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우리는 지금껏 만나 본 적 없는 세계를 상상하고 있습니다” (애드리엔 마리 브라운)

원문: adriennemareebrown.net/st-louis-racial-equity-summit-2021-keynote/

세인트 루이스 인종 평등 회담 기조 연설

애드리엔 마리 브라운adrienne maree brown

우리는 지금껏 만나 본 적 없는 세계를 상상하고 있습니다. 말과 행동으로 그 세계를 현실에 써넣고 있습니다.

오늘날 이 지구의 이 나라에 살고 있는 우리는 이 행성의 경이를 체감해 보지 못했습니다. 홈리스, 빈곤, 불평등, 백인 우월주의white supremacy, 가부장제, 성차별, 동성애혐오, 트랜스혐오, 정상신체중심주의, 강간 문화, 노예제, 환경 파괴, 기후 위기, 감옥이 없는 세계를 경험해보지 못했습니다. 옥타비아 E 버틀러의 말대로 이는 우리네 ‘끔찍한, 평범한’ 일들의 일부일 뿐입니다. 우리는 이런 섬찟한 신념과 행동이 없는 세계를 본 적이 없지만 ― 많은 이들은 이런 신념이나 행동이 일부나마 없는 자그마한 공동체조차 겪어보지 못했지만 ― 그래도 우리는 상상합니다.

우리는 다른 이들이 상상한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를 억압하는, 그저 사실처럼 느껴지는 구조의 대부분을 우리는 사실이라고 배우지만 이것은 실은 역사 속 상상의 산물들입니다. 현실이, 권위가, 전통이, 당연한 전제가 되기 전에 상상된 것들입니다. 미국 역사의 상상은 패권supremacy, 지배domination, 승리victory를 중심에 두어 왔습니다. 인류 역사상 상상된 가장 아름다운 것들이 아니라, 가장 폭력적으로 떠받들어져 온 것들입니다.

어떤 이들은 식민지 이주 노동indetured labor과 노예제 ― 노동하는 이들에게는 돌아가는 것이 거의 혹은 전혀 없는, 비인간화된 사람들의 착취하는 생산 ― 에 기반한 인종화된 경제 체제를 상상했습니다. 자본주의에서는 쉼 없이 생산하고 규모의 성장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 규범이자 전제이고, 따라서 우리는 죽도록 일합니다. 혹은 특권을 가진 경우라면 타인들을 죽도록 혹은 죽음의 위험에 처하도록 일하게 합니다. 오늘날의 우리는 착취가 시야에 들지 않게 하기를, 철창이나 국경 너머에 두기를 선호하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인종화된 자본주의에서 착취 당하는 이들은 대개 유색인Black and Brown people입니다. 하지만, 희다는 것이 인종적 차이나 우월성의 표식이라곤 해도 백인의 패권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굉장히 특정하고 제한적인 인종화된 경제적 지위를 이야기하는 것임을 ― 부유하고 장애 없는 백인 이성애자 남성을 말하는 것임을 짚어 두어야 하겠습니다. 백인 특권이 다른 백인들에게 낙수 효과를 일으킬 수는 있지만, 백인임이 실제로 작동하는 방식은 흰 피부의 특권에 다가갈 수 있는 모든 이들이 백인White의 저 엘리트 경제적 지위를 두고 싸우는 것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가 코로나19 확산 종식을 위해 잠시 멈춰 시민들을, 심지어 백인white people조차도, 돌보지 못한 것이 바로 그래서입니다. 엘리트 집단은 손해를 보기를, 생산을 멈추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들은 57만 명의 목숨이 자신들의 손익 결산보다 중하다는 시나리오는 상상치 못했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에게 좋은 것만 상상할 수 있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으신가요?

하지만, 바로 지금, 그 모든 생명과의 관계 속에서 상상하는 법을 기억하고 있는 이들도 있습니다 ― 선주민 연인들은 제게 우리가 미래의 일곱 세대를 상상하고 그에 따라 결정을 내려야 함을 알려 주었습니다. 이 같은 장기적인 관점은 우리의 온 존재를 시간을 넘나드는 가족 관계 속에 밀어 넣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스승이자 벗인 테리 마셜Terry Marshall이 상상력 전쟁이라 칭한 것을 치르고 있습니다. 억압적인 역사적 상상력, 패권의 상상력을 의문에 붙이는 순간, 정의를, 자유를, 옳은 관계를 꿈꾸는 순간, 우리는 상상력의 전사가 됩니다. 조직가가 됩니다. 우리의 사명은 억압보다 강력한, 패권보다 정직한 전망을 함께 꿈꾸는 것입니다. 이윽고 상상에서 새로운 현실로 힘껏 나아가는 것입니다.

