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차
- 가자를 포위 지구나 인도주의적으로 접근해야 할 공간이 아니라 선주민의 땅으로 이해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
- 현재 가자에서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대 파괴를, 그곳에 뿌리 박고 있는 선주민 역사에 비추어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 트럼프 행정부와 국제 사회 일각에서 부추기는 최근의 가자 계획들에 어떤 형태의 식민적 공간 통치가 담겨 있는가?
- 선주민적인 가자 재건 전망은 어떤 것일까?
- 어떻게 해야 외부의 재건 노력이 가자에서 팔레스타인의 전문성과 주도성을 — 묵살하는 것이 아니라 — 조력할 수 있을까?
- 전체 팔레스타인 해방 투쟁 속에서 가자 재건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들어가며
얼마 전 하마스에서 가자 지구 행정 권한을 가자행정국가위원회National Committee for the Administration of Gaza(NCAG)에 이양하겠다고 발표하면서 누가 누구의 뜻대로 가자의 미래를 조형할 것인가에 관한 중대한 질문들이 다시금 떠오르고 있다. NCAG의 틀이 지배적인 국제 가자 재건안 — 팔레스타인의 주권, 귀환, 자기결정은 논외로 두고 재건을 기술적인 재난 관리 업무로 취급하는 — 과 마찬가지의 기술지배적이고 외부에서 부과되는 논리를 따른다는 점에서 특히 중요한 질문들이다.
이 라운드테이블에서는 역으로 가자를 그저 포위지구나 인도주의적으로 접근해야 할 공간이 아니라 선주민의[역주1] 지역으로 이해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묻는다. 누르 주다와 데나 카두미가 선주민 관점이 어떻게 도시성urbanism, 재건, 통치에 관한 기존의 이해들을 새로이 빚어낼 수 있을지를, 재건이 외부에서 구상된 식민적 마스터 플랜이 아니라 팔레스타인의 주체성과 탈환에서 시작해야 하는 이유를, 인종학살이 계속되는 상황에서도 선주민의 끈기, 사회 조직, 공간적 저항이라는 일상적 양식들을 통해 이미 이루어지고 있는 재건의 모습을 탐구한다
본 라운드테이블은 2026년 5월 21일의 대화를 정리한 것이다. 발행을 위해 가감한 곳이 있다.
가자를 포위 지구나 인도주의적으로 접근해야 할 공간이 아니라 선주민의 땅으로 이해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
데나 카두미
지도에서 가자를 구획하는 직선들은 자연스러운 지리적 경계가 아니다. 식민의 군사적, 정치적 과정의 산물이다. 그 결과 “지구the strip”라는 개념은 가자를 섬처럼 보이게 만들곤 한다. 역사적으로 단 한 번도 가자가 섬처럼 기능했던 적은 없는데도 말이다. 가자는 오래도록, 가자를 팔레스타인의 다른 지역과, 나아가 역내 전체와 이어주는 문화적, 경제적, 사회적 연결망의 교차로에 존재해 왔다.
이 같은 관점은 고립된 장소로서의 가자를 정상화하는 데 기여했다. 가자를 묘사하는 데에는 “지붕 없는 감옥” 같은 말들도 쓰인다. 이런 언어는 가자에 부과되는 속박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나타내기 위한 것이기는 하지만, 또한 그곳을 주로 인클로저와 분리의 렌즈를 통해 이해하는 경향을 강화하기도 한다.
가자를 선주민의 땅으로 대하려면 다른 관점이 필요하다. 이는 여러 시간성이 현재에 교차하고 있음을 인지하면서 가자를 보다 폭넓은 역사적, 공간적 틀에 위치시킨다는 뜻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무역, 교류, 이동, 지역 연결은 가자에서의 삶의 부차적인 측면들이 아니라 — 다른 곳들에서와 마찬가지로 — 그 역사적 발전의 토대다.
