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반올림 합의에 부쳐

반도체노동자의건강과인권지킴이 반올림, 이라는 데에서 활동하는 이들을 처음 만난 것은 아마 2010년이었던 것 같다. (반올림은 2008년 초에 결성되었고, 그 전신쯤 되는 삼성반도체집단백혈병진상규명과노동기본권확보를위한공동대책위원회는 2007년 말에 발족했는데 구성단체 중에 당시 내 소속 단체인 대학생사람연대도 있었으니 아마 존재는 그 전부터 알았을 것이다.) 당시에는 서교동에 살면서 자전거로 신림동을 자주 오갔는데, 지나는 길목에 근로복지공단 서울남부지사가 있었다. 어느날 그 앞에서 방진복을 입은 사람들을 보았다. 그들이 바로 반올림 활동가들이었다.
그땐 기자로 일하고 있었으므로 요즘보다는 훨씬 쉽게 누군가에게 다가가 말을 붙이곤 했다. 아마 약속조차 잡지 않고 불쑥 찾아가 즉석에서 인터뷰를 요청했었던 것 같다. 당시에 쓴 짧은 기사는 “이훈구 활동가는 “피해자가 100명이 넘어서가 문제가 아니라, 단 한 명이라도 일하다 병들고 죽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이라며 “삼성 전자가 사과와 보상을 하는 것은 당연한 순리고, 정부 역시 관리 감독을 소홀히 한 데 대해 사과하고 속히 산재 승인을 해서 피해자들이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이라는 말로 끝났다.
공대위로 시작돼 반올림으로 이어진 운동의 촉발점이 되었던 2007년 삼성전자 기흥공장 반도체 노동자 황유미 씨의 죽음 이후 11년만에, 지난 24일 반올림과 삼성전자가 중재합의서에 서명을 했다. 상대가 삼성이니만큼 좀 더 지켜 보아야 한다는 마음이 가시지 않지만, 이 폭염에 이어가야 했을 천막농성을 (무려 1023일만에) 마무리한 것으로 한시름을 덜었다. (라고 쓰기에는, 나는 자주 찾아가지도 딱히 시름하지도 않았지만.)
많은 사람이 죽거나 병들었다. 삼성이 사과와 보상을 약속하긴 했지만, 삼성 못지 않은 책임을 가진 정부와 관련 입법 활동을 했어야 할, 그리고 해야 할 국회에 대해서는 여전히 더 할 말이 많이 남았다.

노회찬 부음에 부쳐

2009년 김대중이 세상을 떠났을 때 나는 기자로 일하고 있었다. 소규모 언론사였고 데스크의 개입이 거의 없는 곳이었는데, 아마 그때가 유일하게 특정 기사 작성을 요구 받은 때였던 것 같다. 별 건 아니었고, 김대중의 일대기를 작성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내게는 그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다. 그가 대통령직을 맡았던 시기의 나는 정치 같은 데엔 관심이 없었다. 중고등학교를 다니며 그의 삶에 대해 딱히 배운 것도 아니었으므로, 민주화 운동가로서의 그에 대해서 역시 잘 알지 못했다. 내게 그는 그저 노무현에 앞서 신자유주의 정책을 펼친 전직 대통령에 지나지 않았다. 김대중 퇴진을 외쳐 본 적이야 물론 없지만, 노무현 퇴진을 외치는 데에 많은 시간을 들였던 내게, 그는 탐탁지 않은 인물일 뿐이었다.
그런 그의 삶을 되짚고 업적을 기리는 글을 쓴 적이 있다는 것이 어제 저녁에 떠올랐다. 당시 일했던 언론사의 웹사이트는 사라졌기에 누군가 그 글을 찾아 읽을 일이야 없겠지만(특별한 글도 아니었으므로, 어딘가에 갈무리되어 있을 일도 없을 테다), 당시에 어떤 문장들을 썼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지만, 그런 글을 쓴 적이 있다는 사실을 적어도 나는 기억하고 있다.
노회찬이 세상을 떠났다. 면식이 있는 사이도 아니고, 내 삶에 큰 흔적을 남긴 사람도 아니다. 하지만 김대중보다 내 삶에 가까웠던 사람인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무언가 해야겠다고 느꼈다. 특별한 일을 할 것은 아니다. 김대중 일대기를 쓸 때 그랬던 것처럼, 이 사람의 활동을 되새겨 보는 일 정도는 해야겠다고 느꼈을 뿐이다.