세인트 루이스에서, 퍼거슨에서 일어난 [경찰이 흑인을 사살한] 일들은 우리의 상상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우리의 집단적 상상력이 생각해 온 무엇이 가능한지가 하는 것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경찰관이 자신이 위험해 처했다고 상상하고 우리네 아이들, 배우자들, 부모들, 친구들을 죽일 수 있는 세계에, 우리는 질려버렸습니다.

브롱크스에서 아마두 디알로Amadou Diallo가 살해당한 당시 저는 대학에 있었습니다. 캠퍼스 바로 북쪽에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청년이었던 제게 충격을 주었고 제가 정치에 관심을 가지게 만들었으며 제게 어떤 틀이 되었고 저를 겁에 질리게 했습니다.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시급히 무언가 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꼈습니다. 동료들과 함께 CPR이라는 캠퍼스 프로젝트를 기획했습니다. 무엇의 약자였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네요. 오래 가진 않았지만, 이것이 철폐운동가abolitionist로서의 제 출발점입니다. 지금 저는 저와 비슷하게 여기서 일어난 일들로 각성한 한 세대를, 그리고 여러분이 일곱 해 전 이 주에 일어난 일에 어떻게 떨쳐 일어났는지를 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비판과 분노에 빠진 후에야 철폐의 길에 나서곤 합니다. 우리는 불평등을, 우리의 공동체가 백인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이유로 구금되는 것을 봅니다. 해로운 존재들이 잡혀 들어갔다가 할 수 있는 일이 더 적어진 채로, 살아 남으려면 법을 어기는 것밖엔 그다지 수가 없게 된 채로 나오는 것을 봅니다. 이런 일들이 대체 언제쯤 끝날까요? “대체 언제쯤 끝날까”, 그 답은 분명합니다. 우리가 다음에 올 세상을 상상할 때 끝날 것입니다. 우리가 다음에 올 세상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할 때, 바로 그때가 철폐의 때일 것입니다.

우리의 상상은 한편으로 기억에서 옵니다. 저 멀리 거슬러 올라가보면, 우리 모두의 선조는 이 지구 어딘가에, 여러 유산을 물려받은 이의 선조들은 이 지구상의 여러 곳에, 뿌리 내리고 있었습니다indigenous. 전 세계적 식민화의 이전에 존재했던 이 선조들은 이 땅의 면면과, 그리고 서로와 갖가지 방식으로 관계 맺으며, 땅과 삶을 지키며 책임 있게 살았습니다. 시간과 노예제와 자본주의와 백인을 자처하는 자들the construct of whiteness로 인해 고향과 이웃을 잃고 쫓겨 나온 우리는 기필코, 그런 삶이 어떤 것이었을지를 상상해 내야 합니다. 오늘날 살아 있는 선주민indigenous people 대부분은 관계를 부정하는 현대 사회의 속도와 압박에 맞서 유구한 전통과 문자 그대로의 땅을 찾고 또 지켜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 선조들이 물려준 기억 주머니 속에 살아 있는, 우리 DNA 속에 살아 있는 어떤 미래-과거를 상상해 낼 수 있습니다. 선주민의 리더십을 발견하고 따를 수 있습니다. 자신이 어느 땅을 딛고 있는지를 아는 것이 그 첫걸음입니다. 저는 디트로이트에, 아니시나베Anishnaabe 구역에 살고 있습니다. 활발히 활동하는 아니시나베 조직가들이 저와 사람들에게 지식과 기억을 나누어주고 있습니다. 또한 아디주칸Adizookan 같은 창의적인 프로젝트를 통해 상상한 바를 아낌없이 나눕니다.

