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chard Rorty, “Moral Identity and private autonomy: The case of Foucault,”
in: Essays on Heidegger and others,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1, pp. 193-198.
지난해 봄에 읽고 넣어 두었던 것을 좀 전에 다시 읽었다. 몇 군데 고쳤지만 꼼꼼히 보지는 않았다.
Richard Rorty, “Moral Identity and private autonomy: The case of Foucault,”
in: Essays on Heidegger and others,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1, pp. 193-198.
지난해 봄에 읽고 넣어 두었던 것을 좀 전에 다시 읽었다. 몇 군데 고쳤지만 꼼꼼히 보지는 않았다.
Melissa Gira Grant, “Playing the Whore, The Work,” Verso Books, 2019.[1]필자의 책 Playing the Whore에서 따온 제목이다. ‘playing the whore’는 창녀로 일하기, 창녀인 체하기, 창녀 연기하기 등으로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을 텐데, … (계속)
모든 성노동자가 일을 협상할 수 있도록, 또한 위험하거나 임금이 낮거나 바람직하지 못한 노동을 거부할 수 있도록 지원하려면 반드시 성노동자들이 당사자끼리 정보를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떤 직업이든 마찬가지다. 하지만 성노동은 이 정보라는 생명줄을 공유하는 일이 범죄로 여겨질 수 있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미국에서 성판매는 대개 가벼운 범죄이지만 성판매 일을 하는 방법에 관한 정보를 누군가와 공유하는 것은 보다 중한 범법행위로 간주된다.
성노동자들에게는 익명으로조차도 솔직한 정보를 공유한다는 것은 사회적, 정치적, 감정을 위험을 지게 됨을 뜻한다. 보다 일률적으로 합법적인 성노동 형태 ― 미국에서는 포르노그래피나 스트립쇼 ― 에 있어서도 비밀주의는 낙인과 수치심을 강화하며 성노동자가 스스로의 노동을 통제을 능력을 약화시킨다. 성노동자가 그저 정체를 숨기는 것이 아니라 “이중 생활”을 한다고 말하는 서사는 성노동자가 자신이 일터에서 무엇을 하는지를 숨겨야 하는 이유를 은폐한다. 의도적으로 비밀에 부쳐지는 성노동에 관한 것들(예컨대 고객과 노동자의 사생활을 지키기 위한 관례들)은 법적 위험이나 사회적 배제를 감당해 내는 데 필요한 전략으로서, 상담가나 사제가 비밀을 지키고 선을 지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만적인 것으로 여겨질 수 없다. 하지만 이 불가결한 비밀유지는 반성노동 낙인과 감시에 짓눌려 왜곡된다. 노동자들은 누구에게 무엇을 말해야 스스로도 알 수 없는 결과들을 피할 수 있을지를 모르게 된다.
2000년대 초, 그 유명한 “D.C. 마담” 데보라 진 펄프리Deborah Jeanne Palfrey가 “가족의 소중함”을 주창하는 공화당 상원의원인 루이지애나주의 데이비드 비터David Vitter와 곧 권좌에서 물러나게 된 금욕옹호가 에이즈 차르 랜달 토비아스Randall Tobias가[2]랜달 토비아스는 부시 정부 에이즈 정책에 있어 (통칭 각 분야의 ‘차르’라 불리는) 최고 책임자를 역임한 고위 관료로 당시 해외 지원, 국제개발 … (계속) 자신이 운영하는 에스코트 중개소 고객임을 밝혔던 일을 기억하는가. 드보라 진의 중개소에는 언론에 환상을 심어준 만큼이나 우리의 관심을 사로잡은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그녀는 노동자들에게 고객과 섹스를 하지 않겠다는 계약서에 서명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에스코트나 마사지사, 댄서가 고객이 있는 곳을 찾아가는 출장 서비스를 제공하는 중개소로는 드문 일은 아니다. 이런 계약서는 중개소 업주가 법적 책임을 회피하고 노동자들에게 떠넘기기 위한 법적인 가림막이다. 그런데 이런 허구적 구도를 유지하는 것은 ― 성매매가 범죄인 상황에서 정당화될 수 있거나 필요한지와는 별개로 ― 또한 이 일의 실질적인 내용에 관한 현실 세계에서의 대화를 차단한다. 당신이 계약서에 적힌 대로 섹스를 하지 않는다면, 경영진은 협상도 이 일의 일부라고 알려줄 이유가 없다. 그들이 어떻게 콤돔이나 윤활제가 필요한 등의 경우에 노동자의 건강과 안전을 관리할 수 있으랴. 함정수사에 걸렸을 때 업주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이 일이 전적으로 합법임을 주장하는데 어떻게 노동자에게 법적 지원을 제공할 수 있겠는가.
