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력한 자들의 연대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글로컬 포인트》 광장 특별호에 실은 글.

http://blog.jinbo.net/glocalpoint/61

 

 

나의 집회들

집회에 처음 간 것은 2005년 3월이었다. 반전평화의날. 폴리스라인 안에서 질서정연한 행진을 했고 무대엔 연예인이 올랐다. 운동은커녕 정치에도 관심은 없었지만,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그 다음으로 집회에 간 것은 4월, 장애인차별철폐의날이었다. 수업을 마치고 느지막히 도착한 나를 향해 누군가 달려 왔다. 지난번 집회에서 안면을 튼 이였다. 손으로 감싸 쥔 이마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도로 점거 농성을 벌이다 진압하는 경찰에게 맞아 생긴 상처였다. 이해할 수 없었다. 축제 같은 집회도 가능한데, 왜 이런 집회를 하는 것일까. 아는 데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대화를 할 생각조차 않는 정부를, 이렇게라도 하고 나면 무조건적으로 진압하려 드는 경찰을 아는 데엔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기억에 남는 집회들이 몇 개 있다. 
공사를 마친 청계천을 개장하기 얼마 전, 청계천변 장애인 접근권을 주장하며 집회를 열었다. 길을 가는 이들에게 유인물을 나눠 주며 한참을 붙잡고 설득했다. 문도 열지 않은 천변에 내려가 소리를 지르고 위를 올려다 보며 피케팅을 하고 스프레이로 구호를 새기기도 했다. 경찰과 추격전을 벌였다. 
부산에서 열린 APEC 회담을 저지하기 위한 행진은 두 층으로 쌓인 컨테이너 박스 앞에서 멈췄다. 밧줄을 걸고 컨테이너를 끌었다. 다행히 속은 비어 있었다. 경찰이 계속해서 막았기에 목표한 곳까지 다 가지는 못했지만, 아무튼 고비는 넘겼다. 부산 시내 곳곳을 다니며 구호를 외쳤다. 벽에는 스프레이로 구호를 새겼다. 나는 ‘실천단’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한미FTA 반대 집회는 서울 곳곳에서 벌어졌다. 어디를 가는지도 모른채 투쟁국장을 따라 다녔다. 말 그대로 몰랐다. 어디를 가는지는 투쟁국장만이 알았다. 여러 단체들이 ‘택[tactic]’을 짜고 서울 곳곳에서 거리를 막았다. 경찰이 도착하면 도망쳐서는 다른 곳을 막았다. ‘떴다비’라는 방식이었다. 빨라야 했으므로, 지하철 개찰구는 뛰어 넘었다.
2008년 촛불집회 때의 일이었다. 경찰 방패에 몸을 맞대고 서로 밀고 있던 나는 갑자기 뒷줄에서 뻗어 나온 손에 잡혀 경찰들 사이로 끌려 들어갔다. 경찰은 진압을 시작했다. 한 간부가 밑에 사람이 있다고 대열을 세우지 않았더라면 나는 크게 다쳤을 것이다. 이미 몇 차례 밟혀 안경이 부러진 참이었다. 이렇게 죽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크게 다치지 않고 나왔지만 몇 시간 뒤엔 물대포에 쫄딱 젖고 말았다.
용산참사가 일어난 다음날, 용산에서 명동까지 행진했다. 명동에서는 투석전이 벌어졌다. 사람들은 보도블럭을 뜯어 경찰을 향해 던졌다. 경찰은 잠시 밀리는가 싶더니 결국 강경진압을 했다. 한 친구는 경찰이 되던진 돌에 머리가 찢어졌고, 다른 친구는 군홧발에 밟혀 안와골절을 입었다. 이번에도 나는 안경을 잃어버렸을 뿐이니 피해는 미미한 편이었다.

