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국밥값

어느 노인이, 자신의 장례식을 치를 이들을 위한 국밥값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고 들었다. 면식이 있기는커녕 빈소의 위치를 알아내기도 어려울, 기사를 통해서만 접한 사람이었지만 조문을 하고 싶었다. 평소라면 먹지 않는 육개장과 편육, 그런 것이라도 자리를 차지하고 꾸역꾸역 씹어 삼키고 싶었다.


이튿날이었다. 그가 남긴 돈이 십만 원이라는 사실을 안 것은. 장례식에 찾아올 사람들을 ― 그런 이가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지만 ― 위한 돈은커녕, 장례식을 치를 돈조차도 갖지 못한 사람인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장례식을 치를 이, 라는 것은 아마도 자신의 시신을 발견할 이들을 가리켰던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다시 몇 시간 후에야 자세한 사정을 알게 되었다. 장례식을 치를 이들을 위한 국밥값, 이라는 것은 기자가 생각해 낸 말이었다. 그는 십만 원이 든 봉투 말고도 공과금 고지서와 그에 맞는 현금, 그리고 그에 더해 또 백여만 원을 남기고 떠났다고 한다. 빳빳한 새 지폐였다고 했다.



「고맙습니다, 국밥이나 한 그릇 하시죠 "개의치 마시고."」



봉투에는 저렇게 적혀 있었다. 11월 28일에 그는 주택공사에 전화를 걸었다고 한다. 주택공사에서 대출 받아 얻은 임대주택의 주인이 바뀌며 퇴거해야 할 상황에 처한 그는 통화로 이튿날 나가겠다고 말했다 한다. 그러나 그날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고, 주택공사 직원의 신고를 받은 경찰이 그의 사망을 확인했다고 한다.



전화를 하고 재산을 새 돈으로 바꾸고, 혹은 재산을 새 돈으로 바꾸고 전화를 하고, 편지를 썼을 것이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저 한 문장을 썼을 것이다. 그리고는 자신의 손으로 목숨을 끊었다. 제 몸을 수습할 누군가를 위해 국밥값을 남긴 어느 사람의 시신이 되어, 그는 발견되었다.