나는 정당 정치나 의회 정치에 큰 관심이 없고 그와는 당적도 달랐으므로 그의 활동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그에 대한 주된 감정은 막연한 불안감 같은 것이었는데, 이것은 내가 말이 많은 사람, 특히 비유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종종 갖는 불안감이다. 그에 대한 가장 선명한 기억은 그가 말실수를 한 장면이다. 2009년 한 방송 토론에서 진보 인사의 정치적 전향을 비판하며 그는 “내가 국회 법사위 있을 때 성전환 하는 분들, 소수자들의 권리를 옹호해온 사람인데, 국민 다수가 그렇게 성전환 하는 것은 곤란하지 않는가”라고 말했고, 이 일로 성소수자 사회의 비판을 받았다.1
그러나 많은 이들은 또한 그를 성소수자 인권 옹호에 적극적이었던 이로 기억할 것이다. 2007년 그는 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로부터 무지개인권상을 받은 바 있다. 당시 친구사이 간사는 노회찬이 트랜스젠더의 입양권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한 일을 언급하며 “동성애자 사회에서도 하리수씨 입양에 대해서 ‘너무 앞서나간 것 아닌가’라는 생각에 입장 정리를 못하고 있었는데 노회찬 의원실에서 입장을 발표해 문제를 가십거리가 아니라 ‘인권의 문제’로 환기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평했다.2
2006년 그는 성전환자의성별변경등에관한특별법안을 발의했다. 비록 현행 대법원 예규와 같은 수준의 요건을 제시하고 있지만, 국회와 정부는 여전히 그만한 법조차도 만들지 못하고 있다.3 2008년에는 차별금지법안을 발의했다. 역시 통과되지 못한 이 법안의 차별 금지 사유에는 “성적지향”과 “성별정체성”이 명시되어 있었다. 같은 시기 법무부가 제출한 안에서는 삭제된 항목들이다.
한편 2005년에는 장애인차별금지및권리구제에관한법률안을 발의했다. 2004년에는 국가보안법폐지법률안을 발의했으며, 또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를 보장하는 내용의 병역법개정안을 내기도 했다. 의회 안팎에서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활동해 온 것이나 여러 집회에 참석하며 사람들과 함께 싸워 온 것을 새삼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가 대표발의한 백 건이 넘는 법안 중 원안 혹은 수정안이 가결된 것은 그리 많지 않다. 그나마도 누군가가 그의 업적으로 기억해 줄 만한 사안들은 아니다. 그러나 그 숫자가 그의 삶에 대한 지표가 되어 줄 수는 없는 일이다. 폐기된 수많은 법안들은 물론, 정당인으로서 다른 당이나 정부를 향해 그가 발언했던 것들은, 한국 현대사에, 적어도 그 근처에 있었던 나의 삶에, 어떤 식으로든 얕지 않은 흔적을 남겼다.
조금은, 다른 기억을 가져보려 한다.

  1.  http://runtoruin.com/1489 참조.
  2. http://legacy.h21.hani.co.kr/section-021013000/2007/12/021013000200712060688026.html?fbclid=IwAR2ijXjChlkpzeAn4Yi9IR4M1b7-I0qLy8bnrG0fzszrXN1VW550lCrpzEk 참조
  3. 성별 정정에 관한 법안이 발의된 것은 2002년 김홍신 의원안, 2006년 노회찬 의원안의 두 건이 전부다. 2008년에는 국가인권위원장이 법 제정을 권고한 바 있다.