우리의 상상은 또 한편으로 우리 자신의 살아 있음을 음미하는 데에서 옵니다. 오드리 로드Audre Lorde는 우리가 스스로의 에로틱한 살아 있음을 경험하고 나면 보잘것없는 데에, 고통에, 자기부정에 머무는 것이 더는 불가능해진다고 썼습니다. 저는 이 세계의 불평등을 변혁하기 위한 활동을 할 때 그러한 살아 있음을, 참된 무언가에 닿아 있다는 감각을, 혈관을 타고 도는 연결의 감각을 느낍니다. 우리는 잘못되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영원한 전쟁과 스트레스와 충족되지 않는 욕구와 외로움과 거짓이 우리가 살아갈 세계가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바꿀 수 있습니다. 엄밀한 정치적 분석 따위 없이도 세상이 달라져야 함을, 우리가 바꿀 수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때로, 우리 하나하나가, 우리가 함께 할 해방된 미래의 조각들을 속에 담고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고유하게 물려받은 경험들, 또한 우리가 살아온 경험들로 빚어진 그 조각들을 끄집어내려면 상상력을, 참된 자아를 해방시켜야 합니다.

제가 하는 일은 과학소설, 사변소설, 공동 구상collaborative ideation에 걸쳐 있습니다.

대부분의 과학소설은 만약에 그렇다면what if, 그렇게만 된다면if only, 이대로 나아간다면if this goes on, 하는 세 가지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사회 정의 활동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적과도 같은 우리네 삶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우리의 자유가 흥정거리가 되지 않는non-negotiable, 우리가 만족스럽고 상호의존적인 삶을 사는 세계를 함께 꿈꾸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감옥이 없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어야 할까요? 그런 세상에서 참여하고 책임지고 성장하고 그 결실을 누리기 위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까요? 인민을 복종시키는 군대가 없는 곳들이 있다는 생각을 하면 신이 납니다. 군대 없는 땅, 코스타 리카를 여행한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즐거움이, 공동체가 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모든 어린이가 똑같이 건강한 식사, 놀이를 하고 이것저것 만들 공간, 가족과 마을의 든든한 사랑, 시신체적, 감정적, 성적 폭력으로부터의 안전, 질 좋은 교육을 누릴 수 있다면요? 감정적, 신체적으로 폭력적인 처벌을 견딜 일 없이 자신의 행동과 관계에 대한 책임감을 길러 주는 환경에서 자란다면요?

우리가 인종, 성별, 계급에 따라 단정되는 정체성에 속박되지 않고outside of any preconceived identity-value construct 너머에서 스스로를 알아가는 것으로 삶을 시작한다면 어떨까요? 흑인이라는 것our Blackness이 공동의 트라우마와 강요된 회복의 자리가 아니었다면, 그건 어떤 느낌일까요? 지금 세대에 우리가 하는 일이 우리의 역사에서 흑인이라는 것의 의미를 작디작게 만든다면요?

만약에 그렇다면 어떨까요?

우리가 어릴 때부터 민주주의와 합의consensus와 협동collaboration을 그저 정부가 우리를 대변하며 행하기를 바라는 이론이 아니라 현실로서 배우기만 했더라면.

우리의 경찰이 살상무기를 들이대는 것이 아니라 위해를 중재하고 조치를 취하도록 훈련받기만 했더라면.

우리에게 협력경제가 있기만 했더라면. 우리가 사유하고 실천할 때 희소성에 얽매이지 않을 수만, 풍요를 누릴 수만 있었더라면.

그렇게만 됐더라면.

정의로운 전환을 위한 운동이 이대로 나아간다면, 우리 종species은 지구에서 살아남고 별들 사이에 뿌리내리는, 옥타비아가 『씨 뿌리는 자의 우화the Parable of the Sower』와 『달란트의 우화the Parable of the Talents』에서 선물처럼 보여준 미래에 이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철폐운동이 이대로 나아간다면, 우리는 인간이 서로와 관계 맺는 방식을 바꾸게 될 것입니다.

퀴어·트랜스 정의 운동이 이대로 나아간다면, 우리는 마침내 옭아매고 상처 주는 젠더라는 구축물construct과 이성애 규범의 패권을 무너뜨리고 우리에게 가장 자연스러운 수없이 다양한 사랑, 삶, 쾌락의 경험에 진정으로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이대로 나아간다면.

만약에 그렇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이대로 나아간다면.

바로 지금, 우리는 스스로의 상상력을 일깨우는 역사적 국면에 있습니다. 이 질문들이 우리를 도울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중요한matter 존재인 꿈들을 서로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흑인의 생명은 중요하다고 ― 흑인 이성애자 비장애인 남성의 생명만이 아니라 흑인 퀴어 트랜스 여성, 논바이너리 장애인의 생명도 중요하다고 ― 서로를 향해 꿈꾸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생명들의 이름을 말할 것이며 이 생명들이 모두에게 중요해질 때까지 직접행동을 전개하고 정책을 변화시킬 것입니다.