성노동이 위험을 낳도록 만드는 것은 성노동 자체가 아니라 이런 류의 허구적 구도와 형사적 맥락이다. 2012년에야 미국의 시티 몇 곳 ― 샌프란시스코와 워싱턴 DC ― 이 콘돔을 성매매 증거로 활용하지 않기로 했다. 성노동자들과 공중보건 활동가, 인권활동가들이 상당한 압력을 가하자 비로소 취한 조치였다. 뉴욕에서는 콘돔을 성매매 증거로 활용하는 일이 그야말로 정례화되어 있어서, 체포 시 경찰이 작성하는 안내 조서에 성노동 피의자에게서 압수한 콘돔의 개수를 적는 칸이 마련되어 있을 정도다. 공권력의 비극 ― 공권력의 감시를 여성에 대한 폭력(성매매가 이렇게 칭해진다)과 싸우는 도구로 활용한다는 체제가, 보다 변호가 어려운 다른 여성에 대한 폭력을 낳는 ― 이다. 성노동자들은 체포될 위험을 피하기 위해 아웃리치 활동가에게서도, 서로에게서도 콘돔을 받지 않는다.
성노동자가 당사자끼리조차 경험을 공유하지 못하는 것은 자존감이 낮아서가 아니라 이 같은 위험 때문이다.
주
이사를 앞두고 있다. 7월 12일에 방을 빼기로 했다. 갈 곳은 아직 정하지 않았다. 아마도 제천 변두리의 낡은 주공아파트쯤이 될 것이다. 6월 첫 주에 보러 갈 예정인데, 큰 문제가 없다면 그냥 그렇게 확정할 요량이다. 조금이라도 더 좋은 곳, 을 찾아 헤맬 열의는 없고 가격대와 구조는 웹사이트에서 이미 보아 알고 있다. 부동산중개사무소에 가서 물어보니 집에 앉아서 인터넷으로는 확인할 수 없었던 매물이, 아주 가까이에, 있다면 선택의 폭이 조금은 넓어지겠지만 거기까지다. 7월 중순이면 장마일 터이므로 가급적 6월 셋째 주 쯤엔 이사를 하면 좋겠지만 한두 주만에 짐을 다 쌀 가능성은 높지 않다.
그래도 아주 손을 놓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번 주엔 두 번에 나누어 침대를 ― 우선 매트리스를, 며칠 후엔 프레임을 ― 버렸다. 초등학교 저학년생 땐 동생과 이층침대 한 층씩을 썼다. 아마도 중학생 땐, 이모네서 얻어 온 퀸 사이즈 침대를 혼자 썼다. 그 침대는 한동안은 부모님 방에, 한동안은 내 방에 있었던 것 같다. 고등학생 땐 작은 방으로 옮겼고 아버지가 만든 침대를 매트리스 없이 썼다. 중고등학교에 다닌 6년 중 몇 년이나 침대를 썼는지는 모르겠다.
자취를 시작하고서는 집을 자주 옮겼고 침대도 쓰다 말다 했다. 프레임과 매트리스를 갖춘 퀸 사이즈와 수퍼싱글 사이즈 침대를 한 번씩, 그리고 간이침대를 한 번 썼다. 셋 다 내 것은 아니었다. 지금 사는 곳 직전에 산 집에서는 침대 없이 3년을 살았고 지금 집으로 이사하면서 처음으로 침대를 샀다. (새 세탁기와 냉장고를 가진 것도 이 집에서가 처음이다. 세탁기는 샀고 냉장고는 선물 받았다.) 서랍이 딸린 프레임이 20만 원, 스프링 매트리스가 10만 원이었다.