그때랑은 달라

2005년 4월의 집회 후, 잠시 나는 갈등했지만 싸우기로 했다. 경찰을 따돌리고 청계천변에 내려갔고, 방패 장벽을 뚫고 건물을 점거했다. 거리를 막는 것은 일상적이었다. 동원된 경찰 개개인을 공격하는 일은 피했지만, 밀고 밀리는 몸싸움을 주저하지는 않았다. 경찰이 방패로 찍으려 들면 발을 들어 방패를 찼다. 때론 방패를 빼앗기도 했다. 가끔씩이지만, 우리는 경찰을 이기기도 했다.
하지만 수년간, 나는 집회의 면면을 싫어했다. 경찰 한 명을 끌어내 짓밟는 사람들을, 진압 병력이 아니라 그저 때가 되어 순찰을 돌고 있었을 뿐인 순찰차 앞유리에 쇠파이프를 휘두른 사람들을, 경찰에게 날계란이니 까나리액젓이니를 던지는 사람들을, 나는 탐탁치 않아 했다. 수천 명이 모여 있는 한 가운데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렇게 조금씩, 나는 집회에 덜 나가게 되었다.
나는 늘 소위 ‘조직 대오’에 속해 있었다. 때로는 방침을 정해 줄 사람이, 때로는 어떻게 싸울지 논의할 사람들이 있었다. 달라진 것은 2008년 촛불집회 때부터였다. 주말에는 ‘조직’에 속한 모두가 나왔지만 평일엔 혼자 가는 일도 종종 있었다. 혼자 보는 풍경은 달랐다.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었다. 매일같이 광화문 광장에서 밤을 샜지만 하는 일이라곤 대개 거리 공연을 보는 것이 전부였다. 아침이 되면 경찰들은 일렬로 서서 거리로 밀고 들어 왔고, 나는 다른 이들과 함께 속수무책 밀려났다.
혼자 보기 때문에 다른 것만은 아니었다. 나는 늘 조직에 속해 다른 조직에 속한 이들과 함께였다. 내가 목적지를 모른 채 서울 곳곳을 누비듯, 내 옆에 있던 다른 단체 사람들도 목적지를 모른 채 서울 곳곳을 누볐다. 내가 속한 단체만으로 뚫을 수 없는 수의 경찰 병력에 길이 막히면 다른 단체 사람들과 회의를 했다. 그러다 보면 할 수 있는 일이 생기곤 했다. 그러나 2008년의 어느 평일 새벽, 광화문 대로에서는 나도, 내 옆에 있는 이도, 모두가 혼자였다.
이 ‘혼자’들이 모여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내가 한창 집회에 다녔던 그때랑은 다르다. 투쟁국장들끼리 회의해서 짠 ‘택’을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는커녕, 단일한 의견을 갖지조차 않는 무리다. 이 ‘혼자’들의 무리란 건 말이다. 이 수많은 사람들의 한가운데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수 년을 보냈지만, 그 고민만은 내내 하고 있었다.
간단한 것은, 함께 하자고 하는 것이다. 더 이상 혼자이지 않도록, 뜻을 모을 사람을 찾는 것. 그것이 운동의 시작이고 끝이므로, 다른 고민은 어쩌면 필요치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 모인 백만 명의 사람들 중 내가 몇을 설득할 수 있을까. 박근혜가 몇 월에 하야해야 할지에 대해서조차 뜻이 갈리는데, 당장 연행을 각오하고 저지선을 넘자고 ― 그러나 그 선 너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진 모른다고 할 때, 내가 몇을 설득할 수 있을까. 그래서, 사람이 많을수록 나는 무력해진다.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 못하게 된다. 그저 분위기를 좇아, 사람들이 가는 곳엘 가고 사람들에 멈추는 곳에서 멈출 뿐이다.

