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의 편협함

* 바퀴벌레

인생의 3분의 2 쯤은 시골에서 보냈다. 집에서 농사를 짓지는 않았지만, 집은 갖가지 농지들에 둘러 싸여 있었고 그 농지들은 또 몇 개의 산들에 둘러 싸여 있었다. 때로는 남의 밭을 휘젓고 다니기도 하고, 때로는 친구네 농사일을 돕기도 하며, 그리고 대개는 산에 들어가 개울물을 훑고 다니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랬던 시절 동안 본 것은 정말이지 많다. 인상에 강하게 남이 있는 것들만 말해도, 새우, 거머리, 다슬기, 논고동, 송사리, 피라미, 각시붕어, 잉어, 미꾸라지, 붕어, 가물치, 고라니, 너구리, 오소리, 족제비, 두더지, 들쥐, 산토끼, 갖가지 뱀들, 풀무치, 팥중이, 여치, 베짱이, 귀뚜라미, 크고 작은 나방들, 색색의 개구리들, 도롱뇽, 도마뱀, 온갖 소리로 우는 새들―대부분의 것들을 나는 가까이서 보고 또 만지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린 내게도, 그들의 생명은 아름다웠다. 멋모르고 많은 것들을 괴롭히고 또 죽이기도 했지만, 나는 그들을 사랑했다, 고 감히 말해도 좋을 것 같다.
그런 데서 비롯한, 도시에서 자란, 혹은 시골에서 도시를 생각하며 자란 대부분의 친구들과 나 사이에 다른 점이 있다면, 그들이 혐오하거나 두려워하는 대부분의 생물들을 나는 좋아한다는 점일 것이다. 위협적으로 생긴 거미, 귀찮게 윙윙거리는 날벌레들, 한 때의 유행이 되다시피 한 꼽등이까지도, 나는 그저 좋아한다는 점일 것이다.
내가 딱 하나 싫어하는 생물이 있다면 그것은 바퀴벌레다. 어릴 때는 그것이 바퀴벌레는 비위생적이라는 교육을 받은 탓이라 생각했다. 그너 똑같이 비위생적이라고 배운 파리나 모기와는 전혀 다른 감정을 바퀴벌레가 일으키는 원인을 곰곰 생각해보니, 그것은 바퀴벌레만이 유일하게 내가 도시에서 만난 생물이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바퀴벌레를 처음 본 것은 9살 때, 1년 동안 서울에서 살면서였다. 시골에서 살면서는 그 어떤 생물이라도 그저 들에서 공존할 뿐이었다. 개미는 개미굴을 파고, 거미는 거미줄을 치고, 사람은 사람의 집을 짓고서, 때로는 서로를 헤친다 하여도, 어쨌거나 우리는 같이 살고 있었다.
그러나 서울의 바퀴벌레는 사정이 달랐다. 처음 겪어보는 도시 생활이었지만, 그럼에도 내게 도시는 사람의 것으로 다가왔나 보다. 사람의 것인 도시에 지어진 사람의 것인 우리 집, 그곳에서 바퀴벌레는 그저 기생하는 존재요 불청객, 침입자였다. 바퀴벌레를 보며 하게 되는 생각은 그것이 살아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집에 들어와 있다는 것이었다.
겨우 조금 다른 환경에서 접했다는 이유만으로, 내가 그것을 그토록 혐오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은지는 아직 몇 해 되지 않았다.

* 물

어릴 때부터 그랬다. 전기세가 아니라 전기가 아까웠고, 기름값이 아니라 기름이 아까웠다. 어떤 물건이라도 혹 다시 쓰일 데가 있을까 싶어 쉬이 버리지 못했고, 버림 받은 물건을 보면 주워 모았다.
한 때는 그것이, 타고난 생태주의라고 생각했지만, 그저 웃긴 소리일 뿐이었다. 아마도 나는 그저, 내가 갖지 못한 것을 아꼈던 뿐이었다 싶다.
전기 공급이 불안정한 시대를 겪은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시골에서 전기는 다분히 이질적인 존재였다. 기름은 말할 것도 없고. 땅을 파면 어디서든 나오는, 혹은 땅을 파지 않아도 어디서든 흐르는 물이랑은 전혀 달랐다.
그래, 그것을 깨달은 것은 내가 물은 전혀라고 해도 좋을 만큼 아끼지 않음을 깨달으면서였다. 변기를 통해 버려지는 물이나 세탁에 들어가는 물은 아끼면서도, 몸이나 그릇을 씻는 데에 드는 물을 나는 거의 아끼지 않음을 깨달으면서였다.
그것이 단순히 몸과 먹을 것에 대한 결벽증 때문은 아닌 것 같다.물을 아끼지 않을 뿐 그리 열심히 씻는 것은 아니므로. 그저 몸과 관계하는 물, 그러니까 물놀이 하는 데에, 혹은 마시는 데에 쓰이는 물은 늘 산에서 절로 나왔으므로 그런 것은 아닐까.
똑같은 지하수라고는 해도 변기나 세탁기로 들어가는 물은 내가 그 속을 알 수 없는 수도를 통해 흘러 나왔고 펌프가 고장 나기라도 하면 꼼짝없이 끊기고 말았지만, 물놀이라면 언제든 산으로 몇 분 걸어들어만 가면 할 수 있었고, 집에서 마시는 물은 늘 여기저기의 약수터에서 통만 받쳐 놓으면 구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은 아닐까.
이유 없이 뻐근한 몸을 풀겠다며 쉼 없이 더운 물을 몸에 흘려보내는 요즘, 샤워를 할 때마다 생각한다. 내 경험의 편협함을, 오로지 몸이 받아들인 방식으로만 상대를 생각하는 그 편협함을.

댓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