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

‘예의상’의 쓰임

수업 시간 발표를 위해 쓴 글은 열 한 쪽, 참고 자료 목록까지 더해 총 열 두 쪽이 되었다. 서른 명이 듣는 수업, 도합 삼백 예순 페이지나 되었지만 양면 인쇄를 하니 생각보다 부피는 크지 않았다. 학생들에게 나누어 줄 것은 양면 복사를 하고, 교수에게 제출할 것은 단면으로 인쇄한 것을 따로 철했다. 예의상, 이라는 문구가 문득 떠오르자 양면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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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전하던 이

지하철에 복음을 전하는 할아버지가 들어 섰다.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교회에 갈 것을 권했다.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을 외치며 윽박지르는 류만 아니라면 전도하는 이들을 싫어하지는 않는데, 안타깝게도 이번엔 그런 류였다. 예수를 모르는 년이 어떻게 여자야, 무식한 년! 어떠 년인지도 모르는 어떤 여자를 향해 그는 욕을 내뱉었다. 순간 열이 뻗쳐서 저기요, 라고 말을 붙이려는 순간 그는 또 외쳤다.예수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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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용실 한담

서울에 와서 가장 놀라웠던 것 중 하나는, 미용실에서 머리를 깎는 것과 머리를 감는 데 돈을 따로 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실은 서울에 와서도 몇 년을 모르고 살다가, 어쩌다 한 번 이대 근처에서 머리를 자르게 되었을 때 알았다. 늘 집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서 머리를 잘랐기 때문에, 시골에서나 고시촌에서나 해볼 수 없는 경험이었던 것이다. 서울에 와서 머리를 자르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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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반장’이 되고 싶었던 그

   그의 장래 희망 중 하나는 ‘홍반장’이었다.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난다”는 홍반장 말이다.(영화는 보지 않았으니, 그냥 카피 문구만 생각하자.) 그는 돈 잘 버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도 하지 않았고, 자신이 속한 단체나 당을 대표하는 정치인이 되고 싶다고도 하지 않았다. 마을에서 누군가가 도움을 필요로 하면 언제든 나타나서 도움을 주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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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입생이 되었다.

   낯선 캠퍼스에 발을 내딛었다. 처음 들어 보는 수업에는 처음 보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모르는 이름의 학자들이 쓴 논문 목록이 주어졌다. 정처 없는 학교의 낯선 구석들을 기웃거렸다. 내게 주어진 자리는 없었다.   광장에는 몇 장의 자보가 붙어있었다. 수많은 기업 광고들, 혹은 기업처럼 되어버린 동아리 광고들 사이에 겨우 몇 장만이 숨어 있었다. 새내기가 새내기에게, 새내기 혜린이의 일기―’선배’들이 얕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