가자를 경계지어지고 고립된 곳으로 취급하는 데 따른 결과 중 하나는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그 강제적인 경계 속에서 자급자족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족이 불가능한 것으로 판명나면 그것은 가자 자체의 탓으로 돌려지곤 한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가자를 가자가 역사적으로 의지해 온 연결망에서 떼어내어 버린 식민의 경계과 제약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가자를 묘사할 때 쓰는 어휘에 주의해야 한다. 우리가 그곳을 이해하는 쉽사리데 쓰는 범주들이, 오랫동안 가자의 역사를 형성해 왔으며 여전히 그 현재를 형성하는 역내 전반의 관계들을 흐리면서, 파면화과 고립이라는 조건들을 정상화하기 십상이다.
누르 주다
역사적으로 가자는 팔레스타인에서 가장 큰 지방district이었다. 오늘날 가자 지구의 38배 가량 되는 지역을 아울렀다. 그러므로 [가자 지구가 아니라] 그저 가자라고 칭하는 데에는 이 지역의 관계성과 역사적 연결성에 대한 암묵적 이해가 담겨 있다. 내게는 바로 이것이 가자를 선주민 지역으로 사유하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장소를 식민적 개입을 통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의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삶을 통해 발전하는 무언가로 이해한다면, 가자는 특이한 사례가 된다. 가자는 가자를 속박하고 경제적으로 종속시키려는 반복되는 시도에 굴하지 않고 건설되고 지속되었다. 사라 로이Sara Roy 같은 학자들이 “발전 저해de-development” 개념을 통해 주장하는 대로, 이스라엘 정책은 종속적 경제captive economy의 형성을 추구한다. 그럼에도 팔레스타인인들은 점령의 논리에 순응하기를 거부하는 교육, 노동 이주, [해외에서의] 송금, 다양한 도시·사회 개발을 통해 응수했다.
우리는 가자의 고립이 역사적으로 최근의 일임을 잊곤 한다. 1967년까지 내 아버지는 방학 때면 카이로에서 기차를 타고 가자에 왔다. 1967년 전쟁으로 철도가 끊어졌고 그 물자는 시나이 반도에서 이스라엘 점령 당국의 물리적 기반시설을 지탱하는 데로 돌려졌다. 이런 사례들은 이동, 연결, 지역 통합이 한때는 가자에서의 삶의 평범한 측면들이었음을 상기시킨다.
그렇기에 내게 가자를 일차적으로 정의하는 것은 포위가 아니다 — 그것이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되었대도 그렇다. 가자는 인도적 재앙만으로 정의되지도 않는다. 가자를 생각할 때면 나는 라파와 데이르 알-발라의 해변과 집들, 기차를 타고 다녔던 아버지의 이야기, 1948년에 피란한 가족들을 생각한다. 주민들의 노고로 비교적 작은 동네에서 생기 넘치는 도심 지역으로 성장한 슈자이야 같은 곳들을 생각한다. 1967년에 민방위 훈련을 받았던 어머니를 생각한다. 이런 역사들이 여전히 현재를 빚어내고 있다.
그런 경험들을 비-팔레스타인인들, 특히 가자를 주로 소거, 인종학살, 혹은 포위의 장소로 대하는 이들에게 전달하기는 어려운 경우가 많다. 가자 — 그리고 더 넓게는 팔레스타인 남부 — 는 지금 우리가 가자 지구라 부르는 영토로 국한된 적이 없다. 헤브론 산맥 지대에서 가자와 이어지는 똑같은 방언의 특징들을 들으면 팔레스타인 남부의 광범위한 역사적, 사회적 지리가 떠오르곤 한다.
정착자 식민주의의 결정적 특징 중 하나는 현대주의적 경향이다. 정착자들이 스스로의 미래를 상상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과거를 제한지으려, 종결되었고 무관한 것으로 만들려 한다는, 그리고 지금의 현실을 확정된 불가피한 것으로 제시하려 한다는 말이다. 팔레스타인의 시간 경험은 다르게 작동한다. 과거, 현재, 미래는 말끔하게 구분되는 범주가 아니며 엄격하게 선형적인 방식으로 경험되지도 않는다. 동시에 공존하면서 연속적으로 서로에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가자는 — 야파, 나블루스, 다른 모든 팔레스타인 도시와 마찬가지로 — 현재의 조건을 통해서만으로는 이해될 수 없다. 가자를 선주민의 지역으로 대한다는 것은 그 전체 역사를, 그 미래의 가능성들을, 주변 장소들, 공동체들과의 유기적 관계들을 살펴본다는 뜻이다. 가자를 [이스라엘에] 둘려싸인 채 고립된 곳이 아니라 전체 팔레스타인 지리의 생동하고 진화하는 일부로 이해한다는 뜻이다.
