙을 치는 실력밖에 없다. 내가 낼 수 있는 월세도, 내가 살 수 있는 방의 크기도, 조금도 늘어나지 않았다. 늘어난 눙을 치는 실력이래 봐야, 방 좋네요, 다른 방 몇 개만 더 보고 다시 연락드릴게요, 라는 말을 조금은 더 능청스레 할 수 있게 된 정도일 뿐이다. 방 좋네요, 라는 말은 비싸서 여긴 못 살 것 같아요, 라는 뜻이다.
월세 사십오만 원, 사십만 원짜리 옥탑방들은 그래도 환경이 나쁘지 않았다. 제일 처음에 보았던 삼십이만 원짜리 옥탑방은 화장실 입구가 방 바깥에 있고 사람 하나 누우면 여유 공간이 남지 않는 넓이였는데도 그 가격이었다. 마지막으로 본 방은 월세 삼십오만 원짜리, 한눈에 보기에도 매우 낡은 방이었다.
고시촌의 가파른 오르막을 두어 시간 가량 걸었더니 티셔츠는 땀에 젖고 다리는 욱씬거렸다. 이제 매일을 오르내려야 할 길이다. 대학에 다닌 사 년을 오르내린 길, 이번에 구한 방은 대학에 다닐 때 마지막으로 살았던 방과 같은 골목, 겨우 세 건물 남짓 떨어진 곳에 있다. 어느것도 변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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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탑방은 환경이 안 좋다, 는 건 대체로 맞는 말이다. 건물을 신축하면서 그래도 번지르르하게 지어 놓은 방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어디까지나 ‘그래도’의 수준일 뿐이다. 오르막을 걷느라 지쳐 불도 제대로 안 켜 보고 고른 방은 벽지가 누랬다. 샤워기에서는 물이 샜다. 콘크리트 건물의 일부인 옥탑에 샌드위치 패널을 덧대 증축한 세탁실 창문에는 방충망이 없었다.
대강 지은 것이고 오래된 것이니 저런 문제쯤은 접어 두어도 좋을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문이다. 신발 벗어 둘 공간이 따로 없는 옥탑방의 현관문은, 그 아래층들에 있는 원룸의 철문들과는 다른 나무문이다. 공간이 좁아 철문을 달 수 없었다거나 한 것도 아닌데, 양쪽으로 난 두 개의 문을 굳이 나무문으로 해 두었다. 열쇠를 걸 수 있지만, 열쇠 없이도 열 수 있을 허술한 문이다.
쓸데없이 긴 부엌은 싱크대와 가스렌지 사이에 문이 있고 조리대는 없어 편히 밥을 해 먹을 수 있는 곳은 아니다. 길어진 부엌은 화장실 공간을 잡아먹어, 샤워를 하다 조금만 주의를 놓쳐도 변기에 부딪혀 휘청거리게 된다. 화장실과 부엌의 전등을 켜는 스위치는 방문 바로 앞에, 방의 불을 켜는 스위치와 붙어 있다. 그래, 버튼 한 개짜리 스위치 세 개보다는 버튼 세 개짜리 스위치가 몇 푼이라도 싸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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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이틀 째, 방에서 바퀴벌레가 나왔다. 낮에는 여전히 보이지 않지만 밤마다 보이는 걸 보면, 방에서 잠을 자지 않은 첫째 날에도 바퀴벌레는 방을 돌아다녔을 것이다. 먹을 것이 아니면 죽이지 않는다, 는 원칙을 충실히 지켜 첫날은 바퀴 벌레 한 마리를 요구르트 통으로 덮어 잡아서 밖으로 내보내고, 천장에 가만 붙어 있는 네 마리는 방치했다. 이튿날엔 세 마리가 나왔고, 실수 없이 잡아서 밖으로 내보냈다.
사흘째가 되던 날은 바퀴벌레들이 활발히 움직였다. 손이 닿지 않는 천장에 붙은 바퀴벌레를 잡을 수 있도록 주둥이가 넓은 페트병을 준비해 두었다가, 잠들기 전의 두어 시간 동안 열 마리를 잡아 내보냈다. 그 과정에서 실수로 한 마리를 죽였지만, 실수는 실수이니, 이 날도 나는 삶의 방식을 유지할 수 있었다.
넷째 날은 다시 다섯 마리 가량이 나왔을 뿐이었지만, 전날보다 한층 활발했다. 이전의 바퀴벌레들 중 천장을 벗어난 것은 단 한 마리뿐이었는데, 이 날은 다섯 마리 중 세 마리가 방바닥을 기었다. 실수로 한 마리를 죽이고, 나머지는 병으로 잡아 내보낸 후 수퍼에서 바퀴벌레 약을 사 왔다.
내 눈에 띄지 않는 곳을 기어 다니는 바퀴벌레까지 다 죽이려 드는 것은 그래도 내키지 않아서 스프레이 형태의 약을 샀다. 바퀴벌레가 드나드는 장판과 벽지 사이의 틈에 약을 조금 뿌리고, 부엌으로 가서 냉장고 옆을 기어가는 바퀴벌레를 향해 약을 뿌렸다. 싱크대 옆에 있던, 이사 온 후 본 것 중 가장 컸던 바퀴벌레는 약을 뿌리자 맥없이 뒤집어져 움직임을 멈추었다.
눈앞에서 한 마리가 죽자 마음이 편치 않으면서도, 손은 더 잘 움직이게 되어 싱크대 위아래의 틈에도 약을 뿌릴 수 있었다. 뒤집어져 죽은 바퀴벌레를 치울 엄두는 여전히 나지 않았지만. 죽이지 않는다, 는 마음을 버리고 최소한으로 죽이자는 마음으로 돌아서는 데에는 나흘이 걸렸지만, 거기에서 닥치는 대로 죽이는 쪽으로 마음이 가는 데에는 단 몇 분도 걸리지 않았다.
뒤집어져 죽은 바퀴벌레는 오늘 아침에야 휴지로 싸서 버렸다. 아무렇게나 약을 뿌려 놓고도, 이제 내 마음 속에는 이유 없는 살생에 대한 죄책감보다는 언젠가 구석진 곳에서 발견될 반쯤 썩은, 혹은 반쯤 뜯어 먹힌 바퀴벌레 시체를 치울 것에 대한 걱정이 더 크게 자리하고 있다.
새로 이사 온 방에서 마주친 바퀴벌레는 내게 가장 큰 불청객이었지만, 반대로 몇 달 간 비어 있은 듯한 그 방을 온전히 자기네 것으로 삼고 있던 그들에게는 나야말로 불청객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단지 내 눈에 띈 것 이상의 행위를 하지 않았는데, 나는 내가 더 크고 내가 돈을 내고, 또한 손을 더럽히지 않고도 죽일 수 있는 도구를 갖추었단 이유만으로 그들을 내몰기 시작했다.
여전히 이 좁은 방에서 바퀴벌레와 공생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마음이 나흘 전보다 훨씬 작아졌음은 부정할 수 없는 일이다. 시체 치울 걱정만을 하면서도 나는, 손님들이 놀랄 것이라는 핑계를 만들고 있다. 내 손을 더럽히지 않고, 심지어 내 이름조차 더럽히지 않고, 누군가를 내몰고 누군가를 죽인다는 것이 얼마나 쉬운 일인지, 새삼 느끼고 있다.