지금의 이 정치적 순간에 관해 제가 쓴 시 한 편을 나누고 싶습니다. 「이것은 정의가 아니다, 한숨 돌리는 것이다this is not justice, this is respite」라는 제목입니다.

우리가 최초로 할 수 있었던 것은 숨쉬기,
함께
숨 쉬지 않는 자 유죄
(할렐루야 할렐루!)
음, 그들은 우리가 아는 것을 말한다
(그도 놀란 모양이다)
자그마한 연대조차 드물어
우리의 처지가 적나라하다
고요한 고함이 우리 몸을 지난다 마치 (기억하라) 우리가 한몸인양 하지만
실은 합창이다, 이 많은 마음의
크디큰 공허감
이만한 희열
이만한 분노
우리의 비애
안도
한번에, 출렁거리며,
기뻐 외친다
이내 불만에 한숨 돌리고
이 순간이 우리에게 필요한 순간을 가능케 한다 하지만 하지만
다음 숨의 세상에서
그는 지금 아버지이리
아니면 여기 우리처럼 즐거이
살아 있음을 들이쉬고 자유를 내쉬는
삶에 섞여든 어느 날
복 받아 알려질 일 없는
다음 숨의 세상에선
그들 모두 오늘 살아 있으리
그리고 그 부재의 존재는
헤드라인을 흐린다
거리를, 혼돈을, 분노를 많이도 불태워야 했다
소리지르면서 사수하면서
아이들을 겁에 질리게 만들면서
모든 진실이 아닌 것과 욕지기 나는 취약성과
후회와 싸우면서 이미 위험에 처한
너무도 많은 소중한 생명의 무게와 싸우면서
이 죄책감을 얻는다, 죄책감을, 죄책감을
우리는 오늘 밤 이 군중을 높이 찬양하리
우리는 오늘 밤 우리의 전사들에게 감사를 바치리
우리는 오늘 밤 고전 끝에 고지를 점령하리
내일 우리는 전장으로 돌아간다
겨우 네 하고 말하면서도
깊이 슬퍼 애도해야 하는
우리는 안다
이것은 정의가 아니다
한숨 돌리는 것이다

한숨 돌리는 시간은 우리의 목숨을 지켜줄 것입니다. 휴식이 우리의 목숨을 지켜줄 것입니다. 또한 휴식은 우리로 하여금 멈출 줄 모르는 지금의 고단한 긴급사태에서 잠시 내려올 수 있게, 우리에게는 꿈꿀 책임 또한 있음을 다시금 떠올릴 수 있게 해 줄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모든 흑인의 생명이 중요한 세상, 강간 문화가 끝장난 세상, 우리가 이 별에서 우리의 자리를 되찾는 세상, 사랑, 중재, 규칙boundaries and consequences을 통해 서로에게 책임을 다할 수 있는 세상을 꿈꾸고 있습니다.

저의 멘토 그레이스 리 보그느Grace Lee Boggs는 ‘이 세상의 시곗바늘은 지금 어디를 지나고 있느냐’고 묻곤 했습니다. 지금이라면 이렇게 답하겠습니다. 우리는 ‘만약에 그렇다면’과 ‘그렇게만 된다면’이 실현되고 해악이 계속될 수 없는cannot go on 세계를 함께 꿈꾸는, 상상의 시간을 지나고 있습니다.

이런 미래들을 상상한다는 것, 이런 이야기들을 쓴다는 것이 우리가 이런 꿈을 살아 낼 방법을 이미 안다는 뜻은 아닙니다.

저는 지난 이십 년이 넘는 세월을 촉진자facilitator이자 매개자mediator로 일해 왔고, 제가 중재를 요청받은 분쟁의 상당수는 우리가 스스로나 타인의 실수를 책임질 권한은 없으면서도unable to be accountable 그에 화를 낸다는 데에서 기인한 것이었습니다. 위기는 화급하지만 급진적인 상상력에서 나오는 변혁은 느리고 관계적이며 불완전한 작업입니다. 우리는 배우는 중입니다.