현재 가자에서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대 파괴를, 그곳에 뿌리박고embedded 있는 선주민 역사에 비추어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누르 주다
얼마 전에 에얄 와이즈만Eyal Weizman이 어느 이스라엘 불도저 기사의 증언을 토대로 쓴 글을 읽었다. 이 파괴 후에 “그들이 보게 될 것은 모래뿐”이라는 그 기사의 말을 제목으로 붙인 글이다. 팔레스타인인들이 돌아오면 알아볼 수 있는 것은 전혀 남아 있지 않으리라는, 그곳의 풍경을 이루던 것은 전부 사라지고 없으리라는 뜻으로 한 말이다. 최근에는 팔레스타인 구금자들을 눈을 가린 채 그렇게 파괴된 곳으로 데려가서는 눈가리개를 풀어 혼란에 빠뜨린다는, 돌아갈 곳이 남지 않았음을 보여준다는 보고들이 나왔다. 그저 건물을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로 하여금 장소와의 관계가 끊어졌음을 받아들이게 만드는 것이 그들의 목표다.
그런 주장은 곤란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파괴가 현실의 일이 아니라서가 아니라 — 끔찍하리만치 현실이다 — 단순히 건축된 환경을 밀어버리는 것만으로 장소들이 삭제될 수 있다고 전제하는 주장이기 때문이다. 공간적 소속감이 지속적으로 존재하는 건물들, 거리들에 전적으로 달려 있다고 전제하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풍경이 달라졌다고 사람들이 전혀 방향을 못 잡게 되는 그런 곳이 아니다. 더 근본적으로 말하자면, 장소는 그 물리적 구조물들로 환원되지 않는다.
하지만 완전히 솔직하게 말하자면, 라파가 무너졌을 때 내 속의 무언가가 끊어졌다. 하지만 라파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 풍경에는 그 어떤 불도저로도 없앨 수 없는 지식이 뿌리박고 있다. 낭만적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장소와의 관계맺음은 기억, 실천, 유대, 축적된 경험을 통해 행해진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어마어마한 상실이 덜해지는 것은 아니다. 박탈의 현실이 누그러드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파괴만으로는, 파괴의 설계자들이 상상하는 종류의 완전한 제거disinvention를 이룰 수 없다. 장소들은 그냥은 끝장나지 않는다.
트럼프 행정부와 국제 사회 일각에서 부추기는 최근의 가자 계획들에 어떤 형태의 식민적 공간 통치가 담겨 있는가?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시간적 위상학에 대한 작업은 상당 부분 이런 깨달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장소가 대를 이은 거주를 통해 쌓이는 역사, 기억, 여러 가지 형태로 체현되는 지식을 담고 있다고 보는 작업이다. 시간을 풍경에 뿌리박고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어떤 뜻인가? 라파 사람들은 한때 해변을 따라 이집트 국경에서부터 수영하기 가장 위험한 곳까지 정확히 몇 걸음이나 되는지 안다고들 했다. 이런 형태의 지식들은 길이 파괴되고 동네가 초토화된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장소와 보다 깊게 관계 맺고 있다.
그래서, 슬퍼하고 분노하고 상심하면서도 파괴가 한 장소를 통째로 없앨 수 있다는 생각에는 저항해야 한다. 건축된 환경은 파괴될 수 있다. 공동체는 추방 당할 수 있다. 하지만 장소를 구성하는 역사들, 기억들, 사회적 관계들, 여러 가지 형태의 지식들은 파괴하기 훨씬 어려운 방식으로 살아남는다. 그 끈질긴 존속 역시 풍경의 일부다.