무력한 자들의 연대

어쩌면 ‘즐거웠던’ 나의 ‘폭력 집회’ 경험을 되새기는 것에서 시작해, 이제는 무력해진 나에 대한 소외로 이야기를 옮겼다. 그러나 이전의 경험들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소속이 다르거나 아예 소속이 없는 백만 명이 함께 ‘군대처럼’ 움직이지는 못할 것이므로 (또한 그래야 할 필요도 없으므로) 나는 앞으로도 계속 무력할 것이다. 적어도 내가, 내가 속한 단체의 회원들 백 명만이 외로이 무언가를 요구하기보단 행인들과 뒤섞인 천 명 혹은 만 명이 함께 하기를 바라는 한, 나는 내내 무력할 것이다.
내가 무력해진다는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힘이 약해진다는 것, 그것은 어쩌면 평등한 관계를 맺기 위한 나쁘지 않은 출발점이다. 학생운동 단체의 대표였던 내가 다른 회원들을 상대로 건넨 말과, 지금 여기 수많은 혼자들의 사이에서 평범한 혼자일 뿐인 내가 누군가에게 건네는 말의 무게는 전혀 다르다. 모두가 무력한 혼자라면,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평등하게 토론하는 관계가 말이다.
물론 모두가 똑같이 무력하지는 않다. 장애인과 비장애인, 여성과 남성, 트랜스젠더퀴어와 시스젠더, 한국인과 외국인(특히 백인이 아닌), 청소년과 비청소년, 청년과 중년, 화이트칼라와 블루칼라, 이들 모두 광장에서는 무력한 혼자지만 혼자들이 만나는 순간 둘 사이에 숨겨져 있는 무게차가 드러난다. 이렇게 말해도 좋을까, 더 무력해져야 한다고. '조직'이 갖고 있던 힘을 버리는 것 이상으로, 이 사회에서 다수자로서 갖는 힘을 버리고서 시작해야 한다고, 그렇게 토론에 임해야 한다고.
지금까지의 토론들은 성에 차지 않는다. 경찰의 저지선을 넘을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토론을 예로 들어보자. 그저 경찰 저지선을 넘지 않는다는 결론이 답답한 것이 아니다. 이 체제 내에서 법이 갖는 무게를 생각지 않고서 그저 준법을 주장하는 이들이, 혹은 사다리를 갖고 와도 차벽을 넘을 수 없는 이들을 생각지 않고 그저 넘는 것이 능사인 듯 말하는 사람들이 답답한 것이다. 준법이라는 말이 갖는 무게, 폭력투쟁이라는 말이 갖는 무게, 이런 것들을 우선 버리지 않고서 우리는 평등한 토론을 할 수 없다. 서른 해 전 집회를 조직했던 경험을 권위 삼아 내세우는 한, 평등한 토론은 불가능해진다. (경험이 주는 교훈을 모두 버려야 한다는 말은 물론 아니다.) 여자와 아이는 뒤로 빠지라고, 싸움은 성인 남성들이 하겠다고 하는 한, 저지선을 넘어 청와대를 점거한다 해도 새로운 세상은 열리지 않는다.
그래서 어쩌면, 시작은 우리끼리 싸우는 것일지도 모른다. 스스로는 쉽게 버리지 못하는 그 무게들을 없애기 위해, 우리끼리 싸우는 것 말이다. 광장의 무대에 수화통역을 요구하는 것, 무대의 혐오발언들에 사과와 재발방지를 요구하는 것 – 이미 일어나고 있는 그 싸움들 말이다.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도 함께 했던 '페미존' 사전집회가 그 예가 될 것이다.
무게를 가진 자들은 도처에 있다. 박근혜를 그저 몰아내기만 한다면, 그 다음 무게를 가진 사람이 그 자리에 가게 될 뿐이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진정한 '박근혜 이후'를 상상할 수 있도록, 우리는 그 무게들을 없애야 한다. 서로를 더욱 무력하게 만들어, 새로 시작해야 한다. 누구 하나가 강한 것이 아니라 연대로써 비로소 강해지는 그런 연대가 그 토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제안한다. 무력한 자들의 연대를. 기존의 체제에 힘입어 갖고 있는 무게들을 먼저 버리고 스스로 무력해지고자 하는 이들의 연대를, 그 무게를 끝끝내 버리지 못하는 자들을 쫓아가, 함께 무력해지도록 싸우고자 하는 이들의 연대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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