올해 초, 저는 흑인 여성 리더들이 버려지는 패턴을 또 한 번 확인했습니다.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고, 처음엔 너무도 아파서 아무것도 쓸 수 없었습니다. 겨우 쓰지 시작하자 많은 것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마침내 「패턴 깨부수기Disrupting the Pattern」라는 글을 공유할 수 있었습니다.[1][역주]지난 4월에 게시된 글로, BLM 재단 설립자 중 하나인 패트리스 컬러스Patrisse Cullors가 공격받은 ― 공금 횡령 의혹 등 ― 일을 다루고 있다. … (계속) 흑인간에든 지구와 서로에 대한 바른 관계를 수립하기 위해 싸우는 다른 이들과 인종적으로 구축된 선들을 가로질러서든 현대를 실천하는 법을 배울 때 우리가 고민해야 할 몇 가지에 관하 썼습니다.

“비인간화가 벌어질 때면 늘, 누군가는 다른 사람의 가치를 깎아내림으로써 이득을 얻는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십시오. 유력한 급진적인 흑인 여성을 공격해 이득을 얻는 것이 누구인지, 흑인을 위해 물적 조건을 변화시키는 운동들 내부의 충돌을 조명해 이득을 얻는 것이 누구인지 자문해 보십시오.

당신이 흑인의 성공과 자유는 위험하다고, 특히 흑인 여성의 성공과 자유가 위험하다고 생각할 때 이득을 얻는 것이 누구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이 새로운 일이 아니라는 점을 생각해 보십시오.

사회 정의 운동이 우리 대다수가 생활임금도 못 받으면서 추세와 인류애의 변덕에 휩쓸리며 몇 년째 일해 온 영역임을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이 어떤 배신이랄 일, 어떤 권력의 부패에 관한 소식을 접할 때, 그야말로 여간해선 제 인생의 수십 년을 사회 정의 운동과 동포의 해방에 바친 흑인 여성이 제게 남겨진 유산을, 우리를 배반하는 모습을 떠올리지 못하리라는 점을 생각해 보십시오.

부족하다는 거짓말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의 해방 운동이 풍요롭기에는 자원이 부족하다는 거짓말을, 다양한 전략을 구사하며 빛나는 리더 여럿이 동시에 있을 수는 없다는 거짓말을. 거짓말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만들어 냅니다. 우리는 언제나 다양한 전략을 구사합니다.

서로를 공격하지 않고도 풍요를 누릴 길들이 있음을 생각해 보십시오.

지대한 힘을 가진, 흑인 해방을 위한 사회 운동이 겨우 이만한 공격을 받는 것이 우연이 아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인신공격 수준입니다. 이것은 흑인 해방을 위해 우리가 열어가는, 불완전한 모든 노력에 대한 공격입니다.

당신이 모든 정보를 갖고 있지는 않음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저속하고 외설적이고 분열을 초래하는 거짓 정보다 돈이 되는 소셜미디어의 세계를 살고 있습니다. 왜곡과 조작에 능한 이들이 권세를 부리는 곳입니다. 우리에게 영감을 주고 우리를 이끄는 이들을 잡아먹으려 드는 짐승들에게 먹이를 줄 필요는 없습니다. 당신이 할 일이 아닐 수도 있겠죠. 특히나 진실을 알기 위해 캐묻고 조사할 시간이 없다면, 특히나 대뜸 판결을 요청받은 참이라면 말입니다.

당신이 한 적 없는 일로 공격받을 때 어떤 위치에 놓이고 싶은지 생각해 보라. 당신이 한 일에 어떻게 책임질 수 있기를 원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 차례가 되었을 때, 살해 협박, 신상털기, 기타 사생활 침해, 조직적인 괴롭힘과 끝에 버려지고 싶은지를요. 무슨 일에서든 리더가 될 생각이 있다면, 당신 차례가 오고 말 테니까 말입니다. 그러니 생각해 보십시오 ― 문제가 있을 때뿐만 아니라 당신이 바로 그 문제일 때, 원칙에 입각한 투쟁, 원칙에 입각한 비판이란 어떤 것일지를.

운동이란 그저 우리가 만들 미래에 대한 신념의 터일 뿐만 아니라 서로에 대한, 우리의 노고와 배움에 대한 신념을 실천해야 하는 터이기도 하다는 점을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당신의 행동이 혹은 행동하지 않음이 우리를 사랑하는 이들이 공격받을 때 운동이 어떻게 응답할지에 한 가지 선례가 될 것임을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이 어떤 흑인 리더의 운동에 비판적이거나 그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는 이유로 백인 우월주의의 공격으로부터 그를 보호해 주지 않을 참이라면, 확인해 보십시오. 당신이 꿈꾸는 세계에 어울리는 일인가요?