마포대교의 추억

어제는 모 작가님의 곧 공개될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배경 삼을 곳으로 내가 좋아하는 공간을 고르라고 하셨는데 마땅한 곳이 없었다. 자주 모여 놀고 회의를 했던 친구네 집은 친구의 유학과 함께 사라졌고, 다른 좋아했던 몇몇 장소들도 그곳에서 시간을 공유했던 이들과의 관계가 끊어지면서 잘 찾지 않게 되었다. 뒤늦게 고민을 시작했는데, 착각해서 내가 좋아하는 공간이 아닌 내게 의미 있는 장소를 찾았다. 그러다 떠올린 곳이 마포대교다.
정확히는 마포대교가 아니라 한강의 어느 대교, 까지를 떠올렸다. 그곳이 마포대교였다는 것은 기사를 검색해 보고 알았다. 2005년 4월 20일, 4.20장애인차별철폐공동투쟁단은 마포대교를 점거했다. 장애인차별금지법 제정, 장애인 이동권 보장 등을 요구하는 집회였다.(당시 기사를 보니, 공덕동에서 집회를 연 후 국회까지 행진하던 중에 점유 차선을 줄이라는 경찰과 대치하다 대교를 점거한 것이라고 한다.)
너댓 시쯤 현장에 도착했던 것 같다. 대학에 온지 50일 쯤 된, 직업 운동가가 될 생각 같은 건 없었던 나는 학교 수업을 다 들은 후에야 출발했다. 영문학과 진학을 위해 필요한 필수 과목이었다. 그렇게 뒤늦게 도착한 그곳은 이미 아수라장이었다. 낯익은 누군가가 비틀거리며 다가오는 것이 보여 자세히 봤더니 얼마 전에 안면을 튼 사람이었다. 얼굴을 감싸 쥔 그의 손 뒤로 피가 흐르고 있었다.
한 달 전인 3월 20일엔 이라크침략2년규탄3.20국제반전행동에 참석했었고 (조금 전 검색해 보기 전까지 나는 이날의 행사명을 반전평화대행진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학생회를 통해 이런저런 사회 이슈들을 접했지만 딱히 내 일로 고민하진 않았던 모양이다. ‘법 너머에서’ 싸우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제야 이런저런 고민들이 들기 시작했다.
고민이라곤 해도, 물론 기껏해야 ‘(무슨 영화를 누리겠다고)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아니면 ‘(합법적 창구들을 두고) 꼭 이런 식으로 해야 하나’ 하는 것들이었다. 같이 갔던 선배는 왜 이런 식으로 싸울 수밖에 없는지를 한참 이야기했지만 별로 설득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런 의구심을 품고서도 계속 집회에 다녔고, 현장들을 접하면서야 그런 마음이 사그라들었다.
요즘도 종종 하는 이야기지만,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나면 장애인 운동을 업으로 삼을 줄 알았다. 크게 고민했던 것은 아니다. 2005년에는 청계천 장애인 이동권 투쟁을, 2006년에는 성람재단 비리 해결 투쟁을 가까이서 접하면서, 혹은 학교에서 장애아동주말학교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정이 든 탓이었을 게다. (물론 이렇게 말하기엔 만만치 않게 많이 다녔던 한미 FTA 반대 투쟁이나 여러 노동 쟁의 현장에 정이 안 든 이유를 설명할 수 없지만.) 장애인 운동을 통해 운동을 하는 태도는 물론이고 운동의 여러 의제들 ― 용어들을 읊어 보자면 노동권, 복지, 성인지적 관점 같은 것들 ― 을 배웠다.
흐르는 대로 ― 맘 편한 곳 찾아 ― 살다 보니 대학 졸업 후에는 퀴어 운동과 페미니즘 운동의 언저리를 기웃거리기 시작했고 2015년에는 급기야[!] 페미니즘을 전면에 건 단체에서 상근을 하게 되기까지 했다. 그 해엔, 초심으로 돌아가 장애인 운동에 뭐라도 기여를 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성과재생산포럼의 전신인) 장애/여성재생산권새로운패러다임만들기기획단에 들어갔는데 어쩌다 보니 거기서도 퀴어 이슈에 관한 글을 쓰게 되었다…….
요즘은 종종 내 인생이 어디로 흘러가고 있나 하는 생각을 하는데, 어떤 역사를 쓰게 되든 그 처음에는 마포대교가 있었으면 한다. 이 역사를 끊고 전혀 엉뚱한 삶을 시작하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는 뜻이다.

p.s.