이사하고 한 달이 채 안 된 시점에 쇄골이 부러졌다. 덧붙일 핑계가 없지는 않지만 아무튼 그냥 혼자, 아주 조금 속도를 내어, 걷다가 넘어지면서 뼈가 부러지자 겁이 늘었다. 넘어지는 일은 물론 달리는 일도 애초에 적었지만 길에서 달리는 일이 더욱 줄었다. 침대에서 마지막으로 떨어진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지만 침대에 누울 땐 벽에 바싹 붙었다. 비싼 매트리스는 한쪽으로만 누워도 괜찮을까, 내 것은 그렇지 않았다. 몇 달 지나지 않아 눈에 띄게 오른쪽으로 기울었다. 여전히 벽에 붙어 잤으므로 걱정할 일은 아니었다. 매트리스를 돌리면 되었다.
그러면서 알았다. 프레임을 잘못 조립했는지 ― 설치기사가 와서 조립했고 당시엔 물론 괜찮아 보였다 ― 제대로 걸리지 않고 허공에서 내 무게를 견딘 수납함 뚜껑이 꽤나 휘어 있었다. 침대를 이리저리 흔드는 걸론 아귀가 맞추어지지 않았다. 옮겨 달 수 없는 형태였던 경첩을 아예 떼어내고 적당한 위치에 뚜껑을 뒤집어 올린 후에 나사를 박았다. 다시 몇 달이 지나자 원래 모습을 되찾았다. 여전히 무언가를 꺼내고 넣을 때면 나사를 풀었다 다시 박았다.
버리려고 해체하면서 살펴보니 조립할 때 나사 하나를 빼먹었던 모양이었다. 그 때문에 휜 것인지 어쩐지는 실은 모른다. 문제의 뚜껑과는 반대쪽 끝에 있는 나사구멍이었고 애초에 그 사이에는 다른 나사 여럿이 박혀 있었으므로 딱히 문제될 건 없어 보였다. 침대를 분해하면서는 곰팡이를, 침대와 닿은 벽 두 면이 곰팡이로 가득할 것을 걱정했다. 원래도 머리맡에서는 벽을 타고 올라온 곰팡이가 조금 보였고 매트리스를 치우자 책 한권 넓이쯤이 보였다. 프레임에는 엷게 곰팡이가 앉아 있었지만 벽은 생각보다 괜찮았다. 책 한 권 너비만큼이 바닥까지 이어고 장판 끝선을 따라 듬성듬성 앉은 정도였다. 침대가 덮고 있던 방바닥은 습했고 닦으니 까만 게 묻어 나왔는데, 곰팡이인지 그냥 먼지인지 알 수 없었다.
지난 번 집은 내가 산 곳 중에서는 처음으로 곰팡이가 심하게 슨 곳이었다. 한 번은 부엌 천장에 별안간 새카매졌다. 신기하게도 방은 괜찮, 은 줄 알았으나 이사를 나오면서 책꽂이를 옮기니 그 뒤가 모두 까맸다. 당시엔 네 벽을 따라 빼곡히 책꽂이며 책상이며가 있었고 잠자리는 방 한가운데 ― 남는 공간 전부 ― 였다. 모든 벽과 최대한 거리를 둔 곳. 볕이 잘 안 들고 환기도 열심히 하지 않았으므로 꿉꿉한 냄새는 종종 났지만 곰팡이 냄새는 딱히 맡지 못했다. 일상적으로 곰팡이 냄새를 맡는 것은, 그러니까 이 집에서 처음 겪은 일이다. 만으로 꼬박 3년, 대부분은 괜찮았고 책 한 권 너비로 침대 프레임과 매트리스 높이를 모두 채운 곰팡이가 트인 곳으로 나온 얼마 전부터의 일이다. 그 역시도 침대에 눕지 않으면 괜찮았다. 몇 번인가 물이 새서 반대쪽 벽에도 곰팡이 자국이 있지만 자라지는 않는 듯했다.