한나 아렌트, 세월호

얼마 전에 구글에 들어 갔다가 우연히 한나 아렌트 탄생 108주년 기념일임을 알게 되었다. 세월호에 대해서는 여전히 이런 저런 말을 하기 어렵지만, 예전에 읽었던 한나 아렌트의 문장 몇 줄과 함께 세월호가 떠올랐다. 그래서 썼다.
아이작 디네센(Isak Dinesen)은 한 인터뷰에서 “한 친구는 저에 대해 제가 모든 슬픔이 그것을 이야기로 만들거나 그에 관해 이야기함으로써 견뎌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는데, 이것이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닐 겁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한나 아렌트는 이 문장을 고쳐서, 자신의 책 『인간의 조건』, 그 중에서도 아마 핵심이라 할 수 있을 「행위」 장의 머릿말로 썼다. 모든 슬픔은, 그것을 이야기로 만들거나 그에 관해 이야기함으로써 견뎌질 수 있다. 그 밑에는 출처를 밝히지 않고서 아이작 디네센이라는 주를 달았다. 나는 저 말을 믿는다. 이것이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완전히 옳은 말일지도 모른다. 끔찍한 일을 곱씹고 되뇌는 것, 그것은 그 일 이상으로 끔찍한 일이지만 또한 다음으로 나아가는 출발점이 됨을 알고 있다.
세월호가 가라앉은지 어느덧 반 년이 넘었다. 그 배도, 그리고 열 명의 승객도 아직 물 속에 잠겨 있다. 그날 있었던 많은 일, 그 일이 있기까지 있었던 많은 일, 그리고 그 이후로 벌어진 많은 일은 여전히 의문 속에 잠겨 있다. 어떤 이들이 피로감을 말할 정도로 세월호라는 이름은 반복적으로 말해지고 있지만, 아직도 그 이야기는 완성되지 못했다. 당사자들 뿐 아니라 기자들, 활동가들, 변호사들 등 수많은 이들이 그만큼 많은 이야기를 해 왔지만 그들은 여전히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 이야기 하기 위해서는, 누가 무엇을 당했는지 뿐만 아니라 누가 무엇을 했는지, 언제 왜 어떻게 그랬는지를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 대부분을, 우리는 아직 알지 못한다.
한나 아렌트는 이미 행해져 되돌릴 수 없는 행위의 결과로서가 아니라 새로이 행위하는 사람으로서 살기 위해서, 새로운 역사를 이어가기 위해 ‘용서’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상처를 입기 전으로 되돌아 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상처가 저절로 사라지지도 않는다. 스스로의 상처를 보듬기 위해, 우리는 상대를 용서한다. 때로는, 어쩌면 대개는, 처벌로 용서를 대신하고 망각을 기다리지만, 이것 하나만은 변하지 않는다. 용서를 위해서도 처벌을 위해서도, 누가 무엇을 했는지 알아야 한다.
아무것도 알지 못하므로, 이야기를 하는 것도, 용서는 물론이고 처벌도 불가능하다. 그렇게 반 년이 흘렀다. 그날 사고가 있었고 많은 이들이 죽었다고, 어떤 이들은 그 죽음을 야기했고 또 어떤 이들은 그 죽음을 방조했다고, 이야기가 채 되지 못한 말들만이 반복된다. 선장과 선원들, 기업주와 경영진, 정부 인사들, 많은 이들이 지목되고 있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내가 죄인이라고 스스로 나서는 사람은 없고, 나서지 않는 사람을 조사할 수 있는 힘을 가진 것 또한 그들이다.
그 많은 이들이 죽었는데,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것은 어쩌면 영뚱한 사람들 뿐인 것 같다. 가족과 벗을 그 배에 실어 보낸 이들, 같은 배에서 같은 위험을 겪고 겨우 돌아온 이들, 뉴스를 보며 마음 졸이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던 이들. 정말로 누군가에게 죄가 있고, 정작 그 사람은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않고 있는 것이라면, 다시 한 번 한나 아렌트의 유명한 말이 떠오른다. “악의 평범성(the banality of the evil)”. 어떤 이들은 누군가를 한참 비판하다 말고 이 말을 꺼내며 다시금 자책을 시작하곤 한다. 악이 평범한 것이라면, 평범한 내게도 악이 도사리고 있을 것이다. 우리 모두가 죄인이다. 흔히들 그렇게 흘러 간다.
어쩌면 사실일 것이다. 내 속에는, 결코 작지 않은, 악이 도사리고 있다. 그러나 적어도 저 말은 그런 뜻이 아니다. 적어도 저 말을 보고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설픈 자기 반성이 아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을 움직인 것이 거대하고 절대적인 ‘악’이 아니라 그저 ‘사유하지 않음’이라고 말했다. 그는 악마적인 본성을 타고 나지도 주입 받지도 않았다. 그저 자신이 마주하고 있는 이가 또한 사람임을 생각하지 못했던, 자기 역시 그들과 마찬가지로 사유할 수 있는 사람임을 생각하지 못했던 것 뿐이다.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내 속에도, 당신 속에도 있다라는 한 연구자의 말을 직접 부정했다. 자신이 뜻한 것은 “그것이 가장 추상적인 것보다도 더 추상적이라는 점”이며 여기서 “추상적이라는 것은 경험을 통해 사유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사람을 사람으로 경험하지 않고, 그저 이름표로, 숫자로, 어떤 재료로 여기는 것, 이 세계에 함께 사는 사람이 아니라 머릿속을 떠도는 글자와 숫자만을 두고서 계획을 만들고 그것을 다시 이 세계에 부과하는 것, 그것이 한나 아렌트가 본 악이었다.
아이히만은 내 속에도 있을 것이다. 벌레들을 죽일 때, 태연히 거짓말을 할 때, 많은 일들을 모른 채 할 때, 나는 세계를 벗어난 추상적인 존재가 된다. 그러나 지금 중요한 것은 아마도 그것이 아니다. 저 ‘악’이라는 것이 심연 너머에 있는, 나로서는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아니라는 점, 지금 중요한 것은 아마도 이것이다. 그들이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아도, 악이란 것이 결국 텅 빈 것, 아무 내용 없는 것이라면, 그것이 아무리 두렵고 아무리 강력해도, 우리는 결국 그것에 대해 알 수 있다는 점, 그러므로 그것에 맞설 수 있다는 점, 지금 중요한 것은 아마도 이것이다.
* “One of my friends said about me that I think all sorrows can be borne if you put them into a story or tell a story about them, and perhaps this is not entirely untrue.
Lynn R. Wilkinson, "Hannah Arendt on Isak Dinesen: Between Storytelling and Theory," p. 77, Comparative Literature Vol. 56, No. 1, Winter, 2004, pp. 77-98.
** Hannah Arendt, "On Hannah Arendt," p 308, ed. Melvyn Hill, Hannah Arendt: The Recovery of the Public World, St. Martin’s Press, 1979, pp. 301-339.

