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막이

한동안 어째선지, 계속 연이 날리고 싶었다. 그러다 마침 한강에 가자는 김희선에게 연과 얼레를 갈취해서, 한참의 숙원을 풀었다. 바람이 불안정한 데다 옆 날개가 없어 연이 이리저리 흔들렸지만 그래도 잘 날았다. 천원 짜리 쟈이안트 얼레는 실이 짧았다.  아직 연은 땅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는데 어느 순간 탁, 하고 얼레가 멈추더니 실의 끝이 보였다. 실 끝은 얼레에 묶여 … [읽기]

‘예의상’의 쓰임

수업 시간 발표를 위해 쓴 글은 열 한 쪽, 참고 자료 목록까지 더해 총 열 두 쪽이 되었다. 서른 명이 듣는 수업, 도합 삼백 예순 페이지나 되었지만 양면 인쇄를 하니 생각보다 부피는 크지 않았다. 학생들에게 나누어 줄 것은 양면 복사를 하고, 교수에게 제출할 것은 단면으로 인쇄한 것을 따로 철했다. 예의상, 이라는 문구가 문득 떠오르자 양면과 … [읽기]

복음 전하던 이

지하철에 복음을 전하는 할아버지가 들어 섰다.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교회에 갈 것을 권했다.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을 외치며 윽박지르는 류만 아니라면 전도하는 이들을 싫어하지는 않는데, 안타깝게도 이번엔 그런 류였다. 예수를 모르는 년이 어떻게 여자야, 무식한 년! 어떠 년인지도 모르는 어떤 여자를 향해 그는 욕을 내뱉었다. 순간 열이 뻗쳐서 저기요, 라고 말을 붙이려는 순간 그는 또 외쳤다.예수를 … [읽기]

미용실 한담

서울에 와서 가장 놀라웠던 것 중 하나는, 미용실에서 머리를 깎는 것과 머리를 감는 데 돈을 따로 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실은 서울에 와서도 몇 년을 모르고 살다가, 어쩌다 한 번 이대 근처에서 머리를 자르게 되었을 때 알았다. 늘 집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서 머리를 잘랐기 때문에, 시골에서나 고시촌에서나 해볼 수 없는 경험이었던 것이다. 서울에 와서 머리를 자르게 … [읽기]

‘홍반장’이 되고 싶었던 그

   그의 장래 희망 중 하나는 ‘홍반장’이었다.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난다”는 홍반장 말이다.(영화는 보지 않았으니, 그냥 카피 문구만 생각하자.) 그는 돈 잘 버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도 하지 않았고, 자신이 속한 단체나 당을 대표하는 정치인이 되고 싶다고도 하지 않았다. 마을에서 누군가가 도움을 필요로 하면 언제든 나타나서 도움을 주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