그러던 것이, 침대를 치우자 온 방으로 냄새가 퍼졌다. 사흘 전이었나 분해를 시작한 날이 그랬다. 저녁에 외출하면서 벽에 락스를 뿌렸다. 그날 밤에는 곰팡이 냄새와 락스 냄새를 모두 맡으며 잤다. 냄새는 하루를 더 갔다. 두통 속에 잠을 청하며 몇 건의 기사와 오래 전에 가족과 함께 살았던 반지하집을 생각했다. 매일 잠 제 양말 냄새를 확인하는 습관이 있었던 이가 폐에 곰팡이가 번져 죽었다던 기사, 흡연율이 낮은 가정주부가 폐암 발병률이 높은 것은 요리 연기와 독한 세제 때문이라던 기사. 두 번째 기사에는 소득수준이 낮을수록 더하다는 말도 있었다. 곰팡이 이야기도 있었던가는 기억나지 않았다. 고향집은 시골이지만 오래 전 한 해를 서울에 이사 와서 살았다. 반지하주택이라는 것도, 바퀴벌레라는 것도 그때 처음 보았다. 다시 시골집으로 이사를 나온 건 늦겨울쯤, 그러니까 크리스마스가 두 달 가까이 지난 시점이었다. 그때까지도 집 곳곳에 크리스마스 장식이 남아 있었다. 곰팡이가 슨 자리들이었다.
이삿짐에 딸려 온 바퀴벌레로 시골집은 몇 년을 어수선했다. 심지에 불을 붙이면 독한 연기가 뿜어져 나오는 형태의 약을 썼다. 아침 일찍 식기는 마당에 옮겼고 옆집엔 연기가 보여도 소방서에 신고할 필요가 없다고 말해 두었다. 밤늦게 들어오면 환기를 하고 바퀴벌레 사체를 쓸어 담았다. 아마도 몇 번에 나누어, 며칠을 이어 세탁기를 돌렸을 것이다. 옷가지에는 바퀴벌레가 숨을 곳이 많았으므로 식기처럼 빼두었다 들일 수는 없었다. 십 년을 넘게 그래도 바퀴벌레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들보다는 내가 먼저 집을 나왔고, 드문드문 들를 때마다 조금씩 줄어 있었다. 최근 몇 년 동안은 보지 못했다.
서울에서 옮겨 다닌 집들에서는 한 집 걸러 한 집씩 정도 바퀴벌레가 나왔다. 매번 그러지 않은 걸 보면 이사할 때마다 강박적으로 옷을 탈탈 턴 게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다. 전엔 씻어 둔 식기를 쓸 때마다 새로 설거지를 하다시피 했다. 고향집에 살 때 그랬고 나와서도 꽤 한참을 그랬다. 여전히 매번 ― 5분 전에 설거지한 그릇을 꺼내면서도 ― 물로 헹구긴 하지만 예전 같진 않다. 마른 그릇이 필요할 땐 헹구지 않고 쓸 수도 있게 되었다. 지금 집에도 바퀴벌레가 나온 적이 있지만, 습관이 되살아나진 않았다.
이 집에선 엄지손가락만한 바퀴벌레를 몇 번 만났다. 보이는 건 모두 잡아다 밖에 풀었다. 몇 번 그런 후엔 어김없이 약을 놓는다. 그런 후에도 직접 죽이진 않는다. 바퀴벌레에 관한 일기를 여러 번 썼다. 내겐 바퀴벌레만이 침입자라고 썼고, 사실 그들로서는 제 집에 사는 것인데다 애초에 그 어디도 내 집이 아니니 내치지 않는다고 썼고, 그래놓고는 얼마 참지 못하고 이내 약을 뿌렸다고 썼다. 망설이고 무너지고 반성하고 또 무너지는 가운데 점잖은 위선 만 일관되다. 모기도 거미도 꼽등이도 죽이지 않지만 그 저아무렇지 않으니 둘 수 있는 것일 뿐이다. 참거나 바꾸어야 하는 것은 바퀴벌레뿐이었는데, 결국 여태껏 참지도 바꾸지도 못했다.