A의 입대를 전송했다

얼마 전 A의 입대를 전송했다. 춘천의 102보충대. 나는 군인이었던 적이 없으므로, 군 부대에 들어가 본 것도, 그리고 (용산 대로변에 있던 미군부대를 제외하면) 군부대에 그만큼 가까이 가본 것도 처음 있는 일이다. 아직 군복은 입지 않았지만, 그만큼 많은 군인들을 본 것도 처음이었다. 그만큼 많은 남성들 사이에 서 보는 것도 아주 오랜만의 일이었다. 
무서웠다. 군대라는 것도, 징병이라는 것도, 그곳을 가득 메운 사람들도.
당연히 그들은 줄을 제대로 서지 못했다. 행진을 할 때면 줄은 속절 없이 흐트러졌다. 겨우 삼십 분 전에 군인이 된 그들은, 군인이 아니었다. 하나 같이 못나 보였지만, 나름의 빛을 간직한 채로 그곳에 모인 이들은 이내 강당인지 무언지 모를 건물 속으로, 혹은 그 뒤로 사라졌다.
5주에 걸쳐 교육을 받는다고 했다. 정신교육이니 뭐니를 하는 며칠을 빼면, 흔히 말하는 훈련을 받는 기간은 4주쯤 될 것이다. 그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들은 아마 줄을 맞추는 법을, 행진하면서도 제 자리를 지키는 법을 익혔을 것이다. 줄을 벗어나지 못하는 법을, 제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법을 자신의 법으로 삼는 법을 익힌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
언젠가 그것은 잊혀질 테고, 그들은 다시 줄 맞춰 서지 못하는 사람이 되겠다. 그때에도 그들에게는 빛이 남아 있을까. 주워 들은 바로는,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도, 그들은 줄을 맞춰 서지 않는 법을, 줄에서 벗어나는 법을 배우지는 못하는 모양이다. 그저 줄을 맞추지 않아도 되는 법을, 아무곳이나 제 자리인 척 하는 법을 배우는 모양이다.
그날 모였던 이들이 군복을 입고 줄 맞춰 선 모습을 혹여 보게 된다면, 나는 더욱 두려울 것이다. 그들의 위세가 아니라 그들의 변화가, 그들의 퇴화가 나는 두려울 것이다. 빛을 잃었음을 모른 채, 그저  무언가를 빼앗긴 줄로만, 그나마도 그저 저당 잡힌 줄로만 알지도 모를 그들이 나는 두려울 것이다.
강당인지 무언지 모를 건물을 향해 그들이 사라졌다고 썼지만, 실은 어째선지 그들이 어디로 가는지 나는 보지 못했다. 내 앞에서 방향을 튼 그들의 정면에 그 건물이 있었을 뿐이다. 정말로 그리로 갔는지, 그 앞에서 다시 한 번 왼쪽으로 돌아 다른 어딘가를 향했는지를, 어째선지 나는 보지 못했다.

돈과 방 상태는 반비례한다

얼마전 A와 월세 이야기를 하고 있던 중이었다. A는 “돈과 방 상태는 반비례하니까 어쩔 수 없지”라고 말했다. 이해하는 데에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월세가 높을수록 대개 방은 좋아지니까. 비례를 반비례로 잘못 말한 것 아니냐고 물으려다 깨달았다. 이때의 ‘돈’이란 금액이 아니라 부담으로 측정된다는 사실을. 정확히 말하자면, 월세에 대해 갖게 되는 마음의 상태와 방의 상태(혹은 방에 대해 갖게 되는 마음의 상태)는 반비례한다, 고 했어야 할 것이다. 월세 부담이 적어지고 그래서 마음에 들수록 방 상태는 마음에 들지 않는 쪽으로 움직인다고, 그래서 반비례 곡선이 나온다고 말이다.