  • 3.20.국제반전행동은 경찰과의 충돌 없이 마무리 되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날은 전투경찰이 아니라 여성 경찰들이 폴리스라인을 만들고 있었다. “립스틱 라인”이라는 세칭을 듣고서 기이하게 여겼던 것이 문득 떠올랐다.
  • 4.20.장애인차별철폐의날 집회에 가기 전에 선배들이 연행될 경우에 대비한 대응 방법을 알려 주었던 것이 떠올랐다. 화장실에 붙은 쪽지를 보고 왔다고 하라고 했다. 왜 대자보도 아니고 화장실 쪽지였을까?
  • 2005년 오마이뉴스 기사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청계천’」에서 당시의 내 모습을 찾았다. 지금까지도 전경과의 직접적인 대치나 기물파괴를 선뜻 하지 않는 사람인 나는, 당시에도 스프레이로 길에 글씨를 쓰는 일은 마다하고 피켓을 들고 달리기만 했다.
  • 4월 20일에 집회 대신 택했던 강의에서는 결국 C라는 성적을 받았다. 다음 학기에 들은 다른 필수 과목은 조모임을 매주 해야 하는 커리큘럼이어서 수강을 ― 그러니까 영문과 진학을 ― 포기했다.

부역자와 피해자

부역자라는 말이 떠돈다. 사전적으로야 국가에 반역이 되는 일에 동조하거나 가담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각자에게서 국가는 다른 상으로 그려지므로, 반동적인 지배체제를 공고히 하는 데에 가담한 이들을 가리키는 데에 더 자주 쓰이는 것 같다. (어떤)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부역자 여성’을 이야기하자면 이런 식이다. 남성과 결혼하(고 심지어 남아 ― “한남유충”! ― 를 키우)는 가부장제에의 부역자, 남성을 상대로 성판매를 하는 성상품화에의 부역자, 혹은 게이 남성들을 싸고도는 여성혐오문화에의 부역자.
(부역자를 비판하는 것은 물론 중요한 일일 테다. (완수되지 못했지만) 친일 행위자를 처벌하는 것이 새로운 민족국가의 건설에 필수적인 일이었듯이, 페미니스트 국가를 건설하는 데에 가부장제에의 부역자를 비판하는 일이 빠질 수는 없어 보인다. 하지만 친일 행위자 색출과는 조금 다른 문제가 될 것이다. 가부장제는 식민 정부와 같이 구체적이고 분류 가능한 보상을 하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살기 위해 협력할 수밖에 없었다, 는 것은 친일 행위를 변호하는 데에 자주 동원되는 수사다. 그저 ‘사는 것’ 이상을 누렸던 자들의 입에서 나오는데도 이 말이 설득력을 갖는 것은 여기에 일말의 진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선을 긋기 힘드니까 부역자를 비판할 수 없다, 고 말하고 싶은 것은 물론 아니다. 그 선을 찾기 위해, 혹은 정하기 위해, 지난한 과정이 필요하다는 말일 뿐이다.