어제는 집에서 한 정거장 떨어진 데서 내렸다. 편의점에 들러 우유를 샀다. 카운터 앞 줄에서 내 앞에 선 사람은 거나하게 취한 듯했다. 무언가를 잔뜩 올리고는 하나를 점원에게 준 모양이었다. 아직도 남은 물건이 많아서 하나하나 바코드를 스캔하고 결제하기까지 시간이 더 들었다. 카드 승인을 기다리는 동안 그는 딴 데서 산 짐에서 빵을 하나 꺼내 또 점원에게 내밀었다. 가족들이랑 드셔야죠, 라며 사양하던 점원은 승강이 끝에 결국 받아들기로 했다. 내 우유를 계산하며 거 재밌는 사람이네, 혼자 중얼거리던 그가 갑자기 옆에 있던 멘토스 하나를 집어 내게 건넸다. 무어라 말을 했는데 들리지 않아 네? 하고 되물었다. 나도 받았으니 베풀어야죠, 하며 웃었다. 사양하기엔 민망한 말이었다. 물론 급히 가서 아무거나 집어다 나도 베풉네 하기도 멋했다. 웃으며 감사하다고 인사하고 받아 넣었다. 생각했다. 다음번에 올 때 계시면 뭘 드리면 좋을까. 또 생각했다. 그렇잖아도 올 일이 없는 곳인데 한 달도 남지 않은 시간 동안 운 좋게도 또 그가 근무하는 시간대에 들를 일이 과연 있을까. 알고 있다, 적어도 같은 요일 같은 시간대에 맘먹고 찾아간다면 아마도 만날 수 있을 것임을.
원문: Magdalena Osumi, “Expanding access to safe abortions in Japan”(The Japan Times, 21.05.02.)
영국제약사 라인파마(LinePharma)가 임신 초기 단계에 유산(abortion)을 유도하는 안전하고 비용이 부담되지 않는 수단으로서 일본 최초 경구 “임신중지약(abortion pills)” 사용 승인을 요청할 계획이다.
이러한 행보는 임신을 중지하고자 하는 여성들에게 보다 안전하고 비용이 부담되지 않는 임신중지 방법을 제공하기 위해 진행 중인 논의에서 비롯된 것이다.
해당 제약사는 연말까지 규제 승인을 신청할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 요법은 세계적으로 널리 쓰이며 대부분의 선진국에서 이용가능하다. 효과를 우수하며 WHO에서는 “안전한 임신중지” 방법으로 이를 권장한다.
[중략][1][역주] 한국어 자료로 「미페프리스톤 가이드 (1): 소개와 현황」 및 「(2) : 약을 이용한 임신중지 가이드라인」 참고.
여성 권리 옹호활동가들과 의학 전문가들은 오랫동안 정부에 여성의 안전한 임신중지 접근성을 확대할 것을 요구해 왔다. 하지만 팬데믹 기간 동안 경제적 사유로 임신 중지를 택하는 여성이 늘었으며 일부는 아직 일본에서는 승인되지 않는 약물적 요법을 시도했다.
후생성의 최근 연구에 따르면 지난해 10월에서 11월에 임신한 여성의 8% 가량이 COVID-19 팬데믹과 관련된 이유로 임신 중지를 결정했다.
임신 8주 내에 주로 행해지는 수술적 임신중지 비용은 100,000 엔 선이며 12주 이후에는 그 배가 들기도 한다. 일본에서는 의학적으로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22주 이후에는 임신중지를 할 수 없다.
수술적 임신중지 비용이 높은 점은 여성들이 해외 웹사이트를 통해 약물을 받게 만드는 요인이기도 한데, 여기에는 법적 문제가 있을 뿐 아니라 [복용] 절차가 잘못 수행될 경우 건강 상이 위험이 커지기도 한다.
특히 안전 문제가 여성 권리 운동계와 의료계로 하여금 다시금 일본 내 약물적 임신중지 승인을 요구하도록 만들었다.
WHO는 약물적 임신중지가 여성에게 가하는 신체적, 정신적 부담이 수술적 임신중지에 비해 더 적음을 강조한 바 있다. 미페프리스톤 및 미소프로스톨은 70개 국 이상에서 사용되고 있지만 일본에서는 여전히 이용할 수 없다.