근황

얼마 전, 지난 6년을 함께 한 그와 헤어졌습니다. 노래하고 춤추던 그와, 이제는 조금 다른 삶을 함께 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또 얼마 전, 시를 읽고 그림을 그리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어느 것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입니다. 그와 헤어지는 것도, 내가 또 다른 누구로부터 사랑받고 또 다른 누구를 사랑하는 것도.

여전히 글을 쓰기 위해 허우적거리고 있습니다. 이들이 노래하고 춤을 추고 시를 읽고 그림을 그리는 동안, 그밖에도 달리 많은 것을 할 동안, 나는 그저 닿은 글을 쓰기 위해, 나은 글을 쓰기 위해, 허우적거리고 있습니다.

아니, 포장은 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허우적거리지조차 않은채, 몸을 맡기고 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근황

요즘은 다시 쉴새 없이 글을 토해내고 있다. 학교 일도 직장 일도, 해야 할 일들은 어느 것도 손에 잡지 못한 채 영문도 모른 채 떠오르는 글들을 받아 쓴다. 어쩌면 가장 건강한 때, 어쩌면 가장 병든 때의 일이다. 언젠가 다시 읽으면 무슨 말인지 기억조차 못할 글들을 쉼 없이 토해 낸다.
요즘 쓰는 글들은 분명히 전에 한 번씩 쓴 글이다. 매사에 데자뷰는 심했다. 영상 뿐 아니라 문장도 감각도 감흥조차도 분명히 겪은 적 있는 글들만 골라서 토해내고 있다. 어쩌면 소화되지 않은 기억들이다.
토해져 나오는, 반나마밖에 소화되지 못한 기억들. 분명히 소화되지 않았음에도, 먹을 때의 향기는 간데 없고 역한 냄새만을 풍기며, 무엇인지 겨우 가늠할 수밖에 없는 망가진 기억들.
구역감을 참으며 속에 담아둘 수만은 없는 노릇이기에, 영문 모를 글들을 토해내고 있다.