부역자란 어떤 존재일까. 인간에겐 얼마만큼의 저항력이 있을까. 누군가는 죽음으로 저항했던 어떤 국면에서, 여전히 살아남아 ― 저항과 동시에라도 ― 타협하며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부역자일까. 당신은 이렇게 저항할 수 있었다, 고 그렇게 하지 않았으니 당신은 부역자일 뿐이라고, 쉽게 말하지 않는 것은 내게 최소한의 윤리다.
그렇다면 그는 피해자일까? 거대한 체제니 구조니 하는 것 앞에서 겁에 질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없었던, 순전한 피해자를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아니, 그것은 어쩌면 상상력이 종종 택하는 가장 쉬운 길이다. 개인을 비난하지 않으면서 구조를 비판할 수 있어 보인다는 점에서, 어쩌면 윤리적인 상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물리적으로 구속당한 어떤 순간 정도를 빼면) 순전한 피해자라는 것이 있을까. 판단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을 상상하는 법을 나는 알지 못한다. 매순간 체제와, 그리고 스스로와 타협점을 찾아가며 살아가는 사람만을 상상할 수 있기에,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사람이란 언제나 피해자인 동시에 부역자이다.
역시나 당연한 말이지만, 당신의 선택이 있었으니 당신이 입은 피해는 당신 책임이다, 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상대의 주체성을 인정하려는 시도다. 그가 어떤 상황에서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이해하지 못한다면, 나는 그가 처한 조건을 바꾸기는커녕 그의 선택을 비판할 수조차 없고, 그의 피해에 대해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기껏해야 그를 타자화하며 내가 멋대로 상상한 세계를 펼칠 수 있을 뿐이다.
체제의 정점에 있으므로 기꺼이 논외로 쳐도 좋을 어떤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한다면, 내가 아는 한 우리 모두가 부역자이자 피해자이며 피해자이자 부역자이다. 이것은 그들이 실제로 얼마만큼의 저항을 해 내었건에 상관없이, 모두가 나와 동등하게 대화할 수 있는 존재들이라는 뜻이다. 이 대화 없이, 누군가를 부역자로, 누군가를 피해자로 금세 치부해 버림으로써 할 수 있는 일은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주체성이란, 주체적인 선택이란, 언제나 어떤 조건들 안에서 구현된다는 점에서 복잡다단한 문제다. 나의 삶이 그러하듯, 타인의 삶 또한 복잡한 맥락들 속에 얽혀 있다. 다 갖지 못한 사람들의 삶 속에서, 애초에 부역과 피해는 쉽게 나누어지지 않는다. 상대방을 나와 같은 인간으로 ― 때로 겁먹어 움츠러드는, 그러나 때로 제 힘으로 삶을 꾸리는 인간으로 ― 상상하는 것, 그것이 내가 아는 정치의 조건이다.

페미니스트의 용기

  • 페이스북페이지 “경계없는 페미니즘”에 게시함(열기).