제가 존경하는 리더 대부분은 당대에 공격을 받았고, 이는 우리 시대에도 마찬가지일지 모릅니다. 그들의 공통점은 제 동포에 대한, 우리 동포에 대한, 우리에 대한 사랑으로 움직였다는 점입니다. 혁명 운동은 개인적인 것이든 체제상의 것이든 사랑에 어울리지 않는 모든 것을 뜯어고치는 일입니다.

부정직, 불신, 억압 앞에서 사랑이 무엇을 행하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사랑은 진실을 말합니다. 사랑은 우리의 최선을 믿습니다. 사랑은 우리를 해방시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흑인 여성 리더를 소리 높여 사랑하기를 두려워 말아야 합니다. 결국은, 오드리 로드의 가르침이 여전히 옳습니다. 당신의 침묵은 당신도 다른 누구도 지켜주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공격당하고 비인간화 당하는 모든 곳에서, 흑인 여성 리더에 대한 사랑을 외치십시오.

사랑은 우리에게 집이 되어 줍니다. 사랑은 아무 조건 없이, 우리가 함께라고 말합니다.

사랑은 우리에게 완벽함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완벽한 사람은 없으니까요. 사랑은 우리가 우리 동포를, 우리 종을 위해 해 온 바를 봅니다. 이들이야말로 우리의 집입니다.

저의 인종 정의 운동은 상당 부분이 흑인으로서의 저의 이야기와 전망 속에서my own Black story and Black offer 연대하고 자신을 사랑하는 일로 이루어집니다. 제가 알기로 이것은 이 세상에서 흑인의 다른 영광으로부터 아무것도 빼앗지 않습니다. 오히려 풍요를 더합니다. 저는 저를 사랑하고, 해방 운동이 영원한 저의 있을 곳이라 믿습니다. 저는 실수해 왔고 실수할 것입니다. 여전히 해방을 향할 것입니다.

제가 말하는 연대에 마음이 동하신다면, 함께 말해 주십시오.

사랑합니다, 흑인 여성 여러분.
사랑합니다, 운동가 여러분.
당신에 관한 뒷말을 하지 않겠습니다.
당신이 공격당할 때 침묵하지 않겠습니다.
당신과, 당신을 위해, 당신 편에서, 당신 주위에서, 연대하겠습니다.
나는 당신의 자유에 마음을 기울입니다.”

함께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말해두겠습니다. 저는 우리가 해방된 세상을 상상합니다. 그 전에, 저는 우리가 그 해방을 위해 하는 모든 일을, 방법에는 동의하지 않는 경우라도, 깊이 존경하는 세상을 상상합니다. 하지만 저의 시선은 그저 자유로운 상태 너머를 향합니다 ― 제 꿈은 목적지가 아니라 계속 이어질 실천임을 알고 있습니다. 상상 다음은 구상이기 때문입니다 ― 이 꿈을 어떻게 구조와 정책과 합의의 안ideas으로 만들어야 할것인가? 어떻게 지반을 일구어야 할 것인가?

안을 그리고 나면 반복에 들어섭니다 ― 무엇을 멈추고 무엇을 시작할 것인가?

제가 너무도 많은 것을 상상하고 있음을 압니다. 위해와 패권의 순환으로부터의 해방, 우리 몸과 지구에 대한 주권적이고 안전한 관계, 정체성부터 경제까지 모든 것을 사랑을 지침으로 이해하기. 이런 상상들은 여전히 이상하고 낯설고 … 퀴어해 보일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창발적 전략Emergent Strategy』의 첫머리에 인용한 엘라 베이커Ella Baker의 말로 끝맺어 보겠습니다.
“그저 제 꿈일지 모르지만, 저는 이것이 현실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1 [역주]지난 4월에 게시된 글로, BLM 재단 설립자 중 하나인 패트리스 컬러스Patrisse Cullors가 공격받은 ― 공금 횡령 의혹 등 ― 일을 다루고 있다. 컬러스는 5월 28일자로 사임했으며, 본인에 따르면 이는 의혹과 별개로 1년 이상 준비한 일이다. 공금 횡령을 뒷받침하는 증거는 나온 바 없으며 BLM 재단 역시 의혹을 일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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