데나 카두미
가자에서의 삶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파괴를 목록화하고 분류하고 정량화하고 이해하고자 하는 자료가 어마어마하게 나와 있는 것 같다. 분석적으로 말하자면, 이 파괴에서, 특히 선주민 도시성Indigenous urbanism이라는 렌즈를 통해 볼 때, 나오는 중요한 통찰 하나는 도시학살urbcide이 인종학살의 중심 전술이 되었다는 것이다. 도시 환경의 파괴는 그저 폭력의 전개에 부수적인 것이 아니라 종종 그 핵심에 속한다.
그런데 이 파괴와 함께 우리는, 특히 재건을 둘러싼 논쟁들을 통해, 가자의 미래를 두고 경합하는 구상들 또한 목도하고 있다. 재건안들은 가자를 초자본주의적이고 금융화된 개발 모델들을 통해 외부의 우선순위들에 따라 재설계되어야 할 공간으로 취급함으로써 익숙한 식민적 전제들을 재생산한다. 이런 구상은 기존의 사회적, 문화적, 공간적 관계들을 무시하고 애초에 그 파괴에 가담한 자들의 책임을 은폐한다.
하지만 이런 분석적 질문들 너머에는 매우 개인적인 차원 또한 있다. 누르와 마찬가지로 나도 이 인종학살 내내, 거의 몸으로 느껴지는, 가슴 아픈 순간들을 겪었다. 그 중 하나는 일찌감치, 사람들이 가자 북부에서 쫓겨나 남쪽으로 내몰렸을 때였다. 나는 어느새 1948년에 야파에서 비슷한 길에 올랐던 내 가족을 상상하고 있었다. 내 아버지는 아직 한 살도 채 안 된 때였다. 아기인 아버지가 형제자매들과 함께 있는 모습이 그려졌고, 그 경험이 전과는 달리, 처음으로, 몸으로 직접 느껴졌다.
나는 가자에 직접 가 본 적은 없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이 벌어지고 나니 팔레스타인인으로서 가자에 대해 느끼는 연결감이 더욱 깊어졌다. 이번 시기를 지나면서 내게 각인된 것은, 아무리 엄청난 파괴를 겪고 있다 해도, 그저 파괴의 장소로서의 가자가 아니다. 오히려 내 마음 속에서 가자는 저항, 창조, 수무드(집단적 견딤)의 장소로 굳어졌다.
이것이 지금까지의 고통이나 상실을 덜어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는 디아스포라로서 내게 가자에 가해진 대대적인 파괴 너머의 가자를 마주할 책임이 있다는 뜻이다. 터무니 없는 파괴의 와중에서 가자는 사람들의 역량들, 역사들, 열망들로써 빚어지는 장소로 남아 있다 — 가자를 정의하는 것은 바로 그들이다.
트럼프 행정부와 국제 사회 일각에서 부추기는 최근의 가자 계획들에 어떤 형태의 식민적 공간 통치가 담겨 있는가?
누르 주다
이런 안들에서 가장 분명히 드러나는 것은 광범위한 제국주의적, 신식민주의적 논리다. 이런 안들에는 강력한 외부 행위자들에게 팔레스타인의 공간을 새로 설계하고 팔레스타인의 미래를 결정할 권리가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이 계획들은 대개 인종학살이 낳은 새로운 공간적 현실들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칸 유니스나 데이르 알-발라 등지로의 피란과 집중이 지속되리라고 전제하고 가자 북부와 라파의 대대적인 파괴를 새로운 공간적 기준선으로 취급한다. 인종학살이 낳은 지리를 출발점으로 삼음으로 인해, 이런 안들은 이 공동체들이 귀환할 수 있는가, 어떻게 그래야 하는가 하는 근본적인 문제를 직시하지 못한다. 대신에 추방을 재건의 기반으로 정상화하고 만다.
동시에, 팔레스타인인들이 이미 아래에서부터 기반구조를 재건하고 있음을 간과한다. 지방행정 구조가 붕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각지에서 친구들, 가족들끼리 임시 수도 시설을 만들고 지역 서비스를 복구하고 일상을 지속할 새로운 방식들을 개발하고 있다. 사람들은 외부의 재건 계획을 기다리고 있지 않다. 비상하게 어려운 조건 속에서 일상을 재생산할 길들을 찾고 있다.