*
몇 년 전의 일이다. 길을 가는데 누군가 팔을 뻗어 길을 막았다. 그는 남성으로 보였고, 덩치가 컸고, 옷이 더러웠으며, 말을 더듬었다. 이런 흔한 표지들 앞에서 나는 긴장했다. 그는 그 팔을 움직여 나를 칠 수 있는 거리에 있었다. 그를 자세히 살핀 것은 그 다음 순간의 일이다. 옷에 묻은 것은 물감이나 페인트 쯤 되어 보였다. 그곳은 공방이며 작업실이며가 모여 있는 골목 근처였다. 그저 지저분한 작가일까, 하는 데에 생각이 닿자 긴장이 조금 누그러졌다.
그제서야 그의 말이 귀에 들어왔다. 여전히 말을 더듬고 있던 그는 문장은커녕 단어도 완성하지 못했지만, 라이터를 원하고 있단 것을 알 수 있었다. 바뀐 것은 없었다. 그는 여전히 남성으로 보였고 덩치가 컸고 옷이 더러웠으며 말을 더듬었다. 달라진 것은 내가 그에게 어떤 편견을 투사했는가 하는 것뿐이다. 그는 여전히 나를 때릴 수 있는 거리에 있었고, 어쩌면 나를 때리고 싶어 하는 작가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느 노숙인에게 난데 없는 (그로서는 이유가 있었겠지만) 욕지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는 삿대질을 했고 주먹을 들어 올렸다. 그에게 정말로 맞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노숙인이 몰려 있는 구역을 지날 때면 움츠러들지만, 다행히 나는 온전히 겁에 질리지는 않았다. 내게 말을 붙여 오는 몇 명의 노숙인과 대화를 해 본 적이 있다. 겨우 몇 분 담배를 주고 받은 사람도 있고, 삼십 분 넘게 인생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다. 예의 그에게 두들겨 맞지 않은 덕에 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
용기, 에 대해 생각한다. 십여 년 전 소위 ‘활동’이라는 것을 시작할 때, 내게는 용기가 필요했다. 남들이 자연스레 여기는 일을 비판하고, 그 비판을 위해 통상적인 인생의 길에서 벗어나고(예컨대 기업에 취업하지 않는다든지), 때로는 전경과 맞서고, 이런 일들에는 용기가 필요했다. 거창하게 말하자면 세계를 바꾸는 일이었지만, 한편으로 그것은 늘 나 자신을 바꾸는 일이었다.
필요한 용기는 한 가지가 아니었다. 활동이라는 길에서 필연적으로 마주하게 되는 타자들 ― 나 역시 이 사회의 ‘타자’이겠지만 ― 을 대하는 데에는, 전경과 몸싸움을 하는 것 이상의 용기가 필요했다. 비정규직 철폐니 주거권 보장이니 하는 그들의 요구를 지지했지만 그들의 삶을 온전히 지지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성별분업이나 나이주의 같은 일상의 권력 구도에 익숙해 져 있는 이들이었다. 그들과 같은 공간에 앉아 대화하는 것은 종종 두려운 일이었다.
현실 제도만 비판하고 대의만 외칠 것이 아니라면, 내 곁의 삶들을 관통하고 있는 소소한, 그러나 강력한 권력 구조까지를 바꾸고자 한다면, 그러나 그들과의 대화는 불가피한 일이었다. 그들은 왜 나와는 다른 문화와 입장을 가지고 있는지 알지 못하고서는, 그들에게 말을 건넬 수 없었으니 말이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나를 바꾸기 위해, 나와 그들의 관계를 바꾸기 위해, 우리 사이에는 대화가 필요했다.

*
용기, 에 대해 생각한다. 타자의 자리에 다가갈 용기. 그것은 때로는 세상이 내 기대만큼 아름답지 않음을 확인하는 데에 필요한 용기이며, 때로는 내게 가해질 어떤 피해들을 감수하는 데에 필요한 용기이다. 그 용기 없이는 아무런 대화도 불가능했다. 미디어가 그리는 그들의 모습은 순전한 피해자이거나 무질서한 폭도이거나 둘 중 하나뿐이었으므로, 그들이 어떤 힘들 사이에서 줄다리기하며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제대로 알려주지 않았다.
여전히 긴장한다. 노숙인들이 누워 있는 어둑한 터널을 지날 때, 중년 남성들이 다수인 노조를 방문할 때만이 아니다. 여성들이 모인 공간에서도, 장애인들이 모인 공간에서도, 청소년들이 모인 공간에서도, 교수들이 모인 공간에서도, 나는 긴장한다. 이미 알고 있다. 그들 안에도 권력 관계가 있으며 그것은 종종 용납할 수 없는 것임을.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과 연을 끊어버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런 식으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그것이 전부일 리야 만무하지만, 시작점에서는 언제나 용기를 내어야 한다. 서로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알지 못하면 왜 이렇게 살고 있는지를 알 수 없고, 그래서는 무엇을 어떻게 바꾸어야 할지 알 수 없다. 페미니스트의 용기란 그런 것일 테다. 정부를 상대로, 혹은 내가 속한 문화권을 상대로 무언가를 요구하는 용기. 무엇을 요구해야 할지 알기 위해, 기꺼이 나의 안전망 바깥으로 나아갈 용기. 가장 위험한 곳에 다가갈 용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