일본에서 [응급피임약 사용 가능 기간보다] 더 진행된 임신을 중지할 유일한 방법은 수술적 임신중지로, 이는 모체보건법에 따라 산부인과 클리닉에서 행해진다.
응급피임약 접근성이 제한적이기에 수술적 임신중지는 여전히 가장 일반적인 임신중지 방법이다.
후생성에 따르면 2019 회계년간 일본에서는 156,430건, 가임기 여성 1000명단 6.2건의 임신중지가 있었다. 수술적 임신중지가 합법화된 1949년 이래 일본에서 해당 시술 수는 감소해 왔다.
일본은 유도유산의 도덕적, 법적, 종교적 지위를 둘러싼 복잡한 논쟁이 있는 미국 등과는 달리 종교적 기반을 둔 프로라이프 운동의 영향은 없다.
하지만 후생성은 제약사가 작성한 부작용 목록에 있는 대량출혈 위험을 근거로 약물을 쉽게 사용하지 말라고 경고해 왔다.
사실 일본 후생성은 약물 오용 우려로 지난 2004년, 개인의 의사 처방 없는 미페프리스톤 수입을 금지했다.
하지만 일본 정부의 입장은 활동가, 의학 전문가들의 비판을 받아 왔다. WHO는 2012년에 일본에서 흔히 행해지는 수술적 임신중지가 자궁 손상 위험을 수반함을 지적하며 약물적 임신 중지를 도입할 것을 촉구한 바 있다.
원문: 遠見才希子, 「緊急避妊薬、アクセス拡大を訴える声広がる ― 薬局での販売解禁を政府が検討へ」(Reproductive Health +, N0. 28. October 2020, p. 3.)
[2020년] 7월 21일, 시민 프로젝트 “#응급피임약을약국에서(#緊急避妊薬を薬局で)”가 카토 카츠노부(加藤勝信) 당시 후생노동성 대신에게 응급피임약(애프터필)의 접근성 개선을 촉구하는 6만 7천 명의 서명과 약국에서의 응급피임약 판매를 요구하는 요청서를 제출했다. 일본에서는 2019년에 응급피임약에 대한 온라인 처방이 허용되었으나 성행위 후 되도록 빨리, 늦어도 72시간 이내에는 복용해야 하는 점을 고려해 접근성을 더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응급피임약 접근성 확대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은 여성이 주체적으로 택하는 피임수단이 극단적으로 제한되어 있는 일본의 현실 때문이다. 1999년, UN 회원국 가운데 가장 늦게 허가된 경구피임약(저용량 정제)은 병원이나 클리닉에서의 진단이 필요한 데 더해 다른 나라에 피해 가격이 비싸고 피임 목적으로는 보험이 적용되지 않는다. 또 하나의 피임 수단인 자궁 내 장치(IUD/IUS)는 장기적인 피임효과가 있지만 출산경험이 없는 여성에게는 권장하지 않는 클리닉이 많고 비용도 높은 등의 지점이 젊은 여성에게는 장벽이 된다.
피하에 삽입하면 수년간 효과가 유지되는 피임임플란트나 피부에 붙이면 피임효과가 나는 피임패치 등 여성이 스스로 선택해 사용할 수 있는 여러 가지 피임수단이 있지만 일본에서는 저용량 정제와 IUD/IUS로 제한되어 있는 데다가 어느 쪽이든 가격이 높기에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피임수단으로는 콘돔이 주를 이루고 있다.[3]UN 「World Contraceptive Use 2020」 하지만 콘돔 사용은 남성의 의지에 좌우되며 성관계시 매번 콘돔을 착용하는 남성은 전체의 절반 가량. 여성 10명 중 1명은 파트너에게 “콘돔을 착용해 달라”고 말했으나 파트너가 콘돔을 쓰지 않은 경험이 있다.[4]I LADY.意識調査「性と恋愛 2019」
피임에 실패한 여성이나 성폭력 피해를 당한 여성에게 응급피임약은 원치 않는 임신을 피하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다. 응급피임약을 약국에서 판매하기 전에 성이나 생식에 관한 지식을 익혀 적절히 피임을 할 수 있도록 성교육을 보급해야 한다는 등의 지적도 있지만, 성교육에 의한 바른 이해의 촉진과 함께 가는 것으로서 응급피임약 접근성을 개선해야 한다는 것이 앞서 소개한 시민프로젝트의 요구이다. 응급피임약이 필요한 사람이 필요한 때에 입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세계보건기구(WHO), 국제산부인과학회(FIGO), UN인구기금(UNFPA), 국제가족계획연맹(IPPF) 등의 국제기구들은 신형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COVID-19)와 같은 긴급사태가 여성들에게 가하는 위험을 지적하며 누구나가 응급피임약을 비롯한 피임수단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일본에서도 COVID-19 확산에 따른 외출자제 조치의 영향으로 중고생의 임신상담 건수 증가가 보고되어 피임수단 접근성 문제가 주목받고 있다.