데나 카두미
이런 안들 상당수가 가자를 일종의 도시 국가로 상상한다. 진지하게 주권 국가로 대하는 이는 없지만 말이다. 그래서 가자는 줄곧 싱가포르나 두바이 같은 곳과 비교되고, 또한 부동산 투기, 관광, 연안 지대 교환 가치 추출의 장소로 그려진다. 이런 접근들은 가자가 바다와 맺는 관계를 기본적으로 사회적, 역사적, 공간적 지리의 일부가 아니라 경제적 자산으로 취급한다.
이런 안들은 또한 감시와 기술적 통치에 관한 문제를 제기한다. 군사 작전에 인공지능을 활용한 바로 그들이 재건, 계획, 도시 설계에 관한 논의에 점점 더 끼어들고 있다. 이는 가자가 새로운 여러 가지 AI 기반 도시 통치의 — 효율성, 모니터링, 자료 추출의 문제를 재건 과정 자체에 결합하고 추후에 다른 곳에 팔기 위한 — 실험 장소가 될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런 위험들은 중대하며, 면밀한 주의를 요한다. 동시에, 결코 실현되지 않을 계획의 구석구석을 분석하는 데에 너무 힘을 쏟는 것도 나는 여전히 저어된다. 어쩌면 계속되는 인종학살에서 우리의 주의를 돌리는 것 역시 그런 안들의 기능일지도 모른다.
선주민적인 가자 재건 전망은 어떤 것일까?
누르 주다
학술 언어에서 우리는 이를 종종 누가 “중심이 되는가centered”의 문제로 표현하곤 하지만 우리가 실제로 묻는 것인 이것이다. 누가 주도하는가lead? 한 장소의 미래를 빚어낼 권한은 누구에게 있는가?
내가 선주민적 재건과 연결 짓는 전망은 오랜 세월 선주민 해방 투쟁의 중심에 있어 온 토지 탈환을 토대로 한다. 팔레스타인의 맥락에서 이는 재건을 — 그 땅에 살고 있는 팔레스타인인들을 위한, 그리고 그곳에서 쫓겨난 이들을 위한 — 팔레스타인 해방 기획 전반 속에 위치시킨다는 뜻이다.
나는 팔레스타인토지학회Palestine Land Society에서 기획한 마을 재건 대회를 종종 생각한다. 건축 전공 학생들이 사람들이 쫓겨나고 종족 청소를 당한 팔레스타인 마을들을 새로 설계하는 대회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기획 중 하나는 베이루트아메리칸대학교 학생들이 제출한 것이다. 다른 대부분과 달리 마을 자체를 재건할 구체적인 계획을 담지 않았다는 점에서 인상적인 안이다.
대신에 그들은 중심이 되는 공용 구조를 설계했다. 마을의 수도를 복구하고 아인’ayn(우물)을 되살릴 댐과 집단의 삶을 뒷받침해 줄 다른 장치들을 담은 아름다운 안이었다. 왜 마을 계획을 수립하지 않았느냐고 물어보니 그들은 마을이 정착촌을 닮지 않기를 바랐다고 설명했다.
그들의 논지는 간단하다. 마을이나 도시는 누군가 지도에 그리고 그대로 건설한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다. 관계들, 실천들, 주민들이 살아가는 하루하루를 통해, 긴 시간에 걸쳐 유기적으로 자라나는 것이다. 이런 접근에는 매우 힘 있는 무언가가 있다. 거주, 건축된 환경, 그리고 사람들이 사회적 관계를 통해 장소를 창조하는 방식들에 관한 근본적인 질문들을 다루는 접근이다. 재건을 사유할 다른 방식을 제시하는 접근이기도 하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재건은 건설이 아니라 탈환에서 출발한다. 첫 단계는 귀환이다. 사람들이 다시금 어떤 장소에 함께 거주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첫 단계다. 오직 그런 후에만, 그곳에 살 사람들을 통해 재건의 형태가 잡힐 것이다.