가져 보지 못했고 가져 보지 못할 돈을 돈 자체의 단위로 계산한다는 것은 아마 이상한 일이다. 얼마만큼 익숙해져 있건 말이다.

을지로, 충정로, 아현, 오줌과 담배

을지로에서 새벽까지 술을 먹었다. 가본 적 없는 골목을 나서 집으로 돌아오면서는 잠깐 길을 잃었다. 빙빙 돌다 접어선 아는 길을 타고 집을 향했다. 자전거에 몸을 싣고 있었다. 소변이 마려워 충정로 역에 들어갔다. 지하도 입구는 열려 있었고 불도 켜져 있었지만, 화장실이 있는 방향으로 들어가는 길에는 셔터가 내려져 있었다. 셔터 앞에는 노숙인 몇 명이 잠을 자고 있었다. 다시 자전거를 타고 가다 아현역에 들어갔다. 긴 통로를 따라 여러 명의 노숙인이 자고 있었고, 그 사이에 앉아 있는 한 명, 서서 벽에 붙은 지도를 보고 있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앉아 있던 사람이 무어라 말을 건네기에 헤드폰을 벗고 되묻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시각을 물었고, 나는 세 시라고 답했다. 새벽 세 시 정각이었다. 그들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자 화장실 표지판이 보였고 그 뒤로는 내려진 셔터가 보였다. 되돌아 가려는데 지도를 보던 이가 말을 걸어 왔다.

그는 담배가 있느냐고 물었다. 박하인데 괜찮겠느냐고, 여기서 피우시겠냐고 되물었다. 여기선 피우면 안 되지 않느냐고, 나가서 피우겠다고 그는 답했다. 계단을 오르며 그는 천안에서 왔는데 차가 끊겨서 여기서 이러고 있다고 말했다. 인도로 올라와 담배를 건네고 불을 붙여 주려 하자 그는 라이터는 있다며 스스로 불을 붙였다. 담뱃갑에서 담배 몇 개비를 더 꺼내 주자 그는 말 없이 받아들었다. 잠시 후 혹시 잔돈이 있느냐고, 차비가 없다고 그는 말했다. 아까 담배를 사고 남은 이천삼백 원, 주머니에 삼백 원이, 지갑에 이천 원이 들어 있었다. 현금이 없다고 답했다가 삼백 원이 있다며 이거라도 필요하시냐고 했다가, 잠깐만요, 혹시 현금이 있으려나, 이천 원이 있네요, 그렇게 이천삼백 원을 그에게 주었다.

담배가 타는 동안 그는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했다. 서울까지 와도 일자리를 구하기가 어렵다고, 정부는 뭐하는지 모르겠다고, 걸핏하면 세금이나 올린다고. 새벽이었지만 그는 목소리가 작았고 띄엄띄엄 차들이 달렸으므로 그의 말은 잘 들리지 않았다. 세금 이야기 뒤로는 중국에서는 세금만 안 내도 사형이라더라, 프랑스는 인권을 중시해서 그런 일이 없다고 하더라, 미국은 사형은 안 하는 것 같던데 길에서도 총을 맞는 나라니 무서워서 살겠나, 이런 이야기들을 했다. 잘 들리지는 않았다.

계단을 오르기 전 그는 나에게 지하철을 타러 왔느냐고, 아직 두 시간은 있어야 될 거라고 말했다. 화장실을 찾아 왔다고 하자 새벽엔 원래 다 닫아 놓는다며, 큰일이냐고 물었다. 아니라고 답했더니 그럼 아무데나 누면 되지 뭘 내려왔느냐고 말했다. 나는 답하지 않았다. 담배를 피우며 이야기하던 중에 한 번, 이제 정말 화장실에 가야겠다며 말을 끊었다. 나의 목소리도 잘 들리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는 한참을 더 이야기했다. 다시 한 번 내가 말을 꺼내고, 그는 물을 마셔야겠다며 어디론가 향했다. 자전거에 올라서는 내게 그는 다시 한 번, 길가에서 볼일을 보라고 했다.

조금 더 가다 어느 허름한 건물의 다방에 딸린 화장실에 들어갔다. 화장실은 가게 밖에 있었고 문도 잠겨 있지 않았다. 건물을 나와서는, 나와 함께 출발한, 그러나 걸어 온 사람과 마주쳤다. 그에게 다시 한 번 인사를 하고, 내리막길을 미끄러져 집에 당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