이와 같은 시민들의 목소리에 따라 [2020년] 10월 초 “제 5차 남녀공동참여기본계획 책정 기본 방향(第5次男女共同参画基本計画策定にあたっての基本的な考え方)」(안)에 응급피임약 약국 판매 금지 해제 검토 안건이 포함되었다.
주
↑1 | [역주] 한국어 자료로 「미페프리스톤 가이드 (1): 소개와 현황」 및 「(2) : 약을 이용한 임신중지 가이드라인」 참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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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역주] 아래 글 참고. |
↑3 | UN 「World Contraceptive Use 2020」 |
↑4 | I LADY.意識調査「性と恋愛 2019」 |
원문: “As An HIV Survivor, COVID-19 Stigma Is Sadly Familiar”(John-Manuel Andriote, Next Avenue, 20.05.20.)
(원문 편집자 주: 이 글은 존A.하트폴드재단이 후원한 “여전히 여기 있다, 여전히 양성으로(Still Here, Still Positive): HIV/AIDS와 함께 늙어가는 미국인 1세대에 대한 연재”의 일환으로 작성되었다.)
엘리자베스 마르투치는 열한 살 난 아들과 자신의 코로나19 완치라는 신나는 소식을 알리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뉴저지에 사는 그녀는 심지어 “코로나19 생존자”라고 적힌 티셔츠도 만들었다.
마르투치는 생존자로서 자신이 그런 반응을 받게 될 줄은 몰랐다. 겁에 질린 사람들은 때로 거슬릴 만큼 오래도록 그러리라는 것도. 《뉴욕타임즈》가 마르투치의 이야기를 보도하며 말했다시피 “다 나은지 한 달이 지난 지금도 어떤 이웃들은 그들을 보면 도망을 간다.”
기사에 따르면 “연방 보건전문가들과 전염병학자들은 COVID-19에서 완전히 회복된 환자는 타인을 감염시킬 위험성이 없다는 데에 뜻을 모은다. 그럼에도 이 병을 겪은(survived) 이들 일부는 여전히 바깥세상에서 오는 공포에서 비롯된 낙인을 마주하고 있다”고 한다.
온라인으로 “코로나19 낙인(COVID-19 stigma)”을 검색하면, 이 병에 걸려 있거나 다 나은 이들이 직면하는, 공포에서 비롯된 회피나 노골적인 박해에 관한 세계 곳곳의 수많은 이야기들이 나온다. 《뉴욕타임즈》 기사에는 완치된 여성의 개의 치료를 거부한 수의사나 “지역 신문에 감염 사실이 보도된 적이 있는 선출직 인사를 보고 놀라 나자빠진” 세탁소 직원의 일화가 나온다.
《재팬타임즈》 보도에 따르면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 “지주들이 세입자를 내쫓고 간호사들은 남편에게 버림받으며 코로나19 환자와 접촉했을 가능성만으로도 사람들이 쫓겨나는” 사례도 있다.
이런 류의 극단적인 낙인은 1980년대 HIV/AIDS 유행의 초기를 거친 이들에게는 너무도 익숙하다. 이 바이러스를 가진 수없이 많은 이들이 집에서 쫓겨났고 가족들은 그들을 피했으며 제대로 된 장례 절차를 거부당했고 도덕적으로 타락해 “그런 일을 자초했다”는 취급을 받았다.