제안된 계획들 상당수는 가자의 미래에 대한 결정이 외부에서 내려지고 가자 인구에게 부과될 수 있다고 상정한다. 선주민적 접근은 정 반대의 — 재건이 뜻하는 바와 그들이 어떤 미래를 창조하고 싶은지는 반드시 파괴에 가장 많이 영향 받은 이들이 결정해야 한다는 — 전제에서 출발할 것이다. 장애물투성이지만, 가자 사람들은 그 권리를 포기하지 않았다.
데나 카두미
가자 재건이 여러 층위에서 동시에 행해져야 한다는 난관이 있다. 한편에는 즉각적이고 시급하게 필요한 것들 — 수도, 위생, 주거, 보건의료, 교육, 여타 필수 기반구조 — 이 있다. 다른 한편에는 미래를 계획하고 설계하는 장기적인 문제가 있는데 이것은 여전히 매우 불확실하다. 가자의 미래를 논할 때 해방을 위한 팔레스타인 정치 투쟁 전반이 계속해서 주변화되고 있기에 특히 그렇다.
재건에 유의미하게 접근하려면 또한 반드시 가자의 기존 도시사들을 살펴보아야 한다. 이 역사들에는 가자시만이 아니라 그 난민촌들, 그리고 수십 년의 피란과 적응, 공동체 건설을 통해 생겨난 사회적 관계들 역시 포함된다. 재건은 그저 망가진 기반시설을 대체하는 기술적인 일이 아니다. 오히려, 그 공간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역사적, 사회적 풍경들과 씨름해야만 하는 일이다.
동시에, 재건에는 이전에 존재했던 것들과는 다른 방식의 건설이 필요할 수 있다. 특히 공동체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필요에 더 부합하는 대안들을 찾아낸다면 더더욱 그렇다. 이는 참여, 대변, 의사결정에 관한 근본적인 문제들을 제기한다. 누가 우선순위를 결정하는가? 무엇을 어디에 누구를 위해 다시 지을지를 누가 결정하는가? 재건에 관한 모든 논의에는 궁극적으로, 기술적 전문성뿐만 아니라 어떤 미래를 누구를 위해 건설할지에 관한 집단적 정치적 숙의 또한 필요하다.
한번에 광대한 여러 지역이 계획되고 건설될 때에는, 평소라면 점진적인 공간의 생산을 통해 형성되는 사회적 관계들이 그와 똑같은 방식으로 생성되지 않는다. 도시들, 동네들은 주거, 적응, 집단 생활이 되풀이되는 과정을 통해 진화한다. 이 유기적 특질을 그저 설계로써 구현할 수는 없다.
한편, 나는 계획된 환경은 어딘가 진정성이 없거나 유의미한 장소가 될 수 없다는 관점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도시 공간은 언제나 시간에 의해 형성된다. 사람들은 그곳에 거주하고, 그곳에 적응하하고, 그곳과 관계 맺고, 궁극적으로는 매일의 장소적 실천들을 통해 그곳을 변화시킨다. 따라서 우리가 우려해야 하는 것은 도시계획 자체가 아니라 재건이 누구에게 득이 되고 그 과정에서 누가 주체성을 행사하는가이다. 가자에 사는 이들이 그저 참고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재건의 매 단계가 그들에게 득이 되어야, 긴 시간에 걸쳐 그 공간들을 빚어내는 것이 바로 그들이 되어야 한다.
이는 우리를 탈환과 관리책임stewardship의 윤리에 관한 지점으로 돌려 보낸다. 선주민성Indigeneity은 그저 개인적 정체성이나 주관성이 아니다. 근본적으로 집단적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재건이 어떻게 집단적 삶이 지속되는 통로로서의 사회적 관계들을 지지하고 강화하는가 하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외부의 재건 노력이 가자에서 팔레스타인의 전문성과 주도성을 — 묵살하는 것이 아니라 — 조력할 수 있을까?