서로에게 상처

용역들이 농성중인 세입자들을 힘으로 몰아냈다. 짤아도 몇 년, 길게는 이십 년을 장사해 온 곳에서, 이렇다 할 보상도 없이 쫓겨난 한으로 한 달 넘게 쪽잠을 자며 폐허가 된 가게를 지켜온 이들이다. 다른 곳에서라도 다시 장사를 시작해 삶을 이을 수 있도록 해 달라 외치고 있던 그들에게, 재개발 업체는 용역을 부려 주먹으로 답했다.
비가 오던 날, 한 때는 매일 출근해 장사하며 생계를 꾸렸던 곳, 최근에는 농성을 하며 밤낮을 모두 보냈던 곳, 한 때는 가게 주인으로 있었으나 지금은 ‘불법’ 점거자로 있는 곳, 그곳에서 쫓겨난 이들은 분에 겨웠다.
문을 막고 서 있던 용역에게 누군가 그렇게 살지 말라고 외쳤다. 용역은 두고 보라며, 당신 자식도 이 일 할 거라고 응수했다. 나는 너 같은 자식 없어, 하고 맞서자 저쪽에서는 나도 당신 같은 엄마 없다는 말이 돌아왔다.
서로에 대한 비난은 서로의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가족에 대한 비난으로 번져 갔다. 그렇게 몇 마디가 오가고, 용역은 눈물을 터뜨렸다. 그래, 나 엄마 아빠 없다, 내가 이런 일 하는데 왜 우리 부모님 욕을 하냐, 부모님 욕 하니까 좋냐, 그는 울먹거렸다.
사건의 발단, 혹은 원인이라 불릴만한 것은 다른 곳에 있었다. 어딘가 으리으리한 사무실, 계산기와 지도만을 갖고 사람을 움직이는 누군가가 있을 것이다. 그 아래에서 또 누군가가 다른 사람을 움직이고, 또 그 아래의 누군가가 사람을 움직이고.
그렇게 해서 세입자들은 쫓겨났고, 용역들은 쳐들어 왔을 것이다. 원인 모를 싸움 속에서 그들을 서로를 욕하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만지기는커녕 존재하는지 확신할 수조차 없는 이와 싸움을 벌이기는 힘든 노릇이다.
결국 남은 것은 상처뿐이었다. 서로에게 상처, 남에게 상처 주지 않고서는 삶을 꾸릴 수 없는 이와, 그에게 상처 주지 않고서는 자신의 삶을 지킬 수 없는 이, 이유 모를 싸움 속에서 남은 것은 그네들의 상처뿐이었다.

서울대 본부에 자보를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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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기 초부터 법인화 반대 자보를 써야지, 해 놓고는 여태 미적거리기만 했다. 학부 다닐 때는 곧잘 개인 명의로 자보를 써 붙였는데, 괜히 뻘쭘해서 같이 쓸 사람을 찾았지만 대학생사람연대도, 인문대 학생회도 딱히 릴레이 자보 같은 것을 쓰지 않아서, 계속 마음의 짐으로만 두고 있었다.
그러고는 얼마 전, 학생 비상총회가 열리고 본부 점거가 시작되었다. 어째선지 자보 쓸 생각을 못하고 있다가, 사회학과와 인류학과 대학원(아마 자치회가 있는)의 원생들이 연명한 자보가 붙은 것을 보고는 나도 하나 써야지, 하고 생각을 했다.
다른 과 친구의 연구실에 갔다가, 인문대 각과 대학원생들이 연명한 자보의 초안을 보았다. 여전히 혼자 쓰기는 뻘쭘해서 거기에 연명을 할까 했는데, 제목이 ‘후배들의 투쟁을 지지한다’고 되어 있더라.
학부생들이 전부 내 후배도 아닐뿐더러, 학번상 후배라고 해도 그렇게 부르고 싶지는 않아서 결국 서명하지 않았다.(그 자보는 후배 대신 학우라는 호칭으로 수정되어 게시되었다.) 그리고는 한 이틀 쯤 어찌 할까 망설이다, 자보 초안을 써서 연구실 문에 붙여 두었다. 읽어 보시고 연명해 달라는 글과 함께.
이틀 동안 붙여 두고 연명을 모아 게시하려 했는데, 첫날 사람들이 읽어만 보고 아무도 서명을 하지 않아서 종일 불안해했다. 두 세 명의 이름으로 거는 것도 물론 좋은 일이지만, 남들이 보기엔 ‘미학과 사람들은 관심이 없구나’ 하는 인상을 받기 십상이니 말이다.
한 일곱 명 쯤 모이면 성공이다 생각하고는 하루를 집에서 보내고, 자보를 게시하기로 한 날 학교에 와서 봤더니 의외로 많은 사람들, 열 세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이름을 적어 두었더라. 안도의 숨을 내쉬며, 기쁜 마음으로 점거 농성장 한 켠에 자보를 붙였다.
그리고 어제 저녁에 문자로 한 명, 오늘 연구실에 앉아 있는데 찾아 와서 한 명, 두 사람이 미처 서명을 못했다고 말하길래 이름을 따로 인쇄해서 풀로 붙였다. 그렇게, 나를 포함해서 열여섯 명의 이름이 담긴 자보가 지금 본부 점거 농성장에 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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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회에서 친구들이랑 같이 쓴 유인물을 뿌린 일은 졸업 후에도 종종 있었지만, 학교에 자보를 붙인 것은 2009년 이후 처음이다. 물론 자보를 만들고 인쇄한 것도. 덕분에 편집을 잘못해서, 제목이 다른 자보들 본문만한 사이즈로 나와버렸다. 제목 작게 나왔다고 전지를 그냥 버릴 수는 없으니 그대로 게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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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어떻게 쓸까 한참 고민했다. 인류학과 자보는 기억이 나지 않고, 사회학과 자보는 ‘사회학과 대학원생은 점거 농성을 지지합니다’는 정도의 문장이었던 것 같다. ‘미학과 대학원생’과 ‘지지합니다’는 정해져 있는데, 주격 조사와 목적어를 뭘로 해야 할지가 어려웠다.
농성 열흘 만에 뒤늦게야 붙이는 자보라, 미학과 대학원생들‘도’라고 썼다. 소위 ‘투쟁적’인 문체의 글이 아니라, 목적어는 ‘법인화 반대 투쟁’이나 ‘본부 점거’ 대신 ‘총학생회’로 했다. 대학원 총학생회가 없는 상황에서 사실, 믿을 만한 것은 미우나 고우나 총학생회 뿐이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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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붙인 자보 전문.