『스톤월 스트롱(Stonewall Strong)』을 쓰면서 지난 삶을 반추해보며 HIV와 그것이 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한참 생각했다. 나는 그것을 도덕과 관련된 문제로 여긴 적이 없었다. 우리가 사는 세계에 위험 물질이 떠다닌다는 이상의 “의미”는 없는 그저 바이러스일 뿐이었다.
2005년에 나 스스로가 양성 진단을 받고서야 HIV 감염인으로 사는 것(living with HIV)이 내게 성격 결함이나 도덕적 패착이 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말의 핵심을 이해했다. 그것은 내가 성적 행동들에 있어 늘 건강한 선택을 하지는 않음을 의미한다. 때로 삶의 트라우마가 내게 영향을 미치고 현명한 판단을 방해함을 의미한다. 내가 인간임을 의미한다.
HIV 감염인으로서 나는 내 건강을 돌보는 데에 책임감을 갖고 있다. 처방대로 약을 복용해 바이러스를 억제하는 것 말이다. 이는 나 자신의 건강이 더 나아짐을, 그리고 내가 다른 누구도 감염시킬 수 없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다른 누군가의 인식을 바꾸거나 그들에게 사실에 기반한 정보를 교육하는 것은, 그들이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낙인을 가하는 태도를 맞닥뜨리며 살아 왔다. 데이트라는 영역에서 특히 그랬다. HIV 유행으로부터 거의 40년이 지났는데도 온라인 데이트 사이트의 게이 남성 플로필에는 “깨끗한(clean)”이나 “DDF”(마약을 하지 않으며 병이 없는(drug- and disease-free))와 같이―바이러스 “검출불가(undetectable)”라 위험성이 전혀 없는 이들을 포함해―HIV 감염인은 누구라도 환영받지 못한다는 신호를 주는 용어들로 가득하다.
심지어는 가장 크게 타격을 입은 게이 남성 커뮤니티에도 이러한 우리-대-그들 식의 태도가 있음을 생각하면, HIV/AIDS 유행 종식에 있어 가장 큰 장애물 중 하나가 낙인이라는 사실은 놀랍지 않다.
질병통제예방센터는 “낙인, 동성애혐오, 차별은 게이·바이섹슈얼 남성의 건강과 안녕에 영향을 미치며 이들이 HIV 검사, 치료, 여타 예방 서비스를 비롯한 질 좋은 보건 서비스를 찾아가고 받는 일을 가로막을 수 있다”고 지적한다. “이런 문제들이 게이·바이섹슈얼 남성이 더 높은 HIV 위험에 노출되게 만든다”는 것이다.
코로나19도 마찬가지다.
생존자들이 축하받기는커녕 사람들이 자신을 피할까봐 걱정해야 한다면 애초에 다른 이들이 검사를 받을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사람들이 이렇게나 비합리적으로 겁에 질려 안전 지침이 자신들을 지켜주리라 믿지조차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우리는 다만 우리 스스로가 HIV나 코로나19를 어떻게 생각할지를,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지를 택할 수 있을 뿐이다. 개인적으로는, 내가 HIV 감염인임을―혹은 이었음을―밝힌다는 이유로 누군가가 나를 피하거나 도망간다 해도 “거절당했다”고 낙담하지는 않을 것 같다. 오히려 그들이 이성적인 사유가 아니라 공포에 끌려다님을 불쌍해 할 것이다.
지금 매일 챙겨 먹는 바이러스를 억제 약물이 나오기 전의 몇 해 동안 HIV가 너무도 많은 친구들의 심신을 황폐하게 만드는 것을 본 나로서는 살아 있고 건강함에 깊은 감사를 느낀다. 마르투치 모자와 마찬가지로 나는 나의 생존을 축하한다. 수많은 이들이 살아남지 못했음을 알고 있기에.
자신의 취약함과 죽을 수 있음을 마주하는 경험을 하고 나면 남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너무 오래 신경을 쓰기는 힘들게 된다. 그들이 문자 그대로 도망친다 하더라도, 당신은 스스로가 회복력이 있음을 안다는 데에서 만족감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이는 삶이 던지는 다른 모든 난관들을 대면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