데나 카두미
가자 현지에서는 시정市政이나 공공 서비스에 경험이 있는 이들을 비롯한 지역 행위자들이 비상하게 어려운 조건 하에서 자원을 확보하고 일상을 지속시킬 방안을 계속해서 찾고 있다. 이미 다양한 기획들이 추진되고 있으며, 일부는 불사조 계획Phoenix Plan 같은 비교적 대규모의 재건안과 연계하고 또 일부는 보다 즉각적이고 국지적인 개입에 초점을 맞춘다. 후자로는 대안 건설 자재 관련 실험, 수도·위생·전기 접근성을 복원을 위한 공동체 기반 시도들, 여타 시급한 기반시설 임시 조성 등이 있다.
나는 가자의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자신들의 공동체를 재건할 만한 전문성이 없다고 생각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의 환경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런 여건들 속에서 살아 왔으며 그것들을 탐구하고 장소에 뿌리내린 다양한 지식을 개발해 왔다. 좋은 설계란 언제나 맥락특정적인 설계다. 특정한 풍경들, 역사들, 관계들, 필요들로부터 나오는 설계다. 외부의 청사진이 이를 대신할 수는 없다. 기존의 도구나 모델이 유용하게 쓰일 수는 있겠지만 가자 재건의 모습은 궁극적으로 그곳에 사는 이들의 우선순위, 여건, 열망이 결정할 것이다. 재건이 유의미하려면 반드시 그 현실에서 출발해야 한다.
팔레스타인 바깥에 있는 우리의 역할은 다를 수밖에 없다. 내 생각에는, 인종학살과 그에 수반되는 도시학살에 대한 이스라엘의 책임을 강조하면서, 외부에서 부과하는 재건안에 뿌리박고 있는 폭력과 부정의를 계속해서 폭로하고 그에 저항하는 것 등이 있다. 건축가, 도시계획가, 공학자 등의 전문가들은 박탈의 조건들을 재생산하거나 식민적인 형태의 재건을 조장하는 사업에 참여하지 말아야 한다.
전체 팔레스타인 해방 투쟁 속에서 가자 재건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특히 중요한 것 하나가 남아 있다. 지난 몇 년만이 아니라 지금의 상황을 낳은 한 세기의 박탈과 식민 폭력에 대한 책임을 계속해서 전면에 놓아야 한다. 재건 논의가 그 역사를 간과한다면 지금 가자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장기간 이어진 이스라엘 정착자-식민 기획의 결과가 아니라 안타까운 사건으로 취급하게 될 위험이 있다. 이는 또한 꾸준히 그 기획에 맞서온 팔레스타인의 공간적 저항의 긴 역사를 숨기는 일이기도 하다.
공간적 저항은 박탈과 삭제에는 물론 팔레스타인인이 누구이며 어디에 속하는지를 강제로 지정하는 데에도 저항하는 것이 핵심이다. 가자 전역에서 그 일상적 실천들 — 공동체 주방, 학교, 지역 재건 노력, 무수한 상호 부조 — 을 볼 수 있다. 나크바의 여파, 1967년 이후, 수 차례의 인티파다들, 귀환 대행진, 10월 7일, 세대를 넘나드는 무수한 여러 가지 집단 행동까지, 역사적으로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논한 여러 질문은 가자만의 일이 아니다. 제닌을, 최근 몇 년 동안 제닌 난민촌에 반복된 공격들을 생각해 보라. 그 공간에 존재하는 것이 늘, 심지어 80년이 지나도, 임시적이라 여겨지는 인구집단에게 재건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난민촌은 결코 영구 정착촌이 될 곳이 아니었지만 많은 곳이 천막촌에서 생동하는 도시 공동체로 진화했다. 가자의 여러 곳도 마찬가지다. 임시 피신지로 시작된 곳이 그곳에 거주하는 이들의 삶을 통해 동네가, 번화가가, 도시가 되었다.
시간은 우리가 서로나 우리가 점유하는 공간과 맺는 관계를 변화시킨다. 팔레스타인 해방 투쟁의 상당 부분을 공간에 대한 투쟁으로, 팔레스타인 수무드의 상당 부분을 일종의 공간적 저항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래서다.
↥역주1 이 글에서는 늘 첫 글자를 대문자로 쓴 “Indigenous”를 사용한다. 아래에서는 “선주민”, “선주민의”, “선주민적(인)”을 섞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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