미학과 대학원생들도 총학생회를 지지합니다

6동 연구실에 앉아 있으면 마음이 산란합니다. 땅, 땅, 계속해서 들려오는 8동 공사 현장의 파일 박는 소리 때문만은 아닙니다. 8동을 허물고 새로 짓는 건물이, 중앙대의 인문대를 초토화시킨 두산의 건물이기 때문만도 아닙니다. 잊을만하면 들려오는 시간 강사의 죽음, 사기업 노동자들만큼의 대우조차 받지 못하는 학내의 다양한 노동자들, 영문을 모른 채 오르기만 하는 등록금―무엇 하나만을 탓하기엔, 대학은 이미 너무도 뒤숭숭합니다.

연구실도 강의실도, 어느 곳 하나 환경이 좋아진 곳은 없는데 건물 뒤로는 폭포가 만들어졌습니다. 땅속으로 원래 흐르던 물을 이용한 친환경적인 공사라고 적혀 있기는 하지만, 무엇 때문이 굳이 전기 펌프로 물을 퍼 올려다 떨어뜨리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무엇 하나 스스로는 살 수 없을 것이 뻔한, 이 개울을 보며 청계천을 떠올리는 이가 누구 하나만은 아닐 것입니다.

University라는 단어의 어원까지를 언급하며, 세상이 나아갈 답을 찾는 곳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하던 대학이, 답을 찾기를 포기한 듯 보이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기업의 사원 평가를 방불케 하는 학사 제도, 곳곳에 들어서는 기업의 간판이 달린 건물들, 공부와는 상관없는, 그렇다고 무엇과 상관있는지도 알 수 없는데도 끊이지 않는 공사들, 학교는 그저 바깥세상을 좇기만 하고 있습니다.

서울대법인화 법이 국회에서 날치기 처리되었습니다. 학교는 이마저도 그저 좇으려 합니다. 내용상의 문제도, 절차상의 문제도 묻지 않습니다.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표방하는 대통령, 인문학 전공자가 많아 청년 실업이 심하다고 말하는 노동부 장관, 그런 정권의 인사들이 들어와 학교의 향방을 정하겠다는데도, 학교는 이제 수익 사업을 할 수 있으니 우리는 자율성을 얻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공부하고 싶어 학교에 들어왔습니다. 학교가 법인화되고, 등록금이 또 오르고, 수익성 없는 학문에 대한 지원이 줄고, 그렇게 갈수록 열악해져도 우리는 아마 가능한 한 공부를 이어갈 것입니다. 할 수 있는 것도, 그나마의 일들을 할 수 있는 용기도 많지 않은 시점에서 나온, 총학생회의 결정을 지지합니다. 의결권도 없는 채로, 멀찌감치서 학생비상총회를 지켜 볼 수밖엔 없었지만, 이렇게 글로나마, 지지를 전합니다.

서울대는 법인화설립준비위원회를 해체하고 평등한 대화에 나서라
국회는 날치기 처리된 서울대법인화 법을 전면 재논의하라

인문대학 미학과 대학원